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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6월25일
성 굴리엘모 아빠스
St. Gulielmus Abbas
San Guglielmo di Montevergine (da Vercelli) Abate
Vercelli, 1085 - Goleto, Nusco, 24 giugno 1142
Guglielmo = la volontà lo protegge, dal tedesco
= the will the protegge, from the German






굴리엘모는 '의지와 보호'란 뜻이다.



유럽에서 최초로 번성한 수도원은 5세기에 창립된 성 베네딕토 수도회인데
하느님께서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수도 정신이 헤이해진 경향이 보이자
성 로베르토, 성 베르나르도, 성 브루노 등 수도원 개혁자들과
또는 새로운 수도원의 창립자들을 보내시어 그들로 하여금 수도 생활의 쇄신을 도모하게 하셨다.







베네딕토회 은수자 수도원을 창립한 성 굴리엘모도 역시 이러한 일에 선택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시다.



그는 1085년 이탈리아의 비에몬드에서 가까운 베르첼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적에 일찍이도 양친을 여의어 경건한 친척 손에서 자라 신심에 비상한 열심을 표시했다.
그 일면을 본다면 겨우 14세로서 일생동안 고행의 생활을 할 뜻을 하느님께 약속하고
나이도 아직 어린 몸으로 멀리 성 야고보 사도의 묘지가 있는 스페인의 콤포스텔라까지
순례의 길을 떠났다는 사실로 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순례 도중 그는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실행해 쇠로 된 허리띠를 매고
맨발로 걸으며 음식물은 모두 자비심이 많은 사람에게 구걸했다.



이탈리아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소경이 된 어느 농부를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하느님께 기도하자 그 즉시 농부는 눈을 떴다고 한다.


그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부근 일애에 높아져 그는 이를 귀찮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피하기 위해 광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며
즐겁게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으나 이전부터의 희망이었던 팔레스티나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성지에 도착해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의 말구유, 나자렛에 있는 검소한 성가정의 가옥 등
주님의 수많은 지취들, 그중에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구원의 대사업을 완수하신
골고타의 언덕을 직접 눈으로 보고 묵상해 그의 신앙은 더욱더 견고해지고 수덕에 대한 열심은 점점 더 증가 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적을 만났다.
모든 것을 잃고 가혹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재난도 성지에서 얻은 거룩한 감동과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굴리엘모는 더 한층 하느님께 직접 계시를 받고 성 베네딕토의 규율하에


온전히 세속을 떠나 적막 속에서 기도와 고행에 매진하는 은수자 수도원을 창립하기로 했다.





그는 이것을 위해 남부 이탈리아의 아베리노 시에서 가까운 몬테 비르지니아노라는 산 위에
이미 제자가 된 수명의 사제들과 각각 조그마한 초막을 장만하는 동시에
이교의 시인 비르지니오를 따라 지은 산 이름을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다서
몬테비르지네(Monte Virgine)라고 개칭하고 성모님께 봉헌한 성당에 건축했다.



굴리엘모와 그의 동료들의 경건하고도 엄격한 생활은 시작됐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 혹은 그 성스러운 생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누구나 감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수도원의 평판이 널리 퍼짐에 따라 입회자도 점점 늘어나 굴리엘모는
여러 차례 다른 깊은 산이나 광야 들에 수도원을 세워 열심한 수도자들을 돌봐주었다.



당시 시칠리아의 사람들은 신앙에 냉랭하고 향락을 즐겨 영적 상태는 매우 한심했다.
그래서 그들의 왕 로제리오 2세는 예의를 갖추고 굴리엘모를 초대해 신앙 생활의 쇄신에 대해 의뢰했다.
그의노력은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를 언짢게 여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인을 죄에 떨어뜨리려고 미모의 창녀를 보내 그의 정결을 빼앗으려고 했다.
굴리엘모는 처음부터 그를 쳐다보지 않았으나 창녀의 유혹이 점점 심해져


그는 타고있는 장작불 위에 누워 버렸다. 창녀는 대경 실색했다.
그뿐 아니라 불 속에서 나온 그의 몸에 티끌 만한 상처도 없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자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통회하여 다시는 죄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고 여러 가지의 기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굴리엘모는


1142년 6월 25일 본 고향, 천국을 향해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성스러운 유해는 손수 건립한 굴레도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시토회
라틴어 Ordo Cistereiensis
영어 Cistereians(O. Cist.)



1908년 프랑스 부르군드지방 시토(Citeaux)에서
성 로베트트(St. Robertus de Molesme, ?∼1111)가 설립한 수도원에서 시작된 수도회,
회의 이름은 모원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us de Clairvaux)의 기여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곧 서부유럽으로 확산되어 13세기 중엽에는 680여 개의 소속대수도원들이 있었다.



은수적(隱修的)인 수도외의 생활양식으로 교회, 제구(祭具), 제의(祭衣) 등이
매우 소박하며 성 베네딕토의 회칙을 기초로 한 규법을 준수하여
단식, 침묵, 단순노동 등이 매우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1119년 교황 갈리스도 2세에 의해 인간된 `사랑의 헌장'(Charta Caritatis)이 회헌이
되었으며 이런 시토의 규정들은 다른 중세수도원 들, 특히 의전수도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시토회에 각 국가단위의 구심점들이 형성되자 시토에 있는 수도원은
국외 시토회 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엄격한 회칙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어
이것은 라 트라프 (La Trappe)의 수사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1902년 레오 13세 때 트라피스트회는 시토회에서 `엄률 시토회'로 분리하여 독립하였고,
이 전의 시토회는 `성 시토회'로 존속하였다.



1898년 시토 대수도원이 복구되었을 때 엄률을 채택하였으며
로마에 거주하는 시토의 아빠스는 엄률시토회의 총장이 되었다.
현재 114개 수족에 1,318명의 회원이 있다. (1983년 교황청연감).


(가톨릭대사전에서)





트라피스트회
라틴어 Ordo Cisterceinsium Reformatorum
영어 Trappists



1098년 프랑스의 시토(Citeaux)에 세워진 수도회, 즉 시토회 중 ‘엄률(嚴律) 시토회’의 주요 수도회.


1892년 시토수도원이 모원(母院)으로 회복될 때까지 라 트라프(La Trappe)가 엄률 시토회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1664년 랑세(A.J. Le B. de Rance)에 의해 개혁의 물결이 일게 되었으며


이 때 ‘트라피스트’란 이름이 생겨났다.


이는 이전의 시토회의 성격을 보유하면서 더욱 엄격성을 추가한 회였다.


트라피스트의 생활은 ‘기도와 참회, 침묵과 노동’으로 요약된다. 현재 85개 수도원에 3,100명의 회원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시토회 세 창립자
*성 로베르토 축일:4월29일.
*성 스테파노 하딩 아빠스 축일:4월17일.게시판1715번.
*성 알베릭 축일:1월26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축일:7월11일.게시판1267번.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축일:8월20일.게시판1324번.
*세니의 성 브루노 주교 축일:7월18일.게시판1278번.
*성 브루노 사제(카르투시안수도회)축일:10월6일.게시판1407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칠층산 글쓴이: 토마스 머턴


옮긴이: 정진석 | 출판사: 바오로딸



영성가로서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토마스 머튼 수사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도 숨김없이 기술하고 날카롭게 분석한 감동적인 자서전이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던 유혹과 장애에 대한 묘사, 좌절과 실의 속에
방황하던 어두움과 수도원의 황홀한 내적 삶이 담긴 이 자서전은
아름다운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인간의 단순한 사건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부, 영혼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현대사회에 대한 충격적인 통찰과 심원한 내적 영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성바오로인터넷서원에서)





시토회 세 창립자



♬2.Gloria-빈소년합창단




















San Guglielmo di Montevergine (da Vercelli) Abate
25 giugno
Vercelli, 1085 - Goleto, Nusco, 24 giugno 1142


Nobile, divenuto monaco, decise di recarsi in Palestina. Lungo il cammino si fermò in Irpinia dove fondò la Congregazione Benedettina di Montevergine, con caratteristiche cenobitiche. Sentendo il bisogno di solitudine, nominò il suo successore nella Congregazione, che abbandonò per poi fondare altri monasteri, fra cui quello di San Salvatore, diviso in due parti destinate rispettivamente ai religiosi e alle religiose. La sua opera infaticabile lo portò ancora più lontano verso Rocca San Felice, Foggia e Troia. L'ideale di vita ascetica da lui proposto, sostanzialmente legato alla Regola benedettina, faceva parte del movimento spirituale che cercava una Regola più pura e dava maggior spazio alla preghiera e alla contemplazione.


Patronato:Irpinia
Etimologia:Guglielmo = la volontà lo protegge, dal tedesco
Emblema:Bastone pastorale, lupo


E' presente nel Martirologio Romano. A Goleto presso Nusco in Campania, san Guglielmo, abate, che, pellegrino dalla città di Vercelli, fattosi povero per amore di Cristo, fondò su invito di san Giovanni da Matera il monastero di Montevergine, in cui accolse con sé dei compagni che istruì nella sua profonda dottrina spirituale, e aprì molti altri monasteri sia di monaci sia di monache nelle regioni dell’Italia meridionale.


La sua statua in San Pietro a Roma ha un lupo accovacciato ai piedi, in ricordo di un prodigio che gli attribuisce la tradizione. Quando viveva da eremita sui monti, l’asino che era il suo prezioso mezzo di trasporto fu sbranato da un lupo, che poi Guglielmo prodigiosamente trasformò in mansueto animale da soma. Di Guglielmo non conosciamo i genitori, probabilmente nobili. Lo incontriamo quindicenne, già vestito da monaco e in viaggio come pellegrino. Cammina per mesi e per anni. Va a San Giacomo di Compostella, poi a Roma, poi si avvia verso la Puglia: vuole imbarcarsi per la Terrasanta. Ma lo dissuadono dapprima un futuro santo, Giovanni da Matera, da lui incontrato a Ginosa (Taranto); e poi alcuni rapinatori presso Oria (Brindisi) che lo picchiano selvaggiamente perché delusi dalle sue tasche vuote. "Non è lì che ti vuole il Signore", gli ha detto Giovanni. E lui, dopo indecisioni e prove, va infine a stabilirsi sui 1.500 metri di Montevergine, nel gruppo appenninico del Partenio, presso Avellino. Terra ancora di orsi e di lupi, dove vive da solo per un anno.
Poi arrivano altri uomini (e alcuni sacerdoti) attratti dalla vita eremitica, che intorno a lui formano una comunità. Ma poi salgono anche i pellegrini, i “fedeli”, a cui bisogna predicare e amministrare i sacramenti, nella chiesetta consacrata nel 1124. Guglielmo ha adottato la Regola benedettina con marcata accentuazione eremitica, ma quest’affluenza di gente rende necessaria anche un’attività pastorale, una “cura d’anime”.
Nel 1128 egli affida la comunità al futuro beato Alberto e va a stabilirsi in Lucania sul monte Cognato, dove presto nasce un monastero; e quando è ben stabilito, ecco che Guglielmo riparte fermandosi a Goleto, ancora nell’Avellinese. Qui per un anno gli serve da cella il cavo di un gigantesco albero, e qui ancora nasce un monastero. “Doppio”, anzi; ossia con una comunità maschile e una femminile, ognuna con propria sede e propria chiesa.
Il Meridione d’Italia “adotta” affettuosamente questo piemontese. Altri monasteri egli fa nascere in Irpinia e in Puglia: "moltissimi", dice la sua prima biografia del XII secolo. Così si forma quella che sarà chiamata Congregazione Benedettina di Montevergine, e che avrà vita plurisecolare. Nel 1879 si fonderà poi con la Congregazione Cassinese.
Guglielmo muore nel monastero del Goleto, e nelle sue comunità s’incomincia subito a venerarlo come santo. Alcuni vescovi autorizzano anche il culto pubblico, che sarà poi esteso a tutta la Chiesa nel 1785. Il suo corpo verrà traslato nel 1807 dal Goleto a Montevergine, dove si trova tuttora. E lo stesso monastero, per tutta la durata della seconda guerra mondiale, sarà il rifugio segreto e sicuro della Santa Sindone di Torino.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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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19-Jun-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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