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2월22일(11월13일)
성녀 프란치스카 하비에르 카브리니
ST. FRANCES XAVIER CABRINI
St. Maria Francisca Xavera Cabrini
1850 at Sant’Angelo Lodigiano, Lombardy, Italy -
22 December 1917 at Chicago,Illinois,USA of malaria;
interred at 701 Fort Washington Avenue, New York,USA
Beatified:13 November 1938;
her beatification miracle involved the restoration of sight to a child
who had been blinded by excess silver nitrate in the eyes
Canonized:7 July 1946 by Pope Pius XII;
her canonization miracle involved the healing of a terminally ill nun
Patronage:emigrants, hospital administrators, immigrants, orphans
창설자. 이민(移民)의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비에 카브리니는 미국 시민 중에서 최초 시성된 사람이었다.
하느님 사랑의 보살핌에 대한 그녀의 깊은 신뢰는
그녀가 그리스도의 업적을 수행하는 용감한 부인이 될 수 있는 힘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자기를 교사가 되도록 교육시킨 수녀원에서 입회를 거절하자
이탈리아의 카도뇨에 있는 설립의 집 고아원에서 자선 사업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1877년 9월에 허원을 하고 수도복을 받았다.
1880년에 주교는 고아원의 문을 닫고 프란체스카를 성심 전교 수녀회의 부원장으로 임명하여
고아원에서 나온 일곱 명의 젊은 부인들이 그녀와 함께 일하도록 했다.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부터 중국의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교황 레오 13세의 말에 따라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갔다.
그녀는 여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뉴욕시로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수천 명의 이탈리아 이민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는 일마다 좌절과 어려움을 맛보게 되었다.
그녀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미국에서의 첫 고아원으로 만들고자 했던 집은 쓸모없는 집이었다.
대주교는 그녀에게 이탈리아로 되돌아가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참으로 용감한 프란체스카는 고아원을 세우기로 한층 더 마음을 굳히며 대주교의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성공했다.
35년 동안 프란체스카 사비에 카브리니는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무식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봉헌된 67개의 기관을 설립했다.
신앙을 잃어 가고 있는 이탈리아 이민들 사이에서 교육의 크나큰 필요성을 느낀 그녀는
학교와 성인 교육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언제나 물을 보고 놀랐으며
혹시 물에 빠져 죽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30번 이상이나 바다를 건너 여행했다.
그녀는 시카고에 있는 자신의 콜롬버스 병원에서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프란체스카 사비에 카브리니 원장의 동정과 헌신은 오늘날 병원이나 요양소 또는 국가 기관에서
병자들을 돌보고 있는 그녀의 수십만 명의 동료 시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풍족한 사회에서 나날이 증가하는 병원 비용에 대해 불평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뉴스는,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부족하게 받고 있으며 그들의 땅에 와서
시민의 봉사자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카브리니 원장을 찾고 있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946년 7월 7일 프란체스카 사비에 카브리니의 시성식에서 비오 12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이룬 것은 대단히 미약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하느님의 뜻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고
여인의 힘으로는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을 성취시키는 데 있어 그녀를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만큼
독특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Mother Cabrini shortly after establishing
the Missionary Sister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각국의 인구증가와 더불어 이민 문제가 시끄럽게 논의 되는 이때에
’이민(移民)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한 성녀의 생애를 이야기함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분은 1917년에 세상을 떠난 마리아 프란치스카 하비에르 동정녀이다.
그녀는 1850년 7월 15일, 북 이탈리아의 로디지아노에서 태어나,
같은 날 세례를 받고 본명을 마리아 프란치스카라 했다.
거기에 하비에르(사베라) 붙은 것은 그녀가 장성하여 전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전교의 대주보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사모하는 의미에서 자원하여 붙이게 된 것이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축일:12월3일.게시판1504번
그녀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영리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며,
부모의 허락을 얻어 아직 13세의 어린 몸으로 종신 동정 서원을 발했다.
그 후 그녀는 교원 자격을 얻어 일생 동안 여성 교육을 위해 바치려고 교직을 위한 수녀원에 들어가려 했으나
지도 신부의 의견에 따라 비달도 시에서 2년 동안 더 교편을 잡았고,
그 후 코토네이 시에 가서 보육원을 경영했다.
코토네이 시에는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소성당이 있다.
그녀는 가끔 보육원 아이들을 데리고 그 성당에 가서 조배를 했는데
실상 자기 자신이 성모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보육원 생활을 하는 동안 로디의 주교는 그녀의 사람됨에 관심을 두고
그녀에게 새 수녀회를 조직할 것을 권유했다.
Sacred Heart of Jesus
Sacro Cuore di Gesù
celebrazione mobile - Solennità
예수성심대축일(사제성화의 날)이동대축일:
2004.6.18,게시판1824번, 2003.6.27.게시판1245번.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대축일이며 성체 성혈 대축일 주간의 금요일에 지켜집니다.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그녀도 그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회를 조직하여 ’예수 성심 전교회’라 불렀다.
그녀는 1877년 9월에 허원을 하고 수도복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탈리아는 남, 북미(南, 北美)등 해외에 많은 이민들을 보냈는데
그들은 빈곤한 생활을 견디면서 처녀지를 개간했다.
그러나 교회나 학교는 고사하고 신부나 교리 교사를 초청할 능력이 없어 그들의 영적 상태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였으며,유서 깊은 본국 사람들에게 비해 정신적으로 매우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프란치스카는 그러한 사정을 듣고 그 지역에 가서 비록 규모가 작을지라도
학원이나 병원을 설립하여 공익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교회 장상, 특히 교황 레오 13세도 그런 의사를 갖고 있다는 소식에 힘을 얻어 즉시 일에 착수,
수하 수녀들과 함께 미국을 향하여 출발했다.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부터 중국의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교황 레오 13세의 말에 따라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갔다.
그녀는 여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뉴욕시로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수천 명의 이탈리아 이민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는 일마다 좌절과 어려움을 맛보게 되었다. 그
녀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미국에서의 첫 고아원으로 만들고자 했던 집은 쓸모없는 집이었다.
대주교는 그녀에게 이탈리아로 되돌아가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참으로 용감한 프란체스카는 고아원을 세우기로 한층 더 마음을 굳히며 대주교의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성공했다.
프란치스카는 본래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언제나 물을 보고 놀랐으며
혹시 물에 빠져 죽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30번 이상이나 바다를 건너 여행했다.
35년 동안 그녀는 왕성한 정신력과 탁월한 진취성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 받은 사람들,
무식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아메리카는 물론,
남미 도처에 이탈리아 이민을 찾아서 여러 가지 사업을 일으키며 67개소의 기관및 수녀원을 세웠다.
신앙을 잃어 가고 있는 이탈리아 이민들 사이에서 교육의 크나큰 필요성을 느낀 그녀는
학교와 성인 교육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자본이 넉넉지 못했으므로, 그녀의 희생심과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이 없었던들
그와 같이 광범위하게 사업을 확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 성심에 대해 지대한 공경과 신뢰를 가지며, 수녀들을 성심의 보호하심에 맡겼다.
그리고 모든 덕에 있어, 특히 겸손과 청빈에 있어 스스로 수녀들의 거울이 되었다.
1917년 12월 22일,
그녀는 자기 회의 병원 증축을 위해 시카고 시에 체류중에 콜롬버스 병원에서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67세, 그 유해는 뉴욕에 이송되어 마사 카브리니 여자 고등학교 부속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그녀는 1946년 7월 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을 받았다.
♬목마른사슴-Guitar Duo
FRANCES XAVIER CABRINI
Memorial
22 December
Profile
One of thirteen children raised on a farm. She received a convent education, and training as a teacher. She tried to join the order at age 18, but poor health prevented her taking the veil. A priest asked her to teach at a girl’s school, the House of Providence Orphanage in Cadagono, Italy, which she did for six years. Took religious vows in 1877, and acquitted herself so well at her work that when the orphanage closed in 1880, her bishop asked her to found the Missionary Sister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to care for poor children in schools and hospitals. Pope Leo XIII then sent her to the United States to carry on this mission.
She and six Sisters arrived in New York in 1889. They worked among immigrants, especially Italians. Mother Cabrini founded 67 institutions, including schools, hospitals, and orphanages in the United States, Europe and South America. Like many of the people she worked with, Mother became a United States citizen during her life, and after her death she was the first US citizen to be canonized.
Born
1850 at Sant’Angelo Lodigiano, Lombardy, Italy
Died
22 December 1917 at Chicago, Illinois, USA of malaria; interred at 701 Fort Washington Avenue, New York, New York, USA
Beatified
13 November 1938; her beatification miracle involved the restoration of sight to a child who had been blinded by excess silver nitrate in the eyes
Canonized
7 July 1946 by Pope Pius XII; her canonization miracle involved the healing of a terminally ill nun
Patronage
emigrants, hospital administrators, immigrants, orphans
Readings
We must pray without tiring, for the salvation of mankind does not depend on material success; nor on sciences that cloud the intellect. Neither does it depend on arms and human industries, but on Jesus alone.
Saint Frances Xavier Cabr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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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ed by the grace of god, we join the saints in honoring the holy virgin Frances Xavier Cabrini. She was a humble woman who became outstanding not because she was famous or rich or powerful, but because she lived a virtuous life. From the tender years of her youth, she kept her innocence as white as a lily and preserved it carefully with the thorns of penitence; as the years progressed, she was moved by a certain instinct and supernatural zeal to dedicate her whole life to the service and greater glory of God.
She welcomed delinquent youths into safe homes, and taught them to live upright and holy lives. She consoled those who were in prison, and recalled to them the hope of eternal life. She encouraged prisoners to reform themselves, and to live honest lives.
She comforted the sick and the infirm in the hospitals, and diligently cared for them. She extended a friendly and helping hand especially to immigrants, and offered them necessary shelter and relief, for having left their homeland behind, they were wandering about in a foreign land with no place to turn for help. Because of their condition, she saw that they were in danger of deserting the practice of Christian virtues and their Catholic faith.
Undoubtedly she accomplished all this through the faith which was always so vibrant and alive in her heart; through the divine love which burned within her; and finally, through constant prayer by which she was so closely united with God from whom she humbly asked and obtained whatever her human weakness could not obtain. Although her constitution was very frail, her spirit was endowed with such singular strength that, knowing the will of God in her regard, she permitted nothing to impede her from accomplishing what seemed beyond her strength.
From a homily at the Canonization of Saint Frances Xavier Cabrini by Venerable Pope Pius 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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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a Francesca Saverio Cabrini Vergine
22 dicembre - Comune
S. Angelo Lodigiano, 1850 - Chicago, 1917
Una fragile quanto straordinaria maestrina di Sant’Angelo Lodigiano. In questo ritratto si colloca la figura di Francesca Saverio Cabrini, nata nella cittadina lombarda nel 1850 e morta negli Usa, in terra di missione, a Chicago. Divenne maestra e quindi entro nell’Ordine delle ≪Sorelle della Provvidenza≫, poi diede vita alla missione del ≪Sacro Cuore di Gesu≫ che si occupo delle orfanelle e delle opere parrocchiali. Porto il suo carisma missionario negli Stati Uniti, tra gli italiani che vi avevano cercato fortuna. Per questo divenne la patrona dei migranti. Nel giorno della morte il suo corpo venne traslato a New York alla ≪Mother Cabrini High School≫, vicino ai suoi figli. (Avv.)
Patronato:Emigranti
Etimologia: Francesca = libera, dall’antico tedesco
Emblema: Giglio
Tra il 1901 e il 1913 emigrarono nella sola America 4.711.000 italiani, di cui 3.374.000 provenivano dal meridione; un vero morbo sociale, un salasso, come lo hanno definito politici e sociologi (anche se non e mancato chi, come Nitti, ha avuto il coraggio di dire che l’emigrazione era un affare per lo Stato, cui recava valuta estera senza rischi di capitali). Ma accanto ai drammi che l’emigrazione suscito, bisogna ricordare ancor oggi una fragile maestrina di S. Angelo Lodigiano, Francesca Cabrini, nata nel 1850, ultima di una nidiata di tredici bambini, che al fenomeno della emigrazione non guardo con gli occhi del politico ne del sociologo, ma con quelli umanissimi di donna, cristiana, meritando il titolo di madre degli emigranti.
Orfana di padre e di madre, Francesca avrebbe voluto chiudersi in convento, ma non fu accettata a causa della sua malferma salute. Accetto allora l’incarico di accudire a un orfanotrofio, affidatole dal parroco di Codogno. La giovane, da poco diplomata maestra, fece molto di piu: invoglio alcune compagne a unirsi a lei, costituendo il primo nucleo delle Suore missionarie del Sacro Cuore, poste sotto la protezione di un intrepido missionario, S. Francesco Saverio, di cui ella stessa, pronunciando i voti religiosi, assunse il nome. Come il santo gesuita, avrebbe voluto salpare per la Cina, ma quando venne a conoscenza della colpevole incuria e del dramma della disperazione di migliaia e migliaia di emigranti italiani, scaricati dalle stive delle navi nel porto di New York privi della minima assistenza materiale e spirituale, Francesca Saverio Cabrini non ebbe esitazioni.
Anche lei nella prima delle sue ventiquattro traversate oceaniche condivise i disagi e le incertezze dei nostri compatrioti; ma e straordinario il coraggio con cui affronto la metropoli statunitense e seppe districarvici per stabilirvi il punto d’incontro e di soccorso degli emigranti. Per prima cosa bado agli orfani e agli ammalati, costruendo case, scuole e un grande ospedale a New York, poi a Chicago, quindi in California, allargando poi la sua opera in tutta l’America, fino all’Argentina.
A chi si mostrava con lei ammirato per il successo di tante opere, madre Cabrini rispondeva con sincera umilta: "Tutte queste cose non le ha fatte forse il Signore? ". Tradotte in cifre queste opere costituivano ben trenta fondazioni in otto diverse nazioni. La morte la colse sulla breccia, dopo un ennesimo viaggio, a Chicago, nel 1917. Il suo corpo venne portato trionfalmente a New York, nella chiesa annessa alla "Mother Cabrini High School", perche fosse vicino agli emigr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