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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6월2일(6월1일)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 수도자


San Felice da Nicosia Religioso Cappuccino


Nicosia, 5 novembre 1715 - Nicosia, 31 maggio 1787


Beatified:papa Leone XIII, 12 febbraio 1888.
Canonized:Papa Benedetto XVI, 23 ottobre 2005
Felice = contento, dal latino






키프로스(Cyprus) 섬 니코시아에서 태어난 시칠리아(Sicilia) 사람인 그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었다.


20세 때 카푸친회의 입회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고행하며 지내다가,


그 후 7년 뒤에야 미스트레타 수도원에 들어가서 펠릭스란 이름을 받았다.





그는 주로 엄격한 고행과 탁발에서 큰 덕을 쌓았고, 이웃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였다.


또한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을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그에게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다.



60세가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간구하고 병자를 치료하였으며 노동을 계속하였다.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순종하면서 살다가 72세의 일기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188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성 펠릭스는 72년 동안 수련기 1년을 제외하곤 이태리 시실리에 있는


지리학 센터 부근의 Demone 계곡에 위치한 니코시아의 고향 마을에서 살았다.



1715년 11월 5일에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에게서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기에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나 가지 못하고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구두를 잘 만들어 호황을 누리고 있는 장인에게 어린 견습공으로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가 능숙한 구두 수선공이 되어 명성을 얻고 고객들을 확보함으로써


가족의 생계가 잘 보장되길 바랬다.



그의 가족은 매일 기도와 전례에 참석했다.


가족들은 고된 일과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가족을 위해 묵주기도를 했다.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일요일은 기념할 만한 특별한 날이었다.


가족들은 카푸친 작은 형제들에 의해 지도되는 Cappuccinelli로 알려진 성체회의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내적 고요에 머무는 것을 습득했고,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를 자주 반복하는 기도와 포기하고 수긍하는 태도를 계발시켰다.


성당의 저녁 종이 울릴 때, 그는 그의 동료들을 기도로 이끌곤 했다.


그가 그의 직업을 그만두었을 때 그가 쓰던 구두 수선 탁자는


“야고보가 일하던 장소”로서 존경받을 만큼 그는 높은 존경심을 받았다.


[다음에 계속]-카푸친카페에서



*카푸친작은형제회 성인들 Capuchin Franciscans: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축일:5월21일(19일),게시판1773번.1891번)
단순성과 기쁨.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1587년.축일:5월18일.게시판1770번.1166번)
만디츠의 성 레오폴드 사제(축일:5월12일,게시판1759번,1890번)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축일:5월11일.게시판1757번)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축일:4월24일.게시판1727번,1119번)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축일:4월21일.게시판1722번)
성 요셉 레오네사(축일:2월4일.게시판1601번)
꼬를레오네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자(축일:1월12일(19일),게시판1564번)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축일:10월30일.게시판1444번)
성 세라피노(축일:10월12일.게시판1417번,691번)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축일:9월20일(25일)게시판1384번)
오상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축일:9월23일.게시판1379번)
복자 오피다의 베르나르도(축일:8월26일(23일)게시판1334번)
복자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동료순교자(축일:8월7일.게시판1305번)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축일:7월21일.게시판1283번)


니코시아의 성펠릭스 수도자(축일:6월2일.게시판179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카푸친은 기도의 교사로서



플라비오 로베르또 형제(o.f.m.cap. 전 총봉사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고, 기도의 교사이기도 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기도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다"


(2 첼라노 95)고 이야기해준다.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가 그 기도 안에서 찾게 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현시를 봄으로써 그분의 영혼이 녹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상처들이 항상 그 눈앞에 있게되는


그 만큼 그리스도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그 정도로 긴밀하게 그 분의 마음에 되새겨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가 그 숨은 보물 , 그 값진 밝은 진주를 찾아냈다고 느끼게 되었다......."(대 전기 1.4)



프란치스코의 둘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하는 불은 기도의 결과인 그 불이었다:


그 불을 다른 사람들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 불은 그들을 이끌어


프란치스코를 기도의 선생님으로 삼아 그에게 찾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타인과 그 개인 경험을 나눌 수 있기 전에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발전하여 성숙해져야 했다.


고상 앞에서 바쳤던 그의 첫 기도에서 우리는 건전한 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이 초기 때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1 첼라노 115)



’주의 기도 풀이’에 이르렀을 때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에 대한 근심은 타인과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


모든 이를 당신은 사랑하도록 저희이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이끌어...


저희 몸과 같이 저희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그 기도의 사회적 일면은 더욱 더 깊게 된다.


맨 처음으로 서방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자연의 요소들은 "형제 자매" 라는 친밀한 용어로 묘사되는 존경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기도하도록 온 누리(우주)를 초대한다.


같은 주제는 1221년의 회칙 23장에 영향을 끼친다.


형제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그 기쁨은 그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와 그 첫째 형제들은 교회에 새롭고 놀라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즉 그들은 수도승원에서만 찾게 되었던 그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그 경험을 장터에 가져 나갔다.


프란치스칸 샘들에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은둔을 찾았다가 그 은둔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주었느냐는 여러 개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기도는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접근하는 것에 관하여 새 교훈을 세상 만민에게 가르쳐 주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남겨 준 가르침의 초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 완전히 점령되도록 우리는 은둔의 분위기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 제1회칙 7장, 인준 받은 회칙 5장과 8장,2 첼라노 96)


2. 기도는 사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종들은 기도나 어떤 올바른 일에 항상 종사해야 합니다"(제 1회칙 7장)


3. 정신적 기도와 관상은 길러질 일이다.(보나벤뚜라 대 전기 4장3절)


4. 형제들의 첫째로 가는 성소는 기도하는 것이다.


일과 학문은, 이들이 "거룩한 기도와 거룩한 신심의 영을 끄지 않을 그 만큼만"


(인준 받은 회칙5장, 안또니오 성인에게 보내신 편지) 허가 되어있다.


5. 기도는 인간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 또는 선물이다.(제 1 회칙 17장)


6. 깨끗한 마음과 단순한 의향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깊어질 조건이다.(인준 받은 회칙 5장,제1회칙 22장)



프란치스코는 이 교훈들을 형제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말로써 가르쳤다.


그러나 이 가르침들을 가장 많이 입증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기도 자체였다.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은둔에 집중한 바로 그것은 16세기의 카푸친 개혁의 회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것이었다.


첫 카푸친 형제들이 알바치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콰렐라라의 성지에서 1529년에 모였을 때에


그들은 기도와 관상과 관련되어 있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생애의 전면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은둔 생활 양식의 더욱 작은형제들의 회헌"은 공동체를 도전하며 정신적기도에 4시간을 지내게 하는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 성무일도는 노래와 장식없이 바쳐야 했고, 과도한 음성기도는 피해졌다.


형제들은 외딴곳에 살아야 했으며 개인기도와 신비적 관상은 개혁의 중심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포쏨브로네의 루도비꼬의 개인적인 인격과 가말돌리회의 은둔 수사들의 영향을 드러낸다.



로마에 있는 성 에우페미아 수도원에서 1645년 11월에 형제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관상과 봉사의 조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기도가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서 우선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가 형제들의 영적인 교사이므로 ,그리고 신심의 영이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미지근하고 미온적인 이들을 위해서는 적어도 2시간의 기도를 제정하는데


과연 참으로 영적인 형제들은 늘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1535년 회헌 41조)


알바치나 문서에서 보게 되는 4시간의 묵상을 의무적인 2시간으로 줄였으며


은둔-관상의 일면을 수도회의 사도적 부르심과 균형에 두려는 노력이 있었다.



관상은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이들로,


신적인 친밀감에 성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들이 될 능력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주의에 대한 조심은 언제까지나 카푸친회 은사의 특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음의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카푸친 전통의 일부로 재확인 될 것이다.



카푸친은 자기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교사가 될 줄을 배운다.


1536년의 문맥의 대부분은 아직도 우리 현 회헌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복되신 예수님 친히 그들로 하여금 그냥 말로만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이 실행으로,


사랑의 충만에서부터 말하게 자극시키실 수 있도록 설교자들은 그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그분께 평화로운 점유권을 드리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카푸친들이 반종교 개혁의 운동에 이바지한 초점은 영적 쇄신을 이루려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개인 기도와 관상의 교실에서 배웠던 그 교훈들을 말과 모범으로서 설교하고 가르쳐 주었다.



21세기의 카푸친들도 그 똑 같은 초점을 현대 세상에 전해 주기를 계속해서 소원하고 있다.


이것은 1973년에 떼제에서 확인 되었는데 거기서 제3차 수도회 전체 공의회는 다음의 구절들을 긍정했다.


"성령의 자극을 받아서 기도는 인간 마음의 지극한 필요를 표현하는 것이며,


사랑의 호흡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6조)


"형제들은 어디서나 신자들 가운데와 특히 우리 형제회들과 온 프란치스칸 가족에서 일하게 될


특별히 수련을 받은 기도 및 영성 생활 고무자들을 필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24)


1982/1990년의 회헌은 이 모든 점을 모으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기도 , 특히 내적인 기도의 영을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극진히 기릅시다"(56조 6항)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의 증인들로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에로 초대하여 평화와 참회를 전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닙시다"(46조 7항)


현대 세상은 카푸친이 품는 다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어짐에 준비된 상태로 있다:


즉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할 줄도 가르치려는 그런 소망 말이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




♬Brother Sun and Sister Moon






















San Felice da Nicosia Religioso Cappuccino


2 giugno

Nicosia, 5 novembre 1715 - Nicosia, 31 maggio 1787


San Felice Da Nicosia (al secolo Giacomo Amoroso), italiano, laic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1715-1787). Per oltre quarant'anni ha offerto il suo servizio di mendicante svolgendo un apostolato itinerante. Analfabeta, ha avuto la scienza della carità e dell'umiltà.




Giacomo Amoroso nacque a Nicosia nel 1715, il padre Filippo era calzolaio e la madre Carmela Pirro badava alla numerosa famiglia. Il padre decise di far lavorare il figlio nella calzoleria più importante del paese affinché si specializzasse in questo mestiere. Giacomo presto imparò il mestiere e nello stesso tempo si era avvicinato alla congregazione dei Cappuccinelli presso il convento di Nicosia. Era per tutto esempio in quanto la sua spiritualità la testimoniava in tutte le cose di ogni giorno. Nel 1733 decise di chiedere di entrare come fratello laico nell'ordine dei Cappuccini, ma non fu accolto, anche a causa delle condizioni economiche precarie della sua famiglia alla quale era fondamentale il suo apporto. Una volta morti i genitori nel 1743 riprovò a chiedere di essere ammesso tra i Cappuccini direttamente al provinciale che era in visita a Nicosia, e, finalmente, dieci anni dopo la sua prima richiesta venne ammesso al noviziato nel convento di Ristretta con il nome di fra Felice. L'anno seguente fece la professione e fu inviato nello stesso suo paese di origine dove per 43 anni esercitò il compito di questuante. Nel convento esercitò vari lavori, portinaio, ortolano, calzolaio e infermiere, fuori era il questuante non solo a Nicosia ma anche nei paesi vicini, Capizzi, Cerami, Mistretta e Gagliano.
Si definiva "u sciccareddu", l'asinello che carico portava quanto raccolto al convento.
Aveva una particolare predilezione per i bambini, dalle sue tasche tirava fuori una noce, delle nocciole o delle face le regalava ai fanciulli ed in base al numero di queste cose ricordava loro le piaghe di Gesù, la santissima Trinità, i dieci comandamenti, piccoli regali che però davano l'opportunità a fra Felice di fare una breve e semplice lezione di catechismo.
Se per strada incontrava poveri con carichi particolarmente pesanti dava loro una mano per aiutarli, aiutava gli ammalati e cercava di fare qualcosa per i più bisognosi. Tutte le domeniche era solito andare a trovare i carcerati.
Il superiore nonché padre spirituale spesso lo trattava duramente, lo umiliava appioppandogli nomignoli quali poltrone, ipocrita, gabbatore della gente, santo della Mecca, fra Felice rispondeva a ciò dicendo "sia per l'amor di Dio". Ancora il superiore spesso lo obbligò ad esibirsi nel refettorio del convento con abiti carnevaleschi, distribuendo una massa di cenere impastata come fosse ricotta fresca, che miracolosamente lo diventò veramente.
Fra Felice distribuiva delle striscioline di carta sulle quali erano scritte delle invocazioni alla Beata Vergine e le utilizzava come rimedio infallibile per tutti i mali, appendendole alle porte delle abitazioni dove vi erano sofferenti ammalati o poveri, contrastava il fuoco che aveva attaccato i covoni da trebbiare, oppure appendendole nelle cisterne prive di acqua. Spesso avvenivano grazie ed eventi miracolosi che non facevano altro che accrescere la fama di fra Felice.
Una volta alleggerito da tutti i servizi data l'avanzata età e la malferma salute si dedicò alla preghiera.
Verso la fine del mese di maggio 1787 mentre era nel suo orto si accasciò senza più forze e dopo alcuni giorni nel suo letto raccomandandosi a S. Francesco e alla Madonna chiese al superiore il l'obbedienza di morire. Morì il 31 maggio del 1787. Fu dichiarato Beato da papa Leone XIII il 12 febbraio 1888.
Papa Benedetto XVI, nella sua prima cerimonia di canonizzazione, lo ha proclamato santo il 23 ottobre 2005 in piazza San Pietro.


I poveri sono la persona di Gesù Cristo, e si devono rispettare. Riguardiamo nei poverelli e negli infermi lo stesso Dio, e soccorriamoli con tutto l'affetto del nostro cuore e secondo le proprie nostre forze. Consoliamo con dolci parole i poveri ammalati e prontamente rechiamo loro soccorso. Non cessiamo mai dal correggere i traviati con maniere prudenti e caritative.
(Beato Felice da Nicosia)



Autore: Carmelo Rand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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