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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 7월6일


성녀 마리아 고레티 동정 순교


St. maria Goretti, Virgo. M


Santa Maria Goretti Vergine e martire
Born:16 October 1890 at Corinaldo, Ancona, Italy
Died:choked and stabbed to death during a rape attempt on 6 July 1902 at the age of 12
Beatified:1947 by Pope Pius XII
Canonized:1950 by Pope Pius XII; the ceremony was attended by 250,000 including
her mother, the only time a parent has witnessed her child's canonization
Maria = amata da Dio, dall'egiziano; signora, dall'ebraico = mistress from God, dall'egiziano; mrs., dall'ebraico





마리아 고레티는 이탈리아의 안코나 태생이지만 페리에레 디 콘카로 이사하여 정착한다.


이곳에 정착한 직후에 부친이 운명함으로 써 남은 가족들은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리아는 상냥하고 예의 바르고, 하느님의 사랑과 순명 및 죄에 대하여 예민한 감정을 지닌 아이였다.


매우 경건한 성격을 지녔고 기도 생활에 충실했다.


열 두 살 되던 해에 그녀는 마침내 첫영성체를 했는 데,


그해 7월 어느날 오후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웃에 사는 한 청년이 마리아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녀가 끝까지 항거함으로써 이성을 잃은 그 청년이


마리아를 마구 찔러 14군데나 깊은 상처가 나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마리아는 24시간 후에 운명하였다. 마리아는 병자 성사를 받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를 용서한다."고 말함으로써,


한마디로 그녀는 정결을 지키기 위한 순교자로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성녀는 1950년에 시성되어 큰 공경을 받고 계신다.





용서해야 할 사람이 없을 때 "남을 용서하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잔인무도하게 폭행을 당해 복수심이 끓어오를 때도 용서를 떠올릴 수 있을까?


마리아 고레띠는 겨우 11살 때 자기가 알던 어떤 남자에게 폭행을 당했다.


알렉산드르라는 청년을 그녀를 수 차례 성폭행하려고 했으나 어린 마리아는 가까스로 위기를 물리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를 성폭행하려다 또 실패하게 되자 화가 난 알렉산드르는


마리아를 14군데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마리아는 죽기 전 24시간 동안 자신을 폭행한 사람이 회개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되풀이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후 알렉산드르는 27년의 형량을 마치고 출소했다.


그는 출소하자마자 그때까지 살아 있던 마리아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자신이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꿈속에서


마리아가 백합 한 다발을 들고 나타났다며 용서를 빌었다.


어머니는 딸을 살해한 흉악범을 용서해 주었고 두 사람은 1950년 6월 25일 마리아 고레티의 시성식에 함께 참석했다.


용서는 용서를 받는 사람에게도 축복이 되지만 용서를 한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이 된다.







성녀마리아 고레띠의 시성식에서 행한 교황 비오 12세의 강론에서


(AAS 42(1950),581-582)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아무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리이다



여러분 모두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무방비의 이 소녀는 격렬한 공격에 저항해야 했습니다.


야만적이고도 맹목적인 폭풍이 갑자기 그녀에게 덮쳐 그의 천사적 순결을 파괴하려 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서운 투쟁을 맞을 때 그녀는 주님께 [준주성범]의 다음 말씀을 되풀이하여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내 이처럼 많은 환난을 당해 짓눌린다해도 당신 은총이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아무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리이다.


당신의 은총은 나의 힘이요 권고요 도움이니이다. 당신의 은총은 모든 원수들보다 강하나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너그러운 은총과 그 은총에 대한 굳은 결의의 응답에 의지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고 동정의 영광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간략히 살펴본 이 겸손한 소녀의 생애에서 천상의 상급을 받을 만하고


또 현재 이 세대로부터도 공경과 앙모를 받아 마땅한 모범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부모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그들이 받은 자녀들을 올바르게, 경건하게 그리고 굳세게 기르고,


가톨릭 신앙의 가르침에 일치해서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길러야만 자녀들의 생활이 어떤 위험을 당할 때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투쟁에서 넘어지지 않고


순수하고 티없는 몸으로 나올 것입니다.


여기서 또 행복한 소녀 시절과 활달한 청년 시절을 맞이하는 이들은


순간적이고 헛된 쾌락과 악의 매력에 끌려들지 않는 것을 배우고,


그 길이 힘들로 거칠다 해도 각자의 결의와 하느님 은총의 도움과 기도 및 자신의 노력으로


누구나 이를 수 있는 그리스도인 삶의 완성을 향해 즐거운 마음으로 정진해 나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순교 당하도록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삶에 이르는데에는 모두 부름 받았습니다.


덕행은 노력과 용기를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이 어린 소녀에게 있었던 그 정도의 노력과 용기가 없다 해도


매일의 힘찬 노력이 있어야 하고 이 노력은 죽는 순간까지 중단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이루어지는 평범한 생활도 하나의 완만하고 지속적인 순교라 할 수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순교를 권고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


하느님의 천상 은총에 의지하여 우리 모두 이 목표를 이루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한 동정녀시요 순교자이신 마리아 고레띠는 우리에게 이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지금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이 성녀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처지에서 성녀의 모범을 기쁘게,


기꺼이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본받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25만여 명의 군중들이 시성식에 참석하였다.


마리아 고레티의 단순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낸 숫자였다.


그녀는 한 가난한 이탈리아 소작인 농부의 딸이었으며, 학교에 갈 기회가 없어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지 못했다.


그녀가 첫영성체를 한것은 열 두살 때로 그녀가 죽기 얼마 전이었으며,


첫영성체 교리반에서는 덩치가 큰 편이었고 약간 뒤늦은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7월의 어느 더운 날 오후에 마리아는 오두막집 계단 꼭대기에 앉아 웃옷을 꿰매고 있었다.


아직 열두 살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신체는 성숙했다.


그때 짐마차 하나가 집 앞에 멈추더니 열여덟 살 된 이웃 청년 알렉산드로가 계단으로 달려왔다.


그는 그녀를 꽉 움켜잡고 강제로 침실로 끌고 갔다.


그녀는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겠다는 식으로 숨을 헐떡거리면서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세요. 그것은 죄악입니다.


당신은 이로 인해서 지옥에 갈 것입니다."라며 반항했고 도움을 청하려고애썼다.


그러자 알렉산드로는 분별력을 잃고 단도로 그녀를 마구찌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녀는 죽기 전 몇시간 동안 착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여 주는 단순한 동정심을 드러냈다.


자기 어머니의 잠자리를 걱정하고, 살인자를 용서했으며


(그녀는 그를 두려워했으나 그의 가족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종할 때는 성체를 영하는 경건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참변을 당한지 약 24시간 만에 죽었다.


살해범인 알렉산드로는 30년형을 선고받고서도 오랫동안 참회하지 않았고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는 마리아가 꽃을 모아서 그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


27년 후 그가 석방되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마리아의 어머니께 용서를 청하러 간 것이었다.


어린 순교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생겨났으며, 갖가지 기적이 일어났고


죽은 지 50년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시성되었다.


1947년 그녀의 시복식에서 그녀 어머니(당시 82세)와 두 자매 그리고 남동생이 교황 비오 12세와 함께


성베드로 성전의 발코니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3년 후 그녀의 시성식에는 66세가 된 알렉산드로 세레넬리가 25만 명의 군중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마리아는 교리를 배우는 데는 몹시 힘이 들었는지 모르나 신앙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주님의 거룩함,고결함,순결,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온전한 신뢰였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그녀의 신앙은 단순했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특권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권이다.


순결의 미덕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녀는 정결한 사람이었다.



설혹 그녀가 순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일상 생활이 너무도 거룩했기 때문이다. (사로티 추기경)







마리아 고레티를 20세기의 성녀 아녜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생전에


아녜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요,또는 아녜스와 같은 이탈리아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가톨릭 초창기의 성녀와 같이 갖은 압력을 받으면서도 죽음으로써 깨끗한 동정을 지켰다는 점에서이다.



마리아 고레티는 성녀 아녜스처럼 훌륭한 저택에 살지도 못했으며


아무 부족함이 없이 충분한 교육을 받을 만한 부유한 가정의 딸도 아니었다.


그녀의 양친은 고용살이를 하면서 하루하루의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그의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로마 남쪽 코리날도라는 벽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들의 재산이라고는 손바닥만한 농토와 기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조그마한 집 한채뿐이었다.


마리아는 1890년 묵주기도 성월, 즉 10월 16일에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양친은 성모를 공경하는 뜻으로 그녀를 마리아라 불렀고 또 태어난 날이


바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서 축일 다음날이므로 데레사를 덧붙여 마리아 데레사라 했다.


그러나 보통은 마리에타(’작은 마리아’라는 뜻)라 불렀다.





원래 군인 출신인 그녀의 아버지는 과중한 노동을 이기지 못했던지


마리에타가 아홉 살 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리에타는 부모의 말씀을 잘 들어 곧잘 시중을 해 드렸기 때문에 부모의 총애를 받았다.


아버지는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내 말과 같이 엄마의 말씀도 잘 들어야 한다"고


거듭 거듭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망과 유언, 이 두 가지 사실이 마리에타의 작은 가슴에 얼마나 큰 감명을 주었던지


그녀는 갑자기 어른과 같이 점잖았다.



고레티의 집은 성당이나 학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아이들은 학교에도 갈 수 없었고 교리를 배우는데도 큰 지장이 있었다.


그대신 열심한 어머니가 손수 표양을 보여주며 적당한 때에 훈계도 하고


아이들의 모르는 점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 중에도 특히 어린 마음에 새겨준 것은 이디든지 계시는 하느님의 눈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조그마한 방에 걸려있는 성모님의 상본은 훌륭한 성당안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다.



마리에타는 다섯 살 때에 오빠 안젤로와 더불어 세례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첫영성체는 열 한 살 때에야 겨우 받았다.첫영성체를 받기 전의 일이다.


마리에타는 어머니를 재촉하여 신부께 가서 첫 영성체를 할 허락을 얻어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자 어머니는 "마리에타야, 너는 너무 어려서 신부가 허락하시겠니?


게다가 문답도 다 못 배우고 기도문도 못 외우고, 또 의복이며 미사 수건이며 신은 무슨 돈으로 다 산담?


나는 밤낮 이렇게 바쁘기만 하니 언제 무슨 준비를 하겠니?" 하고 대답했다.


마리에타는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엄마, 그러면 난 언제든지 영성체를 못하겠네.


난 예수님 없이는 못 살아!’어머니의 마음도 아팠다.


"내가 왜 너를 학교에 못 보내 주었겠니? 이렇게 집안이 곤란하니..모든 것을 다 용서해다오"하고 사과하셨다.


"그럼 엄마, 내가 더 부지런히 일할께. 일을 쉴때에는 나르 고카 아주머니 댁에 보내주세요.


그곳엔 주일이면 신부도 오시고 또 아주머니도 글을 읽을 줄 아신다고 하시니...


"이리하여 마리에타는 그때부터 9개월 동안 그곳에 다니며 영성체 준비를 했고,


1901년 6월 16일에 첫영성체를 했다.


그녀의 의복, 미사 수건, 화관, 구두 같은 것은 모두 이웃의 고마운 교우들이 준비해 주었다.





성체안에 계시는 예수님은 실지로 그녀에게 큰 힘을 주었다.


그녀는 일찍이 정조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만일 주님이 이를 도와 주시지 않았던들 그녀는 패배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고레티의 기정은 더욱 경제적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는 그 건물의 일부를 제레네리 가족에게 전세로 내주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고레티 모녀를 마치 여종같이 부렸다.


그 중에도 더욱 못된 사람은 제멋대로 놀고 있는 이제 불과 17세 밖에 안 된 남자 알렉산데르였다.


그는 마리에타에게 방 청소 같은 지저분한 일을 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마리에타의 유일한 보물인 처녀성까지 빼앗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야욕을 채우려 시도해 보았으나 마리에타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께 누설할 경우엔 어머니와 오빠까지 괴롭힐까 염려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다만 어디 갈 때에는 자기 혼자만 집에 남겨두지 말기를 어머니께 요청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런것은 어린아이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공포심이라 생각하고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집안 일과 어린 동생을 그녀에게 맡겨놓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러 떠났다.



1902년 2월 7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의 전날이었다.


그 날 그녀는 다른 친구와 같이 미사를 드리러 갈 약속이 있어 아침부터 성체께 대한 묵상에 잠겨 있었다.


예전과 같이 한나절이 되자 일하러 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다.


알렉산데르는 자기 방에 마리에타를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더러운 내의를 침대 위에 벗어놓고


실과 바늘, 헝겊을 갖다 놓고 "마리에타야 내 내의 좀 기워라"하며 큰 소리로 불렀다.


그의 본심을 안 마리에타는 하는 수 없이 틈을 타서 그 내의를 가지고 나와 기워 주었다.


알렉산데르는 다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알렉산데르는 혼자서 돌아왔다. 마리에타는 소름이 끼치도록 놀랐다.


그는 자기 방에 들어가자마자 "마리에타야, 이리와라’하고 불렀다. 대답이 있을리 없었다.


재차 불렀을 때 "무슨 일이세요?"하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든 좋은 일이니 이리와"


"아니,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시키려는데요? 그것을 알려주기 전엔 안 갑니다"


그러자 그는 뛰어나와 무례하게 마리에타를 끌고 방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당신이 하려는 것을 하느님께서도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나도 그런 일을 하면 가만있을 줄 알아요?"하며 고레티는 그에게 끝끝내 대항했다.


도저히 안될 줄 안 알렉산데르는 그때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단도를 꺼내어 고레티를 닥치는 대로 찔러


열 네 군데의 상처를 입혔다. 고레티는 쓰러졌다. 고레티가 죽은 줄 안 범인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돌아온 어머니가 유혈이 낭자한 마리에타를 발견하고 아연실색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즉시 차에 실어 네쓰노 병원에 옮겨 갖은 치료를 다 해보았으나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하느님께서 그녀의 순결한 순교에 대한 영관(榮冠)을 씌워 주시기 위함이셨으리라.



"엄마! 물 한 모금만" "마리에타야, 그건 안 된다. 선생님이 안된다고 하신다"


"한 방울만 입술 축일 정도로" "마리에타야, 십가자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해라.


엄마도 왜 모르겠니, 그렇지만 너를 위해서는 안된단다."



이처럼의 고통은 스물 네 시간을 끌었다.


노자로서의 봉성체를 주기위해 오신 신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마리에타, 너도 알다시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나?


너도 너를 이같이 참혹히 만든 그 사람을 용서해 주겠니?


"예, 신부, 저도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도 사후 천국에서 내 옆에 올 수 있게끔 기도하겠어요."


그리고 그 입에서 마지막으로 울려나온 말은 "엄마, 아빠가..."였다.





마리아 고레티는 그로부터 45년이 경과한 1947년 4월 27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초등 학생들을 합한 30만이란 대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복녀품을 받았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950년 6월 25일에 성인품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또한 그녀를 위한 많은 저서와 논설이 세계 각국어로 발표되었고, 그녀에 관한 영화도 제작되었다.


그를 살해한 범인은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한 후 회개했다.


마리에타의 어머니는 다행히도 딸의 시복시과 시성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예식에 참여한 많은 청소년 군중은 그녀를 높이 찬양했다.






♬Lauda Sion - 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Santa Maria Goretti Vergine e martire
6 luglio - Memoria Facoltativa
Corinaldo (Ancona), 16 ottobre 1890 - Nettuno, Roma, 6 luglio 1902


Nacque a Corinaldo (Ancona) il 16 ottobre 1890, figlia dei contadini Luigi Goretti e Assunta Carlini, Maria era la seconda di sei figli. I Goretti si trasferirono presto nell'Agro Pontino a Nettuno, in provincia di Roma. Nel 1900 suo padre morì, la madre dovette iniziare a lavorare e lasciò a Maria l'incarico di badare alla casa e ai suoi fratelli. A undici anni Maria fece la Prima Comunione e maturò il proposito di morire prima di commettere dei peccati. Alessandro Serenelli, un giovane di 18 anni, s' innamorò di Maria. Il 5 luglio del 1902 la aggredì e tentò di violentarla. Alle sue resistenze la uccise accoltellandola. Maria morì dopo un'operazione, il giorno successivo, e prima di spirare perdonò Serenelli. L'assassino fu condannato a 30 anni di prigione. Si pentì e si convertì solo dopo aver sognato Maria che gli diceva avrebbe raggiunto il Paradiso. Quando fu scarcerato dopo 27 anni chiese perdono alla madre di Maria. Maria Goretti fu proclamata santa nel 1950 da Pio XII. (Avvenire)
Etimologia: Maria = amata da Dio, dall'egiziano; signora, dall'ebraico
Emblema: Palma

Dopo il gran numero di vergini martiri, del lontano tempo delle persecuzioni contro i cristiani, che oltre a rifiutare l’adorazione degli idoli, rifiutavano soprattutto le offerte ed i desideri sessuali dei loro carnefici, come ad esempio s. Lucia, s. Agata, s. Cecilia, s. Agnese, ecc. ci fu un lungo tempo in cui nella Chiesa non comparvero figure eclatanti di martiri per la purezza.
Ma nel nostro tempo la Chiesa ha posto sugli altari figure esemplari di giovani donne e adolescenti, che nella difesa della virtù della purezza, oggi tanto ignorata, persero la loro vita in modo violento, diventando così delle martiri.
È il caso della beata Pierina Morosini († 1957) di Fiobbio (Bergamo); della beata Carolina Kozka († 1914) della Polonia; della beata Antonia Mesina († 1935) di Orgosolo (Nuoro); della Serva di Dio Concetta Lombardo († 1948) di Staletti (Catanzaro), ecc., prima di loro ci fu la dodicenne Maria Goretti, oggetto di questa scheda, beatificata nel 1947 e proclamata santa nel 1950 da papa Pio XII durante quell’Anno Santo.
Forse ai nostri giorni parlare della difesa estrema della purezza, fa un po’ sorridere, visto il lassismo imperante, la sfrenatezza dei costumi, il sesso libero fra molti giovani; ma fino a qualche decennio fa la purezza era un bene e una virtù, a cui specialmente tutte le ragazze tenevano, come dono naturale da difendere e preservare per un amore più completo e benedetto dal sacramento del Matrimonio, oppure come dono da offrire a Dio in una vita consacrata.
Con il riconoscimento ufficiale della Chiesa di questa forma di martirio, quello che fino allora poteva considerarsi, secondo il linguaggio di oggi, come uno stupro finito tragicamente per la resistenza della vittima, assunse una luce nuova di martirio, visto la personale spiritualità della vittima, il concetto di difesa della purezza come dono di Dio, il ribellarsi coscientemente fino alla morte; piace qui ricordare s. Domenico Savio che nella sua pura adolescenza, diceva: “La morte ma non il peccato”.
In quest’ottica va inquadrata la vicenda terrena di Maria Goretti, nata a Corinaldo (Ancona) il 16 ottobre 1890 e battezzata lo stesso giorno, fu poi cresimata, secondo l’uso dei tempi in piccola età, il 4 ottobre 1896 quando il vescovo Giulio Boschi, giunse in visita pastorale nel paesino.
Nel 1897, i genitori Luigi Goretti e Assunta Carlini che avevano oltre la primogenita Maria, altri quattro figli, essendo braccianti agricoli e stentando nel vivere quotidiano con la numerosa famiglia, decisero di trovare lavoro altrove; mentre tanti compaesani tentavano l’avventura dell’emigrazione nelle Americhe, essi scelsero di spostarsi nell’Agro Pontino nel Lazio, che essendo infestato dalla malaria, pochissimi sceglievano di trasferirsi lì.
Giunsero dapprima nella tenuta del senatore Scelsi a Paliano, come mezzadri insieme ad un’altra famiglia già residente i Serenelli, pure di origine marchigiana, composta solo da padre e figlio, essendo la madre morta da tempo.
Poi i rapporti con il proprietario si guastarono, ed i Serenelli ed i Goretti dovettero lasciare Paliano e fortunatamente trovarono, sempre come mezzadri, un’altra sistemazione nella tenuta del conte Lorenzo Mazzoleni a Ferriere di Conca, nelle Paludi Pontine; zona che prima della bonifica, iniziata nel 1925 e completata soltanto nel 1939, fungeva da diga naturale fra la parte settentrionale e l’immenso acquitrino a sud; non era certamente un luogo salutare, perché d’estate era invaso dalle zanzare e dalla malaria; il chinino unico farmaco efficace, era soprattutto usato per scopo terapeutico, ma non serviva per lo scopo preventivo.
Mentre i genitori si adoperavano nel lavoro massacrante dei campi, Maria accudiva alle faccende domestiche, tenendo in ordine la casa colonica e badando ai fratellini più piccoli. Dopo alcuni anni, il 6 maggio 1900, il padre non ritornò a casa, stroncato dalla malaria ai margini della palude, Maria aveva allora 10 anni; prese a confortare la mamma rimasta sola con la famiglia e con un lavoro da svolgere superiore alle sue forze; nonostante che il raccolto fosse buono quell’anno, la famiglia rimase in debito con il conte Mazzoleni dei diritti di mezzadria, di ben 15 lire dell’epoca.
Il proprietario dopo aver invitato la madre a lasciare quel lavoro e la casa, perché era impossibile mantenere il rapporto lavorativo legato ad un mercato esigente e ad un raccolto abbondante e sicuro; ma dietro la disperata richiesta di mamma Assunta di restare, perché con cinque figli non aveva dove andare, il conte acconsentì purché nel rimanere si associasse ai Serenelli, che abitavano nella stessa cascina e coltivavano altri terreni.
La soluzione sembrò ideale, i Serenelli padre e figlio coltivavano i campi e Assunta accudiva i figli e le due case, oltre ai lavori sull’aia; mentre Maria si dedicava alla vendita delle uova e dei colombi nella lontana Nettuno, al trasporto dell’acqua che non era in casa come oggi, alla preparazione delle colazioni per i lavoratori nei campi, al rammendo del vestiario.
Non aveva più potuto andare a scuola, che già frequentava saltuariamente; era definita dalla gente dei dintorni “un angelo di figliola”; recitava il rosario, era molto religiosa come d’altronde tutta la famiglia.
Aveva insistito di fare la Prima Comunione a meno di undici anni, invece dei dodici come si usava allora; con grandi sacrifici riuscì a frequentare il catechismo, e così nel maggio del 1902 poté ricevere la Santa Comunione.
Fino ad allora la sua fu una vita di stenti, duro lavoro, sacrifici, poche Messe alle quali assisteva nella chiesa della vicina Conca, oggi Borgo Montello, ma che da giugno a settembre chiudeva, quando i conti Mazzoleni partivano per sfuggire alla malaria e alle zanzare che proliferavano con il caldo. Allora sacrificando ore al sonno, si recava a Messa a Campomorto distante parecchi km.
Intanto i rapporti fra il Serenelli padre e Assunta Goretti si incrinarono, in quanto egli essendo vedovo fece ben presto capirle che se voleva mangiare lei e la sua famiglia, doveva sottomettersi alle sue richieste non proprio oneste.
Siccome Assunta non era disposta a cedere, il Serenelli cominciò a controllare tutto, persino le uova nel pollaio e a passarle gli alimenti con il contagocce. Maria intanto giunta ai dodici anni, cominciava a svilupparsi nel fisico, diventando di bell’aspetto, ma il suo animo era semplice e puro e non aveva avuto tempo di sognare per il suo futuro, tutta presa ad aiutare nel lavoro, sostenere e incoraggiare la mamma, accudire i fratelli piccoli.
Il figlio del Serenelli, Alessandro, aveva intanto raggiunto i 18 anni, di fisico robusto era l’orgoglio del padre, non solo perché sapeva lavorare sodo nei campi, ma cosa rara in quei tempi fra i contadini, sapeva leggere e scrivere; quando si recava in paese, ritornava sempre con qualche rivista poco raccomandabile, che portata in casa, suscitava le proteste di Assunta, ma il padre lo giustificava dicendo che doveva esercitarsi nella lettura.
Alessandro ormai guardava Maria con occhi diversi da qualche anno prima e cominciava a cercare di avere degli approcci non buoni, insidiandola varie volte, sempre respinto dalla ragazza; un giorno fece apertamente delle proposte peccaminose e al rifiuto di Maria, temendo che ne parlasse in famiglia, la minacciò di morte se lo avesse fatto.
Maria per non aggravare i già tesi rapporti fra le due famiglie, stette zitta, rimanendo meravigliata dalla situazione che non capiva, perché aveva sempre considerato Alessandro come un fratello. Il 5 luglio 1902 i Serenelli ed i Goretti erano intenti alla sbaccellatura delle fave secche e Maria seduta sul pianerottolo che guardava l’aia, rammendava una camicia del giovane Alessandro.
Ad un certo punto questi lasciò il lavoro e con un pretesto si avviò alla casa; giunto sul pianerottolo invitò Maria ad entrare dentro, ma lei non si mosse, allora la prese per un braccio e con una certa forza la trascinò dentro la cucina che era la prima stanza dove s’entrava.
Il racconto è dello stesso Alessandro Serenelli, fatto al Tribunale Ecclesiastico; Maria Goretti capì le sue intenzioni e prese a dirgli: “No, no, Dio non vuole, se fai questo vai all’inferno”. Ancora una volta respinto, il giovane andò su tutte le furie e preso un punteruolo che aveva con sé, cominciò a colpirla; Maria lo rimproverava e si divincolava e lui ormai cieco nel suo furore, prese a colpirla con violenza sulla pancia e lei ancora diceva: “Che fai Alessandro? Tu così vai all’inferno…”, quando vide le chiazze di sangue sulle sue vesti, la lasciò, ma capì di averla ferita mortalmente.
Le grida della ragazza a malapena sentite dagli altri, fecero accorrere la madre, che la trovò in una pozza di sangue, fu trasportata nell’ospedale di Orsenico di Nettuno, dove a seguito della copiosa perdita di sangue e della sopravvenuta peritonite provocata dalle 14 ferite del punteruolo, i medici non riuscirono a salvarla.
Ancora viva e cosciente, perdonò al suo assassino, dicendo all’affranta madre che l’assisteva: “Per amore di Gesù gli perdono; voglio che venga con me in Paradiso”; fu iscritta sul letto di morte tra le Figlie di Maria, ricevé gli ultimi Sacramenti e spirò placidamente il giorno dopo, 6 luglio 1902.
Alessandro arrestato e condannato al carcere, già nel 1910 si era pentito e aveva sognato “Marietta”, come veniva chiamata, in Paradiso che raccoglieva fiori e glieli donava con il suo inconfondibile sorriso.
Quando uscì dal carcere nel 1928, andò da mamma Assunta a chiederle perdono e in segno di riconciliazione
si accostarono entrambi alla Comunione, nella notte di Natale di quell’anno.
Il 31 maggio 1935 nella Diocesi di Albano si apriva il primo processo per la sua beatificazione, che avvenne come già detto, il 27 aprile 1947 con Pio XII, lo stesso papa la canonizzò il 24 giugno 1950, di fronte ad una folla immensa, dopo essersi congratulato con la madre, che ammalata e seduta su una sedia a rotelle, assisté al rito da una finestra del Vaticano.
Il suo corpo di novella martire moderna, riposa nella cappella a lei dedicata, nel santuario della Madonna delle Grazie a Nettuno, custodito dai Padre Passionisti e meta di innumerevoli pellegrinaggi da tutto il mondo cattolico; la sua festa si celebra il 6 luglio.
Autore: Antonio Borrelli



MARIA GORETTI

Memorial
6 July; formerly 5 July
Profile
Beautiful, pious farm girl, one of six children of Luigi Goretti and Assunta Carlini. In 1896 the family moved to Ferriere di Conca. Soon after, Maria's father died of malaria, and the family was forced to move onto the Serenelli farm to survive.


In 1902 at age twelve, Maria was attacked by 19-year-old farm-hand Alessandro Serenelli. He tried to rape the girl who fought, yelled that it was a sin, and that he would go to hell. He tried to choke her into submission, then stabbed her fourteen times. She survived in hospital for two days, forgave her attacker, asked God's forgiveness of him, and died holding a crucifix and medal of Our Lady. Counted as a martyr.


While in prison for his crime, Allessandro had a vision of Maria. He saw a garden where a young girl, dressed in white, gathered lilies. She smiled, came near him, and encouraged him to accept an armful of the lilies. As he took them, each lily transformed into a still white flame. Maria then disappeared. This vision of Maria led to Alessandro's conversion, and he later testified at her cause for beatification.
Born
16 October 1890 at Corinaldo, Ancona, Italy
Died
choked and stabbed to death during a rape attempt on 6 July 1902 at the age of 12
Beatified
1947 by Pope Pius XII
Canonized
1950 by Pope Pius XII; the ceremony was attended by 250,000 including her mother, the only time a parent has witnessed her child's canonization
Patronage
against impoverishment, against poverty, children children of Mary, girls, loss of parents, martyrs, rape victims, young people in general
Readings
It is well known how this young girl had to face a bitter struggle with no way to defend herself. Without warning a vicious stranger burst upon her, bent on raping her and destroying her childlike purity. In that moment of crisis she could have spoken to her Redeemer in the words of that classic, The Imitation of Christ: "Though tested and plagued by a host of misfortunes, I have no fear so long as your grace is with me. It is my strength, stronger than any adversary; it helps me and give me guidance." With splendid courage she surrendered herself to God and his grace and so gave her life to protect her virginity.


The life of a simple girl - I shall concern myself only with highlights - we can see as worthy of heaven. Even today people can look upon it with admiration and respect. Parents can learn from her story how to raise their God-given children in virtue, courage, and holiness; they can learn to train them in the Catholic faith so that, when put to the test, God's grace will support them and they will come through undefeated, unscathed, and untarnished.


From Maria's story carefree children and young people with their zest for life can learn not to be led astray by attractive pleasures which are not only ephemeral and empty but also sinful. Instead they can fix their sights on achieving Christian moral perfection, however difficult that course may prove. With determination and God's help all of us can attain that goal by persistent effort and prayer.


Not all of us are expected to die a martyr's death, but we are all called to the pursuit of Christian virtue.


So let us all, with God's grace, strive to reach the goal that the example of the virgin martyr, Saint Maria Goretti, sets before us. Through her prayers to the Redeemer may all of us, each in his own way, joyfully try to follow the inspiring example of Maria Goretti who now enjoys eternal happiness in heaven.


from a homily by Venerable Pope Pius XII at the canonization of Saint Maria Gore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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