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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 4월 30일
성 요셉 베네딕도 코톨렌고
St. Joseph Cottolengo


St. JOSEPH BENEDICT COTTOLENGO
San Giuseppe Benedetto Cottolengo Sacerdote
Born : 3 May 1786 at Bra, Piedmont region, Italy
Died : 30 April 1842 of typhus at Chieri, Italy
Beatified : 1917
Canonized : 1934 by Pope Pius XI
Name Meaning : whom the Lord adds (Joseph)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Third Order Franciscan





이탈리아 토리노(Torino)의 브라(Bra)에서 출생한 성 요셉 베네딕투스 코톨렌고(Josephus Benedictus Cottolengo)는 사제로 서품된 후 본당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토리노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의료시설이 없었다. 그는 본당내의 어느 부인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아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을 개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점점 확대되자 그는 자원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는데, 이것이 성 빈첸시오 수도회와 빈첸시오 수녀회의 모태가 되었다.



1831년 콜레라가 창궐하게 되었을 때 병원도 문을 닫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도시 외곽인 발도코로 자리를 옮겨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다. 병원은 연일 만원이었고, 그래서 조금씩 확장되었다. 이제 그는 노인, 농아, 맹인, 불구자, 정신 이상자 및 거리의 여성에게도 보호의 손길을 뻗쳤다. 그래서 그의 피콜라 카사(Piccola Casa)는 큰 병원 조직이 되었다.



그는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연민회, 착한 목자회, 로사리오의 은수자회 그리고 삼위일체의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장티푸스로 인하여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오랫동안 치료하였지만 이탈리아의 키에리(Chieri)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1934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성 요셉 베네딕도 고또렌고


(St. Joseph Benedict Cottolengo) 증거자, 사제.



토리노시에는 거의 일 백년 동안이나 명예로운 제단에 모셔진 성스런 3회 사제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 중의 한 분이 성 요셉 베네딕도 고또렌고이다. 이 성인은 적어도 19세기의 다른 어떤 사람보다 훌륭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를 다스리시며 삶의 수고로움을 거쳐 영원한 축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항상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며 간원하도록 이끌어준 도구가 되었다.


요셉 베네딕도는 1786년 5월 3일 브라라고 불리우는 피에몬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이 세상의 재화에 있어서는 가난하였으나, 거룩한 마음과 인격의 특성에 있어서는 부유하였다. 이 덕있는 부부에게서 12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요셉이 제일 맏이였다. 어렸을 때는 매우 약해서 어머니는 혹시 죽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 하였지만 그녀의 열렬한 기도와 충실한 보살핌은 결국 그를 건강하고 힘세게 만들었다. 그가 철이 들자, 어머니는 그의 마음을 성모님과 하느님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 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열심하며 매우 설교를 잘하고, 경건한 성 안드레아 성당의 본당 신부는, 가난하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예의 바르고 순수한 어린이에게 9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첫 영성체를 허락하였다.


학교에서 요셉은 그의 성적이 학급의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을 깨닫고 몹시 슬퍼하였다. 몇분의 신부님들은 위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기도해 보라고 충고해 주셨는데, 그 후로 성적이 뛰어 올라 학급의 우등생이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이 담긴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보답하고 싶어했다. 때때로 말하기를 "나는 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어!" 하였다.


거룩한 사제직을 준비하려고 했을 때, 여러가지 방해되는 것들이 있었어도 그는 많은 시험을 통과하는데 성공하였다. 1811년 6월 8일, 토리노의 무염시태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모든 사도적 의무에 열심히 전념하였고,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헌신하였지만 아직도 그의 마음은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어떤 특별한 일에 쓰시려고 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토리노에 있는 '코르푸스 크리스티' 대성당에 있는 성인전에 의하면 그는 성 빈첸시오 바오로의 생애를 읽고, 또 여러 곳에서 보이는 비참함을 목격하고서, 인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 일의 첫 단계로 치료실로 쓰일 몇 개의 방과 이 일에 관심을 갖는 몇명의 젊은 여성들을 구하여 본당의 빈곤한 환자들에게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


1832년 '섭리의 집'이 발도꼬에 세워졌다. 비오 9세는 이것을 '기적의 집'이라고 불렀는데 수입이나 전망에 상관 없이 자비로운 하느님의 섭리에 충실히 의존하였다. 성인이 계획한 다양한 자선사업 때문에 자선대학으로 불리워졌다.


1842년 그가 죽을 때에도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업은 여러 종류의 병원, 일터, 학교, 신학교, 은둔 수도원과 활동 수도원, 양로원을 갖추고 정신 박약아와 정신병자, 절름발이, 간질병자, 장님, 귀머거리와 벙어리,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람들 모두를 수요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완벽했다. 1917년 고또렌고의 시복식 당시 이 '자선의 도시'는 대략 8천의 인구를 헤아렸는데 이들은 이곳에 세무소를 세우려는 당국의 시도에 분연히 반해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긴 기념물을 최초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유지 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 프란치스꼬 3회에 입회한 요셉 베네딕도는 완벽한 가난의 정신으로 유명하였다. 자기 자신을 꾸준히 수양하는 한편 성체성사와 예수 성심에 대한 사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섭리를 최대한 신뢰했던 이 성인은 어떤 반대나 폭풍이나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프란치스꼬의 훌륭한 성격을 칭송하였다. 토리노시 당국이 사람들의 항의에 따라 진료소를 패쇄하라고 명령하자, 성인은 웃으면서 그 요구에 따라 병원을 시골로 옮기면서 "양배추는 옮겨 심어줘야 잘 자라는 법이지"라고 말하였다. 그는 방대한 모든 부대시설을 갖춘 그의 정착촌을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였다.


위대한 보상으로 불리움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 였다. 마지막 시간까지 열렬한 기도를 바치다가 1842년 4월 13일, 저녁에 사망하였다. 여러가지 신체적 질병과 정신질환의 치유를 포함해서 많은 기적이 그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그의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4년 3월 19일, 그를 가톨릭의 여러 성인들 중의 한 분으로 시성하였다.
(평화의 사도, 한국재속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에서)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 증거자, St. Joseph Benedictus Cottolengo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중 가장 중요한 활동은 사람들-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뒤를 따른 모든 성인도 특별히 가난한 이를 사랑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이들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다. 이탈리아의 성 빈첸시오와 또 19세기 박애(博愛)의 사도라고 불리는 1934년 3월 29일 시성된 요셉 베네딕토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1786년 5월 3일 북 이탈리아 토리노의 프라에 있는 코톨렌고 가문에서 태어났다. "될 듯한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격언대로 어려서부터 이미 마음이 착해 어려운 아이를 보기만 하면 즉시 자기에게 있는 빵이나 용돈까지도 다 주어 버리고 아무것도 없으면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동냥거리를 타내는 것이었다.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어린 요셉이 자꾸만 연장으로 방의 넓이를 재고 있어 하도 이상해서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으니까 요셉은 "다 큰 다음에는 이런 방에다 병자들을 많이 수용하고 싶어서요..."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9세때에 첫영성체를 하고 나서 그는 성직자가 되려고 결심하고 아스티시의 신학교에 들어가서 25세에 사제과 되고 더욱 연구를 계속해 토리노 시에서 신학 박사의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잠시 무보수로 성당 사목을 돕고 있었으나 마침 그때에 무서운 전염병이 유행해 이에 신음하는 자가 많아졌으므로 요셉 베네딕토는 어려운 이들을 도와 활동할 때라 생각하고 실량, 약품, 의복, 붕대 등을 가지고 병원이나 마을 내의 가정을 찾아다니면서 신음하는 환자를 간호도 해 주고 임종에 처한 이에게 성사도 주며 활발히 활동을 시작했다. 부모는 아들이 악한 병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해서 이를 금지시키려고 했으나, 요셉은 "전쟁에 나서지 않으면 병정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하며 끝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형제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성스러운 태도를 그에게 엿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명성은 토리노 시까지도 널리 전파되어 성체의 성당 소속의 사제로 선임되어 거기에서 강론도 하고, 고해 성사도 주고 성체도 영해 주었는데, 그 진실하고도 열심한 태도는 신자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늘 "주님의 뜻에 적합한 다른 선업은 없는가"하고 생각하던 때, 우연히 장상한테 받은 성 빈첸시오의 전기를 읽고 나서 자신의 갈 길을 발견한 듯이 기뻐하며 "그렇다. 성빈첸시오가 파리에서 빈민, 병자들을 위해 한 것이야말로 내가 토리노에서 해야 될 일이다"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가난한 부인에게 초대되어 성사를 주러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병자는 여행 도중 병에 걸려 토리노 시의 자선병원에 무료입원을 원했으나 허용되지 않고, 또 남편과 두 아이는 형편없이 누추한 초막에서 그날 그날을 간신히 보내는 것이었다. 이 불쌍한 모양에 매우 애를 태운 요셉 베네딕토는 돌아오자마자 즉시 성모 마리아의 제대앞에 엎드려 열심히 기도하고 이런 사람들을 수용하는 장소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불다로싸라는 구영게 두 방을 빌려, 그때부터 박애 자선 사업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곳에 병자를 수용하고 정성껏 간호해 왔으나 3년후에는 마을 내 사람들의 반대로 말미암아 부득이 그곳을 폐쇄하고 교외(郊外)의 왈도카라는 곳으로 이전하면서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이라고 칭하고 역시 무료로 빈민 병자의 구제에 헌신했다. 이곳은 오늘에 와서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작은 마을을 형성할 정도록 발전해 수용 인원이 때로는 7천명이란 수에 달한 때도 있었다.



요셉 베테딕토는 왈도카에서 빈자의 아버지, 또한 착한 목자로서 활동하기를 10여 년, 그 후는 이탈리아의방방곡곡에 같은 사업을 일으키고 이에 종사하는 동지를 위해 빈센디니라는 남자 수도원과 빈센디네 혹은 흔히 코톨렌기니라는 여자 수도원을 14개소나 창립했다. 이러한 수도원은 모두 자본금없이 세워진 것이었으므로 종종 파산의 위기에 직면한 적도 있었으나, 요셉의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의 정은 기이하게도 보답되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어디선가 독지가가 나타나서 부채를 갚아 주는 것이었다. 또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지도 않는 하늘의 새들까지도 먹여 살려주시는 인자하신 아버지께서는 박애의 사도인 요셉이나 그의 형제 자매들을 결코 굶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요셉 베네딕토는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잠시도 잊지않고 자신이 간호하게 될 환자를 주님(主)이라고 부르며 사실 주님께 대한 것처럼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성인은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는 성 요셉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는데, 성 프란치스코가 세운 제3회에는 이미 청년시대에 입회하고 그의 청빈과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등의 정신을 체득한 바가 있었다.



1842년 봄, 토리노 시에는 페스트(黑死病)가 만연해 환자들의 수용 간호에 종사하고 있던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의 사제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속출하는 상태에 있게 되어 요셉 베네딕토도 병에 감염, 중태에 빠졌으나 작은 집의 사람들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원해 키에리에 있는 형제의 집에 옮기게 하고 그곳에서 9일 동안 앓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해 4월 30일 천국을 향해 길을 떠났다. 임종시 그가 기도한 말씀은 다윗 성왕의 "야훼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시편 122, 1)라는 시편의 한 구절이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키에리의 마을 사람들이 거의 전부 다 참가해 성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유덕을 높이 찬양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창설자, 증거자. 이탈리아 또리노의 브라에서 출생한 요셉은 사제로 서품된 후, 본당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또리노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의료시설이 없었다. 그는 본당내의 어느 부인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고,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집을 개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점점 확대되자, 그는 자원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는데, 이것이 성 빈첸시오 수도회와 빈첸시오 수녀회의 모태가 되었다. 1831년 콜레라가 창궐하게 되었을 때, 병원도 문을 닫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도시 외곽인 발도꼬로 자리를 옮겨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다. 병원은 연일 만원이었고, 확장되었다. 이제 그는 노인, 농아, 맹인, 불구자, 정신 이상자 및 거리의 여성에게도 보호의 손길을 뻗쳤다. 그의 삐꼴라 까사는 큰 병원이 되었다.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그는 연민회, 착한 목자회, 로사리오의 은수자회 그리고 성삼의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장티푸스로 인하여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오랜동안 치료하였지만, 이탈리아의 키에리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1934년에 시성되었다.
(성 바오로 수도회홈에서)




♬Fratello sole e sorella luna-Claudio Baglioni














San Giuseppe Benedetto Cottolengo Sacerdote


30 aprile - Comune
Bra, Cuneo, 3 maggio 1786 – Chieri, Torino, 30 aprile 1842



Portato fin da piccolo verso i bisognosi, divenuto sacerdote a Torino, aprì nella regione di Valdocco le Piccole Case della Divina Provvidenza, prima per i malati rifiutati da tutti, poi per “famiglie“ di handicappati, orfani, ragazze in pericolo e invalidi.Le Piccole Case , oltre a dare rifugio e assistenza materiale, tendevano a costruire una identità umana e cristiana nelle persone completamente emarginate. Con Giuseppe nacquero i preti della Santissima Trinità, varie famiglie di suore, i fratelli di S. Vincenzo, il seminario dei Tommasini. Apostolo, asceta, penitente, mistico, devotissimo alla Madonna, egli portò nelle sue case una vita spirituale intensa. Fu formatore di vita religiosa e precursore dell’assistenza ospedaliera.



Etimologia: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La parola “Cottolengo” è solita evocare nell’immaginario collettivo più una struttura gestita da suore ospitante ammalati gravi, piuttosto che rimandare alla figura del santo fondatore, la cui vicenda terrena cade spesso in secondo piano e vuole dunque essere oggetto della presente scheda agiografica.
Giuseppe Benedetto Cottolengonacque a Bra (Cuneo) il 3 maggio 1786, primogenito di dodici fratelli, da un modesto esattore del pubblico erario. Dalla mamma ereditò quel tenero amore per i poveri e i malati che lo contraddistinse per l’intera vita. Quando il figlio aveva cinque anni ella lo sorprese a misurare le pareti di una stanza, che egli già sognava di poter riempire di letti per i sofferenti non appena ne avesse avute le possibilità. Crebbe con una corporatura assai gracile ed a scuola, dove assolutamente non eccelleva, solo dopo una novena a San Tommaso d’Aquino poté divenire uno dei primi della classe. All’età di soli dieci anni Giuseppe si propose di vivere alla presenza di Dio e di farsi santo. Trasportato da un innato fervore religioso, di giorno era solito animare la casa con i canti imparati in parrocchia ed alla sera, al suono di un ferro di cucina, richiamava i familiari a pregare dinanzi al quadro della Vergine Maria.
Già terziario francescano, il 2 ottobre 1802 il Cottolengo ricevette la veste talare dalle mani del parroco. Nel 1805 entrò nel seminario di Asti, che però dopo due anni fu chiuso ed il santo fu costretto a continuare in famiglia gli studi sino all’ordinazione presbiterale che gli fu conferita l’8 giugno 1811. Rendendosi conto della deficienza degli studi teologici condotti, in particolare in occasione delle confessioni a Bra ed a Corneliano d’Alba, dove era stato inviato come vicecurato, chiese con insistenza di poter integrare i suoi studi a Torino. Nel 1816 finalmente conseguì così il dottorato in teologia. Dopo aver svolto ancora per due anni il suo ministero nella terra natia, nel 1818 ricevette la nomina a canonico della basilica torinese del Corpus Domini, dove per nove anni profuse instancabilmente le sue forze, supplicando il sacrista di lasciare in pace i canonici più anziani: “Io sono giovane, diceva, chiamate me per ogni occorrenza. Che ci sto qui a fare se non mi occupo?”. Divenne così ben presto l’apostolo della confessione, il consolatore dei malati ed il soccorritore dei poveri. A questi ultimi donava tutto quanto gli fosse possibile: i compensi delle predicazioni, le elemosine delle Messe, i regali ricevuti dalla famiglia e le elargizioni dei bottegai. Per sollevare dalla miseria il più grande numero possibile di indigenti il Cottolengo persino d’inverno faceva economia nel proprio abbigliamento e nel riscaldamento. I torinesi del tempo presero a chiamarlo il “canonico buono”, ma il santo preferiva continuare a considerarsi un contadino di Bra incapace di tutto se non che di piantare cavoli.
Il Cottolengo percepiva però che quella non era veramente la sua vocazione ed ipotizzò di essere chiamato alla vita religiosa, ma il suo confessore Padre Fontana, oratoriano di San Filippo Neri, all’inizio del 1826 gli disse apertamente: “Voi non sarete né Filippino, né claustrale, ma un povero sacerdote di Torino, perché Dio vuole servirsi di voi per opere di sua gloria”. Dopo aver letto la vita di San Vincenzo de’ Paoli, il Cottolengo comprese allora che la sua vera strada era quella della carità. La definitiva vocazione gli fu svelata da un pietoso episodio nel settembre 1827, quando la famiglia Gonet, con tre bambini, transitante da Milano a Lione, aveva trovato ristoro in un’osteria della parrocchia del Corpus Domini. La moglie si disponeva già a ripartire, quando, colta da grave malore, morì assistita dal “Canonico buono” dopo essere stata respinta dall’ospedale dei tubercolotici poiché incinta e dall’ospizio di maternità in quanto malata. Il santo pensò allora di istituire un ricovero che potessero spalancare le porte ad ogni sorta di infelici. L’opera prese il via il 17 gennaio 1828 con quattro letti in alcune stanze affittate nella casa detta della Volta Rossa. Non mancò di trovare forte opposizione tra i confratelli ed i parenti, ma a tutti Padre Fontana ripeteva: “Lasciatelo fare”. I primi collaboratori furono il medico Lorenzo Granetti, il farmacista regio Paolo Anglesio e dodici visitatrici dei malati dette “Dame di Carità”, che riunì sotto la direzione della ricca vedova Marianna Nasi.
Quando a Torino nel 1831 scoppiò il colera, l’ospedaletto fu chiuso a causa del pericolo di contagi. Il Cottolengo, convinto che “i cavoli, perché prosperino, devono essere trapiantati”, comprò un casetta a Valdocco, proprio nella zona ove poco dopo sarebbe fiorite anche le opere fondate da Giulia di Barolo e San Giovanni Bosco, e vi si trasferì il 27 aprile 1832 con due suore ed un canceroso, adagiato su di un carretto trainato da un asinello. Queste furono le umilissime origini della Piccola Casa della Divina Provvidenza. Il vasto terreno, con l’aiuto di parecchi benefattori e specialmente del Cavalier Ferrero, si costellò ben presto di vari ospedaletti, asili e orfanotrofi. L’unico valido mezzo per portare a compimento la grandiosa opera fu un’illimitata fiducia nella Provvidenza Divina, invocata con costante orazione, e nessuna diretta richiesta fu mai rivolta alla generosità dei torinesi o della corte. Per non far torto alla Provvidenza, il padre fondatore non volle saperne di contabilità o di rendiconti, profondamente convinto che “a chi straordinariamente confida, Dio straordinariamente provvede”. Sulle sue labbra non risuonavano che espressioni del tipo “Avanti in Domino, Provvidenza e Deo gratis”.
Nel 1833 il re Carlo Alberto di Savoia eresse l’opera ad ente morale e nominò il Giuseppe Benedetto Cottolengo cavaliere dell’Ordine Mauriziano. Il santo accettò sentenziando: “Passino i doni ai miei poveri. Io ritengo la croce. Provvidenza e croce sono due cose che vanno unite”. Al termine dell’anno era già pronto un primo grande ospedale da 200 posti letto, al quale ne seguì un altro per tutti i soggetti rifiutati dalla società. Egli stesso riceveva i malati alla porta a capo scoperto, per affidarli alle suore dicendo: “Sono doni di Dio. Siano le vostre pietre preziose”. Al servizio di questa nascente cittadella della carità, il Cottolengo istituì nel 1833 le Suore Vincenzine; nel 1841 le Suore della Divina Pastora per curare la preparazione delle ricoverate ai sacramenti; nel 1839 le Suore Carmelitane Scalze dedite alla via contemplativa; nel 1840 le Suore del Suffragio per i lavori di cucito e le Suore Penitenti di Santa Taide per la conversione delle traviate; infine nel 1841 le Suore della Pietà per assistere i morenti. Era solito ripetere alle sue più strette collaboratrici: “Presenza di Dio, occhi bassi, testa alta, abitino al collo e rosario al fianco. Così, in mezzo ad un reggimento di soldati, sarete senza timore”. Per l’assistenza ai malati di sesso maschile istituì i “Fratelli di San Vincenzo”, per l’amministrazione dei sacramenti i “Sacerdoti della Santissima Trinità”, nonché il reparto giovanile dei “Tommasini”, cioè seminaristi aspiranti al sacerdozio. A tutti ripeteva spesso: “Non lasciatemi mai, a qualunque costo, la comunione quotidiana! Ciò che tiene in piedi la Piccola Casa sono le preghiere e la comunione”. Infatti, quando era a corto di viveri o di soldi, il santo era solito inginocchiarsi ai piedi della Vergine ed ottenere così infallibilmente tutto quanto gli occorreva.
Gregorio XVI con un breve approvò l’operato del Cottolengo, ma il padre dei poveri non si montò la testa e continuò ad essere l’umile servo della Divina Provvidenza, sempre pronto a giocare con i più idioti, a trasportare fasci di legna o ceste di verdure, a fare le pulizie calzando zoccoli di legno e rivestito di una vecchia tonaca, restando nella sua ferma convinzione di essere soltanto un contadino capace di piantare cavoli. Eppure Dio gli aveva addirittura concesso il dono di leggere nei cuori altrui, di prevedere il futuro e di conoscere anche le circostanze della propria morte. Nel febbraio 1842 il santo passò diverse settimane a sbrigare affari che non parevano urgenti, dopodichè. Poi visitò tutte le case che aveva fondato ed ovunque lasciò chiaramente intendere che quello era il suo ultimo addio. “Pregate per me, che sono alla fine dei miei giorni. Vi benedico per l’ultima volta. Ora non posso più nulla per la Piccola Casa, ma giunto in cielo pregherò e continuerò ad essere il vostro padre, e voi ricordate le parole che vi disse questo povero vecchio”. Il 21 aprile 1842 affidò al Canonico Luigi Anglesio la direzione della sua opera per potersi ritirare presso il fratello, canonico nella collegiata di Chieri. In tale città morì santamente il 30 aprile 1842 nel letto che dodici ani prima si era fatto preparare, dopo aver esclamato: “Mi sono rallegrato perché mi è stato detto: Andiamo nella casa del Signore”. Il re Carlo Alberto, saputo della sua dipartita, rimpianse la perdita del grande amico. Giuseppe Benedetto Cottolengo fu sepolto a Torino nella Piccola Casa, in una cappella della chiesa principale, dove riposa ancora oggi. In seguito ai numerosi miracoli verificatisi per sua intercessione, il pontefice Benedetto XV lo beatificò il 28 aprile 1917 e Pio XI infine lo canonizzò il 19 marzo 1934. Oltre alla commemorazione nel Martyrologium Romanum, calendario ufficiale della Chiesa Cattolica, il santo Cottolengo per le sue peculiari opere caritatevoli ha meritato di essere citato nella prima lettera enciclica del papa Benedetto XVI “Deus caritas est”.
Autore: Fabio Ardu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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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1-Apr-2006
Letto da 3437 persone





JOSEPH BENEDICT COTTOLENGO
Also known as
Italian Vincent de Paul; Workman of Divine Providence
Memorial
30 April
Profile
Born to a middle class family. Studied at the seminary in Turin. Ordained in 1811. Parish priest in Bra and Corneliano. Doctor of Divinity. Joined the Order of the Corpus Christi in Turin. Canon of the Church of the Trinity in Turin.


For several years, Joseph treated his priesthood more as a career than a vocation. Then one night he was called to the bed of a poor, sick woman in labour. The woman badly needed medical help, but had been turned away everywhere for lack of money. Joseph stayed with her throughout the travail, and was there to hear her confession, give her absolution, Communion, and last rites. He baptized her newborn daughter, and then watched as both of them died in bed. The trauma of the evening changed his mind about his vocation.


In 1827 he opened a small shelter for the area sick and homeless, renting a room, filling it with beds, and seeking male and female volunteers. The place expanded, and he received help from the Brothers of Saint Vincent and the Vincentian Sisters. During a cholera outbreak in 1831, the local police closed the hospice, fearing it was a source of the illness.


In 1832 he transferred the operation to Valdocco, and called the shelter the Little House of Divine Providence (Piccola Casa). The Casa began receiving support, and grew, adding asylums, orphanages, hospitals, schools, workshops, chapels, alm-shouse, and programs to help the poor, sick, and needy of all types. This small village of the poor depended almost entirely on alms, Joseph kept no records, and turned down offers of state assistance; never once did they do without. Joseph directed the operation until a few days before his death, and the Casa continues to today, serving 8,000 or more each day. He founded fourteen communities to serve the residents, including the Daughters of Compassion, Daughters of the Good Shepherd, Hermits of the Holy Rosary, and Priests of the Holy Trinity.
Born
3 May 1786 at Bra, Piedmont region, Italy
Died
30 April 1842 of typhus at Chieri, Italy
Name Meaning
whom the Lord adds (Joseph)
Beatified
1917
Canonized
1934 by Pope Pius XI



Joseph Benedict Cottolengo (RM)
Born in Bra (near Turin), Piedmont, Italy, on May 3, 1786; died at Chieri, Italy, on April 30, 1842; beatified in 1917; canonized in 1934; feast day formerly April 30.
Joseph Benedict Cottolengo's middle-class mother once surprised him as he was measuring his room with a stick. He explained that he wished to see how many beds he could get into the room because he wanted to turn the house into a hospital when he grew up.


He attended the seminary in Turin, and, in 1811, he was ordained a priest and engaged in pastoral work for a short time in his native city and in Corneliano, before continuing his studies in Turin and taking his degree there. In 1819, he entered the congregation of secular priests of the Order of Corpus Domini and was named canon of the Church of the Trinity in Turin.


In 1828, he was called to a very sick woman, who had not been able to obtain admission to any hospital. The saint rented an unfurnished room, and placed a few beds in it for the poorest and most neglected. Following the example of Saint Vincent de Paul, here no one was to be refused admittance. A doctor, who was his friend, and a benevolent pharmacist helped him. He sought out pious women to nurse the sick and men to serve the male sick. When it became to expand, he organized the volunteers who had been manning it into the Brothers of Saint Vincent and the Daughters of Saint Vincent (Vincentian Sisters). The congregation of young girls he founded renounced the world and were to devote themselves wholly to God and the care of the sick.


Cottolengo had overcome the initial difficulties and his work was growing when, in 1831, cholera broke out. The police closed the hospice, so the Vincentians nursed the poor in their own homes until Joseph was allowed to open a new one outside the city at Valdocco. There they continued ministering to the stricken.


It was opened in the following year and was known as the Little House of Divine Providence. God's providence had moved the little house out to that spot so that it might grow up to be a whole city. Soon there rose about it a House of Faith, a House of Hope, and a House of Love to minister to the crippled, insane, and wayward girls.


His Piccola Casa became a gigantic set of institutions, a city really of more than 7,000 paupers, patients, orphans, cripples, idiots, and penitent women. Today it serves an average of 8,000 to 9,000 inmates daily, and the Cottolengo Institute has several foundations in other areas of the world. Today the Little House at Turin, with its thousands of beneficiaries, is one of the most impressive places in Europe. Here can be seen on a large scale human suffering in its most horrifying forms side by side with human selflessness and love raised to a supernatural degree by a Power beyond itself.


For his growing organization, the saint founded 14 communities, some of which were purely contemplative and were to assist the others by their life of prayer, and to supplement, by spiritual charity, the temporal works of mercy through prayer for those who needed special assistance, above all the dying and the dead. These congregations included the Daughters of Compassion, the Daughters of the Good Shepherd, the Hermits of the Holy Rosary, and the Priests of the Holy Trinity.


The saint relied completely on the boundless mercy of God, and, as one of his friends used to say, had more trust in God than all the citizens of Turin together. As soon as money was given to him, it was spent. Queried about the secret sources of the money with which one tried to explain his gigantic achievements, he answered: "Providence sends me everything." He learned, however, that Providence may provide bread for today, but not at the same time for tomorrow or the day after. (Remember the story of the Manna in the desert.)


He paid everything, yet amid constant difficulties. "In the Little House," he used to say, "we progress as long as we possess nothing. We decline when we live on endowments." Saint Joseph would have had problems today. He depended upon alms to maintain these many and varied institutions, yet he kept no books of accounts and made no investments.


King Charles Albert frequently proposed to let the government take over the protectorate of the foundations. "Why?" answered Cottolengo. "They are under the protection of Divine Providence; protection by the state is superfluous."


This trust in Providence, however, did not keep him from strenuous work and effort. He slept but a few hours, often only on a chair or a bench, and persevered in his task of prayer and work. But therewith he wore himself out.


In 1842, he handed the administration of the institutes to his successor. The doctors persuaded him to go to his brothers at Chieri, where he died a few days later of typhoid. He had promised the sisters as he left: "When I am in Heaven, where everything is possible, I will cling to the mantle of the Mother of God and I will not turn my eyes from you. But do not forget what this poor old man has said to you."


Saint Joseph Cottolengo's example was one of the inspirations for Saint John Bosco, who in the earlier years of his priesthood helped occasionally at the Piccola Casa (Attwater, Benedictines, Delaney, Farmer, Schamoni,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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