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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2월 3일


성 안스가리오 주교


St. Anscharius


St. Ansgarius of Hamburg


Sant’ Oscar (Ansgario) Vescovo


801 at Amiens, Picardy, France -


3 February 865 at Bremen, Germany; relics at Bremen, Hamburg, and Copenhagen


Patronage:Denmark, Scandinavia, Sweden


Benedictine



핏카르디아 지방에서 태어나 베네딕도회 수도사가 된 오스카(안스가리오)는 선교 분야에 있어서,


범상치 않는 목자적 재능과 감수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덴마크 왕 하랄드의 간청으로 선교사로서 다니마르카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를 ’북유럽의 사도’라 부르기도 한다.



함부르크의 제1대 주교로서 북부 독일 지역에 믿음을 전파하고 확고히 하는데 전념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는 그를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파견하여 그 지역의 복음화를 부탁하였다.


그의 뛰어난 설교는 많은 지역민들의 감동을 자아내어 급기야 스웨덴의 국왕 올라프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하였다.


그러나 북유럽의 수많은 민족과 종족간의 문화적 연대감이 하나의 종교로써 이루어지기까지 수많은 세월이 지나야만 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북유럽(스칸디나비아)의 사도’는 성인이 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인이 되었다.


그는 코르비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딕토회 수사 신부가 되었다.


3년후 덴마크의 왕이 개종했을 때 그는 그 나라에 가서 3년 동안 선교 활동을 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평소 관심있던 스웨덴이 그리스도교 선교사를 요청하자 안스가리오는 그곳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해적들에게 잡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년이 채 못 되어서 그는 다시 소환되어 코베이의 대수도원장 겸 함부르크의 주교가 되었고


교황은 그를 스칸디나비아 선교단의 사절로 임명했다.


루드비히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북부 지역 선교 활동 기금이 중단되었다.


안스가리오는 함부르크에서 13년간 일한 후에 북방인들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이교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북쪽에서 새로운 사도직 활동을 지도했는데 그 자신이 스스로 덴마크로 여행하면서 다른 왕을 개종시키는 데 도구가 되었다


제비뽑기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스웨덴의 왕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되돌아오도록 허락했다.



안스가리오에 대해 연구한 역사가들은 그가 뛰어난 설교가요,겸손하고 금욕하는 사제였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헌신적이었으며, 그들의 발을 닦아 주고, 식탁에서 그들을 기다림으로써 주님을 본받았다.


그는 순교하고픈 그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독일의 브레멘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 스웨덴은 다시 이교로 돌아가서 2세기가 지난 후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이교로 머물러 있었다.



역사는 누가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을 기록한다.


그렇지만 안스가리오와 같은 사람들의 용기와 인내심은 본래의 타고난 용기와 끈질긴 선교가 일치되어 있는 든든한 바탕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안스가리오의 생애는 하느님은 구부러진 줄에다가 똑바로 글을 쓰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도직의 결과를 배려해 주신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도 자신의 순수성을 살피시는 것이다.



안스가리오는 자기 동료들 중에 하나가 성인들이 이루어 낸 기적들에 대하여 자랑을 늘어놓자 이렇게 꾸짖었다.


’만일에 내가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자격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 단 하나의 기적을 나에게 허용해 주십사고 청하겠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으로 나를 착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CSPB = CRUX SANCTI PATRIS BENEDICTI" (사부 성베네딕도의 십자가)


성 베네딕도 아빠스 축일:7월11일(게시판1267번)



9세기 초 프랑스에서 태어나 코르비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


826년 덴마크에 복음을 전파하러 떠났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스웨덴으로 가 거기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함부르크의 주교로 선출되어, 그레고리오 4세가 이를 확인하고 그를 덴마크와 스웨덴의 교황 사절로 임명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굳은 마음으로 이겨내었다. 865년 세상을 떠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에서


(Nn. 23-24)



그리스도의 신비를 확신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신앙을 전파할 각자 응분의 의무가 부과되어 있지만,


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제자들 중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사 당신과 같이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을 선교를 위해 제민족에게 파견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당신 원하시는 대로 영을 나눠주시는 성신을 통하여 주께서는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각자의 마음 안에 불어넣어 주시며,


동시에 또한 전교회의 책임인 복음 선포의 임무를 자기의 본임무로서 받아들이는 가지가지의 회를 일으키신다.



사실 균형 있는 천성을 타고 났으며 마땅한 천품과 재능을 갖고 선교의 임무를 받아들이기로 준비된 사람은


그가 방인이건 외국인이건 또는 사제이건 수도자이건 신도이건 다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정당한 권위자로부터 파견되어 신앙과 순명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로 떠나간다.


그들은 복음의 일꾼으로서 불리운 사명을 위해 선택 분리된 사람들이다.


이는 외교인들로 하여금 성신으로 성화되어 성의에 흡합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람은 혈육과 의논치 않고 복음 사업에 자기를 전부 바쳐, 부르신 하느님께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응답은 성신으로 말미암아 자극되고 굳세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파견된 이는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명 안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는 일생 동안 자기의 소명을 지켜 내고 자기 자신과 전에 자기 소유였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또 그는 제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자기가 그 대리로 행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신빙성 있게 전하여 알게 할 것이며


십자가에 걸려 넘어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때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말하여야 한다.


마음이 양순하고 겸손하신 스승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리스도의 멍에의 경쾌함과 그 짐의 가벼움을 드러내야 한다.



참으로 복음적 생활에 의해 많은 것을 인내하며 관용과 인자 그리고 거짓없는 사랑으로써 만일 필요하다면


자기 피를 흘리기에 이르기까지 주께 대한 증거를 해야 한다.


그는 환난과 극심한 가난을 수많이 경험하면서도 즐거움이 거기 넘쳐흐르는 것을 깨닫기 위해 힘과 용기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것이다.(가톨릭홈에서)





베네딕도 패.The medal of St.Benedict(앞면)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 대제가 313년에 가톨릭을 국교로 정한 후로는 지금까지 빠져 있던 이교의 암흑 속에서 벗어난 그리스도교의 찬란한 진리와 은총의 빛을 받게 되었지만,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 북쪽 유럽의 제국은 그 후도 오랬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촉하지 못해 참된 하느님을 몰라보고 다만 허무한 신들의 우상이나 떡갈나무등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딕토회의 선교자 성 보나파시오나 성 골롬바노 등이 전교함에 따라 독일은 9세기에 백성의 거의 전부가 개종했고, 덴마크나 스웨덴도 10세기에 동일한 베네딕토 수사 성 안스가리오의 사도적 활동에 의해 교회의 교화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673 ? -754) 축일:6월5일.게시판1197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안스가리오는 북 프랑스의 코르비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로서 학식이 풍부하고 덕행도 또한 극히 높았으므로 그 수도원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 후 독일 중부의 유명한 고르베이 수도원에서도 가르친 바 있다.


독일의 사도라고 부른 성 보니파시오의 씩씩한 활동에 감동한 안스가리오는 자신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일생을 보내기를 원하던 터에 826년 독일 황제 루도비코하고 하는 열심한 이가 자신과 같은 해에 영세한 덴마크 왕 하라르도에게 안스가리오와 그의 친구 알베르토를 선교사로 파견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기쁘게 이 신천지의 개척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3년간은 그의 열심한 전교도 거의 헛수고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신자이던 하라르도 왕은 백성들의 반대를 받아 국외로 추방당하고 친구인 알베르토는 병이 들어 귀국하게 되는 등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안스가리오는 하느님께 더욱 신뢰하고 끊임없이 전교에 열중했다.



그 후 스웨덴에서 독일에 사절이 와서 가톨릭 선교사의 파견을 간청했으므로 황제는 안스가리오 등 두 사람을 그 나라에 파견했다. 그런데 그들은 가는 도중 불행하게도 해적을 만나 일체의 물품을 약탈당하고 다만 간신히 생명만을 건지게 되었다. 스웨덴 왕 비요룬은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정성껏 환영하고 여러모로 전교의 편의를 봐 주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의 전교의 노력의 결실을 맺어 북 유럽의 신자들의 수도 상당히 증가되었으므로,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829년 함부르크에 대주교좌를 설치하고 안스가리오에게 이를 맡기고 또한 전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교황 사절로 정했다.


그 후 매년 많은 선교사들이 자진해 안스가리오의 지도하에 고난을 겪으며 덴마크, 스웨덴 양국의 교화에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백성들은 여간해서 쉽게 그리스도교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리어 선교사들을 미워하며 모욕하고 박해한 일도 적지 않았다. 원래 그들 게르만 인은 허약, 비겁함을 수치로 여기고 무사(武士)의 정신을 존중하는 용감하고 과감한 민족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구세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비겁한 자라고 멸시하며, 신자가 된 동포를 습격도 하고 교회를 불질러 없애버리기도 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기도 한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843년부터 3년간 계속된 대흉작이 안스가리오와 그의 동료들의 생활을 대단히 궁핍하게 한데다가 845년 해적이 침입해 대주교좌 성당 및 수도원을 다시 태워버리는 등의 재난도 있고 해서 전교상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안스가리오는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여전히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로써 부레멘 교구의 원조를 받으며 자기 교구의 부흥을 완성했다.


안스가리오의 그러한 불요불굴(不撓不屈) 희생적 정신은 위대한 대사도 성바오로와 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의 노력은 결국 보답되어 후에는 그 교세가 발전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여전히 검소한 선덕의 생활을 계속하며, 특히 가난한 자나 병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간절해 매일 자기가 식사하기 전에 반드시 그와 같은 불행한 자 3,4명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한다.


매우 바쁜 일을 하면서도 틈을 타서 기도와 독서 연구에 몰두해 도금도 세월을 허송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독실하고도 경건한 안스가리오 대주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품으로 들어간 것은 864년 2월 3일의 일이었다.


그는 “북부의 사도”로 불리며, 스칸디나비아의 첫 번째 사도로 칭송받으며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베네딕도 패.The medal of St.Benedict(뒷면)




아미앙 근교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안스가리오는 피카르디의 옛 코르비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826년에 그는 덴마크로 복음을 설교하러 갔으나 스웨덴에 관한 관심이 더 커서 즉시 돌아오고 말았다. 831년에 그는 함부르크의 대주교로 축성되었고,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스칸디나비아 백성들을 그가 돌보도록 명하였다.


다네스가 845년에 함부르크를 파괴하자, 브레멘의 주교 임명장이 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스웨덴과 덴마크로 돌아가서 놀라운 정열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사후에는 그 모든 일이 중단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아직 그리스도교회가 뿌리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848년에 브레멘의 첫번째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후에 교황 니콜라오 1세에 의해 함부르크 교구와 통합되었다. 그는 또 다시 데마크와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명렬한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는데, 유트랜드의 왕 에릭을 개종시켰다. 이같은 성공은 그의 뛰어난 설교력, 엄격하고 거룩한 생활 그리고 수많은 기적의 힘이었다.


그리하여 안스가리오는 "북부의 사도"로 불리며, 스칸디나비아의 첫번째 사도로 칭송받으며,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안스가리오 혹은 안스카리오(Anskar)라고도 한다.


(부산교구홈에서)








♬Veni Creator Spiritus-베네딕도수도원





































St. Anschar


(Or ANSGARIUS.)



(Ansgarius or Scharies) Confessor (801-865), apostle of the North, born Picardy, France; died Bremen, Germany. A Benedictine monk at Corbie, he went as a missionary to Sweden and on his return was made first Archbishop of Hamburg and papal legate of the northern nations. He revived the Abbey of Turholt in Flanders and established a school there. Winning the protection of King Eric of Denmark, he continued his missionary labors in Sweden and Denmark. A monumental cross has been erected in his honor on an island in Lake Malar, near Stockholm. The preface to his "Life of Saint Willehad" is a masterpiece. Relics at Bremen, Hamburg, and Copenhagen. Feast, 3 February.



New Catholic Dictionary - Catholic Encyclopedia; Butler






ANSGAR


Also known as


Amschar; Anschar; Ansgarius; Anskar; Apostle of the North; Scharies


Memorial


3 February


Profile


French nobility. Benedictine monk at Old Corbie Abbey in Picardy, and New Corbie in Westphalia. Studied under Saint Adelard and Saint Paschasius Radbert. Accompanied the converted King Harold to Denmark when the exiled king returned home. Missionary to Denmark and Sweden. Founded first Christian church in Sweden c.832. Abbot of New Corbie c.834. Archbishop of Hamburg. Papal legate to the Scandanavian countries. Established the first Christian school in Denmark, but was run out by pagans, and the school was burned to the ground. Campaigned against slavery. Archbishop of Bremen. Converted Erik, King of Jutland. Great preacher, a miracle worker, and greatly devoted to the poor and sick. Sadly, after his death most of his gains for the Church were lost to resurgent paganism.


Born


801 at Amiens, Picardy, France


Died


3 February 865 at Bremen, Germany; relics at Bremen, Hamburg, and Copenhagen


Patronage


Denmark, Scandinavia, Sweden


Representation


wearing a fur pelise; holding the Catheral of Hamburg



Readings


If I were worthy of such a favor from my God, I would ask that he grant me this one miracle: that by His grace He would make of me a good man.



Saint Ansgar to a parishioner who was praising him for being a miracle worker






Sant’ Oscar (Ansgario) Vescovo


3 febbraio - Memoria Facoltativa



Corbie (Francia), ca. 800 - Brema (Germania), 2 febbraio 865



Monaco dell’abbazia franca di Corbie e poi maestro in quella sassone di Korvey (c. 823), divenne il grande evangelizzatore della Danimarca e della Svezia, meritando il titolo di ‘apostolo del nord’. Fu vescovo di Amburgo (831) e po di Brema (847). Gregorio IV lo nomino suo delegato (831-832) per i Danesi e gli Svedesi. (Mess. Rom.)




Etimologia: Oscar = lancia di Dio, dal tedesco arcaico


Emblema: Bastone pastorale



Da piccolo e stato gia scolaro dei benedettini, che nel suo paese natale di Corbie, presso Amiens, hanno una famosissima abbazia. Piu tardi vi ritorna, diventando monaco e poi magister interno, funzione che esercita piu tardi nella comunita della Nuova Corbie (Corvey) in Sassonia. Da qui parte la sua avventura di apostolo degli Scandinavi, che e pure una sorta di duello continuo tra i molti insuccessi e il suo coraggio.


Nell’826 accompagna in Danimarca il nuovo re Harald, che ha appena ricevuto il battesimo e che lo sostiene agli inizi della predicazione. Ma e lui, il re, che non riesce a sostenersi sul trono. Dopo un anno deve gia lasciare la Danimarca, e con lui l’abbandona Ansgario, che nell’829 viene inviato missionario in Svezia col monaco Vittmaro. Qui il re Bjorn gli lascia predicare liberamente il Vangelo ai rari cristiani (perlopiu stranieri, prigionieri di guerra) e alla gente del luogo. In un anno e mezzo di lavoro il risultato sembra promettente: per questo l’imperatore Lodovico il Pio (figlio e primo successore di Carlo Magno) incoraggia la nascita di una struttura ecclesiastica con sede ad Amburgo (territorio imperiale) e col campo di lavoro oltre frontiera. Ansgario ne diventa vescovo nell’831, e puo dar vita in Svezia a una missione stabile con a capo un vescovo. Intanto, riprende l’attivita missionaria anche in Danimarca.


Nel giugno 840 muore l’imperatore Lodovico il Pio: l’impero dei Franchi carolingi si frantuma; e intanto le incursioni dei Normanni, gli “uomini del Nord”, devastano l’Europa settentrionale. Nello sconvolgimento crolla tutto cio che Ansgario stava avviando, e nell’845 i Normanni piombano addirittura su Amburgo, dove lui fa appena in tempo a salvare le reliquie della sua chiesa. Va in rovina anche la missione in Svezia, avversata da molti che non amano la “religione degli stranieri”. Ma lui non rinuncia. Dopo alcuni anni trascorsi a Brema, eccolo arrivare di persona in Svezia, perche non ha nessuno da mandare. Il re Olaf autorizza la predicazione cristiana, ma i buoni predicatori non ci sono. Dove non arriva Ansgario, tutto infiacchisce e decade.


La sua presenza migliora le cose anche in Danimarca, grazie ai buoni rapporti del re Horik con Lodovico il Germanico, figlio di Lodovico il Pio, e padrone del territorio tedesco. Ma sono risultati temporanei, troppo minacciati dalla politica. Questi re del Nord, e la loro politica anche religiosa, dipendono da troppi fattori esterni: se va male una battaglia, se muore un lontano carolingio...


Tornato nei suoi ultimi anni a Brema, Ansgario non vede realizzato il sogno di un profondo radicamento cristiano al Nord. Ma per questo sogno ha messo serenamente in gioco la sua vita intera, continuando a seminare fra i temporali, con ostinatissima speranza.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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