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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2월 21일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학자


ST. PETER DAMIAN


St. Pedro Damianus


San Pier Damiani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1007 at Ravenna, Italy -


22 February 1072 of fever at Ravenna while surrounded by brother monks reciting the Divine Office


Beatified:wasn’t


Canonized:never formally canonized; cultus developed almost immediately after his death;


cultus approved and extended to the whole Church in 1823 by Pope Leo XII





1007년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친 후 잠시 동안 교직생활을 하다가 이를 포기하고 폰테 아벨리나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그 은수처의 원장이 되어 그 곳과 이탈리아의 다른 지방에서 꾸준히 수도 생활을 발전시켰다.


어려운 시기에 살았던 그는 저술로써 로마 교황들을 도왔고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교황 사절로서 활약했다.


스테파노 9세는 그를 추기경에 올려 오스티아 교구장에 임명했다.


1072년 세상을 떠나자 즉시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의 편지에서


(Lib. 8,6: PL 144, 473-476)



슬픔 뒤에 따라오는 기쁨을 즐거이 기다리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여,


형제는 많은 시련을 겪고 있는 영혼의 쓴 맛을 달게 해줄 위로의 편지를 써 달라고 나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형제가 잘 생각해 본다면 형제가 필요로 하는 위로가 목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 형제를 아들처럼 교훈하시어 유산을 얻게 해 주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을 잘 새겨 두십시오.


"아들아, 네가 주님을 섬기려면 정의의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살며 스스로 시련에 대비하여라."



두려움과 정의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역경의 시련도 종이 받는 책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받는 아버지의 교훈입니다.


욥도 극심한 고통 중에서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그리하여 나를 산산이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죽여 주신다면,


차라리 그 것으로 나는 위로를 받고, 견딜 수 없이 괴롭지만 오히려 기뻐 뛰리라."


하느님께서 치실 때 뽑힌 이들에게는 그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들은 일시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천상 행복의 영광을 얻게 될 견고한 희망의 길에서 큰 진보를 이룹니다.



금속을 다루는 이는 금의 불순물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망치로 두들깁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금맥을 더 한층 빛나게 하려고 쇠 줄로 부지런히 문지릅니다.


"질그릇이 가마속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시련으로 단련됩니다." 그래서 복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가지 시련을 당할 때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자신의 악행 때문에 이승에서 일시적으로 고통당하고


선행 때문에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을 사람들이 즐거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런 이유로 형제가 채찍을 느끼게 될 때나 천상 벌의 매로 꾸짖음을 당할 때 실망감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투덜대는 불평이나 또는 우울과 의기 소침에 뻐져 들지 말고 낙심으로 인해 조급한 마음에 기울어져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형제의 표정을 평온하게 하고 마음 자세는 명랑하게 하며 입술은 감사의 말로 가득 차게 하십시오.



하느님의 계획은 놀랍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벌에서 구하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그분은 일으켜 주시기 위해 누르시고 고쳐 주시기 위해 잘라 내시며 들어 높이시기 위해 내버리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성서가 주는 여러가지 보증으로 인내하는 정신이 되도록 정신을 강하게 하여 슬픔 뒤에 따라오는 기쁨을 즐거이 기다리십시오.


희망이 형제의 기쁨을 일으키고 사랑이 형제의 열성에 불붙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형제의 마음은 기쁨과 열성으로 가득 차


외적인 고통을 잊을 수 있고 내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어쩌면 베드로 다미아노는 자신이 고아였고


그의 형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천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그토록 친절했는지 모른다.


가난한 사람 한두 명과 함께 자기 식탁에 앉는것이 그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들의 요구에 직접 봉사하기를 즐겨했다.



베드로는 라벤나의 대주교인 다른 형의 보호를 받게 되자 그를 박대하던 형의 무관심과 가난에서 벗어났다.


라베나의 대주교는 그를 좋은 학교에 보내 주었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베드로는 이 시기에 벌써 자기 자신을 엄격히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속옷으로 거친 모직 샤쓰를 입었고 철저한 단식을 했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다.


그러다가 그는 폰테 아벨라나에 있는 성로무알도의 개혁 베네딕토회에 들어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한 은수처에서 두 명의 수도자가 짝을 이루어 살았다.


베드로는 기도에 지극히 열심이었고 잠도 조금밖에 자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서 심한 불면증으로 고생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성서 공부를 했다.



수도원장은 자기가 죽으면 베드로로 하여금 그 뒤를 계승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원장이 된 베드로는 다섯 개의 다른 은수처를 찾았다.


또한 그는 수사들에게 기도와 고독한 생활을 고취시켰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청에서는 정기적으로 그를 불러들여서 시비중에 있는 두 수도원 사이,


아니면 로마와 일치하지 않는 성직자나 정부 관리들과의 화해나 문제해결을 위탁했다.



결국 교황 스테파노 9세는 베드로를 오스티아의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는 성직 매매를 근절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며, 자기 사제들에게 독신 생활을 지키도록 격려했고,


심지어는 교구 사제들에게까지도 공동 생활과 기도 및 수도 생활의 규정을 지키도록 요구했다.


그는 불필요한 여행을 하거나 청빈을 거스르고 너무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 등을 삼가하면서


수사들과 사제들에 대한 본래의 규율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그는 베상송의 주교에게 감사 위원들이 성무일도의 시편을 노래하면서 앉아 있는 것을 불평하기까지 했다.



그는 많은 편지를 썼는데 약 170편이 현재 남아 있다. 우리는 또한 그가 쓴 53편의 설교와 7편의 전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저술에 있어 이론보다는 예증과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그가 쓴 전례서는 그의 라틴 문체에 대한 재능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는 오스티아의 추기경직에서 은퇴할 것을 허락해 주도록 자주 청했으며 결국은 알렉산데르 2세가 그것을 허락했다.


베드로는 다시 수도자로 돌아온 것을 좋아하였으나 여전히 교황 사절로서 봉사해야 했다.


라벤나의 교황 사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열병으로 쓰러진 그는


자기 주위에 모인 수사들과 함께 성무일도 를 바치면서 1072년 2월 22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1828년에 레오 12세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베드로는 개혁자였다.


만일 그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쇄신 작업을 장려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오늘날 수많은 수도 공동체에서 세운 특별한 기도의 집과 마찬가지로


사제, 수도자,남녀 평신도가 함께 참여하는 기도의 모임이 점점 증가하며 기도를 강조하는 것도 매우 환영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미국에서만도 2천만 명으로 보고되는 불면증 환자들을 잘 이해하는 수호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덕행의 표양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충실히 전해 주자’ -성베드로 다미아노.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의 빛을 비추시오"(마태 5,14-16)라고 말씀하셨는데,


중세기의 유명한 교부 성베드로 다미아노 추기경이야말로 참으로 열렬한 신앙과 광대한 지식으로서 냉담과 불신의 암흑에 헤매는


그 당시의 사람들을 횃불과 같이 비추고 또한 올바른 길을 표시해 준 ’세상의 빛’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006년 이탈리아 라벤나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9세때 이미 양친을 여의고 처음에는 맏형의 집에서 양육되었지만, 이 사람은 가혹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베드로를 야비하게 대했다.


사제직에 있던 둘째형이 이를 보다 못해 자기가 맡아 사랑으로써 양육하는 한편 친히 초등교육을 베풀었다.


그러는 동안 베드로가 세상에서 드문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것을 충분히 발휘시키기 위해 동생을 대학에까지 보냈다.



베드로는 둘째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밤낮 열심히 공부해 대단히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영신에 관해서도 매우 예민한 그는 일찍부터 세속의 명예가 구름과 같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떠한 출세도 할 수 있을 만큼


양양하던 장래를 자기 스스로 포기하고 파엔자 시에서 가까운 산중에 들어가서 작은 초막을 짓고 오로지 기도와 고행으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민가와 세속을 떠나 대자연 속에 살게 된 그는 더욱 성령의 은혜를 방아 점점 더 영신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더 열렬한 신앙을 간직하게 되어,


그의 고신 극기의 생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탄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본래 겸손한 그는 자기 덕행의 빛을 남 앞에 드러내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지만, 숨기는 것보다 더 드러난다는 비유와 같이 성인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사방에 퍼졌다.


그래서 그의 덕망을 사모하여 교훈을 받으러 오는 이가 날로 증가했다. 그 중에도 베네딕토회 대수도원장은 자기 수도원 내부의 개혁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을 간청하고, 뒤에는 교황까지조 베드로의 인겨과 식견(識見)등을 중히 생각하고 교회 신앙의 수호를 의뢰하게 될 정도였다.



그 당시 교회는 슬프게도 규율이 문란해져, 냉담적인 풍조는 신자들간에는 물론, 수도자, 성직자 계급까지도 침입해


성직매매의 폐풍이 사방에서 행해졌고, 사제도 동정을 지키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교황의 청을 들어 이러한 풍기의 숙청에 헌신한 베드로는


옛적 성 요한 세례자와 같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제국을 순회하며 불을 토할 듯한 강론과 엄격한 자기 생활의 모범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결국 그들의 마음에 다시 신앙의 거룩한 불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오, 클레멘스, 레오, 스테파노, 니콜라오 등 교황이 그를 교회 부흥의 대 은인으로서 존경하고,


또한 독일황제 헨리코 3세가 성인과 서신으로 연락하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즐거워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특별히 스테파노 교황과 같은 이는 그의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1057년 그를 오스티아 추기경의 영직에 오르게 했다.


겸손한 베드로는 재삼 이를 사양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마침내 그 직을 받고나서 책임이 점점 더 중대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배로 열심을 분발해 갱신 사업에 노력했다. 그것으로 인해 일부 인사들에게 오해와 비난을 받은 일도 종종 있었지만,


본래 그런것에 개의치 않던 그는 다만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 분투 노력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정결한 마음을 가진 그의 활동이 얼마나 풍부한 결실을 냈는가는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노경(老境)에 들어선 베드로는 일체의 활동을 떠나 평소에 원하던 기도 생활로 돌아가 고요히 선종 준비를 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이 원의는 알렉산데르 교황때 이루어졌으니 한가한 몸이 되어서도 교회를 위해 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그것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대 회의에 교황 사절로서 참석하고 중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1072년 회의를 마치고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도중 그의 영혼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전의 위대한 공로에 대한 상을 받기 위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연옥, 성제에 관한 글을 남겼고, 사제 독신제 옹호를 비롯해 사제들에 관한 내용이 많다.


1828년, 교황 레오 12세는 그를 교회 박사로 선언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유혹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게으른 손은 악마의 작업장”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던 성인이다.


그는 일이나 기도를 하지 않을 때도 언제나 손을 움직여 유용한 물건을 만들었다.


게으름은 몸과 마음을 좀먹는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유혹이 그 공백을 향해 돌진해 들어온다.


심심해서 과자에 손을 뻗는 것처럼 해롭지 않은 유혹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혹은 영혼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유혹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혹의 파괴적인 힘은 우리의 삶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유혹의 덫에 걸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다.


바쁘게 일하는 것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일을 끝마쳤을 때 얻는 성취감과 자신감만큼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도 없다.


최선을 다해 어떤 일을 성취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진정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만일 자꾸 유혹에 빠진다면 무슨 일이든 건설적인 일을 찾아내서 해 보라.


유혹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유혹의 손길이 느껴지면, 게으름이나 지루함에 빠져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볼 일이다.


지루하고 권태로울 때, 나를 유혹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루를 바쁘게 보내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ubi caritas-gregorian chant

































PETER DAMIAN



Memorial


21 February


Profile


Youngest child in a large family. Orphaned. Sent to live with a brother, he was mistreated and forced to work as a swine-herd. Cared for another brother, a priest in Ravenna, Italy. Well educated in Fienza and Parma. Professor. Lived a life of strict austerity.



Gave up his teaching to become a Benedictine monk. His health suffered, especially when he tried to replace sleep with prayer. Abbot. Founded hermitages. Occasionally called on by the Vatican to make peace between arguing monastic houses, clergymen, and government officials, etc. Cardinal-Bishop of Ostia. Fought simony. Tried to restore primitive discipline among priests and religious who were becoming more and more of the world. Prolific correspondent, he also wrote dozens of sermons, seven biographies (including a one of Saint Romuald), and poetry, including some of the best Latin of the time. Tried to retire to being a monk, but routinely recalled as papal legate. Declared a Doctor of the Church in 1828.



"Let us faithfully transmit to posterity the example of virtue which we have received from our forefathers." -Saint Peter Damian


Born


1007 at Ravenna, Italy


Died


22 February 1072 of fever at Ravenna while surrounded by brother monks reciting the Divine Office


Beatified


wasn’t


Canonized


never formally canonized; cultus developed almost immediately after his death; cultus approved and extended to the whole Church in 1823 by Pope Leo XII


Representation


cardinal bearing a discipline in his hand; pilgrim holding a papal bull, to signify his many legations






San Pier Damiani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21 febbraio - Memoria Facoltativa


Ravenna, 1007 ? Faenza, 22 febbraio 1072



Uomo di aspra penitenza e di prolungata preghiera, usci dall’amata solitudine contemplativa di Fonte Avellana, accettando d’essere vescovo e cardinale per meglio promuovere la purificazione e il rinnovamento della Chiesa afflitta da gravi abusi. E’ autore di importanti scritti liturgici, teologici e morali. (Mess. Rom.)



Etimologia: Piero = accorciativo e dimin. di Pietro


Emblema: Bastone pastorale



Dante Alighieri, nel XXI canto del Paradiso, colloca S. Pier Damiani nel cielo di Saturno, destinato nella sua Commedia agli spiriti contemplativi. Il poeta mette sulle labbra del santo un breve ed efficace racconto autobiografico: la predilezione per i cibi frugali e la vita contemplativa ("con cibi di liquor d’ulivi - lievemente passava caldi e geli - contento ne’ pensier contemplativi") e l’abbandono della quieta vita di convento per la carica vescovile e cardinalizia.


Il ricordo del cappello cardinalizio, attribuitogli da Dante con un anacronismo, offre a S. Pier Damiani il destro per inveire contro i prelati del tempo: ai loro tempi Pietro e Paolo percorrevano il mondo da evangelizzare "magri e scalzi"; adesso "voglion quinci e quindi chi i rincalzi - li moderni pastori e chi li meni, - tanto son gravi!, e chi di retro li alzi. - Copron de’ manti loro i palafreni, - si che due bestie van sott’una pelle... ". Ci sono tutti gli elementi di un compiuto ritratto del santo, cioe il contemplativo che il papa toglie quasi di forza dal convento per farne il fustigatore delle principali piaghe ecclesiastiche dell’epoca, la simonia e l’immoralita del clero.


Pietro era nato a Ravenna nel 1007; gia orfano di padre, ultimo di una numerosa nidiata di figli, venne tirato su dal fratello maggiore, Damiano, e cio ne spiegherebbe l’appellativo di "Damiani". Dopo aver studiato a Ravenna, Faenza e Padova e insegnato all’universita di Parma, entro nel monastero camaldolese di Fonte Avellana, in Umbria, che divenne il centro della sua attivita riformatrice. Ma la Chiesa dilaniata internamente da discordie e scismi, conseguenza di quel grave malanno che prende il nome di simonia, compravendita di cariche ecclesiastiche, e dalla leggerezza con cui il clero risolveva il problema del celibato, aveva bisogno di uomini integri e preparati come il colto e austero Pier Damiani. Novello Girolamo, fu al fianco di sei papi come "commesso viaggiatore della pace" e in particolare collaboro con Ildebrando, il grande riformatore divenuto papa col nome di Gregorio VII. Pier Damiani, dopo varie peregrinazioni nella diocesi di Milano, in Francia e in Germania, ebbe il cardinalato e la diocesi suburbicaria di Ostia. Gia vecchio, fu chiamato da Ravenna, la sua citta natale, per ricomporre il dissidio fomentato dai seguaci di un antipapa. La morte lo colse nel 1072 a Faenza, di ritorno dall’ultima missione di pace.


Venerato subito come santo, ebbe riconosciuto il suo culto ufficialmente nel 1828, da papa Leone XII, che lo proclamo anche dottore della Chiesa per i suoi numerosi scritti di contenuto teolog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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