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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2월13일(2월2일)


성녀 가타리나 데이 리치 동정


St. Catherine dei Ricci


Santa Caterina de’ Ricci Vergine


Firenze, 25 aprile 1523 - Prato, 2 febbraio 1590


Caterina=donna pura=pure woman.


Dominican



가타리나 데이 리치는 투스카니의 프라또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원의 수녀이다.


그녀는 좋은 감각과 정성을 다하여 맡아온 수련장과 장상직을 사임하였는데, 그녀의 놀라운 신앙 체험들은 많은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 들면, 매주일 같은 시간에 아주 오랜 시간동안 탈혼하였는데, 이때 그녀는 되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가타리나의 영향은 수녀원의 벽 안에서만 인정된게 아니다. 그녀의 편지에서 나타난 그대로, 교회의 개혁 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성녀 가타리나는 성 필립보 네리와 성 가롤로 보로메오, 그리고 성 비오 5세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아왔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게시판1182번.1785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게시판734번,1454번.
*성 비오 5세 교황 축일:4월30일.게시판1130번.173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The Virgin Appearing to Dominican Saints-TIEPOLO, Giovanni Battista


1747-48. Oil on canvas, 340 x 168 cm. Santa Maria del Rosario (Gesuati), Venice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철학자 성녀 가타리나가 법정에서 교회 옹호의 웅변을 토하고 순교한 후


그 성녀를 보호자로 삼고 그의 이름을 자기 본명으로 짓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성녀 중에서도 같은 본명을 가진 이도 몇 분 계시다.


그러므로 이를 구별하기 위해 그 이름에도 보통 고향이나 도시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교회에서 기념하는 리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녀도 그 중 한 분이시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순교자 축일:11월25일.게시판771번,1491번.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축일:4월29일.게시판1129번.173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이 성녀는 1522년에 태어나 세례 때에는 알렉산드라라고 이름 지었다.


4세때 어머니를 잃고 잠시 대모 손에서 자라난 후 아버지 베드로의 두 숙모가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갔다.


그녀는 수녀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교육을 받기 위함이었다.



수도원에서 수녀들의 교육을 받은 알렉산드라는 학문만이 아니라 신심상으로도 대단히 진보했다.


4, 5년후 아버지는 그녀를 집에 다시 불러 모든 가정 일을 그녀 손에 맡겼다.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도록 집안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동시에 수도원에 있었을 때와 같은 신심의 의무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해 나갔다.


시간이 지나 알렉산드라의 나이도 찼으므로 아버지는 딸도 필연코 즐거우리라는 생각에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출가시키려는 생각을 그녀에게 전했다.


기뻐하리가 생각했던 그녀는 오히려 우울한 안색을 하며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하느님께 일생을 바치는 수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간청했다.


의외의 그녀 말에 아버지는 처음에는 대단히 놀라 여간해서 들어줄 것 같지 않았지만 확고 부동한 그녀의 결심을 안 후에는 단념하고,


그녀를 위해 도미니코회의 플라도 수녀원에 입회 신청까지 해주었다.


수녀가 된 알레산드라는 가타리나라고 이름을 바꾸고 오로지 완덕의 길에만 노력하고 원래는 귀족이었음에도 가장 천한 일까지도 기꺼이 해 나갔다.





그녀가 가장 즐거워한 것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십자가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이었고,


그녀 또한 주님과 더불어 고통을 당하고 싶은 희망이 언제나 불과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수녀원에 들어오자 곧 중병에 걸려 몹시 고생했지만 그녀는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본받는 데 가장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조금도 신음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병고를 참았다.


그녀의 병은 약을 먹을 수록 낫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지므로 그녀는 점점 그것이 인내의 시련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가졌다.



고신 극기하며 수덕에 노력한 그녀는 자매들에게도 존경을 받아 25세 때 원장이 되었다.


원장이 되어서는 말보다 실천으로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했다.



가타리나는 모든 수녀들에게 신망이 두터워 존경받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더욱 겸손하며 자기를 자매들의 종으로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명예등에는 일절 무관심해 될 수 있는 대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했다.



경건한 오랑캐꽃은 몸체는 비록 그늘에 숨어있어도 그 향기를 사방에 퍼뜨리는 것처럼


그녀 덕행의 향기도 숨은 데서 나타나 어느덧 세상에 퍼져 유명한 추기경, 주교, 귀족 등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겸손한 그녀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는지 이러한 것들이 없어지도록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어떤 때는 자매들이 자기의 언행록(言行錄)을 편찬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몹시 놀라며


"보잘것없는 나 같은 사람을 대단한 인물처럼 서술하는 것은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원고를 빼앗아 찢고 불에 태워 버렸다고 한다.



가타리나가 십자가를 손에 들고 사랑하는 주님의 품에 자기의 정결한 영혼을 바친 것은 67세 때였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묵상




현대 의학은 수천 년 동안 성인들과 신비주의자들이 수행해 온 묵상법이 건강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규칙적인 묵상은 혈압을 낮춰 주고 면역 체계를 강화시키며, 우울한 마음을 회복시키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묵상은 의학적인 이로움보다도 영적으로 더 귀한 가치를 지닌다.



묵상은 더 높은 깨달음과 성찰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영혼의 창문을 열어 준다.


성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수난을 관상의 기초로 삼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합일을 통해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었다.



가타리나는 피렌체의 명문가 출신으로 열세 살에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묵상했다.


스무 살이 되던 어느 날, 그는 깊은 무아지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을 보았고 이를 연극으로 재현하게 되었다.


그의 뜨거운 열정은 연극을 본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묵상 시간은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규칙적인 묵상은 갈수록 바쁘고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거룩함이 솟아나는 오아시스가 될 수 있다.


나는 규칙적으로 묵상하는가?


오늘 단 5분만이라도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 존재하는 자로 지내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Christus Factus Est Pro Nobis-베네딕도수도원












































Santa Caterina de’ Ricci Vergine



2 febbraio - Comune


Firenze, 25 aprile 1523 - Prato, 2 febbraio 1590



Nel febbraio 1542 la coinvolge un’esperienza mistica protratta per dodici anni, che lei stessa descrive alla consorella Maddalena Strozzi: ogni giovedi e venerdi e colpita da acuti dolori che a volte lasciano traccia sul suo corpo, e che lei interpreta come un rivivere la Passione, in sintonia con la Madre di Gesu. La voce gira, provocando inchieste in monastero (finite nel nulla), e fa di Caterina un personaggio amato e influente: in lei rivivono infatti i motivi piu cari alla pieta popolare.



Etimologia: Caterina = donna pura, dal greco


Emblema: Giglio



Nacque il 25 aprile 1523 da Pierfrancesco de’ Ricci e Caterina Panzano e ricevette il nome di Sandrina. Rimasta orfana di madre a cinque anni, fu accolta nel monastero benedettino di S. Pietro in Monticelli, la cui badessa era una sua zia. Fin dall’infanzia si sentiva spinta da impulsi interiori alla meditazione della Passione, in cui si incentrera tutta la sua futura vita spirituale. Desiderando abbracciare la vita religiosa, con l’aiuto della matrigna, visito diversi monasteri, ma dopo aver visto come in molti Ordini lo spirito religioso fosse affievolito, fece cadere la sua scelta sul monastero domenicano di S. Vincenzo di Prato, fondato da un ventennio. A causa dell’opposizione del padre, Caterina fu sul punto di morire; ma guarita prodigiosamente, non appena ebbe il suo consenso, entro, il 18 maggio 1535, appena dodicenne, nel monastero di S. Vincenzo, aiutata dallo zio, p. Timoteo Ricci, e prese il nome di Caterina. Nell’ambiente del monastero fu dapprima circondata dal disagio e dalla diffidenza delle consorelle, che non comprendevano i suoi atteggiamenti estatici e le sue grazie straordinarie; ritenuta affetta da squilibrio psichico, fu quasi per essere dimessa alla vigilia della professione religiosa (24 giugno 1536), che ella, peraltro, strappo con lacrime e preghiere.


In Caterina si alternavano fasi di malattie straordinarie e straordinarie guarigioni, come quella operatasi improvvisamente nella notte tra il 22 e il 23 maggio 1540, anniversario della morte del Savonarola. Con eroica sopportazione e con docile umilta la giovane suora seppe cattivarsi a poco a poco l’ammirazione e il rispetto delle consorelle. I tormenti fisici e morali furono la preparazione a prove ben piu straordinarie, che noi conosciamo, in parte, attraverso i Ratti, rivelazioni fatte da Caterina alla maestra di noviziato, suor Maddalena Strozzi, per imposizione dello zio, p. Timoteo.


Il primo giovedi di febbraio del 1542, Caterina ebbe la prima estasi della Passione, fenomeno mistico che si ripete settimanalmente per dodici anni: dal mezzogiorno dei giovedi alle ore 16 del venerdi, riviveva momento per momento le diverse fasi del Calvario nella piu intima comunione spirituale con la Vergine, e per l’intero corso della settimana portava impressi nella carne i segni di un’atroce sofferenza. La notizia del fenomeno fu ben presto conosciuta anche al di fuori del monastero e procuro l’intervento delle autorita, tra cui il generale delI’Ordine, Alberto Las Casas. Poiche anche nelI’ambiente della Curia si parlava dello straordinario caso di Caterina, Paolo III invio un cardinale per un esame, il cui esito fu positivo. Il 9 aprile 1542 fu concesso a Caterina l’anello del mistico sposalizio. Il 14 dello stesso mese ebbe le stimmate, che rimasero visibili sul suo corpo, non corrotto dal tempo; nel Natale successivo le fu promessa una corona di spine, le cui punture la trafissero fino alla morte. In prosieguo di tempo ebbe altre visioni che la facevano meditare sullo stato delle anime, su quello della sua comunita e sulle condizioni della Chiesa, dilaniata dalla rivolta protestante, e in cui sentiva potente l’invito del Signore ad offrirsi in sacrificio per l’unita del’la sua Sposa.


Resa immagine del Crocifisso e arricchita di doni spirituali, Caterina inizio allora una silenziosa e feconda azione apostolica di cui rimane il ricchissimo epistolario. Si formo intorno a lei un gruppo di discepoli, conquistati talvolta miracolosamente, che ricorreranno a lei per preghiere, consigli, beneficenza; intreccio relazioni epistolari con s. Filippo Neri, s. Carlo Borromeo, s. Maria Maddalena de’ Pazzi, il ven. Alessandro Luzzago, con la famiglia granducale dei Medici, con la madre di Cosimo I, con Giovanna d’Austria, con Bianca Cappello e coi Capponi, gli Acciaioli, i Rucellai, i Salviati, i Buonaccorsi. Ma svolse l’azione piu feconda nel monastero, dove fu molte volte sottopriora e priora per ben sette bienni durante i quali la comunita fiori materialmente e numericamente, contando persino centosessanta religiose, e si perfeziono spiritualmente, divenendo un modello di regolare osservanza. La meditazione della Passione, che era il fulcro della spiritualita di Caterina, fu espressa per la comunita con il Cantico della Passione, composto di versetti scritturali e passato nelle pratiche abituali dell’Ordine nei venerdi di Quaresima. Mori il 2 febbraio 1590; fu beatificata nel 1732 e canonizzata nel 1746.


L’Ordine Domenicano la ricorda il 4 febbraio.




Autore: Guglielmo Di Agre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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