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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St Bonaventure Joins the Franciscan Order - HERRERA, Francisco de, the Elder.


1628.Oil on canvas, 231 x 215 cm Museo del Prado, Madrid.



축일: 7월 15일
성 보나벤뚜라 주교 학자

San Bonaventura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t. Bonaventure of Bagnoregio

St. Bonaventura, Ep. Doct

(Bagnoregio, Viterbo, 1218 - Lione, Francia, 15 luglio 1274)


baptised Giovanni di Fidanza


Born:1221 at Bagnoregio, Tuscany, Italy
Died :15 July 1274 at Lyon, France
Canonized :14 April 1482 by Pope Sixtus IV
Name Meaning: good fortune (= bona venture)






성 보나벤뚜라의 중부 이딸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1217/1221년에 탄생하였다.


성인께서 태어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아서 매우 심하게 아팠다.



그때 마침 성프란치스꼬께서 보나벤뚜라 성인이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가게 되었다.


성인의 어머니께서는 아기를 안고 성프란치스꼬가 지나갈 때 아픈 아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성프란치스꼬께서 그 아기를 보자마자 단지 "Oh! Bona ventura"라고 말하였다.


이 뜻은 "오! 참 좋은 행운이여"라는 뜻이다.


그러자 아기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아기의 이름은 보나벤뚜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후 보나벤뚜라 성인은 17세에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그후 빠리대학에서 수학하고 다시 그곳에서 강의하였다. 37세에 프란치스꼬 수도회 총장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그 당시 일어났던 어려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해졌다.


그 어려운 문제들 중에서 특히 성직자의 규율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에서의 곤란한 일


그리고 동방교회를 로마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이었다.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은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위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을 불렀다.


교황께서 부른 학자들 중에는 보나벤뚜라 성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은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리용 공의회를 하면서 보나벤뚜라 성인은 운명하였다.


이제 보나벤뚜라 성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자.


성인에 대해서 크게 4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폰테콜롬보 독방에 있는 성프란치스코의 성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 프란치스코 거룩한 상흔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교회 학자로서의 성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프란치스꼬회 들어갈 때는 청년이었다.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한 후 그는 빠리대학에서 열정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매우 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기에 빠리대학 교수였던 알렉산더는 "보나벤뚜라는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알렉산더 교수 수하에서 보나벤뚜라는 지혜와 완덕에 있어서 날로 진보하였다.


그는 27살부터 자기가 공부하던 빠리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였다.



우리 교회에서 보나벤뚜라를 세라핌적인 학자라고 한다.


이는 그가 "지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그렇게 생활했기 때문이다.



보나벤뚜라는


"우리 지능을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을까지 감동을 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라고 말하였다.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불태우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위대한 학자로서 그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작은 형제처럼 겸손하게 살았다.



어느날 그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가 "보나벤뚜라가 이렇게 큰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하느님께서 잘 알고 있으니 죽은 후에 틀림없이 천당에 가게되어


하느님의 가장 앞자리에 앉으실 것입니다."하고 말하자 보나벤뚜라는


"나보다 할머니가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한다.





☆대 성인으로서의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사람들의 정신을 지혜롭게 밝혀주며 마음을 훈계하고 하느님의 사랑에까지 이르도록 하였다.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와서


"어디에서,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배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보나벤뚜라는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또 다시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때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전기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보고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성인을 방해선 안되지!"하며


발길을 돌렸다는 일화도 있다.


보나벤뚜라는 자신의 삶이기도 한 완덕으로 가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는 많은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프란치스꼬 수도회 총장으로서의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는 빠리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약관 37세에 수도회 총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프란치스꼬가 돌아가신지 3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프란치스꼬 성인이 세운 수도회는 날로 발전하고 커져만 갔다.


보나벤뚜라를 일컬어 "제2의 창설자"라 불릴 정도로 수도회의 조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특히 프란치스꼬 성인이 만든 회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끔 형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은 형제회의 첫회헌"나르보나 회헌"(Narbona)을 만들었다.





알바노의 추기경으로서의 보나벤뚜라



성교회는 교회에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보나벤뚜라의 지혜와 성덕을 높이 사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나벤뚜라는 그 직책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회칙의 정신에 따라 순명할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 임명장을 가지고 왔던 전달자는 보나벤뚜라를 부엌에서 만났다고 한다.


1274년 추기경으로써 제2차 리용 공의회에 참석 중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연혁



1217 이탈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출생


1226 소년시기에 병이 들었으나 그의 어머니가 프란치스꼬에게 전구하여 병이 회복됨


1235-1243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 득할 때까지 수학함


1243 파리에 있는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고 로마관구에 등록함 수도원에서 알렉산더 할레스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그의 사망 후 (1245) 오도네 문하에서 연구를 계속함


1250-1252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룸바르두스이 명제집"저술


1253-1257 파리대학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하면서 그의 사상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인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3편의 토론집을 완성함


1254-1257 작은 형제회 신학교의 책임자가 됨. 로마에서 교황 알렉산더 4세가 참석한 회의에서 프란치스꼬회 총장으로 선출됨


1257.4 작은 형제회 첫회헌 작성 (파리에서)


1259 프랑스 관구 총회 개최.라베르나산에서 "영혼의 여정" 저술


1260 라르보네 총회 (나르보네 회헌 작성).성녀 글라라 귀천


1261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거주


1262 "성 스테파노의 발견" 강론


1263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 귀천


1265 클레멘스 4세가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사양함. 파리에서 총회 개회 (여기서 유명한 "성 프란치스꼬에 대하여" 강론).


1267 독서 강화집 "십계명에 대하여" 저술


1268 독서 강화집 "성령칠은에 대하여" 저술


1270 스페인과 독일에서 체류


1272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대관식에 참석 리용총회 참석


1273 독서 강화집 "창조의 여섯째날"저술.후에 인노첸시오 5세가 된 도미니꼬회의 뻬드로네프란타샤와 후에 요한 21세가 된 빼뜨로 히스파뇨와 함께 알바뇨의 주교겸 추기경으로 임명됨.


1274 총회 개최 여기서 예로시모 형제가 총장으로 선출됨.제4차 리용 공의회 참석


1274.7.15 공의회 도중 귀천.리용의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교황이 주례하고 공의회에 참석했던 모든 고부들이 참석


1482 교황 식스또 4세는 칙서 "천상 고향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라를 성인품에 올림


1587 교황 식스또 5세는 칙서 "환호하는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에게 "교회박사" 의 칭호를 내림.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www.ofmconv.or.kr








보나벤투라는 1217년(1218년?) Bagnoregio에서 태어났다.


그는 Hales의 Alexander가 프란치스칸이 된 이후에


작은형제들이 교수직을 가지고 있었던 파리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총봉사자로서의 보나벤투라는 때때로 "형제회의 두 번째 창설자"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는 행정가로서의 독보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혜와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1257년 4월 23일


그는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 몇 가지를 언급하는 회람 편지를 형제들에게 썼다.


그는 형제들이 사도적 직무를 위해 준비되도록 조처를 취하였지만,


동시에 형제들의 생활을 특징지워 주는 가난의 양식도 고수하였다.


1259년 그는 라베르나에서 피정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 유명한 신비적 작품인 "하느님께로 가는 영혼의 여정"을 저술하였다.



Narbonne 총회(1260) 기간 동안 그는 형제회의 첫 번째 회헌을 형제들에게 주었다.


이 총회는 보나벤투라에게 성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전기를 쓰라는 요청을 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가 집필되어 1263년 Pisa 총회에 제출되었다.


1266년 파리 총회는 대전기 이전의 다른 모든 전기들을 파기할 것을 명령하였다.


대전기는 공동체 형제들과 영적인 형제들을 화해시키기는 데 있어서 필요한


보나벤투라의 정치적인 도구였을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파리의 재속 성직자들로부터 오는 불의한 공격에서 탁발 수도회원들을 변호해 주기도 하였는데,


특히 1269년에 쓴 "Apologia pauperum"(가난한 이들의 변호)라는 작품에서 그렇게 하였다.


그는 1273년 리용 공의회를 준비하기 위해 Albano의 주교(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의회 회기 기간 중이었던 1274년 7월 1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프란치스칸이었던 두 교황에 의해 (Sixtus 4세와 Sixtus 5세)에 의해 각각 성인품에 올랐고,


교회의 박사로 선포되었다.





성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 Giovanni Fidanza 1217년 이태리의 Lazio 지역에 위치한 Bagnoregio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앓고 있던 Giovanni는 성 프란치스코의 중재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대전기 서문 3항).


그는 파리 대학에 들어가서 Hales의 Alexander 아래서 수학하였다.



■ 이 유명한 학자(Hales의 Alexander)는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파리 대학에서 프란치스칸 교수들이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보나벤투라도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여 성서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그는 Peter Lombard의 명언집을 주석하였고,


이 대학 내에서 교구 신학자들과 탁발수도회(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신학자들 사이의


길고도 치열한 논쟁이 진행 중이던 때에 프란치스칸 학파를 이끄는 거장이 되었다.



■ 1257년 2월 2일, Aracoeli 총회에서 그는 Parma의 요한에 이어 총봉사자로 선출되었다.


그가 착수한 첫 번째 작업 중 하나는 형제회를 안정시키고 일치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형제회의 내의 공식 전기로서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라는 이름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저술하였는데, 이 일은 Narbonne 총회(1260)가 위임한 것이었고,


Pisa 총회(1263)에 제출되었다. 파리 총회(1266)는 대전기만을 성인의 공식적인 전기로 인식시키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의 다른 전기들을 모두 파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 이 명령이 첼라노의 3부작에게 불행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통상적으로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인정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대전기뿐이라고 여겨졌다.


첼라노의 3부작에 대한 사본들은 학자들이 시토회 수도원들과 분도회 수도원들에서 연속적으로 발견하였다.


그 수도원들은 총회의 결정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보나벤투라는 또한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 8부기간 동안에 전례에 쓰기 위해


“소전기”에다 대전기를 요약하여 소개하였다.


보나벤투라는 리용 공의회의 준비하기 위해 1273년 Albano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274년 7얼 14일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스칸 교황인 식스토 4세가 1482년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또 다른 프란치스칸 교황인 식스토 5세가 1588년 그를 교회의 박사로 선포하였다.


그는 세라핌적 박사로 알려져 있다.



■ 대전기는 서문으로 시작을 하는데, 여기에서 보나벤투라는 성서적인 관점에서 프란치스코를 소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사명을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간택된 자의 이마에 구원의 십자가를 각인시켜 주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지닌 묵시록의 천사로 나타난다.


이러 표상은 우연하게도 성령의 시대에 관한 피오레의 요아킴의 종말론적인 주장을 받아들였던


여러 형제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는데,


이 형제들은 형제회 내에 대단히 큰 어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형제회는 이미 “Communitas Ordinis” 즉 공동체주의 형제들과


영적인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자라나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었다.


보나벤투라는 중재자의 역할을 한 셈이며,


많은 수의 학자들은 이 대전기가 형제회의 역사 안에서 긴장이 매우 크게 조성되던 시기에


총봉사자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도구였다고 지적해 왔다.



■ 대전기는 15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장은 프란치스코의 덕목들을 하나 혹은 몇 개씩 칭송하고 있다.


(대전기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면 된다:


E. Cousins, “Bonaventure. The Soul’s Journey into God. The Tree of Life. The Life of Saint Francis.”


머리말은 I. Brady가 썼음. Paulist Press, New York, 1978).



보나벤투라는 역사학자로서 첼라노가 써 놓은 것들에 새로운 자료를 보태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문서화된 사료들, 특히 첼라노 전기의 내용을 보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지니고 있으며, 이 사료들을 신비적인 형태로 종합해 놓고 있다.


보나벤투라는 정말로 프란치스코의 충실한 아들이었다.



그는 형제회를 멀리 까지 두루두루 다녔으며,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꽤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관대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


대전기는 이 모든 것 이상의 것을 담고 있으며, 프란치스코에 관한 고전적인 전기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 대전기는 화가 지오토에게 아시시 대성당의 상부 벽에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관한


24개의 프레스코 작품을 그리는 데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품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성 보나벤뚜라 주교의[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에서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는 신적 지혜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문이시다.



우리를 위로 오르게 하는 사다리요 운반해 주는 수레이시다.


"하느님의 증거 궤 위에 놓인 속죄 판"이요 "영원으로 부터 감추어 계시던 신비"이시다.


자기 얼굴을 이 속죄 판에로 완전히 돌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 열성과 경탄, 환희와 기쁨, 찬미와 환호로 그분과 함께 파스카 곧 ’건너가게 된다’.



그런 사람은 십자가라는 나무로 홍해를 건너 에집트에서 사막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숨겨진 만나를 맛보고, 외적으로 죽은 사람처럼 무덤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쉬게 되고,


아직 여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함께 매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뜻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건너감’이 완전한 것이 되려 한다면 지성의 온갖 사고 작용을 중단시키고


우리 정감의 주축을 하느님께로 향함으로써 하느님으로 온전히 변모되어야 한다.


이 ’건너감’은 신비적이고 통상인의 시야에서 완전히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얻어 누리는 사람외에는 그것을 얻은 사람이 없고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 외에는 그것을 얻는 사람이 없으며,


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보내 주신 성령의 불로 말미암아 영혼의 골수가 불타 오르는 사람 외에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도 바울로는 이 신적 지혜는 성령을 통하여 계시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 싶으면



학습하는 교리가 아닌 은총에게,


지성이 아닌 열망에게,


학습할 때의 독서가 아닌 애타게 바치는 기도에게,


스승이 아닌 신랑에게,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광채가 아닌 어둠에게,


빛이 아닌 불에게,


즉 지극히 감미로운 도유와 뜨거운 애정으로 하느님 안에 들어가게 하고


존재를 완전히 타오르게 하는 그 불에게 물어 보라.


이 불은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 불이 태우는 용광로는 거룩한 예루살렘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수난의 불타는 열정으로 그것에 점화하신다.


"내 영혼은 십자가에 매달림을 택하고 내 뼈는 죽음을 택하노라."고 말하는 사람만이 이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죽음을 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뵐 수 있다.



"하느님을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라는 성서의 말씀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죽어서 이 어둠 속에 들어가 온갖 걱정과 욕망과 꿈을 침묵시켜 버리도록 하자.


하느님을 뵌후 사도 필립보와 함께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도록 하자.



그리고 사도 바울로와 함께 우리도 "내 은총은 너에게 충분하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다윗과 더불어 기쁨으로 이렇게 외치도록 하자.


"이 몸과 이 마음 다한다 하여도,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이시로다.


주여, 영원한 찬미를 받으소서. 또한 억조 창생이 ’아멘, 아멘’을 외치게 하소서.





보나벤투라는 높은 성덕과 신학적 지식을 겸비한 아주 적극적인 설교가요 교사로서


신비주의의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그를 만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에 관한 글을 읽노라면 우리도 그가 진실한 프란치스코회 수사이며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The Lying in State of St. Bonaventura-ZURBARÁN, Francisco de


1629.Oil on canvas 250 x 225 cm.Musee du Louvre, Paris



1274년 7월 15일 아침, 제2차 리옹 공의회 도중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와 회의에 참석한 사제들은


알바노의 주교 보나벤투라가 새벽녘에 병환으로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역사가는 프란치스코회 추기경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는 뛰어난 학자,웅변가,탁월한 성인으로서 친절함과,


가까이 하기 쉬운 소박함과, 온유함과 동정심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그의 완덕 때문에 하느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장례 미사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주께서 그에게 이 같은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에 그를 알게 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보나벤투라는 중세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자 사상가 중의 한분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인으로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관한 주석’,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세 갈래 길’, ’완덕생활’ 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하여


성서 주석, 약 5백편의 설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성인은 식스토 5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된 위대한 프란치스칸이다.



*성 토마스아퀴나스축일:1월28일.게시판917번,1590번





성 토마스 데 아퀴노와 더불어 교회 신학계의 쌍벽(雙壁)이 되는 성 보나벤투라,


그가 남겨놓은 업적은 중세기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찬란히 빛나고 있다.



이 두 신학자는 그 저서와 제자들의 많음에도 서로 손색이 없으며,


토마스가 그 가르침이 밝고 심원한 의미에서 천사적인 박사라고 불린다면,


보나벤투라는 오히려 경건하고 사랑이 흐르는 면에서 세라핌적인 박사라고 불리어진다.



또 성 토마스가 논리적(論理的)이라면,


성 보나벤투라는 오히려 심리적(心理的)이어서


그 문장의 감미롭고, 아름답고 고움은 비할 바가 없다.



두 분은 다 수도자이다. 성 토마스가 도미니코회의 영향을 받아왔음에 반해,


성 보나벤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회의 영향을 받았고,


양자가 그들 수도회의 제2의 창립자라는 명칭을 받을 만큼 그들은 바른 언행으로 사람들의 거울이 되었다.



보나벤투라가 중부 이탈리아의 바뇨레아에서 태어난 때는 1221년경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생존시였다.


죠반니 디 피단짜가 그의 이름인데,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그의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어릴때에 큰 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으므로, 신심이 두터운 그의 어머니는 그를 성프란치스코께 데리고 가서,


만약에 완쾌되면 장래에 수도원에 보낼 서약 아래 성인께 기도와 강복을 청한 결과 즉시 쾌유되었다.


성인도 대단히 기뻐하며 " 오! 보나벤투라(기쁜 일이여)"라고 외쳤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을 보나벤투라라고 불렀고,


과연 그가 17세때에 그의 어머니는 서약대로 그를 수도원에 보내었다.



수련을 끝마친 후 보나벤투라는 우선 올비에트에서 일반 학문을 연구하고


1238년에 영국의 유명한 알렉산데르 헬이스 문하에거 공부하려고 파리대학으로 갔으며,


그의 총애 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20세에 신품을 받아 얼마간 그 수도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248년부터 1255년까지 아직 26세의 젊은 몸으로 파리 대학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다.



그 해 성 토마스 데 아퀴노도 같은 대학의 교수가 되엇다. 이리하여 두분은 서로 친구가 되어


거룩한 동반자로 서로 격려하고 연구해 중세기 신학의 기반을 확립함에 전력했다.


이쯤 되니 각국에서 젊은 학생들이 그들의 학덕을 흠모하여 서로 앞을 단투어


그들의 슬하게 운집하게 되었고, 그들의 명성은 그들 주위를 위압하게 되었다.



높은 나무는 바람에도 세차게 부딪치는 법이다. 그들이 명성이 세상에 널리 떨치자


질투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비방하고 수도회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들의 수업은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 때문에 중단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쌩-아무르의 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해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어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쌩-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그는 이런 이들에게 대해 유화하고 온순한 어조로써 수도회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을


부드럽게 설명하고 반박한 결과,


그렇게도 시끄럽던 잡음은 씻은듯이 없어지고 다시는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게끔 되었다.


성인이 사람들의 찬양을 받게 된 것은 위의 사실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그 학식의 풍부함보다도 그 두터운 애정에 더욱 기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탁발 수도회가 파리에서 다시 부흥될때, 그는 토마스 데 아퀴노와 함께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서의 직무를 완수하는 동시에 다수의 서적을 저술했는데,


어떤 날 성 토마스가 방문해 "당신에게 제일 유익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하니


보나벤투라는 ’내가 제일 많이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책은 이것입니다"하고 십자가를 가리켰다고 하니,


얼마나 경건한 태도이며 아름다운 일인가!



성인은 파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지 8년째 되던 1257년에 열린 프란치스코의 총회석상에서 관구장과


기타 요직 전원의 추대를 받아 36세로서 프란치스코의 총장에 취임했다.


그 당시 회 창립자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었지만,


아직 통계적이고 조직적인 전기는 한권도 없었다.


그래서 성인은 회원의 위촉를 받아 비로소 그 편찬에 착수하고 자료의 선택, 정성들인 배열 순서에


그의 달필(達筆)을 휘둘러 과연 기대에 알맞는 훌륭한 전기를 완성했다.


그것이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전"인데, 전후 700년간에 걸쳐 수백 판을 거듭해했고


각국어도 번역되어 수많은 애독자를 갖게 되었다.



그 전기의 집필 중의 일이다.


어떤 날 설 토마스가 2,3명의 제자와 같이 그를 방문해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성인은 책상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하는 자태로 그냥 탈혼이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본 성 토마스는 “성인이 성인의 행적을 쓰는데 방해해선 안 된다”하고


사람들을 재촉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이것을 보아도 성인이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편찬하는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1260년, 나르본느에서 열신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오랬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했다.


총장이 된 그는 회원들로 하여금 성 프란치스코가 제정한 규율을 엄수하도록 하기 위해 친히 모범을 보이며


필설로써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회 있는대로 각 수도원을 순방하며 시찰했다.


그러자 다른 동료 수도자들 중에 신앙에 냉담했던 이들까지도 거룩한 열(熱)에 타게 되어


수덕에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없었다.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그를 영국의 요크 시의 총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겸손한 그는 마침내 그 직책을 거절했다.





보나벤투라만큼 성모 마리아를 공경한 이는 아마 성인들 중에서도 드물 것이다.


그는 총장이 된 이후에도 매 토요일마다 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성모 찬송 미사를 드렸고,


만종(晩鐘)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외우며 기원의 현의를 묵상했으며,


수하 수사들오 하여금 기회 있을 때마다 이것을 신자들에게 장려케 했다.


이것이 바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신자들이 매일 세 번씩 외우는 삼종기도의 시작이었다.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의 총장이면서도 파리에 체류하면서 강의와 설교를 했으며,


특히 프랑스 왕 루도비코 9세와 그 왕족들 앞에서 설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1273년 봄, 그가 53세 된 때


파리 대학의 교수들과 수도자들을 상대로 천지 창조의 6일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그는 127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선출을 적극 지지했었다.


그를 알바노 지방의 주교인 동시에 추기경으로 임명할 터이니 이번은 사양치 말고 승낙한 후


즉시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의 서한이 도착했다.


그는 즉시 파리를 출발해 로마로 향하던 도중 무제로라는 곳에 있는 작은 수도원에서 일 박을 했는데,


때마침 추기경 임명 칙서를 휴대한 교황 사절이 그곳에 도착했다.



그때 보나벤투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부엌에서 식기를 씻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겸손지덕을 닦기 위해서이지만,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더욱 겸손해지는 이 성인에게서 우리는 진실로 배울 것이 많다.



그의 겸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는 교황 우르바노 4세로부터 성 토마스와 더불어 성체 찬미가를 작사(作詞)하도록 분부 받았다.


그리하여 두 분은 서로 최선을 다해 작사를 했다가 서로 대조하기 위해 먼저


성 토마스가 지은 가사를 읽었을 때, 보나벤투라는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하며


자신이 애써 지은 성시(聖詩)를 즉석에서 찢어 버렸다고 한다.


이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토마스의 작품인 “성체 찬미가


-엎디어 절하나이다”는 지금도 교회 예식 중에 아름답게 흘러나오는데


우수한 시인이었던 보나벤투라의 주옥같은 이 작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1274년에 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용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했다.


그 회의의 결과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는 일시 합동이 잘 되었는데,


이는 보나벤투라의 정(情)과 이(理)를 경주한 명토론의 결정이었다.



양 교회 합동을 기념하는 축하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을 기해 행하여졌다.


그 자리에서 성인은 교황을 비롯해 공의회에 참석한 교회 학자 주교들의 위풍 당당한 가운데서


일장의 강론을 했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마지막 강론이 되었다.


쌓이고 쌓인 그의 피로는 그를 병석에 눞게 했고,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교황께 병자 성사를 받고 십자가를 우러러 사랑하는 예수의 곁으로 떠난 것은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1274년7월14일 밤 리용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장례식은 교황과 다수의 고위 성직자의 참석 하에 대성황을 이루었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글을 썻고, 또 남겼는데, “베드로 룸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세 갈랫 길”, “완덕 생활”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해, 성서 주석, 약 5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하다.


그의 저서 가운데 그의 심원한 학식과 그의 경건한 심정이 엿보이지 않는 곳은 한 장도 없으므로,


성 토마스 데 아퀴노와 더불어 교회 신학계의 혜성으로서의 추앙을 받음은 극히 지당한 일이라 하겠다.


돌아가신 지 9년 후, 교황 식스토 4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1588년, 교황 식스토 5세로부터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몬테까살레은둔소 독방에 있는 성보나벤투라의 성화








영적 친구


사람들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람과 쉽게 사랑에 빠진다.
성인들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그들은 서로 친분을 맺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성 보나벤투라는 유명한 성인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토마스 데 아퀴노와 친분이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린 꼬마였던 보나벤투라의 병을 고쳐 준 적이 있었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프랑스 파리에 있던 대학에서 공부할 때 사귄 친구였다.
두 사람은 신학 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기도 하였다.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두고 보면 우리는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데 아퀴노가
신앙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인 친구일 뿐 아니라 영적인 친구였다.
영적인 친구와 신앙에 대한 대화를 하면 큰 위로를 받는다.
영적인 친구들은 시련이 올 때 우리를 강하게 하고, 의혹과 절망에 빠졌을 때 우리를 격려해 준다.
그들은 우리 삶을 밝게 해주며, 영적 성숙의 길에 동행해 준다.
나에게 영적인 친구가 있는가?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도록 도와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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