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월 7일
안티오키아의 성 루치아노 순교자
St. Lucian of Antioch
San Luciano di Antiochia Martire
mid 3rd century at Samosata, Syria -
tortured, starved, and run through with a sword in 312 at Nicomedia, Bithynia;
buried at Drepanum (later renamed Helenopolis)
Canonized:Pre-Congregation
시리아의 사모사따 출신인 그는 수사학과 철학에서 당대의 최고 권위자였으며,
에데싸에서는 마카리오란 사람의 지도로 성서를 연구하였다.
이윽고 그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최대 임무로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모범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신구약 성서에서 오류를 제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그는 70 인역 성서의 다른 간행본을 서로 비교하고 또 히브리 원문을 참조하여
구약 성서 개정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성 루치아노 사본이다.
그러던 중에 디오클레씨안의 크리스챤 박해가 일어나, 루치아노는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는데,
이때 그는 다음의 글을 남겼다 :
"모든 순교자들이 귀하께 인사드립니다. 교황 안토모도 순교로써 당신의 인생을 끝맺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의 무덤은 헬레노폴리스에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칠십인역 七十人驛
라틴어 Septuaginta 그리스어 Septuaginta
약어(略語)로는 LXX로 표기한다.
셉튜아진타(Septuaginta)란 단어는 70이란 숫자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전통적으로는 현존하는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중엽이다.
처음에는 모세오경만 번역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PtolemaiosⅡ Philadelpus, 기원전 285∼247)의 통치기간 중
그리스어에 정통한 72인의 유태인 학자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모세오경 이외의 부분은 그 뒤 100여년간에 걸쳐 이뤄졌다.
이러한 번역의 필요성은 당시 유태인들 사이에는 히브리어보다도 그리스어가 더 익숙한 구어(口語)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70인역을 그들의 성서로 채택할 정도였다.
이외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비교적 신빙성이 없다.
70인역에는 히브리어 구약의 정경의 번역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에스델서, 지혜서, 집회서, 유딧서, 토비드서, 바룩서, 예레미야 서신, 마케베오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경에서도 전통적인 마소라 본문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70인역의 원문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계보의 자료를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70인역은 마소라 본문비평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70인역은 번역문서이기 때문에 원문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유태인의 신학적 윤리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욱 중요한 70인역의 가치는 70인역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의 공백을 메워주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코이네(Koine)로 표현된 신약의 종교적 어휘는 헬레세계로부터 유래된 말이 아니라
70인역의 헬라어를 매개로하여 구약의 히브리 세계로부터 유래된 말이다.
현존하는 70인역의 여러 사본(寫本)들은 기원정 3세기경 복잡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사본들을
오리게네스가 집대성하여 비판적으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70인역을 원상태대로 회복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70인역의 자료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해문서라 불리는 쿰란 동굴들의 두루마리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자료들도 70인역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종교학적 가치 외에도 문화사적 언어학적 자료로서도 크게 평가된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루치아노는 시리아의 사사모다에서 태어나 12세 때 부모를 잃었다.
그는 부모가 남겨놓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에데사의 마카리오라는 학자의 슬하에서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성서에 대한 연구가 깊었던가는 뒤에 그가 사제가 되어 여러 가지 성서의 엣 사본(寫本)을 보면서
그 중에서 부주의로 인해 잘못 기록한 장소나 악의(惡意)로 고쳐 기록한 곳을 일일이 교정한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엄격한 금욕 극기(禁慾克己)의 생활을 즐기고 끊임없이 많은 기도를 올리고,
특히 밤중에도 깨어 있기를 기도하며 육류를 취하지 않고 포조주를 입에 대지 않고 더위와 추위를 잘 참았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로써 말을 삼가며 어디에서든지 하는님의 말씀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하지 않기도 했다.
그는 안티오키아에 가서 그곳에 학교를 세워 무보수로 아이들에게 학문과 종교를 가르쳤다.
그가 목적한 것은 다만 그들을 덕망이 높은 그리스도교 신자, 거룩한 신앙의 용감한 옹호자가 되도록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루치아노는 착한 신자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았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학문과 덕행이 탁월했기 때문에 도리어 미움을 받았다.
어떤 때는 아리우스파(派)의 이단자들이 그를 중상모략하여 그가 주장하는 설은 그 저서에 의하며 온전히 아리우스파와 동일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즉시 자기의 정당한 신앙을 명백히 했으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그를 변호해 준 일이 있지만,
루치아노는 이같이 진리를 위해 이단과 싸운 결과 9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간신히 감옥에서 나온 그는 니고메디아의 어느 마을을 향해 여행을 떠났는데
마침 그곳에선 박해가 심해 40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그 고통에 못 이겨 삽시간에 배교하게 되엇다.
그러나 루치아노가 그 배교자들에게 일장의 설교를 하자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전죄를 통회하며 전과 같이 믿음을 지키기를 선언하여 용감히 순교했다.
그 박해로 말미암아 많은 배교자가 있었으나 그의 설교로 인해 그들도 역시 회개했다.
311년 막시미아노 황제 시대에 유혈의 박해가 다시 일어나자, 학문과 덕망이 높아 유난히 원수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루치아노도 결국 법관 앞에 끌려나갔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바친 ’그리스도교 옹호의 반박문’은 황제를 대단히 감동시켜
"너는 참으로 훌륭한 학자다. 배교만 하면 재산이나 명예나 네가 원하는대로 주리라"는 말까지 들었으나,
그의 마음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라고 대답했으므로 재차 투옥되었다.
투옥된 후 수일간이나 음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다.
그때 그의 앞에는 우상에게 바쳤던 좋은 음식이 식탁 위에 산더미처럼 차려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루치아노는 신자들에게 악한 표양이 될까 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더 원했다.
그는 또다시 황제 앞에 끌려나갔다. 그곳에서도 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라고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는 그 말 이외에는 모두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관리들은 헛수고만 하여 그를 다시 감옥에 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Last Supper - DUCCIO di Buoninsegna
1308-11. Tempera on wood,50x53cm Museo dell’Opera del Duomo,Siena.
같은 해 주님 공현 대축일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면회하러 왔을 때 루치아노는
등에 판자를 대고 받듯이 누워있기만 할 수 있어서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고통을 잘 참으며 아무런 원망스러운 기색도 없이 오히려 방문 온 사람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신앙을 잘 지키시오"라는 말로 격려했다.
신자들이 그에게 성체를 받고자 하자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는 자기 가슴을 제대로 삼고
그 위에 빵고 포도주를 놓도록 하고서,
성찬 제정과 축성문을 외우고 둘러 있는 사람들에게 영해 주었는데,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리라.
그 기이한 미사 성제는 간수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다.
루치아노가 순교한 것은 그 이튿날 1월 7일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도토모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목을 잘리었다고 하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황제는 이 거룩한 사제를 공공연하게 사형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옥에서 몰래 죽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순교한 후에도 박해를 받았다.
황제가 어떠한 수단으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을 노하여, 그 사제에 큰 돌을 매달아 깊은 바다속에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2, 3일 후에 그의 시체가 바닷가에 떠 있는 것을 신자들이 발견하고 이것을 비디니아라는 곳에 정중히 매장했다.
그 후 그리스도교를 보호한 콘스탄티노 대제는 이 성스러운 순교자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 장소에 도시를 건설하여 헬레노폴리스라고 이름지었다.
성 루치아노의 유골은 가롤로 대제 때 프랑스의 아루루에 이전되어 오늘까지 보존되어 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축일:9월13일.게시판1363번
성 콘스탄티노 대제 축일 : 5월21일,게시판177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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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Canto Gregoriano-Hosanna Filio David
LUCIAN of Antioch
Memorial
7 January (Western Church); 15 October (Eastern Church)
Profile
Following the death of his wealthy parents, he gave away his possessions, and studied rhetoric, philosophy, and Scripture under Macarius at Edessa. Hermit briefly in his youth. Ordained in Antioch. Spiritual director of Saint Pelagia of Antioch.
Head of a school of theology in Antioch; one of his students was Arius, founder of Arianism. Friend of Paul of Samosata and other heretics, and may have been excommunited himself at one point, but later came back to full communion.
Noted Scripture scholar, working to insure that copyists made the most exact copies possible, correcting copyist errors by comparing against older texts in the original languages. His edition of the complete Bible, known as the Lucian Recension was used by many churches, and by Saint Jerome during his work on the Vulgate.
Arrested in Nicomedia during the persecution of Diocletian, and spent nine years in prison. Dragged before the emperor as an example, he struggled to his feet and gave a great defense of the faith. He thrown back in the cells, given no food or water for 14 days, then hauled before the tribunal and interrogated; he answered all questions with "I am a Christian." Martyr.
Born
mid 3rd century at Samosata, Syria
Died
tortured, starved, and run through with a sword in 312 at Nicomedia, Bithynia; buried at Drepanum (later renamed Helenopolis)
Canonized
Pre-Congregation
Representation
imprisoned priest lying on potshards and consecrating the Eucharist on his own breast
San Luciano di Antiochia Martire
7 gennaio
sec. III
Etimologia: Luciano = di Lucio, nato nella luce, dal latino
Emblema: Palma
San Luciano, prete dotto e discusso, mori martire a Nicomedia il 7 gennaio 312, durante la persecuzione di Massimino. Esplico in tutto l’Oriente, con fulcro ad Antiochia, la sua opera esegetica rivelando in cio una estrema e tormentata esigenza di precisione per i Testi della tradizione. La sua "Recensione lucianica" dell’Antico e del Nuovo Testamento era diventata dalla fine del IV secolo in avanti il testo usuale di un gran numero di Chiese.
L’opera che rimane fondamentale a tutt’oggi per la conoscenza di Luciano e del suo influsso dottrinale e il saggio di G. Bardy: "Recherches sur Saint Lucien d’Antioche et son ecole", pubblicato a Parigi nel 1936.
Nel 330 l’imperatore Costantino, per ossequiare la madre Elena, fondo Elenopoli. Qui vi si onorava e continuo a onorarsi nel tempo il corpo del martire San Luciano. Fantasia vuole che per il trasferimento delle reliquie di Luciano da Nicomedia a Elenopoli, la provvidenza si sia servita, via mare, di un delfino miracoloso.
Quello che e piu certo e che Costantino, poco prima di morire, fu battezzato nel 337 dal vescovo Eusebio nei pressi della tomba di Luciano.
Tali scarne, frammentarie, tramandate notizie su Luciano sono importanti. Questo Santo, testimone sofferente nella ricerca di Dio, attesto con la presenza della memoria il passaggio, la Pasqua di un impero. Qualche imperatore nei secoli successivi ascolto (e ancora oggi qualcun altro ascolta) messe per un prezzo politico. Soltanto a vicenda terrena pressoche conclusa, l’imperatore Costantino suggello la nuova fede venerando la madre Elena e assumendo per testimone San Luciano.
Autore: Mario Benat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