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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ICON]예수의 변모.노브고로드화파. 88x57cm.15세기말.노브고로드 역사 건축박물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여,


주는 산에서 변모하시어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광을 나타내셨도다.


테오토코스의 중재로서


우리 죄인들에게도 영원한 빛을 비추시는 이여,


주께 영화로다.



(주의 변모축일 아뽈리띠끼온 중.)이콘-신비의 미에서





Mount Tabor. Christ in Glory



축일:8월6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Transfiguration of Christ


Transfiguratio Domini


The Transfiguration of the Lord

Trasfigurazione del Signore





Mount Tabor. Christ in Glory.The Transfiguration of Jesus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 제자들 앞에서


당신의 신적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것(마태 17,1-8)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부 지역 교회에서 기념해 오다가 10세기경에 전례로 도입되었으며,


1456년 교황 갈리스토 3세 때에 보편 교회의 축일로 제정되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40일 앞두고 우리는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이 축일은 5세기부터 동방에서 지내 왔다.


(성십자가현양축일:9월14일,게시판639번)


전례는 사순 제2주일에 이미 거룩한 변모 사건을 기념한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주님의 세례를 또 다른 관점에서 기억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을 둘러싼 구름’과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요르단 강의 계시를 새롭게 한다


(입당송:빛나는 구름 속에서 성령께서 보이고 아버지의 소리가 들려 왔도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여기에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훗날 예수님께 일어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 준다(루가 24,26-27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십자가 죽음의 걸림돌을 극복하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감사송).


그러나 이 사건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모든 믿는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실 하느님의 놀라운 선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본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영성체송: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람이 되리니, 그 때에는 그분의 참모습을 뵈올 것이니라),


당신께서 보여 주신 그 영광이 당신의 몸인 교회 안에도 나타날 것을 보여 주셨다(감사송).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 때에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모습은 그리스도 자신의 참모습이며,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를 뵙게 될 그 날의 모습이다(영성체송).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빛나는 모습을 닮으려고 준비한다


(영성체 후 기도).






마르9,2-10.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 가셨다.


그 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고


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


4 그런데 그 자리에는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5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6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7 바로 그 때에 구름이 일며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8 제자들은 곧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예수와 자기들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산에서 내려 오시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10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서로 물어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이 저물어 가는 때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주님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그 기회만 엿보고 있는 때이므로 파스카 축일이 되어도


마음대로 예루살렘에 갈 수 없는 험악한 공기였다. 적의 살기 띤 눈초리는 도처에 있었고,


기적을 행한 현장에서까지 주님의 신변은 위험한 처지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요르단 강을 타고 올라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셨다.


이 지방은 유다에 속한 곳이 아니므로 다소 안심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3일간을 쉬시며 장래 일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셨다.


쉬신다 해도 물론 전혀 활동을 중지한 것이 아니라,


다만 박해자들을 경계할 필요성이 없는 정도의 정신적 안정에 불과한 것이다,



성 베드로 사도가 예수께서 하느님의 성자이심을 공공연히 선언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였다.


예수께서는 그때부터 자기가 많은 수난을 받을 것과 죽은 후 3일만에 부활할 것 등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베드로 사도 같은 사람의 신덕을 강하게 하시기 위해서는


잠시만이라도 자기의 천국에서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로 어떤 산에 올라가셨다.


전설에 의하면 그 산은 타볼 산이라는 것이다.





산꼭대기에 도달하자 제자들은 피곤해 돌에 걸터앉아 쉬었다. 그러다가 스르르 유쾌한 낮잠에 잠기고 말았다. 얼마 동안 그들은 그런 상태에 있었으리라.


그러다 돌연 그들은 논을 떴다. 그런데 놀란 것이, 태양보다 더 강한 광선이 앞에서 두루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눈이 부시어 눈을 비비고 다시 자세히 보았다.


그러니까 그 광선 가운데 틀림없이 예수께서 서 계셨다. 그러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그 얼굴은 태양과 같이 빛나며 그 의복은 눈보다 더 희게 비치었다.


또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주님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대 예언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예수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잠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이 들어 베드로가 가까스로 입을 뗄 수가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했다.


우리는 이말이 얼마나 철없는 말인가 하고 웃어서는 안된다.


다만 너무 충격을 받아 자기도 모르레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베드로는 너무 감동했으므로 자기에 대해서나 혹은 다른 사도들의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자기들은 음식물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것까지도 잊어버렸다.


다만 한 가지는 언제든지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천국 영광의 편모라도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장차 당신이 수고, 수난하길 때나 혹은 그들 자신이 수난을 겪을 때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굳은 신앙을 길러 주시기 위함이었다.



사도들이 본 예수의 변모가 얼마 동안 계속됐는가에 대해서는 성서에 아무 말도 없다.


추측컨데 극히 단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 덩어리의 구름이 곧 그들을 둘러쌌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구름도 역시 빛이 났다.


그리고 홀연 그 가운데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는 곧 성부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울리자 제자들은 땅에 엎드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곧 예수께서 그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시며 "자! 모두들 일어나라. 두려워할 것 없다."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사방을 두루 살펴본 즉 과연 아무도 없었다.


모세도 엘리야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주님 한 분만이 서 계셨다.


주님께서도 바로 전과 같은 영광의 모습이 아니고 보통 모습으로 계셨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모두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하고 엄격히 명하셨다. 3인의 제자는 그 말씀을 잘 지켜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비밀을 지켰다.


그 후부터는 기회 있는 대로 그때 산에서 본 변모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성 요한 사도는 자기복음서에 당시의 형상을 상기하며 기록하기를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요한 1, 14)고 했다.


또 성 베드로 사도는 더욱 세밀히 기록하기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여러분에게 알려 준 것은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에 근거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그분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 왔을 때의 일입니다"했다.



이와 같이 성 베드로는 주님의 변모를 잠시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도 위대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옛날부터 이날을 큰 축일로 정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예수와 또 그가 가르치신 복음에 대하여 견고한 신앙을 갖도록 하기에 대단한 뜻이 있는 것이다.





Transfiguration - ANGELICO, Fra.


1440-41.Fresco, 193 x 164 cm.Convento di San Marco, Florence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 주교가 주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한 강론에서


(Nn. 6-10: Melanges d’archeologie et d’histoire 67 [1955], 241-244)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다볼산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변모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다니실 때 하늘 나라와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하늘 나라에 대해 아직 확신하고 있지는 못한 듯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견고히 하고 깊게 하시며


또 현재의 사건을 통하여 장차 올 것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다볼산에서 하늘 나라의 예표로서


당신 신성의 광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제자들이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 속에서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복음 사가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원하시기만 한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만을 따로 데리 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바로 오늘 이 축일에 기념하는 기적들입니다. 이것이 다볼산에서 성취된 구원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광이 지금 우리를 여기에 모이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뽑으시고 조명해 주신 제자들과 함께 표현할 수 없는 이 거룩한 신비들의 깊은 뜻을


꿰뚫어 볼 수 있도록 우리는 산꼭대기에서부터 우리를 당신께로 끈질기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목소리를 듣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 곳에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늘로부터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신 것처럼 우리도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면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 빛으로 둘러싸게 되고


우리 영혼의 모습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모되며,


그분의 모상으로 형성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더욱 큰 영광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열렬한 마음과 기쁨을 지니고 그 산으로 달려가 모세와 엘리아, 야고보와 요한처럼 구름 속에 들어 갑시다.


베드로처럼 이 신적 영상에 넋을 잃고 이 아름다운 변모의 영광으로 변모되어


이 세상 것들을 벗어나 높이 들리우도록 합시다.


육신과 피조물은 뒤에다 남겨 두고 탈혼에 빠진 베드로처럼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창조주께로 향합시다.



베드로여, 정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좋겠습니다.


영영 세세 여기에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고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의 빛 속에 거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더 보배롭고 더 거룩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그분의 신적 모상으로 변모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광체요 기쁨이요 환희인 이곳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서 마음은 안식을 누리고 평화로우며 평온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여기에서 아버지와 함께 거처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 들어오시며 우리에게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화들이 있고 영원한 선물들이 쌓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후세의 시작과 상징이 거울처럼 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동방의 영적 감각론중에서


우리가 편하게 지성적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교부들은 오리게네스를 따라 영적 감각이라고 불렀다. 발타살은 이 감각을 자연적 감각의 완성이자 신적인 것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전적으로 새로운 감각으로 이해한다. 무엇보다 이 감각은 은총이 주입된 결과이다.

즉, 영적감각은 하느님께서 계시 안에서 취하신 풍요롭고 다양한 길로 변화된 인간의 감각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향기를 맡으며, 그분의 감미로움을 맛보고, 그분의 현존을 만져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영적인 봄과 영적인 들음과 영적인 읽음에 있다.


니싸의 그레고리오스에 따르면, 참된 영적인 봄(觀想,眞知,eidesis)은 역설적이게도 "보지 않으면서도 보는 것이다". -『모세의 생애』2, 163(to idein en to me idein)

이 당착어법은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성, 비대상성을 가리킨다. 하지만 영적인 봄의 목표는 얼굴을 마주하고 바라보는 것이다(1고린 13,12 참조). 그때는 하느님께 내가 알려진 것처럼 나도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다. 창조주의 시선과 피조물의 시선은 눈들이 서로 응시함으로써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봄의 상호 응시의 일치와는 달리 듣는 행위는 보다 완전한 순명을, 즉 창조주로부터 자신을 보다 더 겸손하게 구별하는 피조물성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영적 감각들을 통하여 동방,서방 가톨릭 교회를 특징지어 보는 발타살의 교회관은 흥미롭다. 발타살에 의하면, 동방교회는 요한적이다. 그것은 봄의 교회이다. 반면 서방교회는 공관복음적, 바울로적이다. 그것은 들음의 교회다. 동방에서는 로고스가 의미와 형形(idea)을 뜻하나, 서방에서는 로고스가 말(Verbum, word)을 뜻한다.(ibid., 482.)

참고로 14세기말 러시아에서 제작된 '그리스도의 변모'[그림1]에서는 세 제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려있다. 그러나 서방의 Duccio di Buoninsegna(1260-1318년경)가 그린 '그리스도의 변모'[그림2]에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빛도 없으며 세제자들은 마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처럼 일어나 있다.




[그림1] 그리스도의 변모(이콘, 14세기 말)

Feofan Grek, Tretyakov Gallery, Moscow, 184x133cm







[그림2] 그리스도의 변모

Transfiguration -DUCCIO di Buoninsegna

1308-11, Tempera on wood, 48 x 50,5 cm, National Gallery, London



동방에서, 창조된 우주는 거대하고도 총체적인 성사요 신비가 되었다. 그 안에서 교회적, 전례적 성사는 하나의 특수한 기능일 뿐이다. 이것이 막시무스 콘페소르 Maximus Confessor(580-662) 의 『신비 안내서』Mystagogia 의 내용이다. 그에게 우주 전체는 하느님께 향한 그리움(憧憬)이었다. 그러므로 동방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신화 神化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관상적인 동방교회와 달리 사도적인 서방교회는 자신을 빛이 아니라 어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의지와 보다 가까이 만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루터와 칼뱅을 거쳐 파스칼에 이르는 서방교회의 전통은, 지성소와 속세를 가르는 성화벽 聖畵壁(iconostasis) 이 아니라 설교대와 의자로 충분한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극단적인 동방(아토스 산, 즉 순수한 봄, 성사聖事와 극단적인 서방(Wittenberg, 즉 순수한 들음, 말씀)사이, 로마(베드로, 즉 바위)위에 세워져 있다.


(김산춘, 발타살의 신학적 미학 감각과 초월 , 분도출판사 2003, 154-158쪽에서)






tabor.In the Friary.






View from Tabor









♬Canto Gregoriano-Veni Sancte Spritus




update 2007.8.6.











Trasfigurazione del Signore

6 agosto - Festa


La liturgia romana leggeva il brano evangelico riferito all'episodio della trasfigurazione il sabato delle Quattro Tempora di Quaresima, mettendo così in relazione questo mistero con quello della passione. Lo stesso evangelista Matteo inizia il racconto con le parole: «Sei giorni dopo» (cioè dopo la solenne confessione di Pietro e il primo annuncio della passione), «Gesù prese con sé Pietro, Giacomo e Giovanni, suo fratello, e li condusse sopra un alto monte, in disparte. E si trasfigurò davanti a loro: il suo volto risplendette come il sole e le sue vesti divennero candide come la luce». C'è in questo episodio una netta contrapposizione all'agonia dell'orto del Getsemani. La trasfigurazione, che fa parte del mistero della salvezza, è ben degna di una celebrazione liturgica che la Chiesa, sia in Occidente come in Oriente, ha comunque celebrato in vario modo e in date differenti, finché papa Callisto III elevò di grado la festa, estendendola alla Chiesa universale. (Avvenire)



La liturgia romana leggeva il brano evangelico riferito all'episodio della trasfigurazione il sabato delle Quattro Tempora di Quaresima, mettendo così in relazione questo mistero con quello della passione. Lo stesso evangelista Matteo inizia il racconto con le parole: "Sei giorni dopo" (cioè dopo la solenne confessione di Pietro e il primo annuncio della passione), "Gesù prese con sé Pietro, Giacomo e Giovanni, suo fratello, e li condusse sopra un alto monte, in disparte. E si trasfigurò davanti a loro: il suo volto risplendette come il sole e le sue vesti divennero candide come la luce". C'è in questo episodio una netta contrapposizione all'agonia dell'orto del Getsemani. E’ evidente l'intenzione di Gesù di offrire ai tre apostoli un antidoto che fortificasse in loro la certezza della sua divinità durante la terribile prova della passione.

L'alto monte, non meglio identificato nel Vangelo, è quasi concordemente ritenuto il Tabor, che si erge nel cuore della Galilea e domina la pianura circostante. La data è da collocarsi tra la Pentecoste ebraica e la festa delle Capanne, nel secondo anno di vita pubblica, il 29, nel periodo dedicato da Gesù in modo particolare alla formazione degli apostoli. Quella montagna isolata era infatti molto propizia alle grandi meditazioni, nel silenzio solenne delle cose e nell'aria rarefatta che mitigava la calura estiva. E in questa suggestiva cornice Gesù si offrì alla vista dei tre prescelti in tutto lo splendore del suo corpo glorioso, quale sarebbe dovuto apparire in ogni istante per la naturale conseguenza della visione beatifica di cui godeva perennemente la sua anima, se per un miracolo d'amore e di umiltà non avesse costretto la propria umanità dentro l'involucro mortale, per offrire il suo corpo passibile di dolore in sacrificio al Padre per la nostra redenzione.

Con questa soprannaturale visione Gesù dava una conferma alla confessione di Pietro: "Tu sei il Cristo, Figlio del Dio vivente". Quell'attimo di gloria sovrumana era la caparra della gloria della risurrezione: "Il Figlio dell'uomo verrà nella gloria del Padre suo". Lo stesso tema del colloquio con Mosè ed Elia era la conferma dell'annunzio della passione e della morte del Messia. La trasfigurazione, che fa parte del mistero della salvezza, è ben degna di una celebrazione liturgica che la Chiesa, sia in Occidente come in Oriente, ha comunque celebrato in vario modo e in date differenti, finché papa Callisto III elevò di grado la festa, estendendola alla Chiesa universale, per ricordare la vittoria riportata nel 1456 a Belgrado contro i Turchi e di cui giunse notizia a Roma il 6 agosto.


Autore: Piero Bargel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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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1-Feb-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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