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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St Eligius in His Workshop-CHRISTUS, Petrus


1449.Oil on wood, 98 x 85 cm.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축일:12월1일


성 엘리지오(엘로이) 주교


St. ELIGIUS(Eloi)


St. Eligius of Noyon  


Sant’ Eligio Vescovo


588 at Catelat, near Limoges, France


-1 December 660 at Noyon, France


Canonized:Pre-Congregation


 



 


엘로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로만-갈로가의 아들로서 골의 샵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에우체리오는 금속 세공인이었기 때문에,


그당시 유명한 금 세공인인 압보에게 아들을 보내어 공부를 하도록 안배하였다.


압보는 리모쥬의 조폐국 책임자였다. 그가 도제 수업을 마친 뒤에는


궁중 재무관 봅보 수하에서 일을 하다가 국왕 클로테르 1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엘리지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한편,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엘리지오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수많은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납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또 632년에 그는 솔리냑에 수도원을 세웠고, 클로테르의 아들 도고베르트 1세의 도움으로


파리에 수도원까지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이리하여 국왕은 그를 자신의 주요 고문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엘리지오는 브리톤으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활약한 결과,


브리톤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그는 640년에 서품되어 노이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뚜르네의 주교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플란데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주에 안터워프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프랑스 왕조에서 근무한 많은 성인들중 엘리죠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590년 출생했고 열심한 부모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주변의 부패타락한 사회안에서도 그는 오직 겸손하고 경건하게 덕행의 길을 걸었다.


다고벨도 왕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엘리죠의 의견을 경청했다.


 


왕정의 고관신분으로 출세의 길이 크게 열려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극빈자와 불행한자를 위해 재산을 내놓았을 뿐아니라 자신도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궁중에서는 신분에 맞는 옷을 입었지만 집에서는 검소하게 평민의 옷을 입고 살았다고 한다.


 


그후 그는 노아연교구의 사제가 되었고 그리고 주교로 추대받았다.


사제서품후 641년 주교로 임명되었다.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고 수도원을 지었으며 극빈자를 위해 자신의 수입을 거의 전부 내놓았다.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빈민을 가엽게 돌봐줄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그는 금속 세공인의 아들로 골의 샵텔에서 태어났다.


리모주의 조폐국 책임자인 압보에게 도제 수업을 받은 그는 국왕 클로테르 1 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엘리지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신 납부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632 년, 솔리냑에 수도원을 세운 그는 클로테르의 아들 도고베르트 1 세의 도움으로


파리에까지 수도원을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국왕의 고문으로 브리톤으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브리톤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640 년에 서품되어 느와이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투르의 주교로도 활약한 그는


플란데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


안터워프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이다


 



 


프랑스 왕조에서 일을 한 많은 성인 중 성 엘리지오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590년경에 출생했다.


부모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로 그 아들을 교회의 가르침대로 교육시켰으므로


엘리지오는 매우 경건하게 자라났고, 어려서부터 기도하기를 즐겼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미술 방면이었으므로 양친을 그로 하여금


금은세공(金銀細工)을 배우게 했더니, 과연 놀랄만한 기술을 발휘해 이 방면의 대가가 되었다.


한편 그는 덕을 닦음에도 게으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친절하며 더욱이 극빈자들에게는 동정심이 깊었다.


또한 열심히 성서를 연구하며, 이에 대한 설명도 열심히 들었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되자, 프랑스 국왕 클로테르 1세는


당시 겨우 30세인 엘리지오를 궁중에 초청하여 보석 귀금속으로 자기의 화려한 옥좌를 만들도록 했다.


필요한 금은 보석의 보고(寶庫)가 그에게 맡겨졌다.


"주신 금은 보석이 남았으므로 두 개의 옥좌를 만들었습니다"했다.


주문대로 한 개의 옥좌로 족한 것인데, 손품을 아끼지 않고 두 개를 만들어


남은 금은 보석을 제것으로 삼지 않는 그의 청렴함은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그러니 국왕은 화려한 그의 옥좌보다 엘리지오의 정직하고 결백한 마음씨를 더욱 가상히 여겼고,


그를 즉시 왕립 조폐 국장(王立造幣局長) 및 자기 고문으로 등용했다.


 


이렇듯 놀라운 입신출세를 한 엘리지오였지만 그는 항상 겸손한 그대로 였으며,


주위 사람들의 부패 타락한 틈에서 그는 오직 덕행의 길로만 나아갔다.


그는 그런 부패 타락한 이들에게 충고를 가하는 한편, 국왕에게까지도 충언을 가끔 올렸다.


이들도 모두 엘리지오의 충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의 정직한 행실과 열심한 기도, 준엄한 단식 등 실로 그에게는 한점의 결점도 볼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말에는 힘있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테르 왕이 서거하자 후계자로 그의 아들 도고베르트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엘리지오를 측근자로 두고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그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는 이미 위세 당당한 고관의 신분이었으므로 그 앞날의 출세도 양양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빈자와 불행한 이를 위해 사재를 내던졌고, 자신은 매우 빈곤한 생활을 감수했다.


궁중에서만은 신분에 알맞은 복장을 했으나,


자택에서는 보잘것 없는 의복과 또 의복감도 가장 검소한 것을 택했다.


 



 


한편 신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으므로


노이용 교구의 사제 및 신자들은 그를 주교로 추대했다.


우선 사제 서품을 받고 641년에는 주교로 축성되어 부임했다.


 


노이용 교구는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이며 주민의 대부분은 아직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다.


엘리지오 주교는 열심히 그들이 개종을 도모하고, 각 지방에 성당을 세우며 여러 개의 수도원까지 건축했다.


한편 여전히 극빈자를 생각하며 수입의 거의 전부를 그들 구제에 사용했다.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두어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여가 있는대로 손수 교회용의 귀중한 성물도 제작했다.


그때가지도 국왕과 그 후계자들은 가끔 그의 의견을 청하러 왔다.


 


나이 불과 69세인 엘리지오는 죽음이 임박해옴을 깨달았다.


때마침 주교좌 대성전을 건축 도중이었는데, 그는 ’빨리 공사를 완성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준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하여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그러나 엘리지오는 항상 명랑하게 걱정스러운 그들을 위로하며


 ’기뻐하십시오, 나는 이미 오랫동안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날을 고대했습니다"하고 말했는데,


과연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임종 때 침대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과 또한 빈민을 가련하게 여겨줄 것을 거듭 강조하며 부탁했다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agnus dei-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ELIGIUS


Also known as


Eligius of Noyon; Eloi; Eloy; Loy


Memorial


1 December


Profile


Son of Eucherius and Terrigia. Extremely skillful metalsmith. Master of the mint under King Clotaire II of Paris, and a close friend of Clotaire. Eligius was generous to the poor, ransomed slaves (including Saint Tillo of Solignac), built churches, a monastery at Solignac, and major convent in Paris. Counselor to and diplomat for King Dagobert I. Persuaded Breton King Judicael to accept the authority of Dagobert. Ordained in 640. Bishop of Noyon and Tournai. Preacher in Antwerp, Ghent, and Courtai, with many converts. Friend of Saint Ouen.


Born


588 at Catelat, near Limoges, France


Died


1 December 660 at Noyon, France


Canonized


Pre-Congregation


Patronage


agricultural workers, blacksmiths, boilermakers, cab drivers, carriage makers, cart makers, cartwrights, clock makers, coin collectors, craftsmen, cutlers, farm workers, farmers, farriers, garage workers, gas station workers, gilders, gold workers, goldsmiths, harness makers, horses, horseshoe makers, jewelers, jockeys, knife makers, laborers, locksmiths, metal collectors, metal workers, metalsmiths, miners, minters, minting, numismatics, numismatists, precious metal collectors, saddle makers, saddlers, sick horses, taxi drivers, tool makers, veterinarians, watch makers, wheelwrights


Representation


anvil; hammer; horseshoe; pincers; man grasping a devil’s nose with pinc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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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 Eligio Vescovo


1 dicembre


Chaptelat (presso Limoges, Francia), 588-590 - Olanda, 1° dicembre (?) 660


 


Di famiglia Gallo-Romana, secondo la leggenda Clotario II gli commissiono un trono ed egli ne fece due con la quantita di metallo prezioso fornitogli per uno. Clotario lo nomino, cosi, suo orefice e monetiere. Tesoriere del re Dagoberto II, fondo il monastero di Solignac nel 632 e costrui ospizi e molti altri monasteri; alla morte del re, Eligio fu nominato vescovo e fece numerosi viaggi nelle Fiandre e nelle isole Frison. Eligio e il patrono degli orefici, dei maniscalchi e dei contadini.


 


Patronato:Fabbri, Gioiellieri, Garagisti


Etimologia: Eligio = eletto, dal latino, nobile guida, dall’ebraico


Emblema: Bastone pastorale


 


Gli si presenta il diavolo vestito da donna: e lui, Eligio, rapido lo agguanta per il naso con le tenaglie. Questa colorita leggenda e raffigurata in due cattedrali francesi (Angers e Le Mans); e nel Duomo di Milano, con la vetrata di Niccolo da Varallo, dono degli orefici milanesi nel Quattrocento.


L’Eligio storico, figlio di gente modesta, deve aver ricevuto tuttavia un’istruzione, perche viene assunto come apprendista dall’orefice lionese Abbone, che dirige pure la zecca reale: un grande maestro nella sua arte. E l’allievo Eligio non e da meno. Della sua fama di artefice e di galantuomo parla un singolare racconto, non documentato: il re Clotario II gli commissiona un trono d’oro, dandogli il metallo occorrente. E lui, con quello, di troni gliene fa due. Dimezzato il preventivo: cose mai viste, ne prima ne dopo.


Sotto Clotario, Eligio va a dirigere la zecca di Marsiglia, e intanto continua a fare l’orefice. Col nuovo re Dagoberto I (623-639) viene chiamato a corte e cambia mestiere: il sovrano ne fa un suo ambasciatore, per missioni di fiducia. Altri incarichi se li prende da solo: per esempio, riscattare a sue spese i prigionieri di guerra, fondare monasteri maschili e femminili. Morto il re, sceglie la vita religiosa, e il 13 maggio 641 viene consacrato vescovo di Noyon-Tournai.


Comincia un’esistenza nuova. Eligio s’impegna nella campagna di evangelizzazione (e ri-evangelizzazione) nel Nord della Gallia, nelle regioni della Mosa e della Scelda, nelle terre dei Frisoni. Ne diventa uno dei protagonisti, con altri vescovi come Audoeno (Ouen) di Rouen (che sara anche il suo biografo), Amand di Tongres, Sulpizio il Pio di Bourges. E la sua vita si conclude appunto sul campo, in terra olandese (di qui i suoi resti verranno riportati a Noyon solo nel 1952). E subito parte l’altra storia di sant’Eligio: il suo culto si diffonde in Francia, in Germania, in Italia. Lo vogliono come patrono non solo gli orafi, ma in pratica tutti gli artigiani dei metalli, e poi i carrettieri, i netturbini, i mercanti di cavalli, i maniscalchi, e ai tempi nostri anche i garagisti. In alcune localita francesi si da la benedizione ai cavalli nel giorno della sua festa.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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