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월20일
메시나의 성녀 유스토키아
Santa Eustochia (Smeralda) Calafato di Messina
St. Eustochia Calafato
Born:25 March (Good Friday) 1434 at Annunziata, Messina, Italy as Smerelda Colonna
Died:20 January 1491 at Montevergine, Sicily; entombed in the apse of the church at Montevergine; body incorrupt
Beatified:14 September 1782 by Pope Pius VI at Rome
Canonized:11 June 1988 by Pope John Paul II at Messina, Sicily
이탈리아 Messina의 Catania 귀족가에서 1434년 3월25일 태어났다.
아주 좋은 조건의 결혼 제의를 거부하고 15세에 고향 인근의 Basico 의 성 글라라 수도원에 들어갔다.
작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교황 갈리스도 3세의 인가를 받아 Messina에
성 글라라의 회칙을 철저히 지키는 수도원을 창설했다.
이 창설에는 성녀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이며 후에 성녀의 전기 작가가된 복녀 야고바가 동참했다.
성녀는 예수님의 수난을 열렬히 공경했고 이에 대한 많은 영적 문헌을 남겼다.
1485년 1월20일 귀천했고 그의 유해는 Messina 수도원에 모셔져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8년 6월11일 그 수도원을 방문하여 시성했고 축일은 1월210일이다.
(프란치스칸 삶과 사상 15호, 124쪽에서)
제주성글라라수도회 홈에서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
▒ 복음적 교회생활
성녀 클라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절대 순명하며 교회에 종속됨을 근본가치와 이 성소의 주춧돌로 삼았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맥박이며 교회를 존재케 하고 유지시켜주는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이 공동체생활의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의 딸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이 성체성사를 통해 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으로 그의 신비체인 교회의 전 지체와 일치함으로써 교회를 지탱시켜 나아가고, 특히 나약하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지체들의 보조자로서 영적 봉사를 하는 것이 본회의 주요 소명이다. 이에 교회에 충성함으로써 교회의 어느 지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교회정신과 완전히 일치하여 복음을 생활함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 복음적 형제애
성녀 클라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울삼아 상호 형제적 일치를 깊이 보존하며 복음 이상의 완성을 향해 나아감을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이 심오한 자매적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전 공동체가 하나되어 전 지체, 교회에 형제애 일치의 표징이 되고 활력을 주며, 이로써 누리는 기쁨은 복음적 생활의 결실이며 참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자매애 안에 복음 정신은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 안에 모두 하나되는 구원의 신비를 실현하게 된다.
▒ 복음적 가난
성녀 클라라에게 복음적 생활은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절대적 가난의 생활이다. 가난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법에 의한 복음적 가난이다. 즉 구유에서 가난하게 나셨고, 십자가 위에서 맨 몸으로 달리신 가난한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생활로써 따름이 본 회의 영성에 근본을 이룬다.
순례자로서 단순과 겸손으로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며 기쁜 마음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 작은 자의 생활이다. 즉 모든 것은 은총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의식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가난. 겸손)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 안에서 늘 감사하는 참된 의미의 복음적 가난이다.
▒ 복음적 관상생활
성녀 클라라의 복음적 생활양식은 관상이다. 봉쇄된 수도원 안에서 깨끗한 마음과 주님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고요와 침묵의 기도 생활에 있어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는 이 고요와 관상적 고독의 모범이다. 관상 중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뵈옵고 추구하는,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의 신비를 묵상하며 이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모든 것 위에 감사하며 기쁨과 평화 중에 끊임없는 찬미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본 회의 사도직이며 이는 하느님의 영원한 만민 구원계획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상생활은 교회가 그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본질적 표징이 된다.
▒ 활동분야
우리의 사도직은 관상생활이며, 사도적 활동은 없다. 자급자족을 위한 한 수단으로 봉쇄 구역 안에서 소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나눔의 실천이며, 인근 주민과 같은 형태의 육체적 노동을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정신에 따라 택한 서민적 생활 수단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서 이 육체 노동은 낮은 자들의 수고를 함께 하는 것이며 고통 당하고 굶주리며 억압 당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함께 실생활로써 이 낮은 자되는 어리석음을 받아들여 창설자의 정신으로 복음적 가난과 단순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지향적 삶은 육체적 노동에서뿐 아니라 각자의 소임과 고유한 분야 안에서도 한 맥이 되어 기도와 침묵으로 살아 움직인다.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 아가 2,6; 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 아가 2,6; 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 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제주성글라라수도회홈에서)
♬Fratello Sole e Sorella Luna-Claudio Baglioni
(Brother sun, sister moon)
Santa Eustochia (Smeralda) Calafato di Messina
20 gennaio
Annunziata, 25 marzo 1434 - Montevergine, 20 gennaio 1491
Di famiglia agiata, figlia di un ricco mercante nacque il giovedì santo del 1434 nel villaggio di Annunziata. Venne battezzata Smeralda. Entrò tra le clarisse a 15 anni prendendo il nome di suor Eustochia. La sua scelta religiosa fu contrastata dalla famiglia tanto che i fratelli minacciarono di dar fuoco al convento che doveva ospitarla. Tuttavia le insistenze della giovane convinsero le consorelle ad accoglierla. Fu sempre animata da un profondo amore alla povertà. Nel convento di San Maria di Basicò, sceltasi per cella un sottoscala, visse penitente, dormendo sulla nuda terra e portando il cilicio. In seguito maturò il desiderio di fondare un nuovo monastero. Così nel 1464 nacque il monastero di Montevergine che alla morte di Eustochia, il 20 gennaio 1491 contava 50 suore. È stata canonizzata da Giovanni Paolo II l'11 giugno 1988. (Avvenire)
Sulla vita della Calafato, clarissa, abbiamo due antichi mss.: il primo è nella Biblioteca comunale di Perugia e una sua copia, debitamente collazionata, il 28 febbraio 1781 fu inviata dall'arcivescovo di Messina alla S. Congregazione dei Riti per il processo di beatificazione della serva di Dio (copia pubblicata dal Macrì nel 1903). L'origine di questo ms. si fa risalire a un tempo di poco successivo alla morte della beata, quando suor Jacopa Pollicino, figlia del barone di Tortorici, su richiesta di suor Cecilia, badessa del monastero di S. Lucia di Foligno (con cui le Clarisse messinesi erano in corrispondenza), scrisse la Vita della Calafato, facendosi aiutare da altre suore che erano vissute con la beata. Suor Cecilia, trasferendosi in seguito a Perugia, portò seco il ms., lo ritoccò e gli diede un miglior ordine, togliendo espressioni prettamente siciliane e arricchendolo di colorito toscano.
Il secondo ms. fu ritrovato da Michele Catalano nella Biblioteca Civica Ariostea di Ferrara e da lui pubblicato nel 1942. Composto nel 1493, due anni dopo la morte della Calafato, riproduce con la più grande fedeltà l'originale, seguendolo anche nelle espressioni siciliane: questo testo "oltre alla notevolissima importanza mistica e al valore agiografico e storico, ha valore non piccolo nella storia della nostra lingua" (Catalano).
Figlia di Bernardo, ricco mercante messinese, e di Macalda Romano Colonna, la Calafato nacque il giovedì santo 1434 nel villaggio detto Annunziata, presso Messina. Chiamata al battesimo Smeralda, crebbe in un'atmosfera di pietà: infatti, la madre, indotta dal b. Matteo di Agrigento, si era affiliata al Terz'Ordine di S. Francesco e viveva una per fetta vita cristiana. La figlia cominciò presto a seguire le sue orme. Una visione del crocifisso, avuta in una chiesa, la decise a darsi completamente al Signore e, respingendo i numerosi pretendenti, domandò di entrare fra le Clarisse di S. Maria di Basicò. Le suore, però, intimorite dai fratelli della Calafato, che avevano minacciato di dar fuoco al convento se vi fosse entrata Smeralda, si rifiutarono di accoglierla, ma le insistenze della beata ebbero infine ragione dell'opposizione dei fratelli ed ella, vestendo l'abito religioso, ricevette il nome di Eustochia. Una sua preghiera al Crocifisso mostra da quale desiderio di soffrire fosse animata: "O dolcissimo mio Signore, vorría morire per lo tuo santo amore, cosí come Tu moristi per me! Forami il cuore con la lancia e con i chiodi de la tua amarissima Passione; le piaghe che tu avesti nel tuo santo corpo, che io le abbia nel cuore. Ti domando piaghe, perché mi è grande vergogna e mancamento vedere Te, Signore mio, piagato, che io non sia piagata con Te". La Calafato, sceltasi per cella un sottoscala, visse penitente, dormendo poco e sulla nuda terra e affliggendo le sue carni col cilicio e la flagellazione.
Nel convento di S. Maria di Basicò, uno dei più importanti della Sicilia di allora, asilo delle nobili fanciulle messinesi e perciò oggetto dei privilegi dei re, la beata non trovò però il suo ideale di rinunzia, poiché la vita regolare era mitigata da dispense che dispiacevano al suo spirito, nutrito dalle laudi di Jacopone da Todi: progettò quindi una riforma. Callisto III, col decreto del 18 ottobre 1457, accolse le richieste della Calafato che, aiutata anche finanziariamente dalla madre e dalla sorella, si trasferì nel nuovo convento di S. Maria Accomandata. Nonostante l'opposizione di superiori e consorelle, che non vedevano di buon occhio la riforma, Eustochia vi entrò con la madre, la sorella e Jacopa Pollicino. Nemmeno i Frati Minori Osservanti vollero andare a celebrare la Messa nella nuova fondazione e, abbandonata da tutti, la Calafato si rivolse a Roma, ottenendo un nuovo Breve pontificio, in seguito al quale l'arcivescovo di Messina impose ai Frati Osservanti, sotto pena di scomunica, di assumere la cura spirituale delle suore riformate. Il nuovo convento vide rifiorire i primi tempi del movimento francescano, sotto la ferma guida della fondatrice, che insegnava con la parola e con l'esempio l'ideale del Poverello e l'amore del Crocifisso, insieme con l'adorazione eucaristica, nella quale passava notti intere. Le vocazioni affluirono numerose, tanto che l'edificio divenne troppo angusto per la fiorente comunità; per munificenza di Bartolomeo Ansalone, nel 1463, le Clarisse Riformate poterono trasferirsi a Montevergine, in un nuovo monastero che esiste tuttora. Ivi, per esortare le consorelle alla virtù e all'amore del Crocifisso, la Calafato scrisse un libro sulla Passione. I1 20 gennaio 1491 suor Eustochia morì lasciando la sua ultima raccomandazione: "Prendete, figlie mie, il Crocifisso per Padre, ed Egli vi ammaestrerà in ogni cosa".
Durante la vita, ed ancor più dopo la morte, si attribuirono alla Calafato vari miracoli. I messinesi la venerarono come protettrice della loro città, specialmente contro i terremoti; il 2 luglio 1777 il senato della città promise di recarsi ogni anno a Montevergine il 20 gennaio e il 22 agosto; nel 1782, infine, la Calafato fu beatificata da Pio VI.
L'arcivescovo di Messina, nel 1690, scriveva alla S. Congregazione dei Riti: "Il suo corpo, da me diligentemente veduto e osservato, è integro, intatto e incorrotto ed è tale che si può mettere in piedi, poggiando sulle piante di essi. Il naso è bellissimo, la bocca socchiusa, i denti bianchi e forti, gli occhi non sembra affatto che siano corrotti, perché sono alquanto prominenti e duri, anzi nell'occhio sinistro si vede quasi la pupilla trasparente. Inalterate le unghie delle mani e dei piedi. Il capo conserva dei capelli e, quello che reca maggiore meraviglia, si è che due dita della mano destra sono distese in atto di benedire, mentre le altre sono contratte verso la palma della mano [accenno ad una benedizione che la beata avrebbe dato con quella mano, dopo la sua morte, ad una suora. Le braccia sic piegano sia sollevandole che abbassandole. Tutto il corpo è ricoperto dalla pelle, ma la carne sotto di essa, si rileva al tatto disseccata>>. Ancora oggi si può vedere intatto il corpo della beata ed in piedi nell'abside della Chiesa di Montevergine, esposto alla venerazione del popolo, che in folla vi accorre soprattutto il 20 gennaio. L'iconografia rappresenta la beata in ginocchio dinanzi al Sacramento e, più frequentemente, con la Croce nelle mani.
Le braccia si piegano sia sollevandole che abbassandole. Tutto il corpo è ricoperto dalla pelle, ma la carne sotto di essa, si rileva al tatto disseccata ". Ancora oggi si può vedere il corpo della beata intatto ed in piedi nell'abside della chiesa di Montevergine, esposto alla venerazione del popolo, che in folla vi accorre soprattutto il 20 gennaio e il 22 agosto. I martirologi francescani ricordano suor Eustochia al 20 gennaio. L'iconografia rappresenta la beata in ginocchio dinanzi al Sacramento e, più frequentemente, con la Croce nelle mani.
Autore: Giuseppe Morab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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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9-Sep-2001
Eustochia Calafato
Also known as
Eustochium Calafato; Eustochia of Messina; Eustochia Montevergine; Eustochia Calafato de Messina
Memorial
20 January; formerly 1 February and/or 16 February
Profile
Daughter of Count Bernardo and Countess Macaldo Romano Colonna, Sicilian nobles and wealthy merchants. Legend says she was born in a stable because her mother had received a vision directing her there. Raised and educated by her pious mother, Smerelda felt drawn to the religious life from an early age.
Eustochia received a her own vision, the image of Christ Crucified. The experience led her to join the Poor Clare Convent of Santa Maria di Basico against the wishes of the rest of her family. Her brothers threatened to burn down the convent, and Smerelda returned home. However, seeing the girl's true devotion and desire they relented, and she returned to the convent, taking her vows and the name Eustochia.
Noted for her self-imposed penances and austerities. Believing her convent locked sufficient discipline, she joined the reform-minded Poor Clare community at Santa Maria Acommodata in 1457, a community whose discipline was so severe that local Franciscan priests refused to say Mass there, fearing they were encouraging impious excesses. She was soon joined there by a blood sister and a niece. In 1463 the group relocated to Monte delle Vergini (Maiden's Hill).
Elected abbess in 1464. Noted for her devotion to the Blessed Sacrament and to the poor of the area. The local lay people considered her their patron and protector, the cloister a place of refuge, especially during the earthquakes that rocked the area.
Born
25 March (Good Friday) 1434 at Annunziata, Messina, Italy as Smerelda Colonna
Died
20 January 1491 at Montevergine, Sicily; entombed in the apse of the church at Montevergine; body incorrupt
Beatified
14 September 1782 by Pope Pius VI at Rome
Canonized
11 June 1988 by Pope John Paul II at Messina, Sicily
Additional Information
For All the Saints
Representation
Poor Clare nun holding a cross; Poor Clare nun kneeling before the Blessed Sacrament
Readings
Learning assiduously in the school of Christ Crucified, she grew in knowledge of him and, meditating on the splendid mysteries of grace, she conceived a faithful love for him. For our saint, the cloistered life was not a mere flight from the world in order to take refuge in God. Through the severe criticism which she imposed upon herself, she certainly wanted to be united to Christ, gradually eliminating whatever in her, as in every human person, was fallen; at the same time, she felt united to all. From her cell in the monastery of Montevergine she extended her prayer and the value of her penances to the whole world. In such a way she wanted to be near to each brother and sister, alleviate every suffering, ask pardon for the sins of all.
- Pope John Paul II in his homily at the canonization of Saint Eustoch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