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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6월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St. Aloysius Gonzaga


Saint Aloysius Gonzaga (Jesuit)


San Luigi Gonzaga Religioso
Born:9 March 1568 at castle of Castiglione delle Stivieri in Montau, Lombardy, Italy
Died:20-21 June 1591 at Rome of plague, fever, and desire to see God;


relics entombed under the altar of Saint Ignatius Church, Rome
Beatified:19 October 1605 Pope Paul V (cultus confirmed)
1621 by Pope Gregory XV
Canonized:1726 by Pope Benedict XIII
Luigi = derivato da Clodoveo


The Patron Saint of Youth




주님은 어디에서든지 성인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
심지어는 잔인하고 타락한 문예 부흥기의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플로렌스는 "사기,살인,독살,음탕이 난무하는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시오 곤자가에게는 "신심의 어머니"가 되었다.
왕족의 아들인 그는 왕궁과 군사 훈련장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알로이시오가 영웅적인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

알로이시오는 일곱 살에 심오한 영적 자극을 체험했다.
그는 마리아의 성무일도, 시편 기도 외에도 신심 기도를 바쳤다.
그는 아홉 살에 고향인 카스틸리오네를 떠나 플로렌스에 와서 공부하게 되었으며
열한 살에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일주일에 세 번씩 재를 지키는 등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부모와 오스트리아의 여왕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했으며,
필립 2세의 궁전에서 시동(侍童)으로 지냈다.
알로이시오는 궁중 생활을 보면 볼수록 그것을 외면하고 되었고 성인들의 생활을 공부함으로써 위안을 얻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체험에 관한 책을 읽고 난 그는 예수회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고
그의 결심은 스페인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고는 4년에 걸친 아버지와의 투쟁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과 평신도들도 그를 "평범한 소명"에 머물러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나 결국 그는 소원대로 가문을 계승할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예수회의 수련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다른 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종류의 고행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고행의 정확한 본질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더 많이 먹어야 했고 다른 학생들과 오락을 즐기라는 강요를 받았으며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기도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철학 공부로 4년을 보냈으며 로베르토 벨라미노 성인을 그의 영적 지도자로 삼았다.

1591년에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었다.
예수회는 자체 병원을 개설했고 총장과 다른 많은 예수회 회원들이 직접 봉사에 나섰다.
알로이시오도 환자들을 씻기고 그들의 침대를 만들면서 간호했다.
그러다가 그만 그 자신이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회복된 뒤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고 침대에서 쉽게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며칠 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기도 생활의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23세에 세상을 떠났다.





재를 지키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고독 속에서 기도하며
여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성인으로 알려진 알로이시오는,
절제 생활이 축구 선수나 권투 선수들의 훈련장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따라서 성적 금기가 거의 무너져버린 듯한 요즘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수호자가 되기에 부적당한 것 같다.

체중이 초과되고 냉온방 시설이 잘된 사회가 스스로 어떤 결핍을 감수할 수 있을까?
알로이시오가 그랬듯이 그럴 만한 이유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려는 이유는
기도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의 온 마음을 기울여 우리의 기도에 집중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모든 육적이고 지상적인 생각들은 지나가 버리게 합시다.
그때 우리 영혼에는 그 기도의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깃들이지 않도록 합시다."
(성치프리치아노, "주님의 기도에 관하여" 31장)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사제 축일:7월31일.게시판1295번.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학자 축일:9월17일.게시판1367번.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축일:12월21일.게시판1531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게시판145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I am a piece of twisted iron; I entered religion to get twisted straight.


-Saint Aloysius


(Picture from Fr. Maurice Meschler's "Life of St. Aloysius Gonzaga")



스페인의 필립 2세를 섬기고 있는 마르끼스 페란떼 까스티글리오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롬바르디의 가족 城에서 3월 9일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에 있었으나, 아주 어릴적부터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1577년에 그는 공부하러 플로렌스로 가서, 만투아 공작의 궁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알로이시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경험한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되려는 열망으로 불탔다. 마침내 그가 16세 되던 해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정하였다.


부친의 격노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듯 했으나 드디어 그는 1585년,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모범적인 수련자였으며, 흑사병이 퍼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듯 하였다


예수회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병원을 열자,


알로이시오는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자신도 만성 열병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는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성인이 후일 그의 성덕을 증언하였다.


성 알로이시오의 자서전과 편지 및 영적인 저술들은 아주 독특하고


다른 시대와 사회 사람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이다.





알로이시오 공자가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교황 베네딕또 13세에 의하여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비오 11세에 의해서는 가톨릭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부산교구홈에서)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자기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Acta Sanctorum, Lunii, 5, 878)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이다.


존경하올 어머니, 성령의 은총과 그 끊임없는 위로를 누리시길 빕니다.


어머니의 편지가 제 손에 닿았을 때 저는 아직도 죽은 이들의 땅인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제 심혈을 기울여 산 이들의 나라에서 영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천국을 갈망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벌써 그 곳에 가 있고 싶었고 이미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난 줄로 진정코 생각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사랑이란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도 저와 함께 무한한 기쁨을 가지셔야 합니다.


어머니의 은덕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참된 행복을 보여 주셨고


또 그것을 잃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시어 온갖 두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어머니, 바다만큼 깊고 또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해 볼 때 제 정신은 그 광대함에 압도되고 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도 짧고 보잘 것 없는 저의 수고를 보시고 어떻게 저에게 영원한 안식이라는 보상을 주실 수 있는지,


또 이제까지 게을리 찾던 나를 천국의 무한한 행복으로 초대 하실는지,


또 그것을 얻으려고 그다지도 적은 눈물을 흘린 저에게 많은 고생과 눈물의 보상인 그 보화를 주시려 하실는지요!


존경하올 어머니,이것을 거듭거듭 생각하시고, 주님 면전에서 살아 있고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제 자신의 간구로써 어머니를 더 염려해 드리는 저를 어머니께서 죽은 사람인 듯 슬퍼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무한한 이 자비를 거스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이별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 구원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불사 불멸의 끝없는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다 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생명을 잠시 동안 거두시는 것은


우리를 더 안전한 자리에 두시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은총의 선물로 꾸며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 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드리니다.


제 희망의 성취인 그 항구를 향해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어머니께서 저를 친히 축복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바쳐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더 확실히 보여 드릴 다른 방도가 없기에,


어머니께 기꺼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페나테 곤자가와 마르타 타나산테나의 아들이며
양친은 모두 여러 추기경과 교황을 배출한 고귀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페란테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영국 왕 헨리 8세가 주는 높은 지위를 사양했고,
그의 아내는 자선 사업에 전심했으며 아기를 가질 희망이 보이자
그 어느 때보다도 성서를 열심히 읽었다.
맏아들 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만토봐 근처에 있는 카스틸리오네 성에서 태어났다.





알로이시오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무척 사랑스럽고 얌전했다.
좀 큰 뒤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떤 으슥학 구석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하는 소원밖에는 없었다.
어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만들 생각으로, 네 살 때에 벌써 그 몸에 알맞은 군복과 무기를 장만해 주기까지 했다.

어떤 날 아버지는 알로이시오를 카살레 요새로 데리고 갔었는데,
알로이시오는 거기서 매우 재미있어 했고 심지어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그마한 야포(野砲)에 화약을 재기까지 했었다.
대포가 발사되자 모두들 영문(營門)에서 무슨 반란이나 일어난 줄 알았고
알로이시오는 알로이시오대로 포의 반동으로 인해 죽을 뻔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알로이시오는 병사들의 그 고상하지 못한 말투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튜니즈에 원정(遠征)을 가려고 배를 탄 후에 알로이시오는 집으로 돌아왔으며
1577년 원정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알로이시오와 그의 동생 로돌프를 플로렌스에 있는
프란치스코 1세의 궁정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알로이시오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의 표준어인 토스카 말을 배웠다.
그의 좋은 성적은 엘레오노라와 마리아 레메리치스 왕녀들에게 모범으로 인용되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발견한 결점, 즉 분노, 조급증, 불만 등을 쳐 이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그는 아직 묵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로사리오의 현의(玄義)에 대한 작은 책자를 읽은 덕택으로 천주의 성모께 대한 그의 정성이 더 커졌다.
그가 마리아의 종 수도회 성당에 있는 성모 영보성상 앞에서 종신 정결 서원을 올린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비록 손톱만한 유혹을 당한 일조차 없었으나, 그때부터 엄한 경계와 극기에 전심했다.

1579년 알로이시오는 아버지께 불려 만토봐로 갔었는데, 그곳에서 신장병(腎臟病)의
초기 증세가 보였으므로 철저하게 음식물을 조심하여 병을 완전히 고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그로 인해 몹시 약해졌다.
몇달 후에는 카스틸리오네로 가서 자기 영혼에 선익을 찾아냈던 단식재를 계속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며 묵상을 했다.
이러는 중에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매일의 묵상'이라는 책과 '인도 통신'이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되어 예수회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 알로이시오는 보로메오 추기경을 접대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7월 22일에 그에게 첫영성체를 시켜주셨다.

그가 다시 카살레에 가서 머무르는 동안, 군대에는 별 관심도 없이 고어연구(古語硏究)에


많은 진보를 보여, 특히 세네카와 폴리카르포 및 영성 작가들의 많은 작품을 읽었으며,
그와 동시에 카푸친회 수도원과 바르나바회에 대해 우러러보았다.

1581년 그는 다시 카스틸리오네로 돌아와 하루에 한 주먹의 음식 밖에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쇠사슬과 박차의 바퀴를 가지고 고신 극기를 했으며,
밤을 거의 기도로써 지냈고, 그때부터 두통을 앓기 시작한 것이 끝내 낫지 않았다.
만약에 알로이시오가 끊임없이 "내 하느님이여, 나를 인도해 주소서!"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던들
영적 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그릇된 신비주의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1581년 페란테 경이 스페인 왕의 시종장이 되자 알로이시오는 마드리드 왕궁에서
디에고 황태자의 선생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자기 연구, 그 중에도 특히 학술적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굴복한 후 그가 라틴어로 필립 2세를 치하한 연설문을 보면
그의 문학적 소양이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술과 검도를 배우는 시간이 되면 아버지의 꾸중을 무릅쓰고라도 살짝 빠져나갔는데,
그것을 보면 순명이 그때 알로이시오의 으뜸가는 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라나다의 루수의 저서를 읽고, 또 한 시간씩이나 아무 분심없이 묵상을 계속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하기에는 서너 시간 동안 투쟁을 해야만 했다.
만토봐에서 세속을 버릴 생각을가지고 있던 알로이시오는 디에고 왕자의 죽음으로 한층 더 세속을 경멸하게 되었다.





알로이시오는 처음에 카푸친 수도회와 또 개혁할 단계에 있는 오랜 수도회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그때 초창기의 비약적인 열성을 보여 주던 예수회를 택하게 되었다.
그가 예수회로 마음이 끌린 것은 특히 청소년 교육과 외교인의 귀화라는 그의 취미가 있어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 수도회에 들어가야만 나중에 아무런 고위 성직도 맡지 않게 되리라고 확신한 까닭이기도 했다.
이 사정을 알자 아버지는 우선 격노했고 시일을 좀 끌기 위해서
만토봐, 페라라, 팔마, 토리노 등지의 궁정을 구경시켰으니 그것이 1584년의 일이었다.

여러 주교들이 그를 재속 성직자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혹은 그의 영토를 다스리는 것이
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설복시키고자 했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피가 나도록 편태하는 것을 문틈으로 엿보고
또 예수회 신부 한 분을 시켜 한 시간 동안이나 그의 성소에 대해 꼬치꼬치 여러 가지를 물어본 후
마침내 그 수도회에 들어가는데 동의를 했다.





수도원으로 떠나기 전에 알로이시오는 아버지의 일 때문에 7,8개월을 밀라노에 머물면서 그동안 철학 공부를 계속 했다.
1585년 7월에는 만토봐에서 성 이냐시오의 수련을 했고, 11월 2일에는


동생 로돌프에게 자기 공작령(公爵領)을 양도한다는 증서에 서명하고 4일에는 로마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로렛다에 들러 자기를 낳을 때에 어머니가 하신 그의 청원기는 단축되었으니,
그것은 벌써 그의 성소가 얼마나 성실했는지의 증거가 역력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석 달 후에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들에게 대한 하느님 뜻을 반대한 것을 뉘우치며
뛰어난 신심을 보여 주며 선종했다.
알로이시오는 크나큰 설움을 맛보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이 이렇게 고운 것을 기쁘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카스틸리오네를 떠난 후로 알로이시오가 자기 가족을 생각한 것은 오직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가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
특히 보조 수사들과 즐거이 사귀었으며, 다 낡은 옷에 전대를 메고 자선을 청하러 나가기를 즐겨했다.
그가 천신론(天神論)이라는 책명으로 알려진 묵상 책을 쓴 것이 이때였다.





1586년 10월 27일, 그는 수련장과 함께 나폴리로 떠났다.
그러나 단독(丹毒)과 열병이 도는 바람에 그는 다음해 5월에 예수회의 로마 학교로
다시 파견었고 거기서 1857년 11월 25일에 첫 서원을 발했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가 되어 공개된 장소에서 철학논문을 증명하고 신학 연구를 시작했다.
토론에 있어서 그는 언제나 힘차게 그러나 절제 있게 자기 의견을 주장했으며


남의 말을 중단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1588년 2월과 3월에는 소품을 받고 더욱 더 순명의 덕을 닦는데에 힘썼는데 이는 누가


그에게 자기의 외부적 극기에 대한 열의에 반대하는 때에는 언제나 항거하는 경향이 현저했던 까닭이다.





1589년 9월에 알로이시오는 총장 신부의 명령을 받고 자기 동생 로돌프와
만토봐 공작 사이에 일어난 솔페이노 성 쟁의(爭議)를 중재하기 위해 카스틸리오네로 갔다.
그는 특히 공작의 관대한 마음에 호소해 예수의 사랑을 위해 로돌프와 화해하기를 청했다.
그는 또한 악한 표양이 되었던 자기 동생의 비밀결혼을 우호적으로 승인하게 하는데에도 성공했다.



그런 다음 밀라노의 예수회 수도원으로 갔고 거기에서 자기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리라는 묵시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수도 생활의 요람이었던 로마를 다시 보았으면 하는 소원을 가졌었는데
마침 총장 신부가 그곳으로 불러들여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시에나에서 수도회 학생들에게 강연을 해 달라는 청을 받고 알로이시오는
"너희들은 말을 듣지만 말고 오직 행하는 자가 되라"는 구절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로마에 돌아와서는 주교들의 청으로 여러 주교직의 책무에 대해 연설을 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더 굳게 하기 위해,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독언집(獨言集)과
성 베르나르도가 쓰신 아가(雅歌)해석과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특히 1590년과 1591년에 걸쳐 엄습했던 기아와 혹사병 때에 이웃을 사랑하는 덕을 밝히 드러내어,
그는 처음에 성 식스토 병원에서 봉사하다가 다음에는 위로의 성모 마리아 병원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도중에서 흑사병 환자를 만나 등에 업고 가다가 자기 자신이 병에 전염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3월 3일 이었다. 그는 석 달 동안을 병고에 시달리다가 하루는 밤새도록
일종의 탈혼 상태가 계속되는 중에 성체 축일 팔일 축제 내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해의 성체 축일 팔일 축제는 6월에 있었다.





그러나 팔일 축일이 다가오자 병세가 오히려 나아지는 것 같아 보여서


그의 고해 신부인 벨라르민 신부까지도 그 날 밤 그의 곁에 있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가 밤 열 시와 열 한 시 사이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에는
다른 신부 두부노가 간호원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성모 영보 성당 지하실에 매장되었는데,


7년 후에 티베르가의 홍수로 인해 유해의 분배를 행했다.
나머지 유해는 같은 성당에 딸린 한 경당에 모셨다가 여러 번 옮겨 모셨고
나중에는 성모 영보 성당 자리에 새로 지은 성 이냐시오 성당에 모셨다.





시복은 바오로 5세 교황 때인 1605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1726년 4월 26일에 결정하고 같은 해 12월 31일에 선포했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725년 6월 21일에 청소년의 주보로 결정되었는데,
이 칭호는 그 후 여러 번 확인 되었고 마지막으로는 1926년 6월 13일 비오 11세 교황이 재 확인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축일:8월28일.게시판1336번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축일:8월20일. 게시판1324번.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 축일:9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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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Ad Majorem Dei Gloriam)"



주님 안의 벗들 예수회의 창설자 성 이냐시오의 영성
모든 수도 공동체는 고유한 은혜를 지닌다.
교회의 신비에 보편적으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수회에 보다 더 본질적으로 고유한 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도적 봉사를 위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동지애' 혹은 '동반자의 삶'이고,


'주님 안의 벗들'이 되는 체험이 예수회 창립의 기초를 이룬다.



'예수회'(Compa a de Jesus, 직역하면 '예수의 동반자')라는 명칭이 지시하듯 동반자로서의 삶이 예수회의 근원적 특은이다.
그러므로 이 "동반자"의 은혜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할 때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을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성인의 첫 동료들이 지녔던 내적 태도와 영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성 이냐시오 영성의 두 결정적 지표들, 즉 라 스또르따의 체험과 까르도네르 강가의 체험을 중심으로 예수회에 전수된 특은을 살펴보겠다.


이냐시오는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알카라, 살라망카에서 공부하면서 이미 동지들을 찾고 있었다.
그때 만난 동지들과의 관계는 끝까지 계속되지 않았지만, 후에 파리에서 그의 고유한 인품, 즉 친절함,


영성지도자로서의 탁월함, 하느님께 대한 봉사의 열정, 앞을 내다보는 식견 등에 감명 받는 여섯 명의 20대 젊은이들이 모였다:


삐에르 파브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시몬 로드리게즈, 디에고 라이네즈, 알퐁소 살메론, 니꼴라스 보바디야.



1534년 8월 15일 성모승천 축일에 몽 마르뜨르의 한 작은 경당에서 그 당시 이미 사제였던 파브르가 미사를 집전하고,


미사 중에 일곱 명의 동지들은 청빈과 정결의 개별적 서원을 발하고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로 서약한다.


그 이듬해에 이냐시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동지들을 파브르에게 맡기고 휴양을 위해 고향을 방문한다.


그 동안 파브르는 세 명의 동지들을 더 받아들인다: 끌로드 제이, 파샤스 브뢰트, 쟝 꼬뒤르. 이들 열 명이 예수회를 창립한 장본인들이다.

그러므로 동반자로서의 은혜는 이들이 파리에서 머물던 시절에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라이네즈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일주에 한번씩 동지들의 하숙방에서 돌아가면서 만났는데 이 모임은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였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주 만나면서 이들은 서로 "주님 안의 벗들"이 된 것이다.


이때 이들은 결코 어떤 수도회를 창립하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 안에서 친구들로서의 정을 나누며 지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동반자'의 은혜가 예수회에 특은으로 전수된다.

이들은 1537년 1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베네치아에서 함께 만났고, 그 후 로마에 가서 2년 동안 여러 사도적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대단한 열정으로 사도적 활동을 전개했는데 길거리에서 설교하고 성사를 집행하며 여러 곳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병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하면서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추위 등의 어려움 속에서 가난하고 고생하는 이들을 위한 활동을 펴나갔다.


이러한 사도적 활동은 그들 서로 간에 공감대를 더 깊이 형성해주었고 형제적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면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사에서 아주 독특하고 눈부신 우정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바로 주님 안에서 서로 벗들이 된 것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한데 엮어져 사도적 활동에 헌신하기 위해


교황의 권위와 이냐시오의 고유한 영도력 아래 뭉쳐진 우정 어린 사제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필요에 따라 교황께서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를 위해 세상 어디에나 파견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권위에 자신들의 의지를 내 맡겼고, 교황께서는 그들과 함께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보시고,


또 유럽의 각지에서 오는 요청에 따라 이들을 여기저기에 파견하셨다.


이렇게 서로 흩어지는 상황에서 이들 사이에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주님 안의 벗들'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공동으로 식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모으시고 일치시킨 것을 우리가 갈라서는 안된다."는 자각과 더불어


1539년 3월 중순부터 6월 24일까지 함께 모여 소위 말해 '사도적 공동식별'의 기초를 이루는


[첫 사부들의 식별(Deliberatio primorum Patrum)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도적 활동에 투신하는 수도회를 창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예수회홈에서 http://www.jesuits.or.kr)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사제 축일:7월31일.게시판1295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축일:12월3일.게시판1504번.


*성 삐에르(베드로) 파브르 사제 축일:8월11일.게시판1531번.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축일:12월21일.게시판1531번.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학자 축일:9월17일.게시판1367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게시판1454번.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축일:10월10일.게시판1415번.


*성 요한 오질비 순교자 축일:3월10일.게시판165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1. 예수회의 기원


예수회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 부터 유래한다.


그들의 시대는 16세기의 대격변기였고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성 이냐시오가 '주님안의 벗들'이라고 부른 그의 동료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찾았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냐시오 성인을 통해서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삶가운데 새로운 생활양식을 일으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 봉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공동으로 갖게된 비젼안에서 고유한 예수회의 생활양식이 자라났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가진 성직 수도회가 결성되었다.


예수회는 1540년에 사도좌의 인가를 받아 교회 안에서 탄생하였다.



2. 예수회의 행동양식


예수회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데 있다.


더우기 그 모든것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 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예수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며, 예수회를 수도적이면서 특히 사도적인 단체로 만든다.


예수회의 사도적 활동은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하고 제한없는 기동성을 요구하며 더 어려운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따라서 교회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응해 어디나 가서 활동할 자유를 얻기 위해,


이전의 전통적인 수도생활 양식 안에 있던 여러가지 방해 요소들을 과감히 포기하여 근본적으로 쇄신된 수도생활 양식이 성립되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靈神修練)을 통해 관상한 그리스도, 즉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그리스도는 예수회원 모두에게 삶과 일의 원형이 되시며,


또한 각자의 상황안에서 사도적 적응성을 가지고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선택하도록 재촉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회원은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관상가가 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의 특별한 유대속에서 교회와 함께하는 정신으로 봉사한다.


예수회원은 무상으로 봉사할 마음을 가지며, 기도로써 길러지고 체득된 식별의 감각을 지니고 세상안에서 활동한다.


예수회 전통은 봉사의 질과 자기도야에 있어 엄격함을 유지하여 왔으며,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결한 감각으로 참으로 인간다운 것을 존중한다.


예수회원의 행동양식은 외면상으로는 평범하고 또 그것을 추구하나, 내적으로는 자신의 목적의 탁월한 완성을 위해 노력한다.



3. 오늘날의 예수회원


예수회는 그 시대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영감을 받아 거기에서 사도적 활동력을 보존할 통찰을 길어 내었다.


따라서 우리시대 인간들의 염원과 필요를 보되 그리스도의 눈으로 봄으로써,


오늘날의 예수회원들은 스스로의 신원과 사명을 자각한다.


오늘의 예수회원은 이냐시오와 같이 '예수의 벗'으로 부름받았음을 인식하면서,


'주님 안의 벗들'인 동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께 결속하여,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투쟁인 신앙의 봉사와 신앙에 내포된 정의 구현에 헌신하는 사명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다.


예수회원은 세가지 서원을 통해 이러한 봉사에 필요한 사도적 자유를 얻어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면서 세계의 현실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예수회홈에서 http://www.jesuits.or.kr )





Dedication to Jesus



Dedication to Jesus


Lord Jesus Christ,


take all my freedom,


my memory,


my understanding, and my will.


All that I have and cherish you have given me.


I surrender it all to be guided by your will.


Your grace and your love and wealth are enough for me.


Give me these,


Lord Jesus, and I ask for nothing more. Amen.


- St Ignatius Loyola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저는 이것으로 만족하리이다.


-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봉헌기도 -




♬Take and Receive-Manoling Francisco. SJ






The First Communion of Saint Aloysius











Saint Aloysius Woodcut
The woodcut, by MR. ERIC KENNINGTON,








San Luigi Gonzaga Religioso
21 giugno
Castiglione delle Stiviere, Mantova, 9 marzo 1568 - Roma, 21 giugno 1591


Figlio del duca di Mantova, nato il 19 marzo del 1568, fin dall'infanzia il padre lo educò alle armi, tanto che a 5 anni già indossava una mini corazza ed un elmo e rischiò di rimanere schiacciato sparando un colpo con un cannone. Ma a 10 anni Luigi aveva deciso che la sua strada era un'altra: quella che attraverso l'umiltà, il voto di castità e una vita dedicata al prossimo l'avrebbe condotto a Dio. A 12 anni ricevette la prima comunione da san Carlo Borromeo, in visita a Brescia. Decise poi di entrare nella compagnia di Gesù e per riuscirci dovette sostenere due anni di lotte contro il padre. Libero ormai di seguire Cristo, rinunciò al titolo e all'eredità ed entrò nel Collegio romano dei gesuiti, dedicandosi agli umili e agli ammalati, distinguendosi soprattutto durante l'epidemia di peste che colpì Roma nel 1590. In quell'occasione, trasportando sulle spalle un moribondo, rimase contagiato e morì. Era il 1591, aveva solo 23 anni. (Avvenire)


Patronato:Giovani, Gioventù
Etimologia:Luigi = derivato da Clodoveo


E' presente nel Martirologio Romano. Memoria di san Luigi Gonzaga, religioso, che, nato da stirpe di principi e a tutti noto per la sua purezza, lasciato al fratello il principato avito, si unì a Roma alla Compagnia di Gesù, ma, logorato nel fisico dall’assistenza da lui data agli appestati, andò ancor giovane incontro alla morte.


Il matrimonio dei suoi genitori - il marchese Ferrante Gonzaga e Marta dei conti Tana di Chieri (Torino) - si è celebrato nel palazzo reale di Madrid, perché Ferrante è al servizio di re Filippo II di Spagna. Luigi è poi nato nel castello di famiglia: è il primo di sette figli, erede del titolo e naturalmente con un futuro di soldato. Perciò il padre lo porta in mezzo alla truppa già da bambino. Poi cominciano per lui i soggiorni in varie corti e gli studi.
Nel 1580, dodicenne, Luigi riceve la prima Comunione dalle mani di san Carlo Borromeo. Nel 1581 va a Madrid per due anni, come paggio di corte e studente. È di questa epoca un suo ritratto. Autore è il grande El Greco, che mostra il Luigi autentico (come pochi altri suoi ritratti), e ben diverso dal fragile piagnone raffigurato più tardi da tanta pittura per sentito dire, fuorviata dal fervore maldestro di oratori e biografi: purtroppo la sua austerità di vita (da lui contrapposta alla fiacchezza morale del gran mondo) sarà, per molto tempo, presentata come una sorta di avversione ossessiva nei confronti della donna.
In Spagna, Luigi è brillante alunno di lettere, scienza e filosofia e tiene la tradizionale dissertazione universitaria; insieme, legge testi spirituali e relazioni missionarie, si concentra nella preghiera, decide di farsi gesuita e – malgrado la contrarietà del padre – a 17 anni entra nel noviziato della Compagnia di Gesù a Roma, dove studia teologia e filosofia.
Nel 1589 (a 21 anni) lo mandano a Castiglione delle Stiviere per mettere pace tra suo fratello Rodolfo (al quale ha ceduto i propri diritti di primogenito) e il duca di Mantova. Obiettivo raggiunto: Luigi si muove bene anche in politica, anche se la sua salute è fragile (e le severe penitenze certamente non lo aiutano). Nel ritorno a Roma, un misterioso segnale gli annuncia vicina la morte. È il momento di staccarsi da tante cose. Ma non dalla sofferenza degli altri; non dalla lotta per difenderli. Nel 1590/91 un insieme di mali infettivi semina morte in tutta Roma, stende in 15 mesi tre Papi uno dopo l’altro (Sisto V, Urbano VII, Gregorio XIV) e migliaia di persone. Contro la strage si batte Camillo de Lellis con alcuni confratelli, e così fa Luigi Gonzaga. Ma siccome è malato anche lui da tempo, gli si ordina di dedicarsi ai casi non contagiosi. Però lui, trovato in strada un appestato in abbandono, se lo carica in spalla, lo porta in ospedale, incaricandosi di curarlo. Poi torna a casa e pochi giorni dopo è morto, a 23 anni. "In una commovente lettera, il 10 giugno, egli prese commiato dalla madre" (L. von Pastor).
Nel 1726, papa Benedetto XIII lo proclamerà santo. Il suo corpo si trova nella chiesa di Sant’Ignazio in Roma, e il capo è custodito invece nella basilica a lui dedicata, in Castiglione delle Stiviere, suo paese natale.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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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12-Jun-2001




Aloysius Gonzaga

Also known as
Aluigi Gonzaga; Luigi Gonzaga
Memorial
21 June
Profile
Italian noble who grew up in a castle, the son of a compulsive gambler. Cousin of Saint Rudolph Acquaviva. Trained from age four as a soldier and courtier. Suffered from kidney disease which he considered a blessing as it left him bed-ridden with time for prayer. While still a boy himself, he taught catechism to poor boys. Received First Communion from Saint Charles Borromeo. At age 18 he signed away his legal claim to his family's lands and title to his brother, and became a Jesuit novice. Spiritual student of Saint Robert Bellarmine. Tended plague victims in Rome in the outbreak of 1591.
Born
9 March 1568 at castle of Castiglione delle Stivieri in Montau, Lombardy, Italy
Died
20-21 June 1591 at Rome of plague, fever, and desire to see God; relics entombed under the altar of Saint Ignatius Church, Rome
Beatified
19 October 1605 Pope Paul V (cultus confirmed)
1621 by Pope Gregory XV


Canonized
31 December 1726 by Pope Benedict XIII
Patronage
AIDS care-givers; AIDS patients; Catholic youth; Jesuit students; relief from pestilence; sore eyes; teenage children; teenagers; young people


Readings
There is no more evident sign that anyone is a saint and of the number of the elect, than to see him leading a good life and at the same time a prey to desolation, suffering, and trials.


- Saint Aloysius Gonz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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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ho wishes to love God does not truly love Him if he has not an ardent and constant desire to suffer for His sake.


Saint Aloysius Gonz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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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Holy Mary! My Mother; into thy blessed trust and special custody, and into the bosom of thy mercy, I this day, and every day, and in the hour of my death, commend my soul and body. To thee I commit all my anxieties and sorrows, my life and the end of my life, that by they most holy intercession, and by thy merits, all my actions may be directed and governed by thy will and that of thy Son.


Saint Aloysius Gonz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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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the comfort and grace of the Holy Spirit be yours for ever, most honored lady. Your letter found me lingering still in this region of the dead, but now I must rouse myself to make my way on to heaven at last, and to praise God for ever in the land of the living; indeed I had hoped that before this time my journey there would have been over. If charity, as Saint Paul says, means "to weep with those who weep and rejoice with those who are glad," then, dearest mother, you shall rejoice exceedingly that God in his grace and his love for you is showing me the path to true happiness, and assuring me that I shall never lose him.


Take care above all things, most honored lady, not to insult God's boundless loving kindness; you would certainly do this if you mourned as dead one living face to face with God, one whose prayers can bring you in your troubles more powerful aid than they ever could on earth. And our parting will not be for long; we shall see each other again in heaven; we shall be united with our Savior; there we shall praise him with heart and soul, sing of his mercies for ever, and enjoy eternal happiness.


from a letter to his mother by Saint Aloysius Gonz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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