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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3월8일


천주의 성 요한 수도자


St. John of God


St. Joannes de Deo, C


San Giovanni di Dio Religioso


8 March 1495 at Montemoro Novo, Evora, Portugal


- 8 March 1550 while praying before a crucifix, dying from a illness contracted while saving a drowning man


Beatified:21 September 1630 by Pope Urban VIII


Canonized:16 October 1690 by Pope Alexander VIII


Order of Hospitallers of Saint John of God


병원과 병자들의 주보성인.카톨릭 간호협회와 간호사들의 주보 성인





1495년 포르투갈에서 태어났다.


군인으로서 위험한 생활을 한 후 그의 여생을 선업에 바치고자 하여 병자를 돌보는 데 완전히 헌신했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병원을 설립했고 제자들을 모았으며,


제자들은 후에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를 창설했다.


병자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 탁월했다. 1550년 그라나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주의 성 요한 동상


데 아가피트 발미탸나作. 바르셀로나 아동병원.



천주의 성 요한 수도자의 편지에서


(Archiv. gen. Opd. Hospit., Quaderno: De las cartas..., ff’ 23’’-24’,27’ O.


Marcos,Cartas y escritos de Nuestro Glorioso Padre San Juan de Dios, Madrid, 1935, pp.18-19;48-50)



그리스도께서는 충실하시어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크오신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선행을 할 수 있을 때마다 결코 선행을 중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당신이 우리에게 백배로 갚아 주시고 영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이익을 얻는 복된 길입니다! 우리를 회개에로 부르시어 죄를 뉘우치게 하시고,


먼저 우리 자신에게 그 다음 우리 이웃에게 사랑의 봉사를 하도록 하시면서


우리와 이렇게 훌륭한 거래를 하시는 이 복된 상인에게 누가 있는 것을 모두 바치지 않겠습니까?


물이 불을 끄듯 사랑은 우리 죄를 씻어버립니다.



이 집에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 자신도 그들이 어떻게 살아 나가는지 보고 자주 놀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며 모든 이를 먹이십니다.


이 도시는 큰 도시이고 특히 지금과 같은 겨울철에는 날씨가 매우 춥기 때문에,


이 하느님의 집을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집에는 병자와 건강한 자,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포함하여 110명 이상이 머물고 있습니다.


이 집은 모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수족을 못쓰는 사람, 불구자, 나병환자, 벙어리, 정신 병자, 중풍 병자, 옴으로 고생하는 이들,


나이 많아 움직일 수 없는 이들,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 외에 많은 순례자들과 방랑자들도 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음식을 준비할 불과 물 그리고 소금과 그릇을 줍니다.


이 모든 것을 하기에는 돈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해 주십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빚을 지고 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포로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너무도 빚을 많이 져 빚 때문에 포위당할 때는 밖에 출입할 생각도 감히 못합니다.


수많은 내 형제들과 이웃들이 가난 속에 있고 힘에 겹도록 고통받으며


너무도 큰 어려움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압박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을 때 나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


러나 나는 내 마음을 아시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께서 내 빚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때 나는 "오로지 그리스도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인간을 신뢰하는 자에게 저주 있으라." 고 말합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사람들로부터 저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충실하시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분께 영원히 감사를 드립시다. 아멘.


(가톨릭홈에서)





천주의 성 요한(1495-1550)은 누구인가?



천주의 성 요한은 카톨릭 교회의 성인이며,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의 창립자이다.


그의 본 이름은 요한 시데다 이다.


하지만 그가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약 13년 동안 가난한 사람, 정신질환자, 박해받는 이들,


창녀, 노인, 고아, 과부등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복음 정신에 입각하여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것을 보고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 하여 천주의 요한 이라 불리 웠다.



천주의 성 요한이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는 많은 인생 역정이 있었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어느 이름 없는 순례자를 따라 고향을 등지고 목동, 군인, 노동자, 책장사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어느 하나에 얽매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그는 지극히 평범한 종교행사라 할 하나의 사건에서 삶의 전환을 맞게된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한 성인인 세바스챤을 기리는 축일 미사에서


아빌라의 요한 신부의 강론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스페인에서 유명한 설교가로 많은 이들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회심시켰던 아빌라의 요한


장차 하느님의 사랑의 투사로 나설 평신도 한 사람을 움직였다.



*아빌라의 성 요한 축일:5월10일.게시판1151번.1755번.


*성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축일:1월20일.게시판901번,157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그날의 강론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순교한 세바스챤 성인의 삶이 주제 였는데,


천주의 성 요한에게 미친 강력한 힘과 효력은 그의 강론이 끝나기도 전에 나타났다.


그의 종교적 회심은 가히 미쳤다 할 만큼 광적인 행동으로 나타났고,


그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정신병원에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왕립병원에서 환자들을구해내는 천주의 성 요한


(고메즈 모레노作.피사박물관)



병원에 수용된 그에게 치료가 시작되었다. 당시의 치료란 말할 필요도 없는 채찍질 이었다.


비인간적인 치료 방법과 학대에 고통을 겪은 그는 쇠사슬에서 풀려난 즉시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다른 환자들을 돌보아 주기 시작하였고


그 안에서 소외된 채 적대감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환자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것은 불쌍한 이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따뜻하고 친절한 장소,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열려있는 따뜻한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강한 바램이었다.



종교적 회심에서 비롯한 마음의 상심에서 벗어난 그는


병원에서 나온 후 몇몇의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세웠다.


당시의 병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병원이 아니다.


다만 병자들을 수용하는 기능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병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단 병자들뿐만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노인들, 어린이들 등이 함께 있는


오늘날의 양노원이나 복지원에 가까운 병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았다.



현대의 병원이 그러하듯이 환자들을 질병에 따라 분류하여 수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침대를 따로 쓰도록 하였다.


당시에 유명한 병원들도 각 환자마다 침대를 따로 제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은 19세기 초엽에 영국의 한 병원에서 이루어질 일이었다.





환자를 돌보는 천주의 성 요한



그는 환자들 뿐만 아니라 집 없이 떠도는 노인과 고아, 과부등을 위해서 집을 마련하고


비록 보잘 것 없는 집이지만 인간답게 넉넉한 자리를 잡고 깨끗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쉴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왕립병원에서 자신이 당한 대우를 생각해서 정신질환자들을 각별한 관심으로 보살 폈다.


그가 시행한 정신질환자를 위한 치료법은


스페인에 있었던 여타의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었던 치료법과는 달랐다.


각자의 방을 주고 깨끗하고 따뜻한 환경에서 그들의 심신을 보살폈던 것이다.



20세기 초엽에 이탈리아의 저명한 정신의학자인 롬보로소 교수는


천주의 성 요한의 종교적 회심에서 비롯한 ’광기’를 연구하면서


그야 말로 현대의학의 선구자였다고 인정하였다.



"요한은 병자들의 간호에 있어서 분명히 개혁하였다.


그는 각 환자에게 개인 침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질환에 따라 분류시키려는 생각을 한 최초의 장본인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수용소를 개방해서 행려자들이나 여행자들에게 잠잘 자리를 마련해준


현대 구빈원의 창시자인 것이다."



천주의 성 요한의 자유롭고 개방된 사랑의 정신은 정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환대이다.


이것은 단순히 주인이 손님을 집안에 맞아들이는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환대란 주인의 입장과 방식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그 자신의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는 것이다.


이런 환대의 삶을 살아간 천주의 성 요한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다.





천주의 성 요한-이그나즈 귄터作



1539년 가을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루치나의 집 시작(천주의 성 요한의 첫 공동체)


1572년 1월 교황 비오 5세, 천주의 성 요한 제자들의 공동체를 수도회로 인준


1690년 10월 교황 알렉산더 8세, 천주의 성 요한 시성


1886년 5월 교황 레오 13세, 천주의 성 요한을 병원과 병자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


1930년 8월 교황 비오 11세, 천주의 성 요한을 성 가밀로와 함께 카톨릭 간호협회와 간호사들의 주보 성인으로 선정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홈에서)





군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저버렸던 요한은 40세가 되었을 때 깊은 죄의식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남은 일생을 하느님께 대한 봉사로 바칠 것을 결심하고 즉시 아프리카로 향했다.


거기서 그는 포로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석방시켜 주고 자신은 가능하면 순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곧 순교에 대한 자신의 열망이 영적으로 순수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성물 판매점에서 비교적 단조로운 생활을 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아직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요한 데 아빌라 신부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은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매질을 가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크게뉘우치고 자비를 구하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정신 병원에 들어간 그는 요한 신부의 방문을 받았다.


요한 신부는 그에게 자신의 개인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일에 손을 뻗칠 수 있는 좀 더 적극적인 일을 해보라고 충고했다.


요한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을 떠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스스로 구걸을 하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그러자 요한의 훌륭한 활동에 자극을 받고 그의 신심에 감동된 많은 사람들이


돈과 물품으로 그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카타리파의 후작과 대주교도 있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요한의 관심과 사랑의 외적 행위 이면에는


그의 겸손한 정신에서 반영되는 깊은 내적 기도 생활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성이 많은 후원자들을 모아들여서 요한이 죽은 지 20년 뒤에는


천주의 성요한 의료 봉사 수도회가 조직되었고 오늘날은 세계적인 수도원이 되었다.



요한은 10년 동안의 헌신적인 봉사로 인해 병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병을 숨기고 건강한 것처럼 살았다.


그는 병원의 행정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후원자들을 위한 지도자를 임명했다.


그는 영적 친구이자 추종자인 안네 오소리오 부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죽었다.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친 천주의 성요한이 보인 철저한 겸손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과 지혜,인내,정열의 선물로써 그를 축복해 주셨다.


요한은 주님을 멀리 떠나 있다가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된 그의 초기 생활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구에르레로 대주교는 천주의 성요한이 뜨내기와 부도덕한 여인들을


병원에 데리고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


요한은 복종하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을 위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의 회개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병원에는 저 자신을 제외하고는 나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사실 가난한 사람들의 빵을 먹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구에르레로 대주교는 요한의 성실성과 겸손에 신뢰할 수밖에 없었으며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돌려 보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천주의 성 요한 동상


(페드로 데 메나作.피사박물관)



천주의 성 요한이라 함은 이 성인이 회개 후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점에서


이처럼 부르게 되었지만


그는 교회에서 빈첸시오와 같이 자선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원의 창립자로서 유명한 사람이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축일:9월27일.게시판666번,1387번.



그는 1495년 포르투칼의 한 작은 마을 몬테모로 노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극히 신심이 깊었지만 어린 요한은 부모와 달리


그다지 신앙에도 열심이지 않고 모험심(冒險心)과 호기심이 강해 도리어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그렇다 할 죄악에 물들지 않고 지낸 것은


그의 유일한 장점 즉 성모 마리아께 대한 깊은 존경심 때문이었다.



7세 때 그는 갑자기 스페인의 나그네로부터 그 나라의 애기를 듣고,


보고 싶은 호기심에 대담하게도 집을 나오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어머니는 그것이 화가 되어 중병에 걸려 곧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아버지도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리스본 시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그도 2,3년 후에 아내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요한은 태연하게도 그리워하던 나라 스페인에 가서


오로페사라는 백작가(伯爵家)의 목동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충실히 15년 동안 봉사한 보람이 있어서 주인에게 총애를 받아


나중에는 주인 딸과의 혼인문제까지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매일 여전히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던 요한은 굳을 결심으로 그 혼담을 물리치고


결국 그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럴 즈음 마침 당시 전쟁이 일어나 병정을 모집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기회로 스페인의 군인이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극히 불행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방종(放縱)한 환경에 물들고 유혹되어 마침내 죄악을 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엔테라비아에서 부상을 입고 위험에 처했을 때 마리아께 기도드리고 있는 요한



그러는 동안에 그는 두 번이나 죽을 뻔한 후 갑작스럽게 고향이 그리워져


부모의 소식도 알 겸 몬테모로 노보로 돌아왔다.


이미 부모는 세상을 떠났고, 이것도 자신의 불효의 탓이란 것을 들었을 때


그는 얼마나 놀라고 슬퍼했는지 모른다.


다시금 통회의 눈물로 젖은 요한은 이제야 전반새의 죄를 보속할 굳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를 위해 성 베드로 놀라스코(S. Petrus Nolascus)등과 같이


회교도의 포로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건너 가려고 생각하고 먼저 부모의 묘(墓)를 찾아사 이별을 오한 후


지브랄타르 해협을 거쳐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다.



*성 베드로 놀라스코 축일:1월28일.게시판919번,1591번.



그러나 우연히 도중에서 악한의 모함을 당해 포르투칼로부터 추방당한 어느 귀족을 알게 되었는데


그 가족은 낙심해 생계를 유지할 생각도 없이 다만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련한 처지였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 생각하고,


자기의 의복을 팔아 급한 것을 돕고 또한 공장에서 노동을 해서 번 월급을 전부 그 가족에게 희사했으므로


그들은 성인의 은혜에 감동되어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요한은 포로 구제의 일의 곤란함을 깨닫고 그페인으로 돌아와서 우선 지브랄타르에서,


다음에 그라나다 시에서 성구(聖具), 성화상(聖畵商)을 시작했다.


그리고 상업을 하는 한편 무식한 농부나 노동자의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성모께 대한 도리를 알려 주며


그들의 마음에 신덕을 심어 주려고 갖은 애를 썻다.


이와 같이 교리를 가르쳐 주는 일이 성격에 맞았던지 그는 그 일을 진정으로 좋아했으나


하느님께서는 후에 그를 더 존귀한 사업에 부르셨던 것이다.





1539년 1월 20일 성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축일(게시판1578번) 때의 일이다.


16세기 스페인에서 명성이 높았던 아빌라의 성 요한이 그라나다에 와서


대죄와 지옥에 대해 일장의 설교를 했다.


이것을 들은 천주의 요한은 매우 감동되어 다시금 자신의 과거의 죄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지금까지의 보속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그들의 용서를 청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발광하는 줄로 오해하고 끌어다가 정신병원이 입원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아빌라의 요한을 만나 위로를 받고 우울하던 기색도 사라져


이후부터는 일생을 자선 사업에 봉헌하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업의 시작으로서 그는 그라나다 사립 병원의 간호인이 되어 무보수로 일라도록 했으나


얼만 안 되어 그 병원에 화재가 났으므로 그는 독자적으로 한 병원을 창립할 계획을 갖고


즉시 노동을 해 임금을 저축하고 재료를 구입하며 기타의 비용에 충당하기로 했다.


물론 가난한 그에세는 여간 힘이 드는 사업이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셨기 때문에


의외로 빨리,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한 병원을 세울 수가 있었던 만큼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가련한 병자를 수용하여 그들에게 주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가능한 온갖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환자한테서 한 푼도 안 받았기 때문에 경비를 걱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로 인해 요한은 아침에 간호의 임무를 마치고 나서는 광주리를 어깨에 메고 항아리를 손에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선과 기부를 청하고


희사한 사람들에게는 감사의 뜻으로 성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자신은 극단적으로 검소한 수도 생활을 감수하며 구걸해 온 모든 것은


사랑하는 병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박애(博愛)의 정신을 나타냉 요한의 활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되어 그의 소문은 전국에 퍼져 이제는 귀족과 부호도 기꺼이 그의 사업에 헌금하게 되고


심지어는 국왕 필립보 2세까지도 의연금을 하사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병원을 확장하고 제반의 설비를 완전히 하고 더욱 불행한 병자를 구제했다.


더군다나 그의 협력자도 많이 모여왔으므로 한층 더 활발한 활동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요한은 따로 수도원을 세울 의사는 없었다.


다만 주교의 권고로 동료들은 모두 사제복과 비슷한 제복을 입게 되었다.




기도하는 사람. 천주의 성 요한



요한은 또한 매일 마을을 도는 동안 사람들의 생활상태 뿐 아니라,


그들의 쓸쓸한 마음에 자연히 동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도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자포자기로 몸을 망치는 윤락녀들의 생활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금요일마다 방문하고 그들에게 설득도 하고


갱생을 원하는 여자들에게는 그들의 부채를 지불해 주기도 하고,


바른 직업을 주기도 하며 혹은 진실한 결혼 생활을 이루도록 주선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아주 타락해 버린 창부들이나 그의 포주 및 악한들에게 미움을 받아


저주를 받은 일이나 조소를 받은 일, 매를 맞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수치를 잘 참아 인내하며 영혼의 빛을 상실하지 않은


가련한 여자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외에 또 요한은 자신도 정신병원에 들어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일이 있어서였음인지


정신병자에 대한 동정도 남보다 몇 배로 강해 그 보호구제의 방면에도 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성인은 자선과 박애를 위해 밤낮 활동을 계속했으므로 차차 몸이 쇠약해짐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마침 이른 봄에 헤니르강이 범람해 홍수가 났을 때,


물에 휩쓸려 떠내려온 한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흐린 물로 뛰어들어 몸을 냉하게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중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들은 그라나다의 주교는 친히 병석을 방문해 성사를 주고나서


“아무거나 말씀하실 것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은 “참으로 제 마음에 거리끼는 일이 세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오늘까지 하느님께 이루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은혜를 받았으나


아직 그의 만 분의 1의 은혜도 갚지 못한 것과,


둘째는 애써 바른 길에 돌아온 부인들이 다시 죄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과,


또 한가지는 이 명부에 기록되어 있는 환자의 부채가 아직 지불되지 않고 있는 점입니다”하고 말하면서


베개 밑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주교는 “당신의 첫때 근심은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탁합시다.


그리고 제2, 제3의 근심에 대해서는 불초하나마 내가 맡아서 어떻게든지 처리하겠으니 아무쪼록 한심하십시오”


하고 진실되게 약속했으므로 요한은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임종이 임박하자 그는 문득 일어나서 십자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때는 1550년 3월 8일이었다.



성인이 떠난 후도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전통을 계승해 자선 박애의 사업을 계속했는데,


후에 그 단체의 인가를 얻어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라 정하고,


회원들은 아직도 천주의 성 요한의 정신을 따라 병자의 간호에 힘쓰고 있다.


1690년에 시성되었고, 병자와 간호원 그리고 병원의 수호 성인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일관성



천주의 성 요한은 온통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아빌라의 성 요한의 강론을 듣고 감명을 받은 그는 그라나다 거리로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했다.


성 요한의 종교적 열정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정신 병원에 가둬 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천주의 성 요한을 찾은 아빌라의 성 요한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좋은 일을 시작하도록 권고하였다.


그 말을 듣고서야 천주의 성 요한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무를 해다 팔아 셋집을 얻고 그곳에서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만약 당신이 경주마와 같은 열정으로 멋진 출발을 했다면


그 열정을 잘 조절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만일 손질을 잘 해서 집 안에 들여놓으면 딱 맞을 것 같은 아주 고풍스러운 식탁 하나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을 가져다만 놓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어떻겠는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열정만으로는 식탁을 맞추고 갈고 윤내는 지리한 작업을 끝낼 수 없을 것이다.


처음의 열정에 힘든 수고와 인내가 합해질 때 바라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맨 먼저 출발한 사람이 반드시 마지막 승자가 아닐 수 있듯이 처음에 열정적으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


반드시 끝까지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끝내지도 못할 일을 시작하고 있지는 않는가? 시작한 일은 꼭 끝낸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AME DU CHRIST(Tradition Latin)-성요한수도회














































JOHN of God



Also known as


Juan de Dios


Memorial


8 March


Profile


He grew up working as a shepherd, misspent a wild youth, and travelled over much of Europe as a soldier and mercenary. Fought through a brief period of insanity. In his 40’s, to make up for the misery he had caused as a soldier, he left the military, rented a house in Granada, Spain, and began caring for the sick, poor, homeless and unwanted. He gave what he had, begged for those who couldn’t, carried those who could not move on their own, and converted both his patients and those who saw him work with them. John founded the Order of Charity and the Order of Hospitallers of Saint John of God. Friend of Saint John of Avila.


Born


8 March 1495 at Montemoro Novo, Evora, Portugal


Died


8 March 1550 while praying before a crucifix, dying from a illness contracted while saving a drowning man


Beatified


21 September 1630 by Pope Urban VIII


Canonized


16 October 1690 by Pope Alexander VIII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 John)


Patronage


alcoholics, alcoholism, bodily ills, bookbinders, booksellers, dying people, firefighters, heart patients, hospitals, hospital workers, nurses, publishers, printers, sick people, sickness, Tultepec Mexico


Readings


Labor without stopping; do all the good works you can while you still have the time.



Saint John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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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we look forward to receiving God’s mercy, we can never fail to do good so long as we have the strength. For is we share with the poor, out of love for God, whatever he has given to us, we shall receive according to his promise a hundredfold in eternal happiness. What a fine profit, what a blessed reward! With outstretched arms he begs us to turn toward him, to weep for our sins, and to become the servants of love, first for ourselves, then for our neighbors. Just as water extinguishes a fire, so love wipes away sin.



So many poor people come here that I very often wonder how we can care for them all, but Jesus Christ provides all things and nourishes everyone. Many of them come to the house of God, because the city of Granada is large and very cold, especially now in winter. More than a hundred and ten are now living here, sick and healthy, servants and pilgrims. Since this house is open to everyone, it receives the sick of every type and condition: the crippled, the disabled, lepers, mutes, the insane, paralytics, those suffering from scurvy and those bearing the afflictions of old age, many children, and above all countless pilgrims and travelers, who come here, and for whom we furnish the fire, water, and salt, as well as the utensils to cook their food. And for all of this no payment is requested, yet Christ provides.



I work here on borrowed money, a prisoner for the sake of Jesus Christ. And often my debts are so pressing that I dare not go out of the house for fear of being seized by my creditors. Whenever I see so many poor brothers and neighbors of mine suffering beyond their strength and overwhelmed with so many physical or mental ills which I cannot alleviate, then I become exceedingly sorrowful; but I trust in Christ, who knows my heart. And so I say, "Woe to the man who trusts in men rather than in Christ."



from a letter written by Saint John of God





San Giovanni di Dio Religioso



8 marzo - Memoria Facoltativa


Montemor-o-novo, Portogallo, 8 marzo 1495 ? Granada, Spagna, 8 marzo 1550



Giovanni, successivamente contadino, militare, commerciante, si senti alla fine chiamato a servire Cristo nei malati. Fondo ospedali, dove pieno di fiducia nella provvidenza di Dio e sollecitando la cooperazione dei buoni (“fate beni, fratelli, a voi stessi”) curo con straordinaria sollecitudine gli infermi del corpo e dello spirito. Ne continuano l’opera i Fatebenefratelli. (Mess. Rom.)



Patronato:Infermieri, Medici, Ospedali, Cardiopatici, Librai, Stampatori


Etimologia: Giovanni = il Signore e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Le vie della santita sono infinite e lo dimostra la vicenda terrena di questo straordinario santo. Juan Ciudad, nato a Montemor-o-novo, presso Evora (Portogallo) l’8 marzo 1495, all’eta di otto anni scappo di casa. A Oropesa nella Nuova Castiglia, dove sosto per la prima tappa, la gente, non sapendo nulla di lui, neppure il cognome, comincio a chiamarlo Giovanni di Dio e tale rimase il suo nome. Fino a 27 anni fece il pastore e il contadino, poi si arruolo tra i soldati di ventura. Nella celebre battaglia di Pavia tra Carlo V e Francesco I, Giovanni di Dio si trovo nello schieramento vincitore, cioe dalla parte di Carlo V. Piu tardi partecipo alla difesa di Vienna stretta d’assedio dall’ottomano Solimano II.


Chiusa la parentesi militaresca, finche ebbe soldi nel borsello vago per mezza Europa e fini in Africa a fare il bracciante; per qualche tempo fece pure il venditore ambulante a Gibilterra, commerciando paccottiglia; stabilitosi infine a Granata vi apri una piccola libreria. Fu allora che Giovanni di Dio muto radicalmente indirizzo alla propria vita, in seguito a una predica del B. Giovanni d’Avila. Giovanni abbandono tutto, vendette libri e negozio, si privo anche delle scarpe e del vestito, e ando a mendicare per le vie di Granata, rivolgendo ai passanti la frase che sarebbe divenuta l’emblema di una nuova benemerita istituzione: "Fate (del) bene, fratelli, a voi stessi".


La carita che la gente gli faceva veniva spartita infatti tra i piu bisognosi. Ma gli abitanti di Granata credettero di fare del bene a lui rinchiudendolo in manicomio. Malinteso provvidenziale. In manicomio Giovanni si rese conto della colpevole ignoranza di quanti pretendevano curare le malattie mentali con metodi degni di un torturatore. Cosi, appena pote liberarsi da quell’inferno, fondo, con l’aiuto di benefattori, un suo ospedale. Pur completamente sprovvisto di studi di medicina, Giovanni si mostro piu bravo degli stessi medici, in particolar modo nel curare le malattie mentali, inaugurando, con grande anticipo nel tempo, quel metodo psicoanalitico o psicosomatico che sara il vanto (quattro secoli dopo ... ) di Freud e discepoli.


La cura dello spirito era la premessa per una proficua cura del corpo. Giovanni di Dio raccolse i suoi collaboratori in una grande famiglia religiosa, l’ordine dei Fratelli Ospedalieri, meglio conosciuti col nome di Fatebenefratelli. Giovanni mori a soli cinquantacinque anni, il giorno del suo compleanno, l’8 marzo 1550. Fu canonizzato nel 1690. Leone XIII lo dichiaro patrono degli ospedali e di quanti operano per restituire la salute agli infer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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