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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생애

T 부르심을 받다

1182년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18세 되던 해에 신분상승을 꿈꾸며 기사가 되고자 아씨시와 페루지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아씨시의 패배로 끝났고, 프란치스코는 1년 동안의 포로생활로 병을 얻어 돌아왔다. 병상에 있는 동안 깊은 영적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으나, 기사가 되고픈 꿈을 버리지 못한 프란치스코는 또 다시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일행이 스폴레토 계곡에서 머물 때 “프란치스코야, 너는 어찌하여 주인 대신 종을 섬기려 하느냐?” 하는 말씀과 아씨시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 와 아씨시 근교 외딴 곳에서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T 세속을 떠나다

1205년경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아씨시 교외에서 한센병(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병환자를 무서워 피했던 프란치스코는 이번에는 말에서 내려 와 그에게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만남으로 프란치스코는 온전히 세속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다 허물어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경건하게 엎드렸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라 프란치스코는 세 개의 성당을 수리하였고, 그 후 이 말씀이 교회를 영적으로 고치라는 소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T 거룩한 복음을 따르다

1208년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전대에 금도 은도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되고, 길을 떠날 때 식량자루도 돈지갑도 빵도 지팡이도 가져가서는 안 되며, 신발도 두 벌의 옷도 가져가서는 안 되고,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는 복음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는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하며 기뻐 외치고는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초대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회개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어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형제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복음 구절로 간결한 회칙을 만들어 교황의 인준을 청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회칙을 인준해 주며 말했습니다. “작은 형제들이여, 하느님과 함께 가서 그분께서 계시하신 대로 모두에게 구원을 알리시오.”

 

T 두 수도회와 재속형제회를 세우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기혼 미혼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남자 탁발수도회인 ‘작은형제회’(1회)와 여자봉쇄수도회인 ‘가난한 글라라회’(2회)를 창설하였고, 세속에 사는 이들을 위해 ‘회개하는 형제자매회’(3회)를 창설하였습니다.

 

T 모든 찬미가 주님 것이옵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은 일생동안 복음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십자가 사랑에 응답하여 1224년 9월 라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오상성흔을 몸에 박아주셨습니다. 그는 눈병으로 인한 고통 중에서도 ‘태양의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1226년 10월 3일 저녁, 프란치스코는 죽음자매를 맞이하며 형제들에게 “나는 내 할 일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할 일을 가르쳐주시길 빕니다.” 하면서 자신의 알몸을 땅바닥에 눕히게 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T 제2의 그리스도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복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가난하였고,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선포했으며, 무너져 가는 교회를 새롭게 건설하였으며, 마침내 오상성흔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죽음까지도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따랐던 프란치스코를 사람들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