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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The Martyrdom of St Agatha-TIEPOLO, Giovanni Battista


c. 1756. Oil on canvas, 184 x 131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축일:2월5일


성녀 아가다 동정 순교자


ST. AGATHA


Sant’ Agata Vergine e martire


in prison at Catania or Palermo, Sicily (sources vary) -


martyred c.250 at Catania, Sicily by being rolled on coals


Name Meaning :Greek:good





불확실한 전설이지만, 그녀는 시실리의 카타리나 혹은 팔레르모에서 태어났고,


그의 집안은 부요하였으며 신심이 깊었고, 하느님께 스스로 정결을 서원하였다고 전한다.



어느 황제의 박해 기간에, 그 지방의 집정관이던 퀸씨아노가 그녀를 탐하다가,


그녀를 소유하려는 계략으로 박해를 이용하였다.


그녀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퀸씨아노는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여, 매음굴로 보냈으며,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어,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글거리는 석탄불에 돌리면서 구워죽였다고 전해온다.



그녀는 보통 한 쌍의 집게나 접시에 담은 그녀의 가슴으로 묘사되었는데,


후일 이것이 잘못되어 접시 위의 빵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성녀 아가타의 축일에는 빵을 축성하는 관습이 내려온다.


그녀는 간호원들의 수호성인이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시칠리아 출신의 순교성녀인 아가다에 대한 민중들의 공경은,


데치우스 황제 치하시절 그가 순교했으리라 추정되는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4세기 경부터 그녀에 관한 공경은 전 세계 교회로 확산되어 있다.


로마에는 그녀에게 헌정된 두 개의 대성당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박해자들이 성녀를 매음굴에 끌고가 배교를 강요하였으며


그들이 가슴을 도려내었을 때 사도 베드로가 나타나 치료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이름은 로마 성찬 기도(미사경본)에 기록되어 있다.


카타니아의 수호자이며 광부, 간호원, 대장장이, 산악 안내인등의 수호성인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시칠리아의 성 메토디오 주교의 성녀 아가다에 대한 강론에서


(Analecta Bollandiana 68, 76-78)





온갖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여기에 참석하신 청중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한 거룩한 순교자의 주년제가 우리 모두를 여기 한자리에 모이게 했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이 순교자는 자신이 치른 훌륭한 투쟁을 볼 때


옛적의 뛰어난 순교자라고 해야 하지만, 매일 매일 성녀에게 월계관을 가져다 주고


성녀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그 신적 기적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투쟁하고 승리하는 것을 볼 때 최근의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가다는 동정녀입니다.


그녀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육신으로 역시 죽음을 맛보신


불멸의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느님과 나뉨이 없는 아드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신학자인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을 우리의 영적 잔치에 초대한 이 여인은 동정녀요 신부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혼인의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그녀는 한 남편 그리스도와 정혼한 정배입니다.



이 동정녀는 자기 양심의 빛과 하느님의 참 어린양의 핏빛으로


자신의 입술과 빰과 혀를 꾸미어 붉게 만들었습니다.


아가다는 그토록 자기를 사랑하던 분이


마치 지금 피에 흠뻑 젖어 있는 것처럼 그분의 죽음을 자기 마음속에 끊임없이 묵상하고 되뇌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입은 순교의 두루마기는 속속들이 젖어 들여


결코 지워지지 않을 그리스도의 붉은 피의 흔적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들에게 동정녀로서의 증거라는 보화와


끝없는 고백의 말이라는 아름다운 색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다라는 이름 자체가 "선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듯이


아가다는 온갖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선하고 착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나눈 그 선을


자신의 정배이신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과 일치되어 있는 우리에게 나누어 줍니다.



최고선보다 더 유익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가다 이상으로 찬미의 노래로써 칭송받을 사람이 또있겠습니까?



아가다, 그녀의 선함은 자신의 이름과도 실재와도 어울립니다.


아가다, 그녀는 자신의 고상한 행위로써 좋은 이름을 얻었고


바로 그 이름으로 자신의 행위들이 고귀함을 증명해 줍니다.


아가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이름만으로도 모든 이들을 자기에게 열렬히 이끌어 들이고,


자신의 모범으로 자신과 함께 지체없이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힘써 나아가도록 가르칩니다.


(가톨릭홈에서)





St Agatha-ZURBARAN, Francisco de


1630-33. Oil on canvas. Musee Fabre, Montpellier



성녀 아가타(선(善)이라는 뜻)는 로마 교회의 위대한 네 동정 순교자 중에서 넷째로 지내는 성녀이다.


이 성녀들의 축일은 다 겨울에 해당된다.


즉 체칠리아는 11월 22일에, 루치아(광채)는 12월 13일에,


아녜스(순결)는 1월 21일에, 아가타(선)는 2월 5일에 지낸다.





성녀 아가타는 데치오 황제 시대에 순교했다.


성녀는 옛날부터 대단히 존경을 받아 그의 이름은 미사 경본에까지 삽입(揷入)하게 되엇다.


또한 그의 수난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옛 기록에 기록되어 기도문으로 사용하게 되엇다.



아가타는 시칠리아 섬의 유명한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때의 총독 퀸시아노는 그녀에게 결혼을 청했으나 거절당한 후에는


그녀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알고 체포해 법정에 끌고 갔다.



그때 재판관은 어찌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노예로서 일생을 보내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성녀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나는 겉으로 종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가장 높은 귀족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총독은 그녀가 그리스도를 배반치 않는다면 더욱 가혹한 형벌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성녀는 그에게 대답하기를, "당신이 나를 맹수와 같이 포악성으로 위협을 한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것을 진정시키리라는 것을 아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불을 사용하면 그때는 천사들이 나를 위해 하늘에서 향기로운 장미꽃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라고 했다.



아가타는 많은 형벌을 받고나서 마치 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처럼


만면에 희색을 띠고 좋은 기분으로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기도하면서 자기의 모든 고통을 구세주께 맡겼다.





다음날 성녀는 재판관에게 다시 끌려나갔을때 그에게


"당신이 만일 형리로 하여금 내 육신을 없애지 않으면 내 영혼은


순교자들과 같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형리들은 그녀를 형벌대에 눕게 하고 뻘겋게 달군 쇠로 그녀의 유방(乳房)을 떼어냈다.



이러한 형벌을 받으며 그녀는 이와같이 기도했다.


"나는 정덕에 대한 사랑으로 이와 같은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나의 주님 구세주여, 나의 이러한 고통을 잘 참아 이기도록 도와 주소서."



아가타는 총독의 잔혹함에 대해서 책망하기를 "악하고 잔혹한 더러운 폭군이여,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먹여 길러 준 것을


이 가련한 여자에게서 베어내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지 않습니까?"했다.



그녀가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다음날 밤에, 점잖은 한 노인(베드로 사도)이 약을 가지고 그녀에게 나타났다.


아가타는 정결의 부끄러움으로 자기 육신의 상처를 그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노인은 "나는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내 딸아, 나에 대해서 의심치 마라"하고 말하자,


그녀는 "나는 세상의 약으로 내 육신을 고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 그의 말씀으로 모든것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는 성 베드로 사도께 온전히 치료를 받고 난 후


"주 예수 그리스도여, 거룩하신 사도를 보내시어 저의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하고 기도했다.


바로 그때 감옥에서는 광채가 밤중에 비추므로 간수들이 놀라며 도망쳤다.


그때 같이 갇혔던 동료들이 도망치기를 권했지만 그녀는 거절하며


"구세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이때, 나를 낫게 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그를 더욱 오랫동안 모시고 싶다"


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흘 후에 그녀는 또다시 재판관 앞에 끌려나갔다. 그때 그는 그녀의 병이 완치된 것을 보고 놀랐다.


재판관은 전과 다름없이 우상에게 숭배하기를 강요했지만


아가타는 그리스도께 자기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그러므로 총독은 대노하여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불타고 있는 석탄 위에서 뒹굴게 했다.


이 순간 모든 마을이 대단한 지진으로 진동했고 그 바람에 두 담이 무너져


실비노와 팔고니오라는 총독의 가장 친한 사람들이 눌려 죽었다.


총독은 이로 인해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까봐 반쯤 죽은 아가타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아가타는 그곳에서 마지막 죽음의 기도를 바쳤다.


그녀는 일어나서 팔을 펴고 구세주께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로 하여금 모든 형벌에서 승리를거두게 해 주셨음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히 복된 영광속에 들어가게 해 주소서"하고 기도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후 1년이 지나서 가다노라는 마을이 화산 폭발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교도였던 주민들은 대단히 두려워하면서


성녀의 무덤으로 달려가 성녀의 수건을 들고 화산의 불꽃을 향해 서서 있음으로써


즉시 재앙에서 구출되었다고 한다.



해 돋을 때에 읊는 찬미가는 바로 이 사실을 연상케 한다.


즉 "많은 이교도들이 동정녀의 무덤에 달려가서 성녀의 수건을 화염을 향해 들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들은 화염에서 구출되었고, 구세주께서는 이로써 성녀 아가타 순교자의 공적을 증명해 주셨다"


성녀의 무덤은 지금 시칠리아의 성 가다노에서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고통



성녀 아가타의 삶은 신비와 전설에 싸여 있다.


그 역시 다른 많은 동정 순교자들처럼,


수없이 많은 고문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순결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죽을 때는 고통을 인내할 힘을 주셨음에 감사드렸다고 한다.



주어진 고통에 대해 감사한다는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머리만 조금 아파도 약 상자부터 찾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는 방법만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영적 성장이나 내면적 성숙은 대부분 고통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고통을 겪고 있을 당시에는 그 가치를 알아차리기가 힘들지만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고통으로 인해 자신이 훨씬 강해지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은 우리의 영혼을 제련시키는 불과 같다.


물론 일부러 고통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굳이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우리 모두에게는 제각기 겪어야 할 고통의 몫이 있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 삶 가운데 들어올 때는


안달하거나 저항하지 말고 고통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성숙해져야 한다.


고통은 인생의 교훈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도 성녀처럼 고통을 구원의 수단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나의 삶에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인가?


시련을 통해서 성숙했다고 생각하는가?


내 인생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믿음과 신뢰를 성숙시키는 기회로 받아들이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Lord’s Prayer







































AGATHA



Memorial


5 February


Profile


We have little reliable information about this martyr, who has been honored since ancient times, and whose name is included in the canon of the Mass. Young, beautiful and rich, Agatha lived a life consecrated to God. When Decius announced the edicts against Christians, the magistrate Quinctianus tried to profit by Agatha’s sanctity; he planned to blackmail her into sex in exchange for not charging her. Handed over to a brothel, she refused to accept customers. After rejecting Quinctianus’ advances, she was beaten, imprisoned, tortured, her breasts were crushed and cut off. She told the judge, "Cruel man, have you forgotten your mother and the breast that nourished you, that you dare to mutilate me this way?" One version has it that Saint Peter healed her. Imprisoned further, then rolled on live coals, she was near death when an earthquake stuck. In the destruction, the magistrate’s friend was crushed, and the magistrate fled. Agatha thanked God for an end to her pain, and died.



Legend says that carrying her veil, taken from her tomb in Catania, in procession has averted eruptions of Mount Etna. Her intercession is reported to have saved Malta from Turkish invasion in 1551.


Born


in prison at Catania or Palermo, Sicily (sources vary)


Died


martyred c.250 at Catania, Sicily by being rolled on coals


Name Meaning


good


Patronage


bell-founders, breast cancer, breast disease, Catania Italy, against fire, earthquakes, eruptions of Mount Etna, fire, fire prevention, jewelers, martyrs, natural disasters, nurses, Palermo Italy, rape victims, single laywomen, sterility, torture victims, volcanic eruptions, wet-nurses, Zamarramala Spain


Representation


breasts on a dish; embers; knife; loaves of bread on a dish; pincers; shears; tongs; veil; virgin martyr wearing a veil and bearing her severed breasts on a silver platter




Readings


Jesus Christ, Lord of all things! You see my heart, you know my desires. Possess all that I am - you alone. I am your sheep; make me worthy to overcome the devil.



-Saint Agatha


--------------------------------------------------------------------------------


Lord, my creator, you have protected me since I was in the cradle. You have taken me from the love of the world and given me patience to suffer. Now receive my spirit.



-Saint Aga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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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fellow Christians, our annual celebration of a martyr’s feast has brought us together. Agatha achieved renown in the early Church for her noble victory. For her, Christ’s death was recent, his blood was still moist. Her robe is the mark of her faithful witness to Christ.



Agatha, the name of our saint, means "good." She was truly good, for she lived as a child of God. Agatha, her goodness coincides with her name and her way of life. She won a good name by her noble deeds, and by her name she points to the nobility of those deeds. Agatha, her mere name wins all men over to her company. She teaches them by her example to hasten with her to the true Good, God alone.



from a homily on Saint Agatha by Saint Methodius of Sicily










Sant’ Agata Vergine e martire



5 febbraio - Memoria


Catania, 235? - 5 febbraio 251



Agata fu martire a Catania, probabilmente sotto Decio (251). Verso il sec. V sorse una chiesa in suo onore a Roma e papa Simmaco le dedico una basilica. Il suo nome e associato a quello di S.Lucia nel canone romano. La sua “deposizione” il 5 febbraio e ricordata dal martirologio geronimiano (sec. VI). (Mess. Rom.)



Patronato:Pompieri, Catania, Repubblica di San Marino


Etimologia: Agata = buona, virtuosa, dal greco


Emblema: Giglio, Palma, Pinze, Seni (su di un piatto)



Sant’Agata il cui nome in greco Agathe, significava buona, fu martirizzata verso la meta del III secolo, alcuni reperti archeologici risalenti a pochi decenni dalla morte, avvenuta secondo la tradizione il 5 febbraio 251, attestano il suo antichissimo culto.


Agata nacque nei primi decenni del III secolo (235?) a Catania; la Sicilia, come l’intero immenso Impero Romano era soggetta in quei tempi alle persecuzioni contro i cristiani, che erano cominciate, sia pure occasionalmente, intorno al 40 d.C. con Nerone, per proseguire piu intense nel II secolo, giustificate da una legge che vietava il culto cristiano.


Nel III secolo, l’editto dell’imperatore Settimio Severo, stabili che i cristiani potevano essere prima denunciati alle autorita e poi invitati ad abiurare in pubblico la loro nuova fede. Se essi accettavano di ritornare al paganesimo, ricevevano un attestato (libellum), che confermava la loro appartenenza alla religione pagana, in caso contrario se essi rifiutavano di sacrificare agli dei, venivano prima torturati e poi uccisi.


Era un sistema spietato e calcolato, perche l’imperatore tendeva a fare piu apostati possibile che martiri, i quali venivano considerati piu pericolosi dei cristiani vivi. Nel 249 l’imperatore Decio, visto il diffondersi comunque del cristianesimo, fu ancora piu drastico; tutti i cristiani denunciati o no, dovevano essere ricercati automaticamente dalle autorita locali, arrestati, torturati e poi uccisi.


In quel periodo Catania era una citta fiorente e benestante, posta in ottima posizione geografica; il suo grande porto, costituiva un vivace punto di scambio commerciale e culturale dell’intero Mediterraneo.


E come per tutte le citta dell’Impero Romano, anche Catania aveva un proconsole o governatore, che rappresentava il potere decentrato dell’impero, ormai troppo vasto; il suo nome era Quinziano, uomo brusco, superbo e prepotente e circondato da una corte numerosa, con i familiari, un numero enorme di schiavi e con le guardie imperiali, dimorava nel ricco palazzo Pretorio con annessi altri edifici, in cui si svolgevano tutte le attivita pubbliche della citta.


Secondo la ‘Passio Sanctae Agathae’ risalente alla seconda meta del V secolo e di cui esistono due traduzioni, una latina e due greche, Agata apparteneva ad una ricca e nobile famiglia catanese, il padre Rao e la madre Apolla, proprietari di case e terreni coltivati, sia in citta che nei dintorni, essendo cristiani, educarono Agata secondo la loro religione.


Cresciuta nella sua fanciullezza e adolescenza in bellezza, candore e purezza verginale, sin da piccola senti nel suo cuore il desiderio di appartenere totalmente a Cristo e quando giunse sui 15 anni, senti che era giunto il momento di consacrarsi a Dio. Nei primi tempi del cristianesimo le vergini consacrate, con il loro nuovissimo stile di vita, costituivano un’irruzione del divino in un mondo ancora pagano e in disfacimento.


Il vescovo di Catania accolse la sua richiesta e durante una cerimonia ufficiale chiamata ‘velatio’, le impose il ‘flammeum’, cioe il velo rosso portato dalle vergini consacrate.


Nel mosaico di S. Apollinare Nuovo in Ravenna del VI secolo, e raffigurata con la tunica lunga, dalmatica e stola a tracolla, abbigliamento che lascia supporre che fosse diventata diaconessa.


Il proconsole di Catania Quinziano, ebbe l’occasione di vederla e se ne incapriccio, e in forza dell’editto di persecuzione dell’imperatore Decio, l’accuso di vilipendio della religione di Stato, accusa comune a tutti i cristiani, quindi ordino che la catturassero e la conducessero al Palazzo Pretorio.


Qui subentrano varie tradizioni popolari, che indicano Agata che scappa per non farsi arrestare e si rifugia in posti indicati dalla tradizione, in una contrada poco distante da Catania, Galermo, oppure a Malta, oppure a Palermo; ma comunque ella viene catturata e condotta da Quinziano.


Il proconsole quando la vede davanti viene conquistato dalla sua bellezza e una passione ardente s’impadronisce di lui, ma i suoi tentativi di seduzione non vanno in porto, per la resistenza ferma della giovane Agata.


Egli allora mette in atto un programma di rieducazione della ragazza affidandola ad una cortigiana di facili costumi di nome Afrodisia, affinche la rendesse piu disponibile. Trascorse un mese, sottoposta a tentazioni immorali di ogni genere, con festini, divertimenti osceni, banchetti; ma lei resistette indomita nel proteggere la sua verginita consacrata al suo Sposo celeste, al quale volle rimanere fedele ad ogni costo.


Sconfitta e delusa, Afrodisia riconsegna a Quinziano Agata dicendo: “Ha la testa piu dura della lava dell’Etna”. Allora furioso, il proconsole imbasti un processo contro di lei, che si presento vestita da schiava come usavano le vergini consacrate a Dio; “Se sei libera e nobile” le obietto il proconsole, “perche ti comporti da schiava?” e lei risponde “Perche la nobilta suprema consiste nell’essere schiavi del Cristo”.


Il giorno successivo altro interrogatorio accompagnato da torture, tralasciamo i testi degli interrogatori per motivo di spazio, del resto sono articolati diversamente da una ‘passio’ all’altra. Ad Agata vengono stirate le membra, lacerata con pettini di ferro, scottata con lamine infuocate, ma ogni tormento invece di spezzarle la resistenza, sembrava darle nuova forza, allora Quinziano al colmo del furore le fece strappare o tagliare i seni con enormi tenaglie.


Questo risvolto delle torture, costituira in seguito il segno distintivo del suo martirio, infatti Agata viene rappresentata con i due seni posati su un piatto e con le tenaglie. Riportata in cella sanguinante e ferita, soffriva molto per il bruciore e dolore, ma sopportava tutto per l’amore di Dio; verso la mezzanotte mentre era in preghiera nella cella, le appare s. Pietro apostolo, accompagnato da un bambino porta lanterna, che la risana le mammelle amputate.


Trascorsi altri quattro giorni nel carcere, viene riportata alla presenza del proconsole, il quale visto le ferite rimarginate, domanda incredulo cosa fosse accaduto, allora la vergine risponde: “Mi ha fatto guarire Cristo”. Ormai Agata costituiva una sconfitta bruciante per Quinziano, che non poteva sopportare oltre, intanto il suo amore si era tramutato in odio e allora ordina che venga bruciata su un letto di carboni ardenti, con lamine arroventate e punte infuocate.


A questo punto, secondo la tradizione, mentre il fuoco bruciava le sue carni, non brucia il velo che lei portava; per questa ragione “il velo di sant’Agata” divento da subito una delle reliquie piu preziose; esso e stato portato piu volte in processione di fronte alle colate della lava dell’Etna, avendo il potere di fermarla.


Mentre Agata spinta nella fornace ardente muore bruciata, un forte terremoto scuote la citta di Catania e il Pretorio crolla parzialmente seppellendo due carnefici consiglieri di Quinziano; la folla dei catanesi spaventata, si ribella all’atroce supplizio della giovane vergine, allora il proconsole fa togliere Agata dalla brace e la fa riportare agonizzante in cella, dove muore qualche ora dopo.


Dopo un anno esatto, il 5 febbraio 252, una violenta eruzione dell’Etna minacciava Catania, molti cristiani e cittadini anche pagani, corsero al suo sepolcro, presero il prodigioso velo che la ricopriva e lo opposero alla lava di fuoco che si arresto; da allora s. Agata divenne non soltanto la patrona di Catania, ma la protettrice contro le eruzioni vulcaniche e poi contro gli incendi.


L’ultima volta che il suo patrocinio si e rivelato valido, tramite il miracoloso velo, portato in processione dall’arcivescovo di Catania, e stata nel 1886, quando una delle ricorrenti eruzioni dell’Etna, minacciava la cittadina di Nicolosi, posta sulle pendici del vulcano e che venne risparmiata dalla distruzione.


Nel 1040 le reliquie della santa, furono trafugate dal generale bizantino Giorgio Maniace, che le trasporto a Costantinopoli; ma nel 1126 due soldati della corte imperiale, il provenzale Gilberto ed il pugliese Goselmo, le riportarono a Catania dopo un’apparizione della stessa santa, che indicava la buona riuscita dell’impresa; la nave approdo la notte del 7 agosto in un posto denominato Ognina, tutti i catanesi risvegliatasi e rivestitasi alla meglio, accorsero ad onorare la “Santuzza”.


Nei secoli le manifestazioni popolari legate al culto della santa, richiamavano gli antichi riti precristiani alla dea Iside, per questo s. Agata con il simbolismo delle mammelle tagliate e poi risanate, assume una possibile trasfigurazione cristiana del culto di Iside, la benefica Gran Madre, anche se era appena una quindicenne.


Cio spiegherebbe anche il patronato di s. Agata sui costruttori di campane, perche si sa, nei culti precristiani la campana era simbolo del grembo della Mater Magna. Le sue reliquie sono conservate nel duomo di Catania in una cassa argentea, opera di celebri artisti catanesi; vi e anche il busto argenteo della “Santuzza”, opera del 1376, che reca sul capo una corona, dono secondo la tradizione, di re Riccardo Cuor di Leone.


Il culto per s. Agata fu talmente grande, che fino al XVI secolo, essa era contesa come appartenenza anche da Palermo, la questione e stata a lungo discussa, finche a Palermo il culto per la santa, fu soppiantato da quello per s. Rosalia. Anche a Roma fu molto venerata, papa Simmaco (498-514) eresse in suo onore una basilica sulla Via Aurelia e un’altra le fu dedicata da S. Gregorio Magno nel 593.


Nel XIII secolo nella sola diocesi di Milano si contavano ben 26 chiese a lei intitolate. Celebrazioni e ricorrenze per la sua festa avvengono un po’ in tutta Italia, perfino a San Marino, ma e Catania il centro piu folcloristico e religioso del suo culto, le feste sono due il 5 febbraio e il 17 agosto, con caratteristiche processioni con il prezioso busto della santa, custodito nel Duomo.


Vi sono undici Corporazioni di mestieri tradizionali, che sfilano in processione con le cosiddette ‘Candelore’ fantasiose sculture verticali in legno, con scomparti dove sono scolpiti gli episodi salienti della vita di s. Agata. Il busto argenteo, preceduto dalle ‘Candelore’ e posto a sua volta sul “fercolo”, una macchina trainata con due lunghe e robuste funi, da centinaia di giovani vestiti dal caratteristico ‘sacco’.


Tante altre manifestazioni popolari e folcloristiche, oggi non piu in uso, accompagnavano nei tempi trascorsi questi festeggiamenti, a cui partecipava tutto il popolo con le Autorita di Catania, devotissimo alla sua ‘Santuzza’.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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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 프란치스칸 성인 2월7일 사라센의 사도 성 모세 안젤라 2010-02-06 3795
481 프란치스칸 성인 2월8일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 동정 안젤라 2010-02-06 4977
480 프란치스칸 성인 2월8일 마타의 성 요한 ♬Ave Maria-Schubert 안젤라 2010-02-06 3918
479 프란치스칸 성인 2월8일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노 안젤라 2010-02-06 3648
478 프란치스칸 성인 2월9일 성녀 아폴로니아 동정 순교자 안젤라 2010-02-06 4993
477 프란치스칸 성인 2월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안젤라 2010-02-06 3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