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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사랑의 기도


             - 성 요한마리아비안네(1786-1859)사제 


 


저의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오로지 하느님만 사랑하기를 바라나이다.


 


한없이 좋으신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느니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더 바라나이다.


 


저의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고자


오직 천국만을 그리나이다.


 


저의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따스한 위로가 없기에


저는 지옥이 두렵나이다.


 


저의 하느님,


순간순간마다 제 혀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제 마음이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기를 바라나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고통 받고,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어느 날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는 은총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느끼며 죽는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제 인생 막바지에 다가갈수록


하느님을 향한 제 사랑을 더하고 채워 주소서.





  


 


요한 비안네 신부님의 말씀 (성시간 묵상)


 


1.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마음을 열며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한 없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2. 기도는 향기로운 장미꽃입니다마는


그 향기를 맡으려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3. 사랑의 불로 타버린 십자가는 가시나무처럼 불에 던지면


타서 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가시는 딱딱하지만 재는 부드럽습니다.


고통을 이겨내기는 힘이 들겠지만


이겨내기만 하면 벅찬 환희를 느낄 것입니다.


 


4.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사제의 해: 성 요한마리아비안네 선종 150주년을 맞아 베네딕도 16세교황께서 2009년6월19일 예수성심대축일부터 2010년 예수성심대축일까지 사제의 해를 선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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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Saint John Mary Vianney

St. Joannes Maria Vianney


San Giovanni Maria Vianney Sacerdote
 


St. Jean-Baptiste-Marie Vianney


St. John Baptist Vianney (Curé d'Ars), Priest (RM)


Saint John Baptist Mary Vianney

Dardilly (Lione, Francia), 8 maggio 1786

- Ars-sur-Formans (Ain, Francia), 4 agosto 1859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God is gracious)

Canonized :1925. Pope Pius XI, Third Order Franciscan,  본당 사제의 수호 성인


 


프랑스 리옹 근교에서 태어난 성 요한 비안네(1786-1859년)는


큰 어려움을 극복한 뒤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벨레 교구의 아르스 본당을 맡으면서


열심한 설교와 고행과 기도와 선행등 놀라운 방법으로 본당을 쇄신하고 발전시켰으며


프란치스코 3회원으로서 뚜렷한 명예를 심어 주었다.


그는 고해성사와 영적지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의 영적 권고를 경건히 듣곤 하였다.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에서


 *영국 산업혁명:1760~1830년, 프랑스 대혁명:1789년(1787~99년)








프랑스 혁명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리용 교외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비안네 성인(1786-1859년)은


정상적인 초등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으며,

바리에르의 소신학교에서 철학을(1811년),리용의 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1813년),


라틴어 때문에 퇴학당하였습니다.(1814년)

그러나 18세 부터 시작되었던 에퀼리의 신부 아베 발레의 지속적인 개인교수와 특별 시험 주선으로


1815년 그레노블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제직을 수여받지 못할 정도로 신학교 성적이 부진하여 장래를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어떤 자격보다도 훌륭한 신심과 좋은 의지를 참작한 교회가 그를 사제로 서품함으로써


한 성인의 탄생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3년동안 아베 발레 신부의 보좌신부로 있은뒤,


1818년 주민 230명의 한적한 시골인 벨레 교구 아르스의 주임사제로 부임하여

여기서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이나 일하며 열심한 설교와 고행과 기도와 선행 등 놀라운 방법으로


본당을 쇄신하고 발전 시켰다.

단순한 설교와 충실한 고해신부로 이름이 퍼져나가,


마침내 조용한 시골을 프랑스 전역으로부터 연 2만여명에 이르는 고해자들이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만여 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고해성사와 영적 지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의 설교를 경건히 듣곤 하였다.



그는 하루에 열 여덟 시간이나 고백소에서 지냈고


그의 설교는 단순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었다.

영적 권고와 충고에 있어서는 간단 명료하였고, 신심이 흘러 넘치는 직설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그는 과로로 운명하였다.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오해하여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인 허풍쟁이"라고 힐난했으나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 모든 사제들이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옹호하였다고 한다.

성인은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 모두가 수도원을 잠깐씩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1929년 교황 비오 11세께서 그를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이름의 뜻은 God is gracious(하느님은 자비롭다)이다.







당신은 자신이 참으로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느끼는가?


다른 세계나 다른 시간에 속한 존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아르스의 성자’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우리의 집은 천국에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호텔에 투숙한 여행객과도 같으며


길을 떠나자마자 항상 천상의 집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한 가지 증거는


우리의 정의와 공평에 대한 내적인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죽음과 고통이 없으며 정의가 다스리고 모든 것이 공평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가 어떻게 공평과 정의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영혼에는 천국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하나씩 들어 있다.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도 나침반의 바늘을 보고 뱃머리를 결정할 수 있듯이,


마음속에 간직한 나침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한다.

그 나침반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한 집을 향해 하고 있음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www.ofmconv.or.kr)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교리 지도에서

(Catechisme sur la priere: A.Monnin, Esprit du Cure d’Ars, Paris 1899, pp.87-89)



기도와 사랑은 고귀한 과업이다.



자녀들이여, 그리스도인의 보화는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따라서 우리 생각을 우리 보화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사람의 고귀한 과업이요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은 이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순수하고 또 하느님과 일치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위안을 받고 감미로움으로 충만해지며 놀라운 빛으로 눈부시게 됩니다.

이 긴밀한 유대 안에서 하느님과 영혼은


녹아 합치된 두 자루의 초와 같아 아무도 그것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미소한 피조물과 하느님의 이 결합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행복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기도 드릴 자격을 잃은 자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당신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기도는 하느님이 지극히 기뻐하시는 향기 입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마음은 작지만 기도는 그마음을 넓혀 주어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 줍니다.

기도는 천상을 미리 맛보게 해주고 천상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흘러내리게 해줍니다.


감미로움을 남겨 주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기도는 마치 영혼에 흘러내리는 꿀과 같아 모든 것을 달게 해줍니다.


잘 바치는 기도에서 고통은 마치 햇빛을 받는 눈처럼 녹아 버리고 맙니다.



기도는 또 한 가지 특성을 지닙니다.


기도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고


너무도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줍니다.

내 얘기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브레스의 본당 사제로 있을 때


한번은 동료 사제들 대부분이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긴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행 중 자비로운 하느님께 계속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그때 나에게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하느님께 온전히 헌시하여 물 속에 있는 고기처럼 기도 속에 완전히 파묻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헷갈림이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그런 거룩한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콜레트는


우리 주님을 뵙고 사람끼리 서로 이야기하듯 그분과 대화했습니다.



 


또는 무엇을 청하고자 하는지 생각지도 않고 성당에 나오는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방문하러 갈 때 무엇 때문에 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비로운 하느님께 흡사 이렇게 말하려는 듯합니다.

"내가 당신께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한두 마디뿐입니다. 빨리 좀 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즉 우리 주님을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가 산 신앙과 완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청한다면


청하는 것을 모두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676번.1403번.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성녀 콜레타 축일:2월7일,게시판938번.160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요한 비안네는 이상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학 공부를 잘 해낼 수가 없었다.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결국 라틴어 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신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개인 교수를 찾았다.

책과의 오랜 투쟁 끝에 요한은 마침내 사제가 되었다.


불가능한 행위를 필요로 하는 상황들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요한이 주임 신부로 있던 아르스 본당에는 편안한 생활에 젖어 신앙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이상은 "일부 악마들은 오로지 기도와 단식으로만 쫓아 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격한 단식과 짧은 수면을 통해 자신을 이끌어 갔다.

그는 카타리나 랏사뉴와 베네딕타 라르데트와 함께 소녀들을 위해 섭리의 집을 설립했다.

그들은 이 섭리의 집을 만드는 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느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요한 비안네의 뛰어난 점은 고해 신부로서의 업적이다.


겨울에도 그는 하루에 11,12시간 동안 성사를 주었고, 여름철에는 하루에 16시간씩이나 고해 성사를 주었다.

만일 그가 사제의 사명에 헌신적이 아니었다면


매일매일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그런 일은 결코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곧잘, 하고 싶었으나 할 시간이 없어 하지 못한 일들을 하기 위해 은퇴를 기대한다.

그러나 요한 비안네는 신부는 은퇴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신자들에게 봉사하는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

그는 수면 시간을 짧게 가졌고 자주 마귀의 방해를 받았다.


이상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가 항상 넘치는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물질적 안락에는 강한 애착을 가지면서도 종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다.

만일 외계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관찰한다면,


그는 우리가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라고는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비안네는 항상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한 사람이었다.



요한 비안네 신부는 전례적인 기도를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적인 기도는 여기저기 흩어진 밀짚과도 같다.


만일 당신이 그것에 불을 붙인다면 조그마한 불꽃이 일어날 것이지만

밀짚을 다발로 모아서 불을 붙인다면 하늘로 치솟는 기둥 같은 큰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공동 기도는 이와 같은 것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은 성인들 사이에서 기적을 행하신다"하신 말씀은 모든 성인 성녀를 일컬은 말이지만,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에게는 특히 적중되는 말씀이다.



그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의 리용 근교인 다르딜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재산은 별로 없었으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부부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 특히 어려운 길손을 받아들이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런 손님 중에는 성 베네딕토 라브르도 끼어있었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훌륭한 부모를 모신 넷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다른 독실한 신자와 마찬가지로 심히 근심했으며


특히 신부가 없어 미사참여와 영성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함을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비안네는 열 한살이 되어 첫 고해를 하고 그 2년후에 첫영성체를 했다.


그는 일찍부터 신부가 되고자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 학비를 조달할 길이 없음을 알고


부모에게 그런 뜻을 전하지도 못하고 매일 매일의 양을 치며 농가의 자녀로서 할 일을 다하며 지냈다.



그는 어떠한 일이든지 다 잘했다. 그러나 신부가 되고가 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날로 더 커갔다.

그래서 그는 17세 되는 때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그 뜻을 표명했다.


물론 부모들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공부를 하기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넉넉하지 않아,


그로부터 2년간을 더 집안 이을 돌보는데 소일했다.

그러자 하느님의 안배로 에쿨리 마을의 바레이 신부가 그 자신이 가난한 시골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부 시켜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비안네가 그 신부 밑으로 가게 된 것은 1805년이었다.







바레이 신부는 손수 비안네에게 필요한 학문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성인처럼 열심한 신부가 가장 정신을 차려 가르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속죄로서 고행을 하는 것이었다.

요한이 침식을 가리지않고 공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후 베리오르 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거기서도 역시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이해력은 있으나 기억력은 매우 부족했다. 교사들은 그의 성적이 불량하므로 그를 퇴학시키기로 했지만


그의 두터운 신앙심과 품행의 단정함은 전 학우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재학하도록 한 것이다. 그 후 요한은 불요 불굴의 정신으로 공부를 해


겨우 신학부에 진급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소망인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신부가 된 그는 그의 은사인 바레이 신부의 보좌가 되었다.


바레이 신부는 이미 연로해 때때로 병석에 눕게 되었으나 여전히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은사와 더불어 무엇이든지 하고, 은사에게 무엇이든지 배우려 했으며,


은사는 제자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두성인의 공동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으니,


즉 그가 부임한 지 2, 3개월이 되자마자 은사 바레이 신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이다.

그 후 비안네 신부는 아르스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아르스는 작은 마을인데, 주민들은 다 신자이지만 대개가 냉담하여 판공성사도 보지 않는 형편이었으며,

주일이 되어도 성당에 나오지 않고 예사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며 세상 쾌락만을 찾는 것이었다.

이 젊은 신부는 이러한 본당 형편에도 조금도 낙심치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했다.

얼마 안되어 그의 친절, 그의 자애심, 그의 훌륭한 행실은 자연히 모든 사람의 마음에 큰 감명을 주게 되었다.


그의 덕에 경탄하게 되고 이어 그의 훈계를 명심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처럼 냉담하던 자들이 차차 신앙심이 깊어져 성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기 위해 비안네 신부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얼마나 많은 고행을 하며 초인간적 활동을 했을까?

그의 존엄한 속죄 생활은 증인이 없으면 믿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끊임없이 단식재를 지키며 감자만으로 식사를 했다.

딱딱한 침대에 담요 한벌, 그 나머지는 성당의 장식을 하든가 빈민에게 희사하던가 했다.

그러한 성스러운 신부의 활동은 곧 근방에 알려지게 되고 나중에는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성사를 보기 위해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모여왔다.


그들 중에는 신앙에 대해 실망한 자, 마음의 고민으로 위로가 필요한 자,

오랫동안 성사를 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로 대죄중에 있는 자들도 무수했지만,


성인 신부를 만나고 난 후부터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빛으로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은혜를 받았다.

사람들이 어려워서 말을 못하는 것까지 들여다보며


그는 매일 장시간 동안 고해성사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날은 15시간, 17시간씩 고해 성사를 주는 일도 있었으며


그에게 성사를 보는 사람은 1년에 평균 2만명에 달했다.

그 지방의 기후는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추웠다.

이러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비안네 신부에게 성사를 보고자 하는 신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은 2,3일 동안 줄을 지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면서도 그의 엄한 고신 극기의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수년 동안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려는 악마의 유혹을 당했다.


그 외의 다른 시련도 닥쳐왔다. 즉 그를 허무맹랑하게 악평하는 투서를 몇 통 받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상시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를 조금도 변치 않았다.


그는 매일 솔직하고 유효한 설교를 하며 충실히 자기 의무를 이행했다.

그러한 생활과 활동은 정말로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자 불신한 자들도 많이 회개했고 그를 조소하던 자들도


그의 성덕에 감동되어 신덕을 굳게 했다.







요한 비안네는 이렇게 부단한 고행과 활동의 생활을 보내기를 41년간,


1859년 7월 29일엔 열 일곱 시간이나 고해 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자

"나는 이제 그만이다!"하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건강은 다시는 회복될 수가 없었다.

그는 5일 후에 임종했는데,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노자성체를 영하고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교가 왔을 때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2, 3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과로로 운명한 것이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그를 복자위에,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본당 사제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했다











♬03. Maranatha! Alleluia! 마라나타 알렐루야 - taize


 


update 2006.8.4.


 


 


(*2003년8월4일. 게시판1302번에 올린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자료가 안보여서 다시 올렸습니다.*)






 


 


 


 


 


 


 


 


"Curé of Ars": Saint John Mary Vianney

St. John Mary Vianney was born in 1786 at Dardilly, some eight miles north-west of Lyons in France. It was two years before the first white settlers arrived in Australia in 1788 and three years before the horrors and persecution of the French Revolution in 1789.


He had great difficulties in studying for the Priesthood but was ordained in 1815 and became the Parish Priest of Ars three years later.


The people soon noticed that he prayed with great recollection and celebrated Mass with deep devotion. They noticed too, his mortified way of life, his love for the poor and the sick, his mild words to everyone. Very soon he had won the hearts of all. A man who ran a dubious business that was the occasion of sin for many answered his humble objection by saying, "But a person must live," St. John Mary replied with much concern, "True, but one must also die."


By means of frequent instructions, he taught his parishioners about the faith and how to live it virtuously. He also spoke about vice and its tragic consequences.


Known popularly as the "Curé of Ars" (Parish Priest of the town of Ars) he became famous as a confessor with up to 20,000 people annually flocking from all over France to attend his Mass and be reconciled to God by his ministry. He spent 16 to 18 hours each day in the confessional.


He tried a number of times to leave all this and live a simple, quiet, contemplative life, but his bishop and the people would not agree to it and he remained in his parish.


 


Nevertheless, a quieter and more contemplative life continued to call him. He spoke of it to Pere Leonard, a venerable Capuchin of the Convent of Les Broteaux, of Lyons. He expressed a desire to join the Capuchin Order, but the discerning Capuchin friar told him that he would do more good remaining in his parish. The Curé persisted, and Pere Leonard told him about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and gave him the rule to read. Shortly after this he joined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The incident, which took place in 1848, was enough to cause concern in the village. A rumour went around that he was going to become a Capuchin.


 


However, although the Curé of Ars became a Secular Franciscan (as they are called today) he remained in his parish and continued to work a twenty-hour day in which he passed the greater part in hearing confessions. He rose about one in the morning and walked the thirty metres from his presbytery to the church. There he rang the angelus bell, thereby announcing to all that he was ready to hear confession. He did this until he celebrated Mass at seven; after his thanksgiving he returned to the confessional, and spent the greater part of the day there. He emerged at eleven to give instruction in the faith to the people in the church and then went for his dinner which took about a quarter of an hour. After a visit to people who were sick he went back to the confessional. He came out again in the evening for night prayers. Then he retired to the presbytery and shut himself up in his room for about three hours. Perhaps living such a life style was the great miracle of Ars.


 


The Curé of Ars lived like that until he was 73 years old, then completely worn out, by his austere life and work, he collapsed on the 31st May and died peacefully on August 4th 1859. His feast is celebrated on tha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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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John Mary Vianney as a member of the Secular Franciscan Order had a great appreciation of St. Francis of Assisi and St. Collette, a reformer of the Poor Clares. This is evident in the instruction on prayer, which f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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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struction on Prayer

by St. John Mary Vianney. (From the Office of Readings for the feast)


Consider, children, a Christian's treasure is not on earth, it is in heaven.


Well then, our thoughts should turn to where our treasure is.


Man has a noble task: that o prayer and love. To pray and to love, that is the happiness of man on earth.


Prayer is nothing else than union with God. When the heart is pure and united with God it is consoled and filled with sweetness; it is dazzled by a marvellous light.


In this intimate union, God and the soul are like two pieces of wax moulded into one; they cannot any more be separated. It is a very wonderful thing, this union of God with his insignificant creature; happiness passing all understanding.


We had deserved to be left incapable of praying; but God in his goodness has permitted us to speak to him. Our prayer is an incense that is delightful to God.


My children, your hearts are small, but prayer enlarges them and renders them capable of loving God.


Prayer is a foretaste of heaven, an overflowing of heaven. It never leaves us without sweetness; it is like honey, it descends into the soul and sweetens everything.


In a prayer well made, troubles vanish like snow under the rays of the sun.


Prayer makes time seem to pass quickly, and so pleasantly that one fails to notice how long it is.


When I was parish priest of Bresse, once, almost all my colleagues were ill, and as I made the long journeys I used to pray to God, and, I assure you, the time did not seem long to me.


There are those who lose themselves in prayer, like fish in water, because they are absorbed in God. There is no division in their hearts. How I love those noble souls.


Saint Francis of Assisi and Saint Collette saw Our Lord and spoke to him as we speak to one another.


As for ourselves, how often do we come to church with out thinking what we are doing or for what we are going to ask.


And yet, when we go to call on someone, we have no difficulty in remembering why it was we came. Some appear as if they were about to say to God: "I am just going to say a couple of words, so I can get away quickly."


I often think that when we come to adore our Lord we should get all we ask if we asked for it with a lively faith and a pure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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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John Mary Vianney recommended liturgical prayer to his people by saying:


"Private prayer is like straw scattered here and there: If you set it on fire it makes a lot of little flames. But gather these straws into a bundle and light them, and you get a mighty fire, rising like a column into the sky; public prayer is like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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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Almighty and merciful God, by your grace Saint John Mary Vianney was remarkable for his zeal as priest and pastor. Help us by his example and prayers to win our brethren for Christ by love, so as to share with them eternal glor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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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An Instruction on Prayer is found in the Breviary for the feast of St. John Mary Vianney, 4th August, Office of Readings, 2nd Reading.


Written by John Cooper OFM Cap. for the Capuchin Communication Centre, Leichhardt, Sydney


 


 


San Giovanni Maria Vianney Sacerdote

4 agosto - Memoria 

Dardilly (Lione, Francia), 8 maggio 1786 - Ars-sur-Formans (Ain, Francia), 4 agosto 1859


Giovanni Maria Vianney nacque l'8 maggio 1786 a Dardilly, Lione, in Francia. Di famiglia contadina e privo della prima formazione, riuscì, nell'agosto 1815, ad essere ordinato sacerdote. Per farlo sacerdote, ci volle tutta la tenacia dell'abbé Charles Balley, parroco di Ecully, presso Lione: lo avviò al seminario, lo riaccolse quando venne sospeso dagli studi. Giovanni Maria Vianney, appena prete, tornò a Ecully come vicario dell'abbé Balley. Alla morte di Balley, fu mandato ad Ars-en-Dombes, un borgo con meno di trecento abitanti. Giovanni Maria Vianney, noto come il curato d'Ars, si dedicò all'evangelizzazione, attraverso l'esempio della sua bontà e carità. Ma fu sempre tormentato dal pensiero di non essere degno del suo compito. Trascorreva le giornate dedicandosi a celebrare la Messa e a confessare, senza risparmiarsi. Morì nel 1859. Papa Pio XI lo proclamerà santo nel 1925. Verrà indicato modello e patrono del clero parrocchiale. (Avvenire)


Etimologia: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Contro la sua volontà di farsi prete sembra congiurare l’universo intero: la famiglia povera, il padre ostile, la Rivoluzione che scristianizza la Francia; poi Napoleone lo chiama soldato e lui diserta per non dover servire l’uomo che ha imprigionato papa Pio VII (lo salva il fratello François, arruolandosi al posto suo). Diventa infine prete a 29 anni nell’agosto 1815, mentre gli inglesi portano Napoleone prigioniero a Sant’Elena.

Ma i suoi studi sono stati un disastro, e non solo per la Rivoluzione: è lui che non ce la fa col latino, non sa argomentare né predicare... Per farlo sacerdote c’è voluta la tenacia dell’abbé Charles Balley, parroco di Ecully, presso Lione: gli ha fatto scuola in canonica, l’ha avviato al seminario, lo ha riaccolto quando è stato sospeso dagli studi. Dopo un altro periodo di preparazione, l’ha poi fatto ordinare sacerdote a Grenoble.

E Giovanni Maria Vianney, appena prete, torna a Ecully come vicario dell’abbé Balley, che però muore nel 1817. Allora lo mandano vicino a Bourg-en-Bresse, ad Ars, un borgo con meno di trecento abitanti, che diventerà parrocchia soltanto nel 1821.

Poca gente, frastornata da 25 anni di sconquassi. E tra questa gente lui, con un suo rigorismo male accetto, con la sua impreparazione, tormentato dal sentirsi incapace. Aria di fallimento, angoscia, voglia di andarsene...

Ma dopo alcuni anni ad Ars viene gente da ogni parte. Quasi dei pellegrinaggi. Vengono per lui, conosciuto in altre parrocchie dove va ad aiutare o a supplire parroci, specie nelle confessioni. Le confessioni: ecco perché vengono. Questo curato deriso da altri preti, e anche denunciato al vescovo per le “stranezze” e i “disordini”, è costretto a stare in confessionale sempre più a lungo.

E ormai ascolta anche il professionista di città, il funzionario, la gente autorevole, chiamata ad Ars dai suoi straordinari talenti nell’orientare e confortare, attirata dalle ragioni che sa offrire alla speranza, dai mutamenti che il suo parlare tutto minuscolo sa innescare.

E qui potremmo parlare di successo, di rivincita del curato d’Ars, e di una sua trionfale realizzazione. Invece continua a credersi indegno e incapace, tenta due volte la fuga e poi deve tornare ad Ars, perché lo aspettano in chiesa, venuti anche da lontano.

Sempre la messa, sempre le confessioni, fino alla caldissima estate 1859, quando non può più andare nella chiesa piena di gente perché sta morendo. Paga il medico dicendogli di non venire più: ormai le cure sono inutili. Annunciata la sua morte, "treni e vetture private non bastano più", scrive un testimone. Dopo le esequie il suo corpo rimane ancora esposto in chiesa per dieci giorni e dieci notti. Papa Pio XI lo proclamerà santo nel 1925.

Autore: Domenico Agasso


 


 


 





JOHN MARY VIANNEY

Also known as

Cure of Ars; Jean Baptiste Marie Vianney; Jean Marie Baptiste Vianney; Jean-Baptiste Vianney; John Baptist Vianney; John Vianney

Memorial

4 August

Profile

Farm hand who in his youth taught other children their prayers and catechism. Ordained in 1815, though it took several years study as he had little education, was not a very good student, and his Latin was terrible. Assigned for a while to Ecully. In 1818 he was assigned to the parish of Ars, a tiny village near Lyons, which suffered from very lax attendance; he began visiting his parishioners, especially the sick and poor. Spent days in prayer, doing penance for his parishioners. Gifted with discernment of spirits, prophecy, hidden knowledge, and working miracles. Tormented by evil spirits, especially when he tried to get his 2-3 hours of sleep each night. Crowds came to hear him preach, and to make their reconciliation because of his reputation with penitents; by 1855 there were 20,000 pilgrims a year to Ars. Spent 40 years as the parish priest.

Born

1786 at Dardilly, Lyons, France

Died

4 August 1859 at Ars, France of natural causes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gift of God

Canonized

1925

Patronage

archdiocese of Dubuque Iowa; confessors; archdiocese of Kansas City Kansas; priests

Readings

All our religion is but a false religion, and all our virtues are mere illusions and we ourselves are only hypocrites in the sight of God, if we have not that universal charity for everyone - for the good, and for the bad, for the poor and for the rich, and for all those who do us harm as much as those who do us good.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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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people would do for God what they do for the world, what a greatnumber of Christians would go to Heaven.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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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either belong wholly to the world or wholly to God.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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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ell you that you have less to suffer in following the Cross than in serving the world and its pleasures.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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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annot please both God and the world at the same time, They are utterly opposed to each other in their thoughts, their desires, and their actions.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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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must always choose the most perfect. Two good works present themselves to be done, one in favour of a person we love, the other in favour of a person who has done us some harm. Well, we must give preference to the latter.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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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should consider those moments spent before the Blessed Sacrament as the happiest of our lives.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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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ttle children, reflect on these words: the Christian's treasure is not on earth but in heaven. Our thoughts, then, ought to be directed to where out treasure is. This is the glorious duty of man: to pray and to love. If you pray and love, that is where a man's happiness lies.


Prayer is nothing else but union with God. In this intimate union, God and the soul are fused together like two bits of wax that no one can every pull apart. This union of god with a tiny creature is a lovely thing. It is a happiness beyond understanding.


My little children, your hearts, are small, but prayer stretches them and makes them capable of loving God. Through prayer we receive a foretaste of heaven and something of paradise comes down upon us. Prayer never leaves us without sweetness. It is honey that flows into the souls and makes all things sweet. When we pray properly, sorrows disappear like snow before the sun.


Some men immerse themselves as deeply in prayer as fish in water, because they give themselves totally to God. O, how I love these noble souls!


How unlike them we are! How often we come to church with no idea of what to do or what to ask for. And yet, whenever we go to any human being, we know well enough why we go. And still worse, there are some who seem to speak to the good God like this: "I will only say a couple of things to you, and then I will be rid of you." I often think that when we come to adore the Lord, we would receive everything we ask for, if we would ask with living faith and with a pure heart.


from the catechetical instructions by Saint John Mary Via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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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is the inner bath of love into which the soul plunges itself.


Saint John Vianney


 


 


 




St. Jean-Baptiste-Marie Vianney

Curé of Ars, born at Dardilly, near Lyons, France, on 8 May, 1786; died at Ars, 4 August, 1859; son of Matthieu Vianney and Marie Beluze.


In 1806, the curé at Ecully, M. Balley, opened a school for ecclesiastical students, and Jean-Marie was sent to him. Though he was of average intelligence and his masters never seem to have doubted his vocation, his knowledge was extremely limited, being confined to a little arithmetic, history, and geography, and he found learning, especially the study of Latin, excessively difficult. One of his fellow-students, Matthias Loras, afterwards first Bishop of Dubuque, assisted him with his Latin lessons.


But now another obstacle presented itself. Young Vianney was drawn in the conscription, the war with Spain and the urgent need of recruits having caused Napoleon to withdraw the exemption enjoyed by the ecclesiastical students in the diocese of his uncle, Cardinal Fesch. Matthieu Vianney tried unsuccessfully to procure a substitute, so his son was obliged to go. His regiment soon received marching orders. The morning of departure, Jean-Baptiste went to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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