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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4월 11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St. STANISLAUS of Cracow


Saint Stanislaus, Bishop and Martyr


Santo Stanislao Vescovo e martire


Born :1030 as Stanislaus Szczepanowsky at Cracow, Poland


Died :murdered in 1079


Canonized :1253.Innocenzo IV.


Stanislao=la gloria dello stato, dal polacco=the Gloria of the state, from the Pole





1036년 폴란드의 슈체파누프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공부했다.


사제가 되어 1072년 람베르트 주교에 이어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었다.


착한 목자로서 자기 교구를 다스렸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으며 매년 자기 교구의 사제들을 방문 했다.


두려움 없이 볼레슬라프왕을 힐책하다가, 1079년 왕에 의해 암살당했다.





성 치쁘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 58, 8-9.11: CSEL 3,663-666)



믿음의 투쟁



우리가 믿음의 투쟁을 하고 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지켜 보시고


천사들도 지켜 보며 그리스도께서도 지켜 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시는 데에서 투쟁하고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승리의 월계관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영예이며 기쁨이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온갖 힘의 방패를 두르고 순수한 정신과 완전한 믿음과 넘치는 열성으로 투쟁에 대비합시다.


하느님의 군대가 우리가 나아가는 전쟁터로 나아가기를!



복된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대비하고 무장을 갖추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 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무기들을 잡고 이 영적이고 천상적인 보호로써 우리 자신을 견고히 합시다.


그러면 악한 날이 올 때 악마의 위협에 저항하여 그를 격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로 가슴을 무장합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견고하게 되어 원수의 공격을 막아낼 것입니다.


우리의 발에는 복음에 대한 열성을 갖추어 무장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사탄의 머리를 짓밟고 부수기 시작할 때 사탄은 우리를 물어 쓰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용감하게 믿음의 방패를 두릅시다. 그러면 그것을 방패로 삼아 원수의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머리를 감싸 줄 영적 투구를 받아 씁시다. 그러면 우리 귀가 영혼을 살해하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며,


눈은 더러운 공상들을 보지 않게 될 것이고, 이마는 보호되어 하느님의 표지가 보존될 것이요,


입은 보호되어 그 입술은 승리할 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오른팔로 영적인 칼을 잡아 무장합시다.


그러면 헛된 제사를 용감히 거절할 것이며 주님의 몸을 영하는 감사제를 기억하여 그분을 포옹하고


훗날 주님으로부터 천상 월계관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마음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이것을 새기며 묵상하고 있는 우리에게 박해의 날이 밀어닥치더라도,


그리스도의 분부와 권고로써 잘 훈련된 그리스도의 군사는


투쟁에서 물러서지 않고 승리의 월계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교회는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없이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크라코비아의 대주교였던 폴랜드인 스타니슬라오가


세례자 요한이 처해졌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서 영웅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제파노프스키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한 그는 주교가 되자 그의 교구를 조직하였다.


그는 주교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사제들에게 큰 관심을 보여


매년 최소한 한번씩은 그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타락한 생활로 좋지 않은 예를 보여주던 폴랜드 왕 볼레슬라오 2세를 파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왕은 그에게 반역죄를 씌워 1079년 4월 11일 미사를 거행하고 있던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1253년 아시시에서 그를 순교성인들의 반열에 올렸다.


폴랜드의 주보성인인 이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전세계의 모든 신자들은 이 나라의 신자들이 보여준 수많은 증거를 기리며,


세계의 모든 신자들이 꿋꿋하게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를 이끌어 나갈 목자를 보내시어,


자신의 몸과 피를 바친 그리스도를 본 받아,


늑대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도록 해주셨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스타니슬라오는 ’국가와 영광(榮光)’이란 뜻이다.


동부 유럽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폴란드의 수호 성인이며


비극적인 크라코프의 주교인 스타니슬라오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성토마스 모어와 성토마스 베케트와 함께 불의한 정부의 죄악에 강경하게 맞선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1030년 7월 26일 크라크프 근처 슈체파노우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폴란드의 수도인


그니에즈노의 주교좌 성당의 부속 신학교와 파리에서 공부한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크라코프 주교의 수석부제와 설교자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그의 놀라운 웅변과 표양으로 성직자와 수도자 등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었다.


그는 1072년에 크라코프의 주교가 되었다.


키에프 대공국에 대한 원정중에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의 정치적 상황에 휩쓸리게 되었다.


뛰어난 언변으로 유명한 그는 왕과 농민들의 죄악 특히 왕인 불레슬라우스 2세의


부도덕한 행동과 불의한 전쟁에 대적하기도 하였다.


왕은 처음에 스스로 사과하고 참회의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다시 과거와 같은 행동을 하였다.


스타니슬라오는 반역죄로 몰려 사형이라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를 계속했으며 결국은 왕을 파문시켰다.


왕은 분노하여 스타니슬라오를 죽이라고 군인들에게 명령하였으나 군인들이 이에 불복하자


자신이 직접 그를 살해했다.


헝가리로 도망가야 했던 불레슬라우스 2세는


아마도 헝가리의 오시아크에 있는 성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남은 일생을 보내던 것 같다.


그는 1253년에 교황 인노첸시우스 4세로부터 시성되었다.





요한 세례자 , 토마스 베케트, 토마스 모어, 스타니슬라오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부패를 감히 고발한 몇 안되는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윤리적 타락상을 지적한 예수님 자신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이것은 정말 위험한 일인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명령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신의 권리를 바라고 있으며,


자기 자신은 아무런 명령이나 통제 없이 살고자 한다."(성토마스 모어,’안락한 대화’)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축일: 6월22일.게시판1237번.1832번.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6월24일.게시판1238번 1836번.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8월29일.게시판1337번.


*켄터베리의 성 토마스 베케트 주교 순교자 축일:12월29일.게시판1544번.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축일:11월13일.게시판1532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폴란드의 서남부에 있는 크라코우 시의 주교좌는 옛날부터 특히 유명한데,


그것은 주로 그 좌에 있었던 성 스타니슬라오가 탄복할만한 덕행의 길을 걸었고,


또한 훌륭한 순교의 팔마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양친은 크라코우 시에서도 상당한 재산가로서 아무 부족된 것이 없는 부유한 가정이었으나.


다만 애석한 일은 결혼 후 30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던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낙담하지 않고 더욱 더 열심한 기도를 계속한 결과 마침내


1030년 7월 26일 원하고 바라던 옥과 같은 한 남아를 낳게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후에 성인품에 오른 스타니슬라오이다. 부모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된 그들은 사례하는 뜻으로 아들을 장차 성직자로서 하느님께 봉헌할 것을 결심하고,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기르고 학문도 그 나라 최고학부 그네젠 대학을 졸업하도록 하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유학을 시키는 등 여러 가지의 교육을 받게 했으며


스타니슬라오도 덕을 잘 닦으며 학업에 충실했으므로 파리에 머물기 7년이 되자마자


교회법 박사의 학위까지 취득했던 것이다.



금의환향한 스타니슬라오는 오래지 않아 양친을 여의고 수도원에 들어갈 생각으로 전 재산을


빈민에게 베풀어주었으나, 크라코우의 주교 람베르토는 그가 비상한 인물이란 것을 알고 그를 주교 고문으로


채용하고 다음 사제 위에 오르게 하고 다시 그 학덕을 칭찬하면서 부주교로 승격시켰다.


람베르토 주교가 서거하자 국왕, 성직자, 평시도들은 그를 그의 후계자로 모시려고 했으나


겸손한 스타니슬라오는 그 주교직에 부적당하다는 이유로 완강히 사양했다.


그러던 중 교황 알렉산데르 2세로부터 명령도 받고, 마땅하게 더 이상 거절할 이유도 없어


마침내 주교 취임을 승낙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주교가 된 스타니슬라오는 잘못됨이 있으면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두려움 없이 이를 책망하고,


일반 신자들의 종교적 생활을 열심케 하는데 즐겨했다.


그러나 이것에는, 먼저 자신이 솔선 실천해 좋은 모범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빈번히 재를 지키며 엄한 고행을 행하고


자선 사업에 힘쓰며 성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므로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의 덕에 감복해 감히 그의 말에 거역하는 이가 없었다.



당시의 국왕 볼레슬라오는 역사상 폭군으로 유명한 왕으로, 그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신하의 아내나


딸에 대해 가끔 못할 짓을 했으나, 한 나라의 왕이 한 짓이므로 후환을 두려워해 누구 하난 나서서


그 못된 행동을 충고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주교에게 그의 비행을 호소하여 그의 입을 통해 왕으로 하여금 자숙하도록 원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스타니슬라오는 국왕에게 충고했는데 왕도 자신의 비행을 깨달았음인지 회개를 결심했으나


그것도 일시적이었고 얼마 안 되어 전보다 더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스타니슬라오는 재차 왕앞에 나아가서 그의 생활의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설명하고 만일


이 같은 소행을 계속한다면 유감이지만 그리스도교에서 파문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간(諫)했다.


이와 같은 그의 직언이 매우 비위에 거슬린 왕은 심중에 혹독한 복수심을 픔고 우선 사람들에게


이처럼 존경을 받고 있는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고자 한 꾀를 짜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 스타니슬라오는 베드로라는 어느 농부에게 교회를 위해 토지를 구입하고


이미 대금도 지불했던 것인데,왕은 베드로가 영수증을 주지 않고 죽은 것을 기회로 비밀리에 그의 유가족에게


베드로가 명령해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불법으로 우리의 토지를 탈취했다고 고소하도록 하게 하여


결국 주교를 법정에 호출시켰던 것이다.


스타니슬라오는 그 토지 매매를 잘 알고 있는 증인도 있으므로 곧 의심이 풀리리라 생각하고 안심하며


법정에 나갔으나,그 중인도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도리어 불리한 증언을 했으므로 그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판사에게 "이곳에는 없는 확실한 증인을 데리고 오겠으니 3일간만 기다려 주시오"하고 간청했다.


별다른 중인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 판사는 주교의 말씀을 곤경을 일시 벗어나려는 궁여지책이라 비웃으며


하여튼 그의 소망대로 여유를 주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스타니슬라오는 그때부터 3일간 단식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3일째 되는 날 아침 미사


성제 후 주교의 성장을 갖추고 베드로의 묘지에 가서 무덤을 열게 하고 "살아나라!"고 한마디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까 죽었던 베드로가 즉각 다시 살아나 주교와 동행해 판사 앞에 서서 명백히 토지 매도의 전말을


설명하여 스타니슬라오의 무죄함을 드러내주고 그는 다시 묘지로 돌아가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 죽었다 한다.



이와 같이 주교께서 왕의 함정에서 벗어나 죄가 없는 깨끗한 몸이 되고 그를 함락시키려고 하던 자의 간계가


폭로된 후부터는 뭇사람들의 스타니슬라오에 대한 존경은 한층 더 증가될 뿐이었다.


그런데 왕은 그 또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번에는 그를 없애 버리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망명할 것을 종용했으나, 주교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기위해


위임받은 신자의 무리를 버리고 주교좌를 떠난다는 것은


목자로서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끝까지 머물기를 결심했다.



1079년 5월 8일 미카엘 대천사의 발현 축일이 다가왔다.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마을 밖에 있는 성 미카엘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볼레슬라오 왕이 부하 병졸을 인솔하고 아무도 모르게 침입하여 친히 창검을 휘두르며 주교를 직접 살해했다.


그 뒤 왕은 백성들에게 그를 악인으로 간주하도록 했으나,


백성들은 도리어 그의 용감한 순교의 태도를 보고 성인으로 공경하고 왕을 부당한 자로 낙인찍어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했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다.


그는 1253년에 교황 인토첸시오 4세로부터 시성되었고, 크라코우의 주요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Alleluia,Beatus Vir Qui Suffert-베네딕도수도원


































STANISLAUS of Cracow


Also known as


Stanislaus Szczepanowsky


Memorial


11 April


Profile


Polish nobility. Educated at Gnesen and Paris. Bishop of Cracow. Murdered while celebrating Mass. Killed by King Boleslaus the Cruel after Stanislaus excommunicated him.


Born


1030 as Stanislaus Szczepanowsky at Cracow, Poland


Died


murdered in 1079


Canonized


1253


Patronage


archdiocese of Cracow Poland, Poland


Representation


bishop being hacked to pieces at the foot of an altar







Santo Stanislao Vescovo e martire



11 aprile - Memoria Facoltativa


Szczepanowski, Polonia, c. 1030 - Cracovia, 11 aprile 1079



Vescovo di Cracovia, fu pastore sapiente e sollecito. Succedette al vescovo Lamberto nel 1072. Intrepido sostenitore della liberta della Chiesa e della dignita dell’uomo, difensore dei piccoli e dei poveri, subi il martirio sotto il re Boleslao II? Canonizzato da Innocenzo IV ad Assisi nel 1253, e patrono della Polonia. Le sue spoglie, custodite nella cattedrale di Cracovia, sono meta di pellegrinaggio attraverso i secoli. (Mess. Rom.)




Etimologia: Stanislao = la gloria dello stato, dal polacco


Emblema: Bastone pastorale, Palma



Re Boleslao II di Polonia (1058-1079) e ricordato nelle pagine della storia per le vittoriose imprese militari che consolidarono il suo giovane stato, allargandone i confini a spese della Russia, per la valorizzazione delle terre, da lui promossa con una nuova organizzazione fondiaria, e per le riforme giuridiche ed economiche. Di questo re, tuttavia, il primo storico polacco, Vincenzo Kadlubeck, ricorda anche le gravi ingiustizie e l’immorale condotta privata. Ma sulla sua strada, Boleslao s’imbatte in un severo censore. Come gia il Battista nei confronti di Erode, il coraggioso vescovo di Cracovia, Stanislao, levo alta la voce, ammonendo l’onnipotente sovrano del suo dovere di rispettare i diritti altrui.


Stanislao era nato verso il 1030 nella diocesi di Cracovia, a Szczepanowo, da genitori non agiati. Compiuti i primi studi presso i benedettini di Cracovia, li pote perfezionare in Belgio, nel celebre studentato di Liegi. Tornato in patria, si distinse per il suo zelo pastorale e per le benefiche iniziative portate avanti con carita e intelligenza. Morto il vescovo di Cracovia, papa Alessandro II lo nomino all’alto incarico. La sua designazione, oltre che dal popolo e dal clero, era stata caldeggiata dallo stesso Boleslao II, che nei primi anni ne assecondo l’opera di evangelizzazione in tutta la regione e la formazione del clero locale, secolare, che doveva prendere progressivamente il posto dei monaci benedettini nell’amministrazione della Chiesa polacca.


La buona armonia tra il vescovo e il sovrano duro finche il coraggioso Stanislao dovette anteporre i suoi doveri di pastore alla tolleranza verso le malefatte dell’amico, poiche la riprovevole condotta del sovrano correva il rischio di alimentare il malcostume tra i sudditi. Le cronache del tempo narrano infatti che il re, innamoratosi di una bella gentildonna, Cristina, sposa di Miecislao, senza frapporre indugi la fece rapire, con grave scandalo per tutto il paese.


Minacciata e poi comminata la scomunica al sovrano, questi non pose piu argine al suo furore, facendo trucidare Stanislao a Cracovia nella chiesa di S. Michele, durante la celebrazione della Messa. L’ignobile "assassinio nella cattedrale" sembra sia stato commesso per mano dello stesso sovrano, dopo che le guardie si erano dovute ritirare perche impedite da una forza misteriosa. Venerato dai Polacchi fin dal giorno del suo martirio, S. Stanislao venne canonizzato il 17 agosto 1253 nella basilica di S. Francesco ad Assisi, e da allora gode di un culto assai diffuso in Europa e in America.


Autore: Piero Bargel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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