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5월28일
빠레데스의 성녀 마리아 안나 동정
Santa Maria Anna di Gesù de Paredes
Quito, Equador, 1618 - ivi, 26 maggio 1645
OFS(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마리아 안나 (1618 - 1645)는 남미 에쿠아도르 키코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신앙을 위해 일본에 가서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자기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살아 있는 순교를 하기로 결심하였디.
재속 3 회 착복을 하고 가난·정결·순명의 세가지 수도 서원을 하였다.
그 후 은수자처럼 집에서 살며 전례에 참례하거나 이웃에 봉사하기 위해서만 집을 벗어났다.
그녀의 기도와 회개 생활에 대하여 하느님게서는 보상으로 많은 특별한 은총을 허락하셨다.
그녀의 전구로 환자들이 치유되기도 하였으며 그녀는 예언과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사를 받기도 하였다.
1950 년 비오 12 세가 시성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녀 마리아 안나 아 예수 데 파레데스(Maria Anna a Jesu de Paredes)는 당시 에콰도르의 수도였던 페루비안 마을에서 태어났고, 마리아 안나 데 파레데스 이 플로레스(Maria Anna de Paredes y Flores) 즉 ‘키토의 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에스파냐 귀족의 딸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뛰어나서 언니들과 더불어 로사리오와 십자가의 길의 기도 바치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12세 때에는 몇 명의 친구들과 어울려 일본인들을 개종시키려다가, 키토 교외 산에서 은수자로 살려는 생각이 떠올라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정치적인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 고해신부인 예수회원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당에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독수자처럼 생활하였다.
또 그녀는 관을 하나 마련한 뒤 매 금요일마다 그 속에서 지내며 죽음을 묵상하기도 하였다. 팔과 다리를 쇠사슬로 묶고 고행자가 입는 말총 속옷을 입었으며, 가시관과 쇠못관을 만들어 고행하였다. 음식은 극히 소량만 먹었고, 물은 그리스도의 갈증을 느낄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입을 축이는 정도였다. 이와 동시에 예언과 기적도 일어났다. 1645년 키토 지방에 지진과 더불어 전염병이 번졌다. 사순 제 4주일의 강론을 들은 그녀는 자신이 백성의 희생물이 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지진은 멈추었으나 그녀는 26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그녀는 1950년에 시성되었다. 그녀는 마리아나 데 파레데스(Mariana de Paredes)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
Il Crocefisso di San Damiano
프란치스코성인께서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회개하는 이들
1)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마태 22,39) 사랑하고,
2) 악습 및 죄악과 더불어 자신들의 육신을 미워하며,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4)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
5) 오, 그런 일을 실행하며 항구하는 남녀 모든 이들을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지!
6) 주님의 영이 그들 위에 내리고(이사 11,2), 주님이 그들을 거처와 집으로 삼으실 것이며(요한 14,23),
7) 그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들이요 형제들이요 어머니들이기 때문입니다.(참조: 마태 12,50).
8) 믿는 영혼이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정배들입니다.
9)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마태 12, 50)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에게 형제들이 됩니다.
10)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
11)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아버지를 하늘에서 모시는 것은, 오,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
12) 위로되시고 아름다우시고 감탄할 만하신 그러한 정배를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13) (아버지의 마음에)드시고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시고 달콤하시고 사랑할 만하시고
또한 무엇보다도 바랄 만한 그러한 형제와 그러한 아들을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일인지!
이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비치셨고(참조: 요한 10,15)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14)거룩하신 아버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나에게 맡겨 주신(요한 17,6) 이 사람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십시오.(요한 17,11).
15) 그리고 나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참으로 믿었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16)나는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요한 17,8-9).
17) 그들을 축복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요한 17,17). 그들을 위하여 나도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요한 17,19).
18)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도 간구합니다.(요한 17,20).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요한 17,11) 이들도 거룩해져 하나가 되게 하소서(참조 : 요한 17,23)
19) 그리고 아버지, 그들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시고(요한 17,24),
당신의 나라에서(마태 20,21)나의 사랑을 그들이 볼 수 있게 하소서(요한 17,24).아멘.
재속 프란치스코회란?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라는 명칭은 이전까지 ’프란치스코 3회’라고 불리우던 것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78年 새 회칙을 인가하시면서 붙여준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천년의 긴 역사를 살아오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수많은 영적 가족들을 탄생시켰고,
그 중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신 1, 2, 3회의 영적가족이 있으니
그 숫자가 오늘까지 8백년 동안 수천만에 이르렀고 현재의 가족수도 백만이 훨씬 넘는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가족들
1회는 프란치스코 남자 수도회를 말하고,
2회는 글라라회라고 불리우는 여자수도회(관상수녀회)이며,
3회에는 수도생활을 하는 정규3회,수도자인 수도 3회와 재속 신분으로 구성된 재속프란치스코회를 말하며,
(전국 51개의 형제회와 6,5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프란치스코 영적 가족의 공통된 특징은 말할것도 없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세 가족의 친교와 고유 역할
이 세가족은 활기에 찬 친교를 이루면서도 각기 다양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실천한 빛나는 영성들을 스스로 배우고 익혀,
교회가 더욱 주님의 거룩하심으로 충만되도록 돕는다.
"선교활동"을 펴서 이 세상을 하루 빨리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로 돌아오는데에 그 공동목표를 두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전국, 국제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조직체이다.
"입회자격은, 50세 미만의 가톨릭 신자이면 되고, 영세한지 3년이상. 견진성사를 받은 자라야 합니다.
교황이 인가한 세계적 공동체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성 프란치스코 가족 중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온세계 모든 평신도와 재속 사제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교황이 인가한 회칙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국가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홈에서)
기원과 발전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사도적 여행을 한 1212년경,
기혼 남녀 평신도들이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의 복음적 생활에 매력을 느껴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려고 헌신하였던데서 비롯하였다.
당시에 귀족이나 천민이나 성직자나 평신도 등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이끌려 프란치스코에게 오기 시작하여 성인은 제3회를 생각했고,
그들에게 생활규범과 모든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복자 루케치오 와 보나돈나 부부가 첫회원으로 알려져있다.
3회 배출 성인
제3회가 배출한 성인은 성 루도비꼬, 성 토마스모어, 성 요한 비안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등 60여명이 되고,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바오로 6세까지 20여명의 교황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시성 단테, 예술가 미켈란젤로, 라파엘, 탐험가 콜럼버스,
레지오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 빈첸시오와 바울로회 창설자 프레데릭 오자남 등
각계 각층에서 3회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교회를 빛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홈에서)
*복자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3회 첫회원)축일:4월28일.인창동성당게시판1737번.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축일(예수회창립자):7월31일.게시판1295번.
*성왕 루도비코 9세(3회 주보성인)축일:8월25일.게시판1331번.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정치인들의 수호성인:축일:6월22일.게시판1237번.1832번.
*성 요한 비안네 사제(본당사제의수호성인)축일:8월4일.게시판1302번.1303번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3회 주보성녀)축일;11월17일.게시판1474번.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축일:9월4일.게시판1348번.1647번.
*복자 프레데릭 오자남(빈첸시오와 바울로회 창설자)축일:9월8일.게시판1356번.
*레지오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Frank Duff):1921년9월7일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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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 역사
일본의 조선인 재속 3회원
한국의 첫 재속 프란치스칸은 1922년 미국 유학 중 재속 3회에 입회하여 서약한 장 면(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400여 년 전에 이미 조선인 재속 3회원이 있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다수는 노예 생활 중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다.
그 당시 일본에는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전교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프란치스꼬 재속 3회에 입회했던 것이다.
1597년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26명이 나가사끼에서 순교의 화관을 쓰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프란치스칸으로 성 베드로 밥티스타를 비롯하여 17명의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1627년에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862년 6월 8일에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또한, 1867년 7월 2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205위 중 두 명도 한국인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었다.
한 명은 파스칼 보스이고, 다른 한 명은 가이오리 에몬인데 모두 같은 날 순교했다.
따라서 한국의 3회의 역사에 있어 그 첫 자리는 일본에서 3회원이 된 순교자들이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재속프란치스코회홈에서)
San Paolo Miki e compagni Martiri
[일본의 순교자]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축일:2월6일(인창동성당게시판1605번)
일본에서 태어난 바오로 미키(1564,1565-1507년) 성인은 예수회에 들어간 다음,
복음을 널리 퍼뜨리는 데 큰일을 하였다.
박해 때 다른 동료 25명과 붙잡혔는데,
그 25명은 베드로 밥티스타와 5명의 프란치스코 제1회 회원들과 17명의 제 3회 회원을,
그리고 미키 신부와 일하던 2명의 교리교사였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
*동료순교자
*성 베드로 밥티스타 사제 순교자(1회)축일:2월6일.게시판1605번
*성 바오로 스즈끼 순교자(3회)
*성 레오 가라수마루 순교자(3회):한국인으로 첫번째 재속 프란치스코회원
*성 바오로 이바라끼 순교자(3회):성 레오 가라수마루의 동생
*성 루도비꼬 이바라끼(3회):성 레오 가라수마루의 조카
*복자 파스칼 보스(3회):한국인.
*복자 가이오리 에몬(3회):한국인.
♬4.LA PAIX OUI LA PAIX(Francais) 성요한 수도회
순명
호기심
담장에 나 있는 구멍을 보면 손가락을 넣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담장 저쪽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데 있다.
정말 운이 나쁘면 그쪽에 악어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다가 손가락을 꽉 물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17세기경 에콰도르의 키토에서 살았던 마리아나는 에콰도르의 영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조언이나 기도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밝고 친절하게 대했으나 자신은 엄격한 고행과 참회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남을 대할 때는 엄격하게 하면서도 자신의 실수나 잘못은 쉽게 이해하고 너그럽게 용서한다.
또 자신의 잘못은 금방 잊어버리면서도 남의 잘못은 오래도록 기억한다.
성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많은 교훈 중의 하나는 쓸데없는 호기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자신의 삶에 더 주의를 집중하라고 충고한다.
예를 들어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과 관계없는 일에 너무 호기심을 갖지 마십시오.
그것에 대해 절대로 발설하지도 말고 물어 보지도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담장 구멍으로 손가락을 넣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다.
공연히 손가락을 다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을 거두어들이자.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내 일에 충실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Santa Maria Anna di Gesu de Paredes
28 maggio
Quito, Equador, 1618 ? ivi, 26 maggio 1645
Patronato:Ecuador
Rimasta orfana dei genitori ancora fanciulla, si consacro a Dio; ma non potendo essere accolta in un monastero, inizio nella sua casa un particolare tipo di vita ascetica, dedicandosi all’orazione, al digiuno e ad altre pie pratiche.
Tento anche di recarsi tra gli Indios pagani per portare loro la fede. Accolta poi nel Terz’Ordine Francescano, si dedico con grande generosita all’assistenza dei poveri e all’aiuto spirituale ai suoi concittadini.
Fu proclamata Patrona dell’Ecuador; canonizzata da Pio XII nel 1950. E’ il primo fiore francescano sbocciata alla santita in America Latina.
Festa il 28 maggio.
Santa Maria Anna di Gesù de Paredes
26 maggio
Quito, Equador, 1618 – ivi, 26 maggio 1645
Rimasta orfana dei genitori ancora fanciulla, si consacrò a Dio; ma non potendo essere accolta in un monastero, iniziò nella sua casa un particolare tipo di vita ascetica, dedicandosi all’orazione, al digiuno e ad altre pie pratiche.
Tentò anche di recarsi tra gli Indios pagani per portare loro la fede. Accolta poi nel Terz’Ordine Francescano, si dedicò con grande generosità all’assistenza dei poveri e all’aiuto spirituale ai suoi concittadini.
Fu proclamata Patrona dell’Ecuador; canonizzata da Pio XII nel 1950. E' il primo fiore francescano sbocciata alla santità in America Latina.
Patronato:Ecuador
E' presente nel Martirologio Romano. A Quito in Ecuador, santa Marianna di Gesù de Paredes, vergine, che nel Terz’Ordine di San Francesco consacrò la propria vita a Cristo e dedicò le proprie forze ai bisogni degli indigeni poveri e dei neri.
S. Maria Anna di Gesù nacque a Quito (nell’odierno Ecuador, all’epoca dominio del Perù) il 31 ottobre 1618. Era una bella bambina sudamericana, ottava figlia del nobile di Toledo Capitano Don Girolamo Paredes y Flores. Venne educata cristianamente: il gesuita P. Juan Camacho rimase più volte meravigliato dall’intelligenza e dalla comprensione dei misteri divini della straordinaria fanciulla. Dormiva poco, costruiva in giardino altari emulando le cerimonie religiose e un giorno cercò di convincere alcuni coetanei ad andare in missione con lei a convertire i pagani. Raccomandava spesso ai familiari la recita del S. Rosario.
Marianna aveva pochi anni quando conobbe il dolore della perdita di entrambi i genitori e venne affidata agli zii che vivevano fuori città. Fece la Prima Comunione, eccezionalmente, all’età di otto anni e, a partire dai dodici, poté comunicarsi quotidianamente. Molti del villaggio erano invidiosi e le proteste arrivarono persino al vescovo con grande pena di Marianna. Per la sua educazione si pensò al convento di S. Caterina da Siena, ma ci furono alcuni impedimenti che lei vide come una contraria volontà divina a tale progetto. Decise che sarebbe rimasta in famiglia, consacrandosi al Signore per il bene dei suoi concittadini. Il confessore, Padre Monosalvas, convinse i parenti ad accettare tale decisione. Tornò a vivere in città, presso una sorella sposata che le mise a disposizione alcune stanze appartate della casa. Professò privatamente i voti di povertà, castità e obbedienza, indossando un abito scuro simile a quello dei gesuiti. La sua giornata trascorreva secondo uno schema stabilito dal confessore: cinque ore di preghiera, letture spirituali e lavori domestici (tipo la tessitura) il cui ricavato era destinato ai poveri che riceveva in casa quotidianamente. Questi erano da lei lavati, vestiti e all’occorrenza curati, con umiltà e senza ostentazione. Ai bimbi, soprattutto agli indios, insegnò a leggere, spesso la vita dei santi, a scrivere, cantare e suonare. Marianna suonava bene la chitarra e il piano. Lasciava la casa solo per partecipare alla Messa quotidiana. Rispettava lunghi digiuni durante i quali il suo unico nutrimento era l’Eucaristia. Secondo l’abitudine dei tempi usava inoltre alcuni strumenti di penitenza. Il Signore la ricompensò con doni mistici: leggeva i cuori, cadeva in estasi, faceva delle profezie. A ventuno anni, il 6 novembre 1639, fu accolta nel Terz’Ordine Francescano che ben si addiceva al suo spirito di rinuncia.
Marianna nutriva una particolare devozione per la Santissima Trinità, per lo Spirito Santo, per la Passione e Morte di Gesù e per la Madonna di Loreto. Amava molto pregare pensando alla S. Casa di Nazareth e all’Annunciazione di Nostro Signore. La sua era una preghiera interiore, secondo la spiritualità ignaziana.
Nel 1645 Quito fu colpita prima da un terremoto, che uccise circa duemila persone, poi da una terribile epidemia. Era la quarta Domenica di Quaresima quando nella Chiesa dei gesuiti Padre Alonso de Rojas, suo confessore, offrì pubblicamente la vita per la salvezza del paese. Marianna, che era seduta davanti al pulpito, alzandosi dichiarò che prendeva il suo posto, giudicando il ministero sacerdotale più importante. Da lì a poco si ammalò mentre le sciagure cessarono. Aveva donato, a soli ventisei anni, la vita per la sua tanto amata città. La notizia si diffuse in un baleno e lo stesso sacerdote la presentò come una eroina. Il suo olocausto di carità era d’esempio a tutta la nazione.
Il Giglio di Quito morì il 26 maggio, giovedì dell’Ascensione. Ai solenni funerali seguirono molti miracoli ottenuti per sua intercessione mentre, nella memoria della gente, era impressa la sua umiltà straordinaria e il suo grado altissimo di orazione. La giovane equadoregna venne beatificata nel 1853 da Papa Pio IX e canonizzata da Papa Pio XII il 9 giugno del 1950. E’patrona dell’Ecuador: il 30 novembre 1946, nel trecentesimo anniversario dalla morte, l’Assemblea Costituente la proclamò “Eroina Nazionale della Patria”.
Autore: Daniele Bologn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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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7-Sep-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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