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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11월28 일


마르치아의 성 야고보, 사제, 제1회


San Giacomo della Marca Sacerdote


ST. JAMES of the Marches


St. Jacobus de Marchia, C


Monteprandone, Ascoli Piceno, 1394 - Napoli, 28 novembre 1476


(1391 at Monteprandone, March of Ancona, Italy


- 28 November 1476 at Naples, Italy)


Beatified:1624 by Pope Urban VIII


Canonized:1726 by Pope Benedict XIII


 



 


 


마르치아의 야고보(1391 - 1476)는 이탈리아 몬떼 브란도네에서 태어났다.


페루지아에서 3년간 수학하고 피렌체에서 가르치다가 뽀르치웅꿀라에서 작은형제회 착복을 하였다.


그리고 수련기를 까르첼리의 은둔소에서 보냈다.


 


그의 수도 생활은 엄격한 보속의 연속이었고


모든 점에서 사부 성 프란치스꼬를 본받으려 하였고 선교사로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독일에서 성공하였다.


 


십자군 원정때 투르크인들을 거스려 성 요한 카페스트라노와 함께 설교하였다.


5 만 여명의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고 20만 여명의 무신론자들을 영세시켰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여러가지 합당한 은총을 허락하셨다.


 


그는 여러 교황의 사절로 유럽 제국을 여행하며 기도하였다.


베네딕또 13 세가 시성하였으며 그의 썩지 않는 유해는 나폴리에 보존되어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1369번


*성 요한 카페스트라노 축일:10월23일.게시판143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t. Francis and the Porziuncola in Assisi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마리아축일:8월2일.게시판1297번


 


야고보는 1394년 9월 Ascoli Piceno 가까이에 있는 Monteprandone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도미니코였다. 그는 그가 아직 어렸을 적에 부모를 잃었다. 그래서 목동으로 일해야 했다.


 


그 후 그는 Ascoli의 프란치스칸 수도원과 도미니칸 수도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페루지아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Bibbiena와 Porziuncola에서 작은 형제들과의 접촉을 갖게 되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1415).


 


그는 플로렌스 외곽에 있는 Monte alle Croci 수도원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계속 공부하였으며 1422년 그곳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1431년에서 1458년 사이에 야고보는 이태리의 많은 도시에서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다.


 


그는 또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내에서의 개혁 운동(Observant 개혁 운동)에 있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교황들은 좀 복잡한 선교를 해야 할 때면 야고보를 그 선교지에 자신들의 대사로 보내곤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가 간 곳은 헝가리,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폴란드이다.


그는 1450년 로마에서 거행되었던 성 보나벤투라의 시성식에 참여하였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간은 이태리의 도시들에서 설교를 하는 데 소비하였다.


 


야고보가 주창한 일들 중 한 가지는 “Monti di Pieta”라는 것을 창립한 것인데,


이것은 중세의 은행의 일종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저렴한 이자로 대부를 받아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태리에서 Observant들이 했던 위대한 사회 개혁들 중의 하나로서,


고리대금을 근절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야고보는 1476년 11월 28일 나폴리에서 설교를 하던 중 죽음을 맞이하였다.


베네딕도 13세가 1726년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보나벤투라 축일:7월15일.게시판1274번


 



 


1394년 이탈리아의 몬테브란드네에서 태어난 성 야고보는


법학박사가 된 후 24세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성 베르나르디노 문하에서 수련을 마쳤다.


 


자신을 단련하기 위하여 고행과 기도생활에 엄격하였고 사제가 된 후에는 지방순회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화시켰다.


기적을 행하고 성공과 명성을 날렸음에도 언제나 겸손과 가난을 실천했던 성인은 1476년 85세에 선종했다.(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축일:5월20일.게시판1169번


 



 


그는 간갈라 집안이지만 부모는 매우 가난한 서민이었다.


그는 1416년에 아씨시의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여, 까르체리에서 수련기를 마치고,


피에졸레에서 성 베르나르디노 디 시에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29세의 나이로 사제가 된 그는 즉시 투스카니, 움브리아 그리고 마르카 등지를 돌며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을 더욱 단련하기 위하여 하루에 3시간만 잠을 잤고,


대부분의 시간을 책 사본하는데 보냈으며, 항상 다 헤어진 의복만을 입고 지냈다.


 


또한 그는 프란치스꼬회와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간의 화합을 위하여 활동한 적도 있다.


또 밀라노의 주교로 천거되었으나 거절하였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THE SAN DAMIANO CROSS


 


마르키아의 성 야고보는 그의 사업과 언변에 있어 위대하고,


교회를 위한 활동과 기적에 있어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 성공으로 유럽 제국에서 유명해진 분이다.


그의 고향은 이탈리아의 안코나 주 몬테 브라드네이다. 양친은 매우 열심한 신자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친척되는 한 신부에게 양육되어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이어 아수코리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고, 후에 페루지아 대학에서 법학을 연구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같은 성공에도 야고보는 결코 마음을 놓지 않고 언제나 겸손하며 경건했다.


이 점을 기특하게 여긴 어떤 부호는 그를 자기 집 가정 교사로 초청하는 한편 피렌체 시청에 좋은 근무처를 알선해 주었다.


이리하여 그의 앞날에는 입신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시 수도생활을 동경해 카르투시오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마음먹었다.


그런데 몬테 아트베르나에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생활을 보고는, 거기에 마음이 쏠리게 되어 마침내 수도원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아시시 근방인 빈한한 카르첼리 수도원에서 수련을 시작한 것은 1416년이며 나이 24세 때였다.


그곳은 성 프란치스코가 가끔 세속을 피해 홀로 조용히 기도하던 곳이다.


 


야고보도 될 수 있는 한 사부(師父)를 본받아 기도와 묵상과 고행을 했다.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원장인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그의 극기 금욕의 혹심함이 건강에 해로움을 줄까 염려해 완화하기를 엄명할 정도였다.


 


야고보는 첫 서원을 발한 후 신학을 연구했는데, 그의 선생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며,


동료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로서 한 지붕 밑에서 세 명의 성인이 기거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 세 성인은 교회를 위해 큰 일을 이룩한 분들이다.


 



 


Compagni di San Francesco


 


야고보가 1420년에 서품되자 곧 지방 순회 설교의 명을 받았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이탈리아,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보스니아, 달마시아, 알바니아 등지를 무대로


맹활악을 하며 죄악과 폐풍을 규탄하고, 이단 사설을 공박하며 각국으로 하여금 십자군에 참가하도록 권유했는데, 한 가지도 실패함 없이 성과를 거두었고,


밀려드는 수많은 군중을 성당에 수용할 길 없어 야외 대 광장을 사용함이 보통이었다.


 


그의 열변에 감동되어 귀화하는 이단자, 이교 신자를 각각 5만 여명에 달했으며, 새로운 영세자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고, 특히 북 유럽은 더했다.


또한 북부 유럽 각국에는 초빙되어 간 일도 있고, 또는 교회가 위기에 당면해 교황의 파견으로 간 일도 있었다.


한편 그때문에 많은 신도를 잃게 된 이단자 측은 때로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 했으나,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충실한 종을 구해 주셨다.


어떤 때는 원수들이 그의 음식에 독약을 타 놓았는데 그가 성호를 그으며 강복하자 그 그릇이 떨어져 두 조각이 되어 위기일발, 생명을 구한 때도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이 외에도 그의 손을 거쳐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한 예로써 아들이 살해되어 비탄에 잠긴 아버지에게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이 같은 기적을 본 유다인의 하수인은 크게 감동해 온 가족이 천주교로 개종했다.


그는 지방 순시 때 먼 거리도 가급적이면 걸어서 갔다. 그런 노고는 다만 하느님께서만 아실 일이다.


가끔 단식재를 지키고, 거친 옷을 입었으며, 성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겸손했다.


따라서 모든 이가 크게 감동하고 그가 설교하는 곳마다 프란치스코회 지망자가 다수 생겼으므로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웅변, 고덕을 겸비한 야고보는 성스러운 친구 카페스트라노의 요한이 사망 후 교황의 특명으로 그의 사업을 인수했다.


그 사업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군에의 참가를 권유하는 일이었다. 야고보는 카페스트라노의 요한의 사망지인 헝가리로 가서 그 사명을 실행했다.


그 후 그는 사업 보고차 로마로 향했는데, 이탈리아 영토에 발을 딛자 각지에서 그의 설교를 간청해 왔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이들의 청을 듣고 열변을 토해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다.



야고보는 미래를 통찰하는 은혜를 받았다. 1464년 그 회의 총장 선거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를 최적임자로 지명했으나 야고보는 대답하기를


"사본느의 프란치스코 신부가 좋을 것입니다. 그는 후에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될 위대한 인물입니다"했다.


과연 그의 예언이 적중되어 사본느의 프란치스코는 7년 후인 1471년에 교황에 당선되어 식스토 4세가 되었다.


 


야고보는 그 뒤 몸이 허약해져 때로는 완전히 기력을 잃을 정도였으나 최대의 힘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이행했다.


1472년에 나폴리 왕이 교황께 청해 야고보로 하여금 자기 나라에 와 설교를 하도록 했는데, 그는 마치 자기 몸을 채찍질 하듯이 이끌고 나폴리에까지 갔다.


그리고 동반자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왕은 예의를 갖추어 환대하고 왕궁 안에서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왕의 후대를 겸손되이 사양하고 프란치스코의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에 기거했다.


 


야고보는 그 후 4년간 나폴리와 국내 각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로서 60년, 야고보는 천명이 다해 1476년 11월 26일에 8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유해는 나폴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며, 아직까지도 안색이 마치 산 사람 같다고 한다.


그 묘에서 여러 가지 기적이 일어났으며 1726년에 시성되었다.(대구대교구홈에서)


 


 



 


 


♬태양의 노래


 





 


 


 


 


 


 


 


 


 


 


 


 


 


 


 


 


 


 


 


 


JAMES of the Marches


 


Also known as


James Gangala; James della Marca


Memorial


28 November


Profile


Born poor. Doctor of Civil Law. Franciscan monk. Student with Saint John of Capistrano. Disciple of Saint Bernadine of Siena. Tutor. Judge of sorcerers. Member of the Friars Minor. Priest. Preacher and evangelist throughout Central and Northern Europe. Writer.


Born


1391 at Monteprandone, March of Ancona, Italy


Died


28 November 1476 at Naples, Italy


Beatified


1624 by Pope Urban VIII


Canonized


1726 by Pope Benedict XIII


Patronage


Naples


Representation


priest holding in his right hand a chalice from which a snake is escaping


 


 


 


San Giacomo della Marca Sacerdote


 


28 novembre - Comune


Monteprandone, Ascoli Piceno, 1394 - Napoli, 28 novembre 1476


 


Fu discepolo di san Bernardino da Siena, dal quale ricevette a 22 anni il saio francescano. Come il maestro, anch’egli si diede alla predicazione, in Italia, Polonia, Boemia, Bosnia e in Ungheria dove si reco per ordine del papa. Oratore ardente, fustigo soprattutto i vizi dell’avarizia e dell’usura. Per questo il santo marchigiano introdusse i Monti di pieta, dove i poveri, vessati da debiti, potevano impegnare le loro cose ad un interesse minimo.


 


Etimologia: Giacomo = che segue Dio, dall’ebraico


 


" Padre, io vado a predicare a Gubbio - disse Fra Giacomo a Fra Bernardino da Siena. ~ E voi dove andrete? ". " lo me ne andro nel Regno " rispose il popolarissimo predicatore.


Intendevi dire che sarebbe andato nell’Abruzzo, all’Aquila, ma Fra Giacomo della Marca, pochi giorni dopo, seppe che il suo grande e amato maestro era partito per un altro Regno. Interruppe la predica e fece recitare a tutti gli astanti un Miserere. Poi disse: " In questo momento cade in terra una grande colonna ". In quel momento, infatti, moriva San Bernardino da Siena.


Non si puo parlare di San Giacomo della Marca senza ricordare il Santo senese che ebbe attorno a se una corona di portentosi predicatori: San Giovanni da Capestrano, Alberto da Sarteano, Matteo di Girgenti e Giacomo della Marca.


Giacomo si chiamava della Marca, perche era nato, nel 1394, a Monteprandone, in provincia di Ascoli Piceno, e, a 22 anni, in Santa Maria degli Angioli, aveva ricevuto il saio francescano proprio da San Bernardino. " 0 buon padre - dira poi - io mi ricordo quand’ero novizio e tu mi tagliasti con le tue mani la mia prima tunica ".


Si diede, come il maestro, alla predicazione, con grande successo, non solo in Italia, ma in Bosnia, in Boemia, in Polonia. Stava mangiando, quando gli giunse l’ordine del Papa di partire per l’Ungheria. Si alzo immediatamente, senza neppure finire di bere. L’obbedienza veniva da lui interpretata nella piu assoluta e istantanea maniera.


La sua vita era di estrema penitenza. Faceva sette quaresime durante l’anno, e negli altri giorni il suo cibo era formato da una scodella di fave cotte nell’acqua. Per quanto castissimo, tormentato da tentazioni, si disciplinava durante la notte. Malato, ebbe sei volte l’Estrema Unzione. Eppure resistette fino agli ottanta anni, nella faticosa vita dei predicatore volante.


I temi della sua predicazione erano quelli stessi di San Bernardino, e nei temi morali, San Giacomo della Marca insisteva su quello dell’avarizia, e piu che altro dell’usura.


L’usura era la piaga di quei tempi, nei quali la mercatura portava alla formazione di ricchezze nelle mani di pochi intraprendenti fortunati. Le classi piu povere dovevano ricorrere a prestiti, fatti da usurai, chiamati da San Bernardino " succhiatori del sangue di Cristo ".


Per combattere l’usura, San Giacomo della Marca ideo i Monti di Pieta, dove i miseri potevano impegnare le proprie cose, non piu all’esoso tasso preteso dai privati usurai ma ad un interesse minimo.


Un altro Santo, che prese il nome del predicatore senese, Bernardino da Feltre, sarebbe diventato poi il piu efficace propagatore dei Monti di Pieta, ideati da San Giacomo della Marca.


Colto da terribili coliche, il magro e quasi distrutto predicatore marchigiano temeva soltanto una cosa: che il dolore fisico lo distraesse dalla preghiera, nelle ultime ore della sua vita. Ai confratelli chiedeva insistentemente perdono per il cattivo esempio che aveva dato. Mori a Napoli, nel 1476, dicendo: " Gesu, Maria. Benedetta la Passione di Gesu ".


 


 


 


Fonte:   


 Archivio Parrocc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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