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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6월19일
성 로무알도 아빠스
ST. ROMUALD
St. Romualdus, Abbas
San Romualdo Abate
Born:c.951 at Ravenna, Italy
Died:19 June 1027; body incorrupt; enshrined at Fabriano, Italy; relics tranlsated in 1481
Canonized:1582 by Pope Gregory XIII
Romualdo = che regna glorioso, dal tedesco = that it reigns glorious, from the German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오스티네 귀족 출신인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또는 로무알도)는 부친의 살인 사건 때문에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가, 20여세 때에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수도원을 떠나 베네치아(Venezia) 교외에 살던 마리누스(Marinus)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인 성 베드로 우르세올루스(Petrus Urseolus, 1월 10일)가 마리누스와 성 로무알두스를 쿡사(Cuxa)로 데리고 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게 하자,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그는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부친을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때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Pereum)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헝가리의 마자르인(Magyars)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인하여 1027년 6월 19일 파비아노 교외의 발 디 카스트로(Val di Castro)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세운 다섯 개의 은둔소들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것은 후일 카말돌리회의 모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로무알도 아바스',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69-173쪽.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로무알도 아빠스', 서울(성바오로), 2002년, 143-144쪽.
(가톨릭홈에서)




로무알도는 '영광과 권세'란 뜻이다.
젊은 시절을 헛되이 보낸 로무알도는 자기 아버지가 재산 때문에 결투를 하다가
친척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그는 이탈리아의 라벤나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피했다.



3년 후에 몇몇 수사들에게서 그는 안정되지 못한 성덕을 추구한다는 깨우침을 받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는 그 후 30년간을 수도원과 은수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온 이탈리아를 돌아다녔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순교로써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치기를 갈망한 그는


교황의 허락을 받아 헝가리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렸으며 그 병은 그가 선교 활동을 하려고 애를 쓸 때마다 재발했다.


또 어떤 때는 지독한 영적 무미 건조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편 23편 "나는 너를 가르쳐 네 갈 길을 배우게 하고 너를 눈여겨보며 이끌어 주리라."


(8절)는 구절을 읽으며 기도하던 중 놀라운 빛과 영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 뒤에 수도원에서 머물던 그는 방탕한 생활 때문에 자기에게서 꾸지람을 들은


어떤 젊은 귀족으로부터 수치스러운 죄명으로 고발을 당했다.
놀랍게도 그의 동료 수사들은 그 고발을 믿었다.


그는 엄격한 참회 행위를 해야 했고 미사를 드리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공동체에서 격리되었다.
6개월 동안의 침묵 끝에 그는 더 이상 그런 불의한 판결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세운 수도원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토스카나에 있는


카말돌리(주인의 이름인 Campus Maldoli를 따서)수도원이다.


여기서 그는 수도공동체와 은수 생활을 결합시켜 카말돌리의 베네딕토 수도회를 세웠다.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수도자가 되어 방황하다가 자기 아들의 격려를 받고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는 훌륭한 지도자로서 우리를 완전한 성덕으로 부르신다.
지금 이 순간 남자와 여자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절대적인 헌신과 활력에 넘치는 영성,
철저한 회개에 도전하라고 촉구한다.
우리가 그들의 생활을 본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하라는 그 부르심에로 돌아서지 않기 때문이다.



로무알도가 살고 있던 수도원에 폴란드의 한 공작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여 멋진 말 한 필을 로무알도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로무알도는 그 말을 나귀와 바꾸더니
자기는 나귀에 타는 것이 그리스도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로무알도의 일생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무한하다는 것과 죄인이라 해도 진실로 통회하고


은총이 인도하심에 잘 따른다면 얼마든지 완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해 주는 좋은 예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귀족이었지만 그들의 생활 상태는 온전히 비그리스도교적이어서 아들 로무알도도 이를 모방하여


어려서부터 마음의 순결을 잃어버리고 부모와 같이 무질서한 생활을 했으나 신앙만은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불량한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다.


그는 종종 말을 타고 인기척 없는 고요한 곳에 가서 교회에 위반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싶다든가


혹은 성인과 같은 완덕의 생활을 하고 싶다든가 하는 충동을 받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 번 타락한 구덩이에서 여간해서는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고, 그 기회에 하느님의 은총은 그의 회개를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이란 것은 그의 부친 세르키오가 사소한 일로 친척의 한 사람과 불목이 되어
결국 결투로서 그를 찔러 죽인 일이다.





그때 청년이었던 로무알도는 동반인으로 억지로 부친과 같이 가게 되어 상대자의 비참한 죽음을 보자


마음 깊이 충격을 받고 라벤나 교회의 클라세 수도원에 가서 40일간 살인죄를 범한 부친과


그리고 그곳에 참석한 자기를 위해 속죄의 고행을 하기 시작했다.


속죄가 끝나 마음이 진정된 후 로무알도는 다시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니
산 수사는 그를 온전히 회개시키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여간해서 들으려 하지 않으므로 그 수사는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의 교회의 보호자인 성 아폴리나리오를 만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좋습니다. 그와 같이 하면 수사가 되리다: 하고 약속했다.



그 날 밤 로무알도는 수사에게 인도되어 교회에 갔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으려니까 과연 성인이 발형하셔서 몇 개 되는 제대를 하나 하나 돌아본 후


다시 자기 무덤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밤도, 그 다음 날 밤도 똑같았다.
이와 같이 하여 로무알도는 완전히 개심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 그는 겨우 21세였지만 처음부터 모든 일을 정성껏 행하며 특히 기도와 극기를 좋아햇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수도원에는 세속적 정신이 충만하여 수도자들도 그리 열심하지 않았으므로


로무알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여러 차례 이를 충고했지만,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게 되고 그중에는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까지도 있었다 .



다행히 하느님의 보호로 그는 그런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원하여 그 수도원을 떠났다.
그러나 그대로 세속에 다시 돌아간 것은 아니고, 완덕에 도달할 열망으로
베네치아 교회에 살던 마리노라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의 대통령인 베드로 오르세올로가 세속을 떠나
마리노와 로무알도에게 의논하여 프랑스 그잔에 있는 성 미카엘 수도원에 들어갔을때 마리노와


로무알도도 그 수도원 부근에 초가를 마련하고 종전의엄격한 생활을 계속하는 한편 농업에도 종사했다.



그 무렵 로무알도는 여러 가지 시련을 당햇다.
과거의 연상이 그를 괴롭혔고 악마도 내외로 그를 보채었다.
그러나 그는 번민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잘 참으려 굳은 신뢰로써 기도하며
모든 것을 죄의 보속으로 다 바쳤다. 그러므로 그의 덕은 날로 진보하는 동시에
그의 부친 또한 회개의 은혜를 얻어 수도원에 입회했다.



아버지에게는 수도원 생활이 너무 엄격했음이지 오래지 않아서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것을 안 로무알도는 급히 이탈리아의 아버지에게돌 돌아와 정성을 다해 위로하고 권면하여 인내로써


수도원에 머무를 것을 간고히 애원했다.
부친도 그의 말에 순응하여 세속에 돌아갈 서을 단념하고 수도 생활을 계속하다가


오래지 않아 선종했다고 한다.



그 후 수년간은 로무알도에 있어서 대단히 복잡한 시대였다.
그는 이탈리아 국내에서 이곳저곳 조용한 곳을 찾아 다녔다.
적당한 곳은 얼마든지 있엇지만 그가 일단 자리를 잡고 초막을 지어 놓으면 어느새 또 못살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거처하는 곳을 알게 되면 상방에서 지도를 받으러 사람들이 조수(潮水) 같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로 삼아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의 수도원장이 되어 달라는 수사들도 있었다.
로무알도는 이런 생활보다 인간을 떠나 고요한 곳에서 경건히 하느님을 섬기기를 더 원했던 것이다.


966년, 독일의 황제 오토 3세는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에 자기의 보호하에 있는 클라세 수도원도


방문하게 되엇는데 그곳의 무질서함을 보고 개혁할 결심으로 이에 적당한 인재를 수도자들에게 선택하라고


한 결과 누구를 막론하고 로무알도를 원했다.
그러므로 황제는 친히 성인을 방문하고 그 중대한 책임을 맡아 주기를 간청하므로


그도 할 수 없이 승낙하고 그곳에 갔으나 그의 허다한 노력에도 허사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교와 황제에게 청해 다시 조용한 자기 거처로 돌아왔다.



그에게 위로가 된 것은 수명의 제자들의 열심한 생활이었다.
그 중에서도 후에 러시아에서 전교하다가 순교한 보니파시오와,
헝가리에서 전교하다가 동시에 순교한 요한과 베네딕토 이 3인은 특별히 뛰어났다.


보니파시오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로무알도는 그곳으로 급히 가려고 까지 생각했으나


그때 마침 중병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 후 로무알도는 어떤 부자에게서 카말돌리라는 한적한 토지를 기부 받아 그곳에 제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고 동시에 카마돌리회를 창설했다.


이수도원은 오늘날까지 계속 그 엄격한 생활양식을 지켜오고 있다.



로무알도는 시도리오 산상에도 한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그곳에 방탕한 생활을 한


귀족 출신의 한 청년이 들어왔다.
이 청년은 회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스스의 권면과 책망에 대해 원망하며


로무알도도 자기와 같이 남몰래 방탕한 생활을을 하고 있다고, 없는 사실을 들어 나쁜 소문을 퍼뜨렷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로 믿고 대노하여 로무알도를 교수형에 처하든가 혹은
그의 초막을 태워버리든가 하라고 모두 흥분했다.
그는 미사를 지내는 것 까지 금지되었다.
로무알도는 묵묵히 그러나 수치를 인내하며 이에 순종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하느님 친히 발현하셔서 미사를 지내라고까지 하셨다.



그는 나이가 많아 임종이 가까운 줄을 알았다.
그래서 하루는 홀로 있고 싶다며 수도자들을 모두 내보냈다.
평소 고독을 즐겻던 그는 임종 때에도 하느님과 홀로 임종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그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제자들이 방에 가서 보니
스승은 이미 고요히 임종한 상태였다고 한다. 때는 1027년 6월 19일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수도생활:게시판1822번.


*아빠스란?:게시판1751번,94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베드로 다미아노가 쓴 [성 로무알도의 생애]에서


(Cap. 31 et 69: PL 144, 982-983. 1005-1006)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자기를 버렸다.


로무알도는 파렌초시 근처에서 3년간 살았다.


첫해에 수도원을 세우고 아빠스를 두는 공동체를 설립했다. 남은 2년동안 은수 생활을 했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그를 높은 완덕의 경지로 올려 성령의 감도하에 미래에 생길 여러가지 일들을


예견하고 지성의 빛으로써 신구약의 많은 숨은 신비들을 깊히 파고 들어갔다.


그는 자주 하느님을 관상하는 중에 탈혼에 빠져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 대한 표현할 수 없는 불타는 열정으로 여러가지 짧은 기도를 부르짖곤 했다.



"사랑하는 예수여, 꿀보다 더 달콤한 주님이시여,


표현할 수 없는 나의 갈망이시여,성인들의 기쁨이시여, 천사들의 즐거움이이여."



성령의 감도를 받아 순수한 기쁨 가운데 그가 부르짖는 애원은 우리 인간의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성인은 어디에 거처하려 할 때마다 자기 방에다 제대와 함께 작은 기도소를 만들고


두문 불출하면서 아무도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여러 은수처에서 거처한 후 이제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발디카스트로에 세웠던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그 곳에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아무 두려움 없이 기다리는 동안 작은 기도소가 딸린 방을 따로 만들고서


거기에 들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자 했다.



은수처가 만들어져 그 곳에 들어가 은거하려 할 때, 그는 점점 심해지는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움 당하기 시작하고 병으로 인한 것보다는 연로한 탓으로 기력이 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모든 기력을 잃고 고통이 더욱 심해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 함께 있던 두 형제를 보고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으라고 말한 후


새벽에 아침기도를 바치려 갈 때 다시 들리도록 했다.


형제들은 마지 못해 나가기는 나갔지만 성인의 병세가 걱정이 되어 잠자리로 들지 않고


그들의 스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까 염려하여 몰래 방 가까이에서 지켜 보았다.



얼마동안 거기에 숨어 있은 후 문에다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으나


몸이 움직이는 소리도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성인께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문을 열어 젖히고 급히 뛰어들어갔다.


불을 켰을 때 이미 그의 복된 영혼은 천상으로 이끌려 올라간 채 누워 있는 거룩한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 진주는 이제 위대한 임금님의 궁전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채우고 있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12.Christus Factus Est Pro Nobis-베네딕도수도원
















San Romualdo Abate
19 giugno - Memoria Facoltativa
Ravenna, ca. 952 - Val di Castro (Marche), 19 giugno 1027


Nobile, divenne eremita e dopo l'esperienza in Spagna, nei pressi di monastero sotto l'influenza di Cluny, iniziò una serie di peregrinazioni lungo l' Appennino con lo scopo di riformare monasteri ed eremi sul modello degli antichi cenobi dell'Oriente. La sua fama e il suo carisma lo misero più volte in contatto con i potenti, principi e prelati. Convertì Ottone III che lo nominò abate di S. Apollinare in Classe, carica che Romualdo rifiutò clamorosamente dopo un anno rifugiandosi a Montecassino dove portò il suo rigore ascetico. Riprese le sue peregrinazioni fondando numerosi eremi, l'ultimo dei quali fu Camaldoli. Questo nome deriva dal campo che un tale Maldolo aveva donato a Romualdo, in cerca di solitudine.


Etimologia:Romualdo = che regna glorioso, dal tedesco
Emblema:Bastone pastorale, Scala


E' presente nel Martirologio Romano. San Romualdo, anacoreta e padre dei monaci Camaldolesi, che, originario di Ravenna, desideroso di abbracciare la vita e la disciplina eremitica, girò l’Italia per molti anni, costruendo piccoli monasteri e promovendo ovunque assiduamente tra i monaci la vita evangelica, finché nel monastero di Val di Castro nelle Marche mise felicemente fine alle sue fatiche.


Un mattino del settembre 978 corre a Venezia l’allarme: "E’ sparito il Doge!". Ed è vero: Pietro Orseolo I, da due anni in carica, è fuggito nella notte, diretto a un lontano monastero dei Pirenei. Ha pochi accompagnatori, tra cui il giovane monaco Romualdo, figlio del duca Sergio di Ravenna. Perché? L’Orseolo è diventato Doge dopo l’assassinio del predecessore, Pietro Candiano IV. Non è chiaro se abbia a che fare col delitto, ma l’imperatore Ottone II minaccia vendette. E allora lui, "sacrificando sé stesso, evitava al popolo pericoli, lotte intestine, attacchi esterni" (A. Zorzi, La Repubblica del leone). Nel monastero pirenaico Romualdo aiuta e assiste l’ex Doge, che muore nel 987-88 da semplice monaco (e la Chiesa lo venera come santo dal 1731).
Romualdo torna poi a Ravenna, ma non si ferma in quello che fu il suo primo monastero, Sant’Apollinare in Classe. Anzi, in verità non si ferma da nessuna parte. Diventato monaco (insieme a suo padre) dopo uno scontro sanguinoso in cui era coinvolto il suo casato, s’impone una vita severa di penitenza, preghiera e meditazione. Ma spesso lo chiamano a incombenze ecclesiastiche e politiche, per le sue relazioni con le grandi famiglie del tempo. Lui accetta per dovere, ma con l’ansia di tornare via al più presto: la sua vera casa sono gli isolotti del delta padano, le alture degli Appennini e, per qualche tempo, le coste istriane: luoghi meravigliosi per la sua solitudine, che però non dura. Arriva sempre gente che cerca Romualdo, che ha bisogno di Romualdo. Certi monaci vogliono crearsi un cenobio? E lui li aiuta, poi si ripete con altri, e infine passa la vita a fondarne da ogni parte. Sempre piccoli, però: non sopporta monasteri grossi e monaci all’ingrosso, e ha scontri continui con personaggi scadenti, o peggio: un abate, che si è comprato la carica, tenta pure di strangolarlo.
Sempre esigente e sempre con progetti: come quello, irrealizzato, di guidare spedizioni missionarie in Nord Europa. Nel 1012 scopre la meraviglia dell’Appennino casentinese (Arezzo) e vi fa sorgere, a 1098 metri, un piccolo eremo. Trecento metri più sotto edifica poi un monastero. E così nasce Camaldoli, centro di preghiera e di cultura ancora nel XX secolo. Costruire, avviare una convivenza, insegnare (ma alla predica preferisce il colloquio). Partenze e arrivi ritmano la vita di Romualdo, che si conclude in un altro monastero fondato da lui: quello marchigiano di Val di Castro. Qui egli muore da eremita qualsiasi, in una piccola cella. Ma “viaggerà” ancora: nel 1480, infatti, due monaci di Sant’Apollinare in Classe porteranno di nascosto le sue spoglie a Jesi. Ma già l’anno dopo verranno riportate, e per sempre, nella chiesa camaldolese di San Biagio a Fabriano. La Chiesa lo venera come santo dal 1595, per decisione di Clemente VIII.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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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1-Feb-2001





Romuald

Memorial
19 June; prior to 1969 his feast was held on 7 Feburary, the date of the translation of his relics in 1481
Profile
Italian nobility who spent a wild youth. Acting as second, he witnessed his father kill another man in a duel, and sought to atone for the crime by becoming a Benedictine monk at Classe, Italy. Abbot from 996 to 999. A wanderer, he established several hermitage and monasteries in central and northern Italy. He tried to evangalize the Slavs, but met with little success. Founded the Camaldolese Benedictines. Spent the last fourteen years of his life in seclusion at Mount Sitria, Bifolco, and Val di Castro. Spiritual teacher of Saint Wolfgang.
Born
c.951 at Ravenna, Italy
Died
19 June 1027 at Val-di-Castro, Italy of natural causes; body incorrupt; enshrined at Fabriano, Italy; relics translated on 7 Feburary 1481
Canonized
1582 by Pope Gregory XIII
Prayers
Prayer for the spirit of...
Representation
monk pointing at a ladder on which other monks are ascending to heaven, indicative his founding of his Order
Readings
Romuald lived in the vicinity of the city of Paranzo for three years. In the first year he built a monastery and appointed an abbot with monks. For the next two years he remained there in seclusion.


Wherever the holy man might arrange to live, he would follow the same pattern. First he would build an oratory with an altar in a cell; then he would shut himself in and forbid access.


Finally, after he had lived in many places, perceiving that his end was near, he returned to the monastery he had built in the valley of Castro. While he awaited with certainty his approaching death, he ordered a cell to be constructed there with an oratory in which he might isolate himself and preserve silence until death.


Accordingly, the hermitage was built, since he had made up his mind that he would die there. His body began to grow more and more oppressed by afflictions and was already failing. One day he began to feel the loss of his physical strength under all the harassment of increasingly violent afflictions. As the sun was beginning to set, he instructed two monks who were standing by to go out and close the door of the cell behind them; they were to come back to him at daybreak to celebrate matins. They were so concerned about his end that they went out reluctantly and did not rest immediately. On the contrary, since they were worried that their master night die, they lay hidden near the cell and watched this precious treasure. For some time they continued to listen attentively until they heard neither movement nor sound. Rightly guessing what had happened, they pushed open the door, rushed in quickly, lit a candle and found the holy man lying on his back, his blessed soul snatched up into heaven.


from a biography of Saint Romuald by Saint Peter Dam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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