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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 : 4월 2일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은수자


St. FRANCIS of Paola


St. Franciscus de Paola


San Francesco da Paola Eremita


Born:1416 at Paola, Calabria, Italy


Died:2 April 1507 at Plessis, France


Canonized:1512 by Pope Julius II


Francesco = libero, dall’antico tedesco = free, from the ancient German





1416년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지방의 파올라에서 태어났다.


은수자회를 설립하였으며, `가장 작은 형제회’로 발전하여 1506년 사도좌의 인준을 받았다.


1507년 프랑스 투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꼬의 편지에서


(Epistola a, 1486: A. Galuzzi, Origini dell’Ordine dei Minimi, Romae, 1967, pp.121-122)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십시오.



가장 너그러이 갚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노고에 상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피해 달아나고 위험들을 몰아내십시오.


우리와 우리 모든 형제들은 비록 부당한 사람들이지만, 여러분이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찾고 있는 동안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 모친이신 마리아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끊임없이 간구합니다.



형제들이여, 강력히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온갖 사려와 열성으로 힘써 영혼의 구원을 얻도록 하십시오.


죽음은 확실하고, 인생은 짧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 올라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하늘에서 내려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다 여러분의 마음을 고정시키십시오.


그분은 우리 때문에 영혼과 육신의 온갖 고통을 당하셨고, 어떤 고초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인내와 사랑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역경 가운데서도 인내심을 지녀야 합니다.



미움과 적대심을 버리십시오. 거친 말을 삼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입에서 한번 그런 말이 흘러 나왔다면,


그 말로 인해 생긴 상처를 치료해 줄 치료제를 같은 입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이렇게 서로 용서해 주고 과거에 당한일을 영원히 잊어버리도록 하십시오.



당한 일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며 분노가 가져다 주는 결과이고 죄를 간직하는 것이며 정의에 대한 증오입니다.


그것은 녹슨 화살이고 영혼의 독소이며 덕의 파멸이고 정신을 좀먹는 벌레요 기도의 방해물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청원들을 무효화하고 사랑을 몰아냅니다.


당한 일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또한 영혼에 박힌 가시요 결코 잠자지 않는 악이며 끝이 없는 죄이고 날마다 겪는 일종의 죽음입니다.



평화를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누구나 갈망할 수 있는 가장 귀한 보물 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죄가 하느님을 분노케 해드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해 주시도록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도 하느님께는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십시오.


주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게 끔 살아가십시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 안에 깃들기를 바랍니다.


(가톨릭홈에서)





이탈리아의 파올라에 사는 경건한 야고보 말도리라 부부는 자녀가 없음을 자못 비관하면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전구를 청하며 자녀를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청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그 결과 1416년 드디어 한 남자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전구해 주신 성인에게 감사의 정을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도 프란치스코라고 이름지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눈병에 걸렸으므로 양친은 재차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를 청하했다.


만일 낫게 해주신다면 장차 아이를 반드시 당신의 수도원에 보내어 하느님께 봉헌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자 그 눈병도 즉시 완치되었다.



아버지는 자신도 엄격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들에게도 똑같이 엄한 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고 그가 목적한 것은 다만 종교 교육뿐이었다.


프란치스코가 13세에 달했을 때 양친은 맹세대로 그를 어느 수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는 온갖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순명하고 겸손하며 엄한 고행도 알뜰히 해 나갔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로 자신도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1년이 지나서도 서원을 발하지 않고 수도원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그는 양친과 더불어 아시시나 로마나 몬테카시 등에 순례의 여행을 떠났으나 돌아와서는 부모의 승낙을 얻어


자기 스스로 하나의 조그마한 바위굴을 만들고 자기 집의 고요한 방과 또다른 두 군데서 여유 있게 은수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가끔 단식하고 또 밤새우며 매질하고 고신극기를 해 음식물로는 산에 서 뜯는 잡초 외에 아무것도 안 먹었다.


프란치스코는 되도록 남몰래 살려고 했으나, 이 같은 생활이 오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435년 그가 겨우 19세때 이미 청년 수명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제자가 되어 함께 같은 생활을 하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므로 신심이 깊은 그의 양친은 자기 아들과 그의 동료를 위해 하나의 작은 성당과 몇개의 조그마한 방을 지어 주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런 생활을 갈망하며 모여오는 이가 많아졌다.


그러므로 그 지방의 주교는그에게 다시 큰 수도원과 부속 성당의 건축을 허가했다.


그 공사가 시작되고 보니 그에 대한 세인의 존경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를 사모하는 이들이 부탁도 안했어도 사방에서 너도나도 서로 경쟁하며 기꺼이 그 공사에 협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뒤 몇 가지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그에 대한 존경은 삽시간에 더 증가했다.


한 예를 들어보면, 그의 조카(여동생의 아들)는 평소 백부인 프란치스코를 사모하던 끝에


그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같이 완덕의 길을 걸으려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좀체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들은 뜻밖에도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를 자기에게 대한 천벌로 생각하고 후회의 눈물을 머금으며 유해를 수도원의 성당에 운반하고 미사 성제 후 즉시 매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를 만류하고 조카의 시체를 자기 방으로 옮기게 하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의 성심에서 우러나온 기도는 드디어 성공했다. 조카는 과연 죽음에서 소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그의 어머니한테 가 지금은 아들을 수도원에 들여보낼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아직 아들의 소생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물론 살아 있다면 수도원이든 어디든 제 가고 싶은 데로 맡길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에 와서 늦어 버렸습니다."하고 탄식하며 대답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아니 승낙만 하면 그만입니다"하고 말하여 되돌아 와서 아들에게 수도복을 입히고 즉시 어머니에게 면회시켰다고 한다.





프란치스코가 뭇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이 같은 기적을 행한 이유만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든지 선량하고 동정이 깊고 친절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형제들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훈계하거나 결점을 고쳐주고 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상대에게 불쾌한 감으 주기 쉬운 것인데,


그가 사랑에 넘치는 태도로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누구나 기꺼이 그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랑을 위해 이것을 하십시오. 사랑을 위해서는 이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명령 방법은 늘 이와 같았다.



그리하여 그의 수도원은 나날이 번성해 갔으므로 딴 곳에도 같은 수도원을 세우려고


1473년 회의 규칙에 대해,정식으로 교황 식스토 4세의 허가를 얻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산수사(山修士)회(Hermits of Saint Francis of Assisi)라고 부르게 했다.


이는 그 회의 규칙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것을 기초로 하고 다시 준엄한 생활을 행하게끔 고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가장 작은 자의 회’(Order of Minim Fiars)라고 그의 이름을 변경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www.ofm.or.kr)



교황의 인가를 얻은 그 수도회는 이탈리아 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도 설립했다.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 프란치스코회는 영국 왕에게 존대를 받고 성인의 기적을 전해 들은 루도비코 11세가 중병에 걸렸을 때 사신을 보내어 성인의 방문을 간청했다.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명령도 있고 해서 1482년 4월 24일 그의 궁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환영은 마치 교황을 맞아들이는 것처럼 성대했다.


국왕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친구하며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줄 것을 간구했다.


이에 대하여 프란치스코는 영원한 생명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천국을 위해 공로를 쌓을 것과 병자 성사를 받고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때는 1483년 8월 4일이었다.



그 뒤 계속 가롤로 8세와 루도비코 12세도 성인을 대단히 존경했으므로, 그는 그들의 원조로 몇 군데에 수도원을 더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이 세상을 작별할 날이 다가왔다.


일찍이 그것을 예감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훈계한 뒤 성인으로서 적합한 선종을 했다.


때는 1507년 4월 2일이었고, 나이는 93세였다. 시성식은 1519년 레오 10세 교황 시대에 행해졌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프란치스코는 ’프랑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파올라의 프란치스코는 관상 생활의 고독을 깊이 사랑했으며 ’하느님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기만을 바란 사람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에게 활동적으로 세상에 봉사하기를 청했을 때, 그는 기적의 일꾼이 되었으며 국가의 진로 결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부모와 함께 로마와 아시시를 순례한 후 파올라 근처의 해안에 있는 한적한 동굴에서 관상적인 은수자로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그의 생활 방식을 본받고자 찾아 온 첫 제자를 받아들였다.


17년이 지난 후에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그는 정식 공동체를 위한 규칙을 제정하고 교회의 인준을 청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은수회’(Hermits of Saint Francis of Assisi)의 설립이며 1474년에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1492년에 프란치스코는 자기 공동체의 명칭을 ’가장 작은 형제회’(Order of Minim Fiars)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자기 회원들이 하느님의 집에서 작은 자(minimi)로 알려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겸손은 프란치스코가 일생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형제들의 신분 증명이 되어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 이외에 사순절의 금육을 계속 지키라는 네번째 규율을 덧붙였다.


그는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과감한 절제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관상적인 은수자가 되는 것이 자기의 바람이었지만 하는님께서는 자기를 사도직 생활에 부르고 계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기적과 예언의 은사와 같은 자기가 받은 선물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옹호자인 프란치스코는 왕과 왕족들에게 직선적인 충고를 하여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왕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교황 식스토 4세의 요구에 따라 프란치스코는 파리에 가서 프랑스 왕 루이 11세를 도와 죽음을 잘 준비하도록 했다.(이야기 참조)


왕에게 봉사하고 있는 동안 프란치스코는 국가 정책을 진로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 왕실 간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평화를 회복하게 했고,


루이 11세에게 논쟁의 대상이 된 땅의 일부를 스페인에 되돌려 주도록 설득함으로써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데에도 협력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 궁전에 머물던 1507년 4월 2일 성금요일에 세상을 떠났고 죽은 지 12년이 지난 1519년에 시성되었다.





파올라의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지나치게 활동적인 세계에 대하여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활동적인 일에 부름을 받은 관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기도와 일 사이의 긴장을 예민하게 느껴야 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의 일생에서 그것은 생산적인 긴장이었다.


왜냐하면그는 국제 관계에 뛰어들게 된 자신의 업무에서 관상 생활의 열매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와 절제의 견고한 기초 위에서 교회의 부르심 앞에 매우 진지하고 휼륭한 응답을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 나가서 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인 자신을 통하여 일하시는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는 중풍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왕은 이탈리아에 있는 프란치스코에게 사람을 보내 그와 그의 수도원을 돕겠다는 많은 약속을 하며 프랑스에 와서 자기를 고쳐 달라고 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를 가라고 명령할 수 있는 교황에게 왕이 직접 부탁할 때까지 거절했다.


루이 11세는 프란치스코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청하자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만큼 다만 그를 위해 기도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성인은 여러 차례 왕과 만났다. 프란치스코는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에 지혜가 넘쳐 그를 통해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증언했다.


기도와 표양으로 그는 왕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왕은 그의 팔에 안겨 평안히 운명할 수 있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죽음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는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기도도 하고, 성지 순례도 다녀오는 등 피 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자 그는 파올라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성 프란치스코에게 와 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거절하자 식스토 4세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 결국 1482년 4월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루이 왕은 그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프란치스코는 모든 생명은 오직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루이 왕은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프란치스코의 도움으로 그 해 8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확실한 것은 죽음은 아주 개인적인 사건이며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 말은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와 선행을 미루지 말라는 뜻이다.


죽음을 실체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삶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ubi caritas - gregorian chant

































FRANCIS of Paola



Memorial


2 April


Profile


Following a pilgrimage in his teens to Rome and Assisi, he became a hermit in a cave near Paola. Before he was 20 years old he began to attract followers. By the 1450’s the followers had become so numerous that he established a rule for them and sought Church approval. This was the founding of the Hermits of Saint Francis of Assisi, who were approved by the Holy See in 1474. In 1492 they were renamed the Franciscan Order of Minim Fiars, which means they count themselves the least of the family of God.



Prophet. Miracle worker. Reputed to read minds. In 1464 Francis wanted to cross the Straits of Messina to reach Sicily, but a boatman refused to take him. Francis laid his cloak on the water, tied one end to his staff to make a sail, and sailed across with his companions. Franz Liszt wrote a piece of music inspired by the incident.



Defender of the poor and oppressed. Gave unwanted counsel and admonitions to King Ferdinand of Naples and his sons. Traveled to Paris at the request of Pope Sixtus IV to help Louis XI prepare for death. Used this position to influence the course of national politics, helping restore peace between France and Brittanny by advising a marriage between the ruling families, and between France and Spain by persuading Louis XI to return some disputed land.



Francis died on Good Friday while still at court in France. In 1562 Huguenots broke open his tomb, found his body incorrupt, and burned it. The bones were salvaged by Catholics, and distributed as relics to various churches.


Born


1416 at Paola, Calabria, Italy


Died


2 April 1507 at Plessis, France


Canonized


1512 by Pope Julius II


Patronage


against fire, boatmen, Calabria, Italy (named by Pope John XXIII in 1963), mariners, naval officers, plague epidemics, sailors, sterility, travellers, watermen


Representation


man with the word "charitas" levitated above a crowd; man holding a skull and scourge; man sailing on his cloak


Readings


Fix your minds on the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 Inflamed with love for us, he came down from heaven to redeem us. For our sake he endured every torment of body and soul and shrank from no bodily pain. He himself gave us an example of perfect patience and love. We, then, are to be patient in adversity.



Take pains to refrain from sharp words. Pardon one another so that later on you will not remember the injury. The recollection of an injury is itself wrong. It adds to our anger, nurtures our sins and hates what is good. It is a rusty arrow and poison for the soul. It puts all virtue to flight.



Be peace-loving. Peace is a precious treasure to be sought with great zeal. You are well aware that our sins arouse God’s anger. You must change your life, therefore, so that God in his mercy will pardon you. What we conceal from men is known to God. Be converted, then, with a sincere heart. Live your life that you may receive the blessing of the Lord. Then the peace of God our Father will be with you always.


from a letter by Saint Francis of Paola








San Francesco da Paola Eremita



2 aprile - Memoria Facoltativa


Paola, Cosenza, 27 marzo 1416 - Plessis-les-Tours, Francia, 2 aprile 1507



Gia la sua nascita ebbe i colori del miracolo: i suoi genitori non si aspettavano piu un figlio. L’aveva tanto desiderato da chiedere l’intervento del Santo d’Assisi, in onore del quale, quando inaspettatamente arrivo, lo battezzarono con il nome di Francesco.. La sua era una famiglia di poveri contadini. Allevato senza agi, Francesco rimase fedele ad un suo ideale di vita austera e impose in seguito, un esistenza dura anche ai suoi seguaci, tanto che la sua “regola” fu criticata anche dagli ecclesiastici per la severita. Mori a novantuno anni.



Patronato:Calabria, Naviganti, pescatori.


Etimologia: Francesco = libero, dall’antico tedesco




Chi ha attraversato lo stretto di Messina avra notato che uno dei grossi traghetti che fanno spola tra l’isola e il continente reca sulla prua il nome di S. Francesco di Paola e probabilmente si sara domandato per quale motivo hanno scelto quel nome. Cinque secoli fa un povero frate, lacero e smagrito dai lunghi digiuni, proveniente da Cosenza, giunto nei pressi di Reggio Calabria, domando ad alcuni barcaioli di traghettarlo oltre lo stretto per recarsi in Sicilia. Al rifiuto di questi, il frate stese il mantello sull’acqua, vi sali sopra e quella insolita imbarcazione si allontano dalla riva veleggiando verso il porto di Messina.


Il prodigio valse al frate la fama di taumaturgo e al futuro santo il titolo di patrono dei marinai. Di miracoli e costellata la vita di questo austero santo, vissuto in mezzo agli onori senza neppure accorgersene. La sua fama aveva valicato le Alpi e lo stesso re di Francia, Luigi XI, lo volle accanto a se, o meglio pretese che il papa gli inviasse in tutta fretta il taumaturgo calabrese perche lo guarisse dalla grave malattia che lo aveva colpito.


L’umile frate, avvertito da un messo pontificio, compi il lungo viaggio fino a Parigi. Al sovrano, per nulla rassegnato a morire, non restitui la salute del corpo, ma quella dell’anima, conciliandolo con Dio e disponendolo ad accettarne la divina volonta. Prima di morire, Luigi XI lo nomino direttore spirituale del figlio e successore Carlo VIII.


Francesco, nato a Paola, in Calabria, nel 1416, e uno dei piu giovani fondatori di Ordini religiosi che la storia registri. All’eta di tredici anni aveva vestito l’abito francescano, ma due anni piu tardi era letteralmente sparito dalla circolazione. Trascorsero alcuni anni prima che un cacciatore, guidato da un capriolo, ne scoprisse il rifugio tra le aspre montagne nei pressi di Cosenza. La fama della sua santita e dei suoi miracoli attiro al suo seguito uno stuolo di giovani desiderosi di seguirne l’esempio. Ai suoi seguaci, gli Eremiti di S. Francesco di Paola o Minimi, lascio un eccezionale invito alla penitenza, riducendo il loro menu per 365 giorni all’anno a pane, pesce, acqua e verdura. Tuttavia le sue dure penitenze non accorciarono affatto la sua vita, tanto che visse fino alla bella eta di 91 anni. Mori in un venerdi santo, il 2 aprile 1507, durante il suo soggiorno in Francia, a Plessis-les-Tours. Fu canonizzato nel 1519, a soli dodici anni dalla morte e viene proposto ancora oggi non solo come modello di penitenza, ma anche di coraggio nel denunciare "le malversazioni dei potenti" (Paolo VI, 27 maggio 1977).


Autore: Piero Bargellini






Francis of Paula




born: 1416



Died: 1507



Canonized: 1512



Feast Day: April 2



Patron Saint of: sailors



Also known as Francis of Paola. Francis of Paula, named after St. Francis of Assisi, was born in 1416 in Calabria, Italy, to devoutly religious parents. At 14 years of age, while on a religious family pilgrimage to Rome, Francis decided to become a hermit in a cave near his home in Paola, Italy. He was soon joined by two others attracted by his austere lifestyle. The three soon left the cave for chapel built by the villagers. The society continued to grow and got the attention of the local archbishop; in 1436, the Archbishop of Cozenza gave his approval. As the unofficial order continued to grow, so too did reports of miracles. In 1474, Pope Sixtus IV officially approved the new order and named it the Franciscan Minim Friars. In 1483, Francis was summoned by Louis XI of France to be spared from a severe illness. Reluctantly, Francis went to Louis XI, but instead of performing a miracle as Louis XI had wanted and expected, Francis convinced Louis XI to willingly accept his fate. At the request of Louis IX’s successors, Francis of Paula remained in France until his death in 1507. During his life, Francis of Paula was known for his ability to read the thoughts of others and for his prophesies. One noteworthy miracle was reported to have happened at the Straits of Messina which he sailed across on a clo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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