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콘]4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성화. 중앙아시아. 16세기. 81 x 73cm
4개의 똑같은 크기의 화면으로 구성된 대형 성화에 소개된 장면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마리아의 탄생, 침상위에 앉아있는 안나를 2명의 시녀가 시중들고 있다.
그림의 아랫부분에서는 산파가 갓 태어난 아기를 목욕시키려고 안고있는 모습을 본다.
배경의 한 건물안에서 성 요아킴이 밖을 내다보고있다.
그림의 오른쪽 윗 부분에는 마리아를 성전으로 데리고 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성전으로 인도되는 은혜는 동시에 하느님과 교환할 준비로 지정되었다.
마리아가 그녀의 양친들에게 인도되었다.
아름다운 건물들이 배경을 이룬다.
그림의 왼쪽 아랫부분에는 성모의 영원한 죽음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성모가 임종의 침상에 편안히 누워있고, 다마스커스의 요한과
아레오팍의 디오니시오로 보여지는 주교복을 입은 두 명의 성자들과
탄식하는 그 밖의 성자들이 임종의 침상가에 둘러 서있다.
관대(棺臺)의 뒤에는 그리스도가 성모의 혼(塊)을 들고 광륜(光輪)속에 떠 있다.
오른쪽 아래화면에는 "그리스도 십자가 칭송"을 묘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배경에는 교회가 보이고 그 앞에 화려한 복장을 한 세명의 교회의 높은 성직자들이 높은 단(段)위에 서있다.
중앙에 서 있는 주교가 십자가를 높이 올리고 있다.
두명의 금관을 쓴 중요한 인물들 곧 왼쪽이 콘스탄틴 황제,
오른쪽이 헬레나황후가 귀빈석에 앉아서 예식을 참관하고 있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탄신 축일:9월8일.게시판1357번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자헌 축일:11월21일.게시판1480번
성모 승천 대축일:8월15일.게시판1317번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 축일:12월4일.게시판1505번,1681번.
아레오팍의 성 디오니시오 축일:10월3일.게시판1402번
성 콘스탄틴 황제 축일:5월21일.1773번.
성녀 헬레나 황후 축일:8월18일.게시판1320번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게시판136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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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 12월 10일
성 밀시아데스 교황
San Milziade (o Melchiade) Papa
St. miltiades
Africa.(Papal Ascension 2 July 311)
- 11 January 314 at Rome, Italy
m. 314 (Papa dal 02/07/311 al 11/01/314)
멜키아데스라고도 부르는 그는 아마도 아프리카 출신인듯 보여지며,
311년 7월 2일에 교황 성 에우세비오를 계승하여 교황좌에 올랐다.
밀시아데스의 재임 기간은 콘스탄티노 황제가 밀비아노교에서 막센시우스를 격퇴하고 승리함으로써
크리스챤에 대한 오랜 박해가 종식하던 시기였고(312년),
따라서 콘스탄티노 황제를 통하여 제국 내의 종교 자유를 획득한 중요한 시기였다(313년).
그러나 이와 동시에 도나투스 이단이 이프리카에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드는
교회 내의 혼란 시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그는 313년, 라떼란 궁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도나투스를 단죄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 도나투스파 ◆ 라틴어 Donatismus 영어 Donatism
도나투스(Donatus, 313~347)에 의해 제창된 북아프리카 교회의 이단사상.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303~305년) 때 교회 안팎에는 많은 배교자가 생겼다. 박해가 멎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이 배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배교한 주교 펠릭스는 체칠리아노(Caecilianus)를 서품한 3인의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말썽이 되어 순교자에 대한 공경과 신앙에 투철한 엄격주의자들인 70명의 주교들은 도나투스의 영향을 받아 카르타고의 주교로서 체칠리아노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마요리노(Majorinus)를 새 주교로 뽑아 임명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체칠리아노에게 호의를 보여 후자의 결정을 몇 차례에 걸친 시노두스를 통해 일축해 버렸다. 이 분쟁은 마요리노 사후 도나투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도나투스는 일종의 엄격주의자, 완벽주의자로 신앙에 대한 열성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나 그의 지나친 완벽주의적 견해는 성사적 의미에 대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즉 배교자나 열교(裂敎)인 이단자들에 의한 성사집행은 무효라는 것이다. 성사는 그 집행에 의해 은총이 주어지는 것[성사의 事效性, ex opere operato]이 아니고 집전자의 성성(聖性)과 정통성에 따라 성사의 유효 · 무효가 결정된다[성사의 人效性, ex opere operantis]는 그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후대 교부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따라서 이단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나[이단자 세례논쟁] 교회는 성인(聖人)들만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극히 제한적이고 엄격한 교리관은 모두 교회에 의해 반박 단죄되었다. 도나투스파는 5세기부터 영향력을 잃었으며 7세기경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축일: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Dedication of Saint John Lateran (게시판1461번)
성 멜키아데스는 아프리카에서 탄생했으며 311년 7월2일 교황이 되심.
교황 임기동안 신앙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교황은 성요한 대성전등 수많은 성전을 건립했다.
교황님의 무덤은 로마에 칼리스도에 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밀라노칙령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Victimae Paschali-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MILTIADES
Also known as
Melchiades
Memorial
10 December
Profile
Pope during the time Constantine declared tolerance for Christians in the Empire. Counted as a martyr on many lists due to the sufferings he endured prior to the toleration decree. May have been Pope when the Church was given the Church of Saint John Lateran. Saint Augustine thought highly of him, and mentioned him in his writings.
Born
Africa
Papal Ascension
2 July 311
Died
11 January 314 at Rome, Italy
San Milziade (o Melchiade) Papa
10 dicembre
m. 314
(Papa dal 02/07/311 al 11/01/314)
Africano (Papa dal in alcuni testi e detto anche Melchiade), fu testimone della battaglia di Ponte Milvio, con la vittoria di Costantino su Massenzio. Era l’anno 312.
La revisione liturgica ne ha limitato la memoria ai soli calendari particolari, perche certamente non fu Martire. Ma dato che nessun altro Santo lo ha sostituito in questo giorno, possiamo ancora ricordare quel Papa sotto il quale la Croce, fino allora segno di infamia, divenne simbolo di gloria e auspicio di vittoria, sui labari imperiali di Costantino.
Non si tratta, come si puo pensare, del Papa San Silvestro, sotto H cui lungo pontificato fu coronato quello che si chiama " il trionfo del Cristianesimo ", e l’Imperatore Costantino, prossimo alla morte, ricevette il Battesimo. Lo straordinario passaggio dall’eta delle persecuzioni a quella della protezione, dall’atmosfera di sospetto a quella di rispetto verso i Cristiani, avvenne sotto il Papa oggi festeggiato, San Milziade, o Melchiade.
Della sua vita non si sa quasi nulla, prima del pontificato. Era di origine africana, e dovette trovarsi a Roma sul finire della sanguinosa persecuzione di Diocleziano. Fu poi testimone dell’ambigua condotta nei confronti dei cristiani, dell’Imperatore Massenzio, il quale, per sedare le discordie della Chiesa romana, esilio tanto il Papa Eusebio, quanto un antipapa, Eraclio, esponente di un gruppo di apostati mal pentiti.
Eusebio morii poco dopo, nel 310. Il nuovo Papa, che fu Milziade, venne eletto pero solo un anno piu tardi. In quell’anno era accaduto infatti un avvenimento importante. Galerio aveva emesso un Editto di tolleranza religiosa, che venne poi sottoscritto dagli " Augusti " Licinio e Costantino. Massenzio non aveva firmato quell’Editto, ma segui lo stesso, nei confronti dei cristiani, la politica di benevolenza dei suoi avversari. Non volle pregiudicarsi il favore dei sudditi, riell’imminenza della contesa politica.
Il neo-eletto Milziade, si valse di questa mutata politica per riorganizzare energicamente la Chiesa. Per prima cosa riottenne i beni dei cristiani di Roma confiscati durante le persecuzioni. Poi invio i suoi Diaconi a riprendere possesso dei luoghi di culto, cioe degli antichi tituli.
Dopo la battaglia di Ponte Milvio, sconfitto Massenzio, Costantino entro in Roma innalzando il segno della Croce. Il Papa, allora, sfrutto ancora meglio in favore dei fedeli, le ottime disposizioni dell’Imperatore vittorioso. Costantino infatti non si limito a restituire i beni della Chiesa: stabili che l’erario contribuisse ai bisogni del culto. Non si contento di reintegrare i cristiani nelle modeste dimore dove avvenivano le riunioni sacre: volle che fossero costruite nuove e grandiose basiliche. La prima ad essere iniziata fu quella detta Lateranense, che e restata la Cattedrale di Roma; e nel Laterano, in un palazzo di proprieta del fisco imperiale, Costantino ospito il Santo Vescovo di Roma.
Il pontificato di San Milziade o Melchiade fu breve. Col 314, le opere da lui fervidamente iniziate vennero proseguite da San Silvestro. Ma tre anni di governo della Chiesa bastarono a fargli meritare l’elogio di Sant’Agostino: " Vero figlio della pace e vero padre per i cristiani ".
Stranamente pero, questo " figlio della pace ", primo Papa dell’eta costantiniana del " trionfo del Cristianesimo ", ricevette il titolo onorifico di Martire, forse per essere stato sepolto nelle Catacombe.
Fonte:
Archivio Parrocch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