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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 7월10일(7월 9일)


성녀 베로니카 율리아니 동정


St. Veronica Giuliani, OFM Cap. Abbess (RM)


Santa Veronica Giuliani Vergine


Sta. Vernoica Julianis, V


(Mercatello, Urbino, 1660 - Citta di Castello, 1727)


Born:1660 at Mercatello, Urbio, Italy as Ursula Giuliani
Died:9 July 1727 at Citt' di Castello, Italy
Beatified:1804
Canonized:1839 by Pope Gregory XVI
Veronica = portatrice di vittoria, dal greco


이탈리아.카푸친 글라라수녀회.원장.






성녀 베로니까 율리안나(수도회축일:7월 10일)는 이탈리아 메르 카텔로에서 태어났다.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녀의 부모는 독실한 신앙인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베로니카는 1677년,17세에 움브리아 지방 카스뗄로의 치따에 있는 카푸친 글라라 수녀원에 들어갔다.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Veronica entro diciassettenne nel convento delle Clarisse Cappuccine di Citta di Castello)



그곳은 성녀 글라라의 첫 회칙이 준수되고 있는 엄격한 수녀원이었다.


여기서 수련장으로서 봉사하면서 순명, 겸손 그리고 극기를 하면시 참다운 수도 생팔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하여, 1697년에 오상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녀에게는 여러 번 성흔과 가시관 자국이 새겨졌다.



이 일로 인하여 요즈음도 항용 있는 일이지만 교회 당국자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겸손한 순명은 이 모든 현상이 진실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1716년 생애의 말기에 자의와는 상관없이 수도원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 까지 책임을 다 하였다.



베로니카는 여러가지의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는데, 18세기의 위대한 신비가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신비스런 체험을 "수난의 일기"라는 제명으로 책에 기록하였다.


1839년 그레그리오 16세가 시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옛날부터 수많은 성인, 성녀를 냈는데,


베로니카 율리아니도 역시 1660년에 그 나라의 소도시 우르비노의 메르카텔로에서 태어난 성녀이다.


물론 양친은 명성이 높았고, 특히 그 어머니는 신심이 매우 두터운 분이었다.


베로니카는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어릴 적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 생활을 꿈꾸었다.



그가 네 살때에 어머니와 작별했으나,


그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십자가를 가리키며 "어려운 때에는 저 예수께 부탁해라"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리마의 성녀 로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거울삼아 고신 극기와 기도생활을 하며 신심생활에 열중했다.



*리마의 성녀 로사 축일:8월23일.게시판604번,1327번.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축일:4월29일.게시판1129번.1738번.



17세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출가시키려고 했다.


훌륭한 가문의 청년들이 구혼했으나 그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기의 뜻에 맞는 사람과 성혼된다면 무슨 요청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달랬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단 한마디 ’저는 예수의 것입니다."였다.


이와 같은 대답에는 그의 아버지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1677년에 카스텔로에 있는 클라라 수도원에 입회하고


1677년 10월 28일 착복해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베로니카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해 수도원의 모든 규칙을 충실히 지켰다.


성실한 수도자에게는 시련이 더 심했다.


하느님께서는 악마에게 그녀를 시험하는 허락을 주시어, 지옥의 무리들은 갖은 수단을 다해 그녀를 유혹하며 마음을 산란케 하고 육체를 괴롭혔다.


이러한 유혹은 수년간 계속적으로 그녀를 습격했으나, 항상 인내하고 겸손하게 끊임없이 주님의 도움을 구했다.


이에 마침내 주님께서도 그 온정의 손을 베풀어 그녀를 위험한 처지에서 구하시고 가끔 발현하시어


그를 격려하시며 성모 마리아를 보내시어 그녀를 위로했다.



베로니카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더 깊어져 덕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시련은 더 커졌다.


그녀는 가끔 예수 수난에 대해 묵상했다.


묵상 때 가끔 예수의 가시관과 매맞으신 상처에 대한 고통을 실감했는데,


특히 1697년 성 금요일에는 예수 수난을 묵상하는 도중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직접 발현하셔서


다섯 상처에서 비치는 눈부신 빛이 그녀의 수족과 늑방을 관통해 고통과 더불어 오상의 상처를 남겨 두셨다.





오상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베푸신 것과 동등한 하느님의 특은이었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고통을 느껴야 했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인창동성당게시판676번,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즉 이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 지방의 주교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친히 그 상처를 검사하며 네 명의 수녀로 하여금 그녀를 감시케 하고,


네 명의 독실한 신부에게 더욱 세밀한 검사를 하도록 명했다.



베로니카는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되었다.


전에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간청함과 같이 보이는 상처를 없애 주시고 고통만을 남겨주시기를 주님께 겸손되이 간청했다.


기도가 허용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700년 4월 4일이었다.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그 상처에서 광선이 비치자 그녀의 오상은 즉시 사라지고


붉은 점만 나타났으나 고통을 여전했다.


그녀는 이고통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참으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희생으로 바쳤다.


이렇게 하기를 5, 6일이 지나자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34년동안이나 수련장직을 맡아


수련자들을 어머니처럼 애정으로 대했다. 그녀는 어떤 일이나 항상 깊은 애정과 충실성으로 일을 했다.



1716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어 그녀는 겸손한 마음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를 사양했으나,


하느님께 순명하는 마음으로 잘 받아들였다.


겸손한 그녀는 자기로서는 수도원을 개선해 나갈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꼈기에


수도원에 대한 일체를 성모의 전구하심에 일임하였다.


성모께서도 이를 기특히 여기셨음인지 항상 뚜렷한 증거로써 그녀를 도와주셨다.


수녀원은 날로 번창하고 경건한 수도원으로서 타에 비할 바 없는 훌륭한 수도원이 되어,


가끔 기도로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





수녀원에서 하느님께 봉사하기 50년, 베로니카에게도 천국을 향할 날이 왔다.


1727년 6월 6일 그녀는 갑자기 쓰러지자 재기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병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열렬한 사랑으로 성체를 모시고 7월 8일 이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순명 서원의 기도문을 외우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므로 고해 신부가 즉시 그것을 알아차리고


"천국에 가는 것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순명하는 마음으로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십시오"하자


베로니카는 그 말을 듣고 잠든 듯이 조용히 운명했다.


베로니카는 여러가지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는데, 18세기의 위대한 신비자로 유명하다.


그녀는 1802년 시복, 1839년에는 시성되었다.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글에 나타난 사랑의 불 -번역 이미경 에우제니아


출처는 The Cord V. 49 N. 4 pp188-195(1999).
저자는 Pacelli Millane,
원제는 The Fire of Love in Writings of Veronica Giuliani입니다.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글에 나타난 사랑의 불

클라라 수녀원 전통 안에서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는
신비가적인 기도에 관한 그녀의 경험에 관한 탁월한 글들을 남겼다.
베로니카 줄리아니는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또한 그녀는 12세기와 13세기에 걸친 수도 개혁의 시대에서 한 부분을 담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아씨시의 성녀 클라라의 풍요함을 재발견하듯
우리는 베로니카의 신비가적 경험과
17-18세기 성녀 클라라의 영성의 귀감이 되는 다른 여성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의 주교들과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 연구 센터는
그녀의 명확한 신비가적 가르침 때문에 그녀가 교회 박사가 될 것인지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녀는 신학적인 개념과 정의의 정제된 구조가 없이
그녀 자신의 하느님 체험에 관해 서술했으나 그 텍스트는 그녀의 삶에서의 활동의 진보와
하느님의 불에 관해 밝히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해 특히 강조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배경에 관하여 다루고 나서
그녀의 글 중 하나인 "사랑의 연옥"에서의 "세 가지 불"에 관한 그녀의 경험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녀가 묘사한 불은 극도로 강렬하며
빙겐의 힐데가르데의 계시에서 나타나는 불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빙겐의 성녀 힐데 가르데 축일: 9월17일.게시판136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기본적인 성녀의 생애에 관한 배경지식

우르술라(오르솔라) 줄리아니(베로니카의 세례명)은
1660년 12월 27일 이탈리아 메르카텔로에서
프란체스코와 베네데타 줄리아니 부부의 일곱번째 딸로 태어났다.

우르술라의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싹텄다.
그녀가 훗날 세 살 때 경험한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과의 대화(D. I,2-5)를
그녀의 "영적 일기"에 기록하였다.
세 살에서 여섯 살 사이에 순교자들과 리마의 로사의 삶에 관하여 듣고나서
그녀는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들을 본받기를 원했다.(D. I,5: V.666)

이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깊은 개인적인 고통은
갑작스런 가족들의 죽음으로 멀지 않아 찾아왔다.
그녀가 일곱 살 무렵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녀의 언니들 중 두 명은 보다 일찍 죽었다.
임종 자리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살아있는 다섯 딸들을 불러다 놓고
딸들 각각에게 예수님의 오상 중 한 부분씩을 맡게 하였다.
우르술라는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맡았다.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에 대한 신심은 그녀의 일생을 통해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종종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우르술라는 첫 영성체 때와 어린 소녀 시절, 사랑의 불꽃을 경험하였다.

우르술라는 보다 엄격한 삶을 살기를 열망했고 움브리아 치타 카스텔로에 있는
카푸친 클라라회에 들어가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녀가 수련기에 들어간 1677년 10월 28일에 우르술라는 베로니카 수녀로 이름이 바뀌었다.
1년 뒤, 1678년 11월 1일에 그녀는 서원을 발하였다.

수도생활 중 엄격함에서 오는 혐오감을 처음 경험한 후,
베로니카는 관상을 통해 주입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예외적인 은총을 받았다.
성령강림 축일 간 어느 아침에 그녀는 자신 안에서 불타오르는 불을 느꼈지만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녀는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자신이 타버렸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그런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강렬한 열망을 경험했고
단지 "오 사랑이시여, 오 사랑이시여, 오 사랑이시여"라고만 말할 수 있었다.(D. I,24-25)

1681년 성 토요일에 주님께서는 베로니카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주셨다.
(D. I,46-50, 122, 158; V. 752-768)

그녀 안에는 고통받고 그녀의 죄를 보속하고픈 열망이 있었다.
회개에 대한 깊은 굶주림이 있었다.
주님의 수난에 관한 그녀의 관상은 그녀의 실제적인 고통 참여에 수반되었다.
7년 후, 스물 일곱 살의 베로니카는 수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수녀원장이 되었을 때까지도 두 번이나 더 수련장으로서의 직무를 맡았다.
1694년에 베로니카는 내적인 성(Castle)의 계시와 신비적인 결혼의 은총을 받았다.(D. I,391-394)
2년 뒤, 성탄대축일에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심장에 화살로 상처를 새겨주셨고
그 상처에서는 종종 피가 흘렀다.(D. I,734-35)
1697년 4월 5일에 베로니카는 그녀의 살에 오상이 새겨지는 은총을 받았다.(D. I,97-103, 894-899; V. 796)
수녀원장은 검사성성에 이 오상에 대해 보고했고
뒤에 이은 세월에 걸쳐 베로니카는 지긋지긋한 시험과 괴로움과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50일 동안 그녀는 병실에 감금되어 있었고
17년간 공동체 내에서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했으며
한동안 수련장의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고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해신부와 주교와 그녀의 공동체의 수녀들과 메르카텔로의 자매들 외에는
일체의 방문이나 서신교환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의 고해사제이자 영적 지도자인 우발도 안토니오 카펠레티는
1702년 3월부터 1708년 7월까지의 베로니카 수녀의 시련에 대해 상세하게 적고 있다.(D. V,395-659)
1703년 2월, 베로니카는 그녀의 일기 중 독립된 작은 논설(treatise)에서
1704년에 시작되어 이듬해 성령강림절에 끝난 사랑의 연옥의 첫번째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시기는 그녀의 내적 정화시기이자 예수님의 수난,
특히 십자가의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시기였다.
베로니카는 1711년에서 15년에 걸쳐 또다른 강렬한 어두움의 시기를 견디어내야만 했다.
이 기간 중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매우 두터운 어두움 속에 혼자 내버려져 있다.
이것은 실제로 나에게 내가 묻혀 있고 최소한의 도움도 없이 닫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와중에서도 만족한다.
내 영혼 깊숙이로부터 나는 하느님의 뜻 외엔 갈망하는 것이 없기에 만족함을 느낀다.(D. III,741)

이듬해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다. 지금 나는 위로 속에서는 만나뵙지 못하지만
메마름과 포기와 적대와 고통 속에서
만나 뵈올 수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진정한 방법을 알고 누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거룩한 삶의 진정한 양식을 배우는 한 사람이 있다.
하느님 안에서 모두이자 하느님 안에서 모두 감추어진.
하느님을 사는 사람. 하느님께 붙들린 사람,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D. III,939-940)

어두움 속의 3년이 지난 후, 베로니카는 점차 외부적인 제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1716년에 검사성성은 피선거권에 대한 금지를 풀었고
그녀는 여전히 검사성성의 감독 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동체의 선거에서 자격권을 갖게 되었다.
즉시, 공동체는 그녀를 원장으로 선출했고 그녀는 재선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그녀가 원장으로 있는 동안, 특히 그녀의 말년 8년간 베로니카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기를 갈망했다.
그녀는 "죽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727년 3월 25일에 그녀는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썼고
그 해 6월 6일에 몸 한쪽에 마비가 와서 한 달 후인 7월 9일에 선종했다.


영향

우리는 수녀원 도서관에 그녀가 이용할 수 있었던 책들을 통해
그녀의 삶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의 일부를 알 수 있는 행운아이다.
치타 델 카스텔로의 클라라 수녀원 도서관은
수도생활과 신비주의적인 도서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헬프타의 젤뚜르다에 관한 랑스페르주의 전기 3판과 (성녀 (대)제르투르다 축일:11월16일.게시판1472번)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축일:4월29일.게시판1738번)
마드리드의 알폰소와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 축일:10월30일.게시판1443번)
에스텔라의 디에고와 (알칼라의 성 디에고 수도자 축일:11월13일.게시판1467번)
아빌라의 데레사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축일:10월15일.게시판1420번)
십자가의 요한의 (십자가의 성요한 사제 축일:12월14일.게시판1523번)


저서들이 가장 그 공동체의 수녀들에게 많이 읽혔다.



베로니카가 잘 알고 있던 다른 영성가들은
프란치스코 드 살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축일:1월24일.게시판1584번)
파치의 마리아 막달레나, (파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5월25일.게시판1781번)
카푸친 회원인 캔필드의 베네딕토와 파르마의 마테오였다.
그녀는 지난 4-5세기 동안에 걸친 기간에 이르는 남성과 여성들의 저서들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적, 수덕적 전통을 익힐 수 있었고 이 전통이 그녀의 저서에 반영되었다.


저서

베로니카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기록한 것은 고해신부들과 장상들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수도생활에 관한 약 2000페이지가 넘는 원고가 탄생하였다.
그녀의 저서는 일기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전기적, 영적 체험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메르카텔로의 자매들과 고해사제들과 그녀의 개인적인 체험을 기록하는 것을 감독한
연이은 두 명의 주교들에게 보낸 500여통의 편지들도 남아있다.
대부분의 자서전적인 이 기록물들은 19세기 말까지도 출판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현재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일기의 원본과 그녀의 저서들의 모은 세 가지 총서들이 있다.
첫번째 총서는 피에트로 피찌카리아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레스테 피오루치과 편집했으며 세번째는 학생들을 위한 영인본이다.
아직도 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학술적인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영적 일기"의 일부가 프랑스어와 기타 언어로 번역된 반면에
영어로 옮겨진 텍스트는 거의 없다.

베로니카의 체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통/보속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베로니카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고통에 직면해 있었고
그 고통 중 일부는 자신 자신이 부과한 것이었다.


사랑의 연옥

그녀의 글, "Il Purgatorio d'amore"(사랑의 연옥)은
이탈리아로 쓰여진 2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이것은 베로니카의 변모된 경험의 짧은 보고서이다.

예수회원인 실베리오 제다에 따르면
이는 하나의 요약이며
"베로니카의 전체 영적 체험기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이 글은 그녀의 고해신부가 이 경험에 대해 쓰라고 한 1705년 6월 11일에 작성되었다.

베로니카는 불과 빛의 풍부한 비유를 통해
"거룩한 사랑의 불"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우리는 베로니카가 묘사한 대로 세 가지의 불 사이의 차이를 논하고자 한다.

그녀는 1703년에 처음 "사랑의 연옥"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이 이전의 경험에 대한 묘사는 1705년 성령강림절의 세번째 경험에 대한 그것과는 다르다.
1704년은 준비 기간인 것으로 나타난다.(D. III,72, 150, 178, 231, 234, 245)
그녀는 이 해에 종종 그녀 안에서 타오르는 불이 1시간 동안 지속되기도 하고
그러나 또 종종은 5시간씩 계속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죄에 대한 슬픔이 그녀를 압도했고
그래서 그녀는 깊이 슬픔에 잠겼으며 그녀의 마음은 계속해서 불타올랐다.
거룩한 사랑은 그녀 안에서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녀는 불꽃을 볼 수 없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불타오른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녀는 모든 죄의 찌꺼기마저 살라버리는 이 불에 대하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였다.

"모든 것이 나에게는 타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이 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어떤 불꽃도 눈에 뵈지 않으며 단지 타는 것이 느껴질 뿐입니다."(D. V, 804-805)
안에서 타오르는 불은 매우 강렬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이 불에 더해지고 영혼은 거룩한 뜻에 고정해서 남아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렸고
그것은 더 타오르기를 열망했습니다."(D. V,805)

베로니카는 체험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두 가지 구조를 창안했다.
그녀는 종종 영혼의 두 부분에 대해 언급하였다.
보다 하등한 "인간적임"과 "영혼", 즉 "우리의 불사적인 존재의 빛"으로 말이다.
그녀는 "인간적임"은 그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그래서 "선함"의 적이라고 설명하였다. "

인간적임"은 불평하고 투덜거리고 고통을 겪거나 희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적임"은 감각과 인간적인 분별과 애욕에 친하다.
"인간적임"은 유혹의 시기에 내던져지거나 어두운 밤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위로와 달콤한 휴식을 찾는다.

그래서 "사랑의 연옥"에서의 이 첫번째 불은
모든 죄와 잘못을 진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 남겨두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타오르는 정화에 관한 것이다.

베로니카는 다음과 같이 생생한 표현을 하였다.
"'인간적임'이 새로운 고통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끼면 그것은 매우 강하게 떨어
그것이 나의 유일한 생각인양 나를 둘러싼 모든 세포도 떨게 만든다."(D.V,804)

두번째 이미지는 보다 강하다. 그녀는 그녀의 영혼을 하느님께 고정시키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서 그녀에게 무엇을 물으실 지 이해하기 위해 기다린다.
"영혼"은 충만하여 지상적인(세속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그녀에게 거룩한 사랑으로 불 붙여 주신다.
그녀는 자신이 불타 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불타 올랐고 나의 애와 뼈는 불에 먹히듯이 타올랐다."(D. V,806)
그래서 "인간적임"은 굴복하여 죽을 것처럼 느껴졌다.
"영혼"의 이미지는 보다 강해진다.
하느님께서는 빛이시며 그 빛은 더욱 강해진다.
그 빛은 너무 강력해서 "영혼"은 보다 충만히 하느님께로 인도된다.
"영혼은 거룩함을 나눔을 안다.
영혼은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느낀다."
베로니카는 이 빛이 진정한 탈혼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이 빛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비밀스러운 실패가
실은 덕성스러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D. V,806)
두 번째 불은 첫 번째만큼 지속되지 않았지만 보다 강력한 효과를 가져왔다.
영혼은 은총과 순순한 사랑으로 변모하려는 상향적 움직임에 열려 있다.
영혼은 보통 감각과 뛰어넘어
빛과 하느님의 활동 안으로 사람을 인도하며 믿음의 벌거숭이 상태로 옮겨간다.
거기엔 하느님의 뜻만을 찾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만이 존재한다.(D.V,808)


세 번째 불은 순간적인 섬광이고
베로니카는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불꽃이 심장에서 놓임을 경험한다.
여러 군데서 그녀는 이 경험을 묘사한 적절한 단어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순수한 사랑에 반해 행동하는 한 존재의 두 분을 결합시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애와 '인간적임'이 전적으로 제거되는 것이다.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된 것 같고
"인간적임"은 이로부터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면 어떠한 다른 고통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룩한 사랑은 영혼을 소유하고 그 영혼을 맹렬한 시련과 결합시킨다.(D. V,807)
이 시련은 거룩한 뜻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그녀를 하느님만을 갈망하도록 인도하고 다른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목마름 느끼게 하며
하느님 안에서 굳건하게 서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세 번째 불이다.(D. V,808)
이 거룩한 사랑이 타오르는 불은 변모 작업을 수행한다.

"사랑의 연옥"은 불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현시에 관하여 기록한 짧은 글이다.
이것은 베로니카의 변모 시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그녀의 모든 저작의 요약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결론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생애는 바로크 시대의 신비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의 영적 생활은 사랑의 관상과,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신비와 보속을 위한
고통과 희생을 위한 어마어마한 갈망의 강렬한 체험으로 이루어진 명확한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녀의 삶은 특별한 현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프란치스코처럼 베로니카도 오랫동안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고통의 신비에 대한 그녀의 접근법은 그녀의 글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그리스도의 오상과의 관련성은
중세 시대의 여성들에게서 나타는 단지 신심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실제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가지의 삶.-강렬한 내적 삶과 수녀원 공동체에서의 외적 삶- 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일기는 이 내적, 외적 여정을 통합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을 보여준다.

이 여인은 12-13세기의 비옥한 수도적 토양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 신비가의 저서들과 달리
그녀의 저서들에 있어선 다른 접근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선택을 바라보고 새로운 질문을 던질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항상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 시대의 심리학적 연구의 발달을 고려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베로니카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그녀의 성덕 때문에 시복 소송이 제기되었고
1839년 5월 26일, 그녀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래서 베로니카 줄리아니는
자신의 전 생애를 하느님의 내적 선물로 받아들일 줄 알았던 여성으로서
클라라 회원들의 오랜 신비주의적 전통선상에 서 있다.

그녀는 이것을 "지상에서의 낙원(천국)"(D. I,184,210,572; IV,594; VI,177)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죽기 6개월 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주님,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이제껏 죄를 지은 것에 용서를 청합니다.
더 이상 저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삶과 피를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거룩하신 뜻에 바칩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뜻만을 따르며 다른 의지는 없습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뜻이 저를 만들었고
저는 그 안에서 살고 죽을 것입니다.
죽음 뒤에, 영원토록 저는 당신의 뜻대로 할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D. IV,903)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태양의 찬가









VERONICA GIULIANI
CAPUCHINESS
Ursula Giuliani was born of gentle folk of Mercatello in Urbino in 1660. When Ursula was four her mother took ill and on her death bed she consigned each of her children to one of the Sacred wounds of Christ crucified. Veronica received Jesus's side pierced with a lance. Around this age Ursula had a very irritable temperament, inclining to be very cranky and dictatorial.


Ursula experienced at the age of seven her first mystical experience. "I remember that at the age of seven or eight years, Jesus appeared to me on two different occasions in Holy Week". It was from this time that Ursula practiced mortification freely and was attacked on many occasions by the Devil.


It was on July 17, 1677 that Ursula was admitted as a Capuchiness postulant. On October 28 she received the habit and the name Veronica. During her religious life she was frequently plagued by Satan. He pushed her down stairs, appeared as her Novice Mistress, and beat her severely. To this Jesus showed his peculiar favour by appearing to her in many forms and many times. At times she would fall to the ground, so wrapped up was she in mystical contemplation.


Veronica held most offices in the Monastery during her life. She was Novice Mistress for twenty two years. In 1716 she was appointed Abbess and remained so until her death. During her time as Abbess, Veronica proved herself in practical matters by building new dormitories on the Monastery and installing an elaborate water piping system.


The last thirty five years of her life were those years when she became totally immersed in Christ. God willed that she undergo terrible aridity. Satan coupled to this, binding her in chains striking her and appearing as savage animals in her cell. It was at this time that Jesus transferred his crown of thorns to her head. This was to be completed later by the transfer of all His wounds.


Veronica underwent continuous scrutiny from doctors and examiners which added more to her constant agony. It was on July 9th 1727 that Veronica passed away. To her vow of obedience she was so devoted that she required a ministerial permission to die. Her death was directly or indirectly due to the stroke which she suffered on June 6th. She was Canonised on May 26th, 1839 and her feast is celebrated on July 9th.



Santa Veronica Giuliani Vergine
9 luglio - Comune
Mercatello, Urbino, 1660 - Città di Castello, 1727


Veronica Giuliani, al secolo Orsola, è una delle più grandi mistiche della storia. Ebbe numerose rivelazioni e ricevette le Stimmate. Nata a Mercatello sul Metauro, presso Urbino, nel 1660, visse cinquant'anni nel monastero delle Clarisse di Città di Castello. Entratavi 17enne, vi morì nel 1727, dopo essere stata cuoca, infermiera, maestra delle novizie e badessa. All'autopsia risultò che il cuore era trafitto da parte a parte. Dopo aver ricevuto le piaghe della Passione di Cristo, infatti - rivela nel diario spirituale - «piansi molto e con tutto il mio cuore pregai il Signore di volerle nascondere agli occhi di tutti». Nulla sapremmo delle esperienze di Veronica, se il direttore spirituale non le avesse ordinato di trascriverle. Lo fece per 30 anni e il risultato è il «Tesoro nascosto», pubblicato in 10 volumi dal 1825 al 1928. Morì nel Venerdì Santo, dopo 33 giorni di malattia. È santa dal 1839. (Avvenire)


Etimologia: Veronica = portatrice di vittoria, dal greco
Emblema: Giglio

La parola "mistica" ha avuto nella nostra epoca un'estensione impropria. Basti pensare alle infelici espressioni di "mistica della razza", "mistica del superuomo". Nel senso proprio e primario la mistica è il campo dei fenomeni vissuti da taluni spiriti privilegiati, uniti allo spirito divino da un legame d'amore ineffabile. Di essi, noi comuni mortali conosciamo soltanto il lato spettacolare, il cosiddetto meraviglioso mistico, come il miracolo e la profezia, il dominio sui fenomeni della natura, le stesse manifestazioni diaboliche, le visioni, le estasi, gli incendi interiori, le stimmate.
Ogni epoca ha avuto i suoi mistici. Oggi ricordiamo una santa, all'anagrafe Orsola Giuliani, nata nel 1660 a Mercatello, presso Urbino, settima figlia dei coniugi Francesco e Benedetta Giuliani, che all'età di diciassette anni entrò tra le suore clarisse di Città di Castello, assumendo alla professione religiosa il nome di Veronica. Nulla sarebbe trapelato dalle austere mura di quel convento della straordinaria esperienza mistica di sorella Veronica, se il suo confessore non le avesse ordinato di trascrivere sul suo diario, con l'imposizione di non rileggere nulla di quanto andava tracciando, le confidenze del Redentore, di cui riviveva puntualmente le sofferenze della passione. "L'anno 1697 - leggiamo sul suo diario - il venerdì santo, la mattina vicino al giorno, trovandomi in orazione... Iddio fece penetrare nell'anima mia la grazia col darmi i segni e i dolori che il Verbo divino aveva sofferti per la mia redenzione. Io sentivo nel mio cuore una pena di morte".
Così descrive la ricezione delle stimmate: "Io vidi uscire dalle sue SS. Piaghe cinque raggi risplendenti e tutti vennero alla volta mia... In quattro vi erano i chiodi, e in una vi era la lancia, come d'oro, tutta infuocata, e mi passò il cuore da banda a banda". Dopo la sua morte, avvenuta a Città di Castello nel 1727, di venerdì, dopo 33 giorni di malattia, sul suo corpo, che mostrava ancora le ferite della passione, venne eseguita l'autopsia e i medici riscontrarono che il cuore era effettivamente trafitto da parte a parte. "Quando vidi queste stigmate esteriori, confida S. Veronica al suo diario - io piansi molto e con tutto il mio cuore pregai il Signore di volerle nascondere agli occhi di tutti". Il suo desiderio venne esaudito, vivendo ella in totale reclusione per tutta la vita. Ma le fitte pagine dei suoi diari, scritti per più di trent'anni e che pubblicati formarono ben quarantaquattro volumi, sono un vero tesoro nascosto che arricchì di stupende pagine la letteratura mistica.
Autore: Piero Bargellini



VERONICA GIULIANI
Also known as
Ursula Giuliani
Memorial
9 July
Profile
Born to wealthy parents, Francesco Giuliana and Benedetta Mancini. In her youth, Veronica developed a deep spirituality and desired nothing more than to dedicate her life to God. Received visions as a child, and her first words were reported to be "Do justice, God sees you." Veronica's father presented suitors in hopes that one would marry her; Veronica became ill at the idea of not devoting her life to God, and Veronica finally received her father's blessing.


Joined the Poor Clares on 17 July 1677 at age 17, receiving the veil on 28 October. Soon after she began receiving visions of Christ accompanied by the pain of the wounds of the Passion. Much skepticism of her stigmata, and many examinations, but it was never disproved; Veronica never tried to prove it, just submitted to the exams.


Novice mistress for over thirty years. Abbess for more than a decade. Author of the 10-volume Diary of the Passion which catalogues her religious experiences.
Born
1660 at Mercatello, Urbio, Italy as Ursula Giuliani
Died
9 July 1727 at Citt' di Castello, Italy
Beatified
1804
Canonized
1839 by Pope Gregory XVI
Representation
crowned with thorns and embracing the Cross; holding a heart marked with a cross



Veronica Giuliani, OFM Cap. Abbess (RM)
Born in Mercatello, Urbino, Italy, 1660; died at Città di Castello, Umbria, July 9, 1727; beatified in 1804; canonized in 1839.
Saint Veronica Giuliani was canonized for her piety but she is more often remembered for the marvels surrounding her life. She was born Ursula Giuliana, the daughter of a family of wealth and breeding.


Ursula was devout from a very early age. By the time she was six, she was giving her food and clothing to the poor. By age 11, she was pursuing a devotion to the Lord's Passion. Also early in life she was intolerant of those who were not as devoted as she, but this tendency was tempered by a vision.


She took great enjoyment in the increased station her father's promotion to public office at Piacenza brought, and she reproached herself for it in later years. She decided to become a nun after experiencing a vision of the Virgin Mary, but her father opposed her plan. He insisted on introducing her to eligible suitors, which caused her to become ill from anxiety. In 1677, her father finally gave in and allowed her to become a nun at the Capuchin convent of Città di Castello in Umbria, where she took the name Veronica.


Her novitiate was difficult. She became more intense in her devotion to the Passion of Christ and experienced a vision of Him bearing the cross. At this time, she began to experience a feeling of pain over her heart. In 1693, she had another vision in which the chalice of Christ's sufferings was offered to her. On Easter 1694 she was espoused to Jesus in a vision and the imprint of the Crown of Thorns appeared on her head.


Three years later she saw Blessed Virgin Mary say to Jesus, 'let thy bride be crucified with thee.' Then at age 37, she received the stigmata in hands, feet, and side during a long period of ecstasy on April 5, 1697. Medical treatment was given, but the wounds did not heal. Her journal records experience.


In her journal she tells of the rays of light that came from Jesus' wounds and became small flames of fire, four in the form of great pointed nails, the fifth a spear-head of gleaming gold. She writes, "I felt a fearful agony of pain, but with the pain I clearly saw and was conscious that I was wholly transformed into God. When I had been thus wounded, in my heart, in my hands and feet, the rays of light gleaming with a new radiance shot back to the Crucifix, and illuminated the gashed side, the hands and feet of Him who was hanging there. Thus My Lord and My God espoused me, and gave me in charge to His Most Holy Mother for ever and ever, and bade my Guardian Angel watch over me, for He was jealous of His honor, and then thus He spoke to me: 'I am Thine, I give Myself wholly unto thee. Ask whatsoever thou wilt, it shall be granted thee.' I made reply: 'Beloved, only one thing I ask, never to be separated from Thee.' And then in a twinkling all vanished away."


Roused, she found the wounds aching and blood and water pouring from her side. She did not want the wounds to be seen, but they were visible until 1700, because Jesus promised her that the marks would only last three years. Thereafter, only her side bled.


Shortly after they first appeared, her wounds were examined by the bishop of Città di Castello, who devised a special, fraud excluding regimen for her. The wounds were bandaged, and the dressings fastened shut with the bishop's seal; she was separated from the other sisters and watched carefully. The wounds remained. During her ecstasies she emitted a sweet odor of sanctity and she levitated. The local bishop was impressed by her obedience and humility throughout and was convinced that the phenomenon was genuine. A favorable report was given to the Holy Office and Veronica was permitted to resume normal community life.


Veronica was the novice mistress for 34 years, forbidding the novices to read books of advanced mysticism. Instead, she insisted on the fundamental virtues fostered by reading Rodriguez's Christian and religious perfection. She was elected abbess in 1716 and served in that capacity for the last 11 years of her life. Not only did the spiritual life of the community improve during her abbacy, but also their physical comfort for Veronica was a practical woman. She installed piped water into the convent and expanded and enlarged its buildings.


She died of apoplexy. She had told her confessor that the instruments of the Lord's Passion were imprinted on her heart, and she drew their positioning for him more than once as she said they changed location over the years. Her heart was examined after death and "miraculously" showed images of a cross, crown of thorns, and chalice, as she had said it would. Examination also revealed a curvature of the right shoulder as if she had carried a heavy cross. (Imagination of the doctors?)


An autobiographical account (10 volumes) she had written at the command of her confessor was used in the process of her beatification and has been published since her canonization. Her mystical experiences were accurately authenticated by eyewitnesses. Through she was in a state of almost continuous ecstacy, she was in no way visionary, but a most practical and level-headed religious. Levitations and stigmata, which ceased bleeding at a word of command, reveal Veronica as one of the best documented examples of how prolonged and intense consideration of Christ's Passion can have an extraordinary effect in the faithful.


She is portrayed in art holding a heart marked with a cross (Attwater, Benedictines, Delaney, Encyclopedia, Farmer, Harrison,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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