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1월9일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
Beata Elisabetta della Trinità Catez Carmelitana
Bl. Elizabeth of the Trinity
Born: Sunday 18 July 1880 in a military camp in the diocese of Bourges,
France as Elizabeth Catez
Died: 9 November 1906 of Addison's disease, a hormone disorder
whose side effects are painful and exhausting; her dying words:
I am going to Light, to Love, to Life!
Name Meaning: worshipper of God
Beatified: 25 November 1984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pending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
(E. Trinitatis, 1880∼1906). 가르멜 수도회 수녀.
프랑스의 부르제 부근에서 태어나 4세 때 육군장교인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어머니는 엘리사벳에게 훌륭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시켰다.
14세 때 동정녀(童貞女)가 될 것을 맹세했고
21세 때 디종의 가르멜수도회에 입회, 2년 후인 1903년 허원(許願)을 하였다.
1904년 11월 엘리사벳은 유명한 기도문구를 지었다.
1905년의 부활절을 앞두고 성 바울로에게서 삼위일체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신의 사명을 찾아냈다.
엘리사벳은 1906년의 그리스도 승천절과 그보다 조금 뒤의 두 차례에 걸쳐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가는 영감을 체험하는 은총을 받았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삼위일체의 엘리사벳(Elisabeth)은 1880년 7월 18일
프랑스의 부르주(Bourges) 근처에서 태어나 4세 때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여의었고,
아빌라의 테레사(Theresia ab Avila)의 저서에 심취할 정도로
열심한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충실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4세 때 동정녀가 될 것을 서약한 그녀는,
1901년 8월 2일 디종(Dijon)의 카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1903년 첫서원을 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삼위일체께 바치는 기도”라는 기도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1905년 부활절을 앞두고 사도 바오로(Paulus) 안에서
삼위일체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는 영적 체험을 한데 이어,
이듬해 주님 승천 대축일과 그 후 얼마 안 있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영적인 은총을 체험하였다.
엘리사벳은 약 9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운 병고를 치르다가
1906년 11월 9일 디종 수녀원에서 사망하였으며,
1984년 11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가톨릭홈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얻었다.
왜냐하면 하느님 친히 천국이시고 그 하느님께서 내 영혼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날 부터 나는 확실히 광명을 얻었고,
이 비결을 나의 모든 사랑하는 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성삼의 엘리사벳 수녀. '침묵하는 영혼'에서(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8. p.17참조)-
1904년 엘리사벳은 성삼께 영광을 드리는 훌륭한 기도문을 지었다.
오! 내가 흠숭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내가 완전히 자신을 잊고 내 영혼이 이미 영원 속에 있는 것처럼
변함없고 고요하게 당신에게 몰두하게 도와 주소서.
아무것도 내 평화를 산란케 하거나 당신에게서 나를 끌어내지 않게 하소서.
오! 불변의 내 주여!
그러나 매순간 내가 당신의 깊은 신비 속으로 더욱 깊이 뚫고 들어가게 하소서!
내 영혼에 평화를 주시고, 영혼이 당신의 천국이 되게 하시며,
당신의 소중한 거처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안식처가 되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거기에 홀로 두지 않고 거기에 있으면서
생생한 신앙으로 온전히 당신에게 몰입하여
당신을 흠숭하고 당신의 창조활동에 완전히 복종하게 하소시!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의 그리스도여, 당신을사랑합니다.
기꺼이 당신 성심의 신부가 되겠습니다.
사랑으로 인해 죽을 때까지 기꺼이 영광으로 당신을 덮어드리고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약함을 깨닫고 나를 당신 자신으로 감싸주시고
내 영혼을 당신 자신의 온갖 활동과 동화시키기를 간청합니다.
나를 당신 안에 잠그시고 나를 완전히 소유하시며
내 삶이 오직 당신 자신의 빛이 되도록 나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하게 하소서
흠모자요, 복원자며, 구세주로서 내 영혼에 들어오소서.
내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여!
당신에게 온갖 것을 배우도록 당신에게 귀기울임으로 내 삶을 보내고 순종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온갖 어둠, 온갖 고난, 온갖 무력함을 통해
나는 당신을 항상 간직하고 당신의 번쩍이는 빛 아래 거하기를 열망합니다.
오! 내 사랑스런 별이시여!
나를 꼭 붙드시어 당신의 빛을 떠나 방황하지 않게 하소서!
오! 태워버리는 불이신 사랑의 영이시여!
나에게로 내려오시어, 바로 내 안에서 말씀이 다시 육화됨으로써
내가 그분에게 또다른 인간성이 되고 이로써 그분이 당신의 신비를 새롭게 하게 하소서.
오! 아버지시여.
당신은 불쌍하고 보잘것 없는 당신 피조물을 굽어보시고 감싸주시며
그에게서 오직 당신의 온갖 기쁨을 두신 저 사랑스런 당신 아들만을 보십니다.
오! 나의 "성삼",
모든 것, 지복, 무한 고독이며 그안에서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광대 무변이시며,
나는 나 자신을 당신의 먹이로서 당신께 드립니다.
내가 당신의 빛 속에서 위대한 당신의 심연을 관상할 때까지 당신 안에 묻히도록
당신은 내 안에 묻히소서!
-가톨릭 전통과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분도출판사 p.356-359 참조)
[이콘] 구약성서의 삼위일체 - 안드레이 루블레프.
111.76x140.97cm.1411년경.모스크바 트레챠코프미술관
전체적으로 볼때 성부의 무릎과 성령의 무릎이 마주 보고 있는데
이는 커다란 잔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희생의 잔을 중심으로 삼위가 둘러 있으며,
비가시적인 틀을 이루고 있는데 그틀은 하느님의 신성이 내재한 단일성을 표시하며,
천상의 만돌라(님부스,신성한 빛과 영광,하늘을 의미)를 암시한다.
성자는 잔의 한가운데에 있다.
성자는 두 손가락으로 강생을 통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희생양이 되시는 당신의 사명을 암시하고 계시며,
왼쪽의 성부는 축복하시는 손짓으로 성자를 격려하고 계신다.
그 반대편의 성령은 식탁 아래의 열린 사각형을 가리키며
이 거룩한 희생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사각형은 동서남북의 모든 창조된 세상을 상징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좁은 길, 즉 고통의 길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삼위는 똑같은 권위를 지녔음을 나타내는 권위의 지팡이를 들고 계시며,
모두 천주성을 뜻하는 푸른빛의 옷을 입고 계신다.
★삼위일체는 모든 종교적 체험.모든 신학. 모든 사회적 행위의 원천이다.
우리가 존재의 충만함,
모든 현존하는 것의 목적과 그 의미를 탐구할 때 발전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즉 삼위일체이다.
그자체의 충만함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에로 들어가는 것이며,피조물인 인간의 신화를 선취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신적인 생명,삼위일체의 지고한 생명에로 참여하는 것이고,
베드로 성인의 말처럼 "신적인 본성에 참여하는자"가 되는 것이다.★
이 화면의 그림은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이콘으로 러시아의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1425년 작이다.
1551년 스토슬라브 교회회의에서는 삼위일체을 그릴때는 이 루블레프의 유형을 따르도록 규정하였다.
(만돌라: 그리스도의 성변화와 지옥의 정복-지옥의 영혼을 구하는 일과 같은 신적인 계시의 원천을 표현하고자 사용되는 하나의 방법이다.)
구약성서의 삼위일체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는 시간에 있어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다.
성자는 니케아 신경에 따르면 온 세계 이전에 성부로 부터 낳음을 받았다.
더군다나 성령은 성부로 부터 발출했다.
삼위일체의 이콘이 표현하고자 추구하는 것이 이 영원성이다.
성서의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우리와의 첫 만남은 창세1,26의 창조설화에서 발견되는데,
성부께서는 "우리자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신다.
두번째 만남은 마므레의 떡갈나무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세명의 천상 방문객들이 나타나
아들 이사악의 탄생에 관해 소식을 전해 준 18장에서 나타난다.
동방교회에 있어서 이 삼위일체의 첫 현시는 오순절, 바로 그날에 충만하게 드러날 약속의 시작이다.
옛계약은 새 계약의 예표이며, 그 새 계약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완성 된다.
만약, 주의 세례 축일에,거룩한 삼위일체의 현시를 외적인 감각만으로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세례자 요한은 성부의 목소리를 듣고, 성자를 보고, 비둘기 형상으로 강림하는 성령을 보았을 것이다.
오늘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회복된 성령의 은총이 인간 전 존재에 주어진 빛으로서 인간을 신화(deification)시키고 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화사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는 지는 해를 향하여 석양을 바라보며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나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여,
그러므로 세상은 주님께 영광을 바치나이다.
만과의 ’화사한 빛’성가 중
출처:이콘-신비의 미.편저 장긍선 신부
*삼위일체 대축일: 게시판1797번.
*[이콘]신약성서의 삼위일체:1796번
*[이콘]구약성서의 삼위일체:179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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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nis Angelicus - Franck - Anthony Way
update 2006.11.8.
Beata Elisabetta della Trinità Catez Carmelitana
9 novembre
Bourges, Francia, 18 luglio 1880 - Digione, 9 novembre 1906
Elisabeth Catez nacque il 18 luglio 1880 nel Campo d'Avor presso Bourges (Francia), e fu battezzata quattro giorni dopo. Nel 1887 la famiglia si trasferì a Digione. Quello stesso anno muore il papà. Il 19 aprile 1890 riceve la Prima Comunione, l'anno dopo il sacramento della Confermazione. Nel 1894 emise il voto di verginità. Sentendosi chiamata alla vita religiosa chiese alla madre il permesso di poter entrare al Carmelo, ma questa le oppose un netto rifiuto, finchè, non fu costretta a cedere ma a condizione che vi entrasse al compimento della maggiore età. Il 2 agosto 1901 entrava nel Carmelo di Digione dove l'8 dicembre 1901 vestì l'abito religioso. L'11 gennaio 1903 emise la Professione religiosa. Il 21 gennaio dello stesso anno compì la cerimonia della velazione monastica. I cinque anni della sua vita religiosa furono una continua ascesa verso Dio ed il Signore purificò la sua anima con sofferenze spirituali, e con sofferenze corporali attraverso il terribile morbo di Addison che la portò alla morte il 19 novembre 1906.
La bibliografia che parla di questa beata è immensa, segno di una incredibile spiritualità tutta da scoprire, meditare, analizzare; maturata nel chiuso di un Carmelo, contemporanea di quell’altra grande colonna dell’ascesi carmelitana, che fu santa Teresa del Bambino Gesù di Lisieux (1873-1897).
Elisabetta Catez nacque nel campo militare di Avor presso Bourges (Francia) il 18 luglio 1880, poi trasferita con la famiglia prima ad Auxonne e poi a Digione, dove nell’ottobre 1887 rimase orfana di padre. Dotata di un carattere piuttosto duro, volitiva, impetuosa, ardente, estroversa, dovette lavorare a lungo e un poco alla volta per dominarsi o come diceva lei, di “vincersi per amore”, attirata da Cristo, particolarmente a cominciare dalla Prima Comunione, ricevuta il 19 aprile 1891 e con la cresima il 18 giugno successivo.
Senza frequentare mai scuole vere e proprie, ebbe i primi rudimenti del sapere, dello scrivere e delle scienze da due istitutrici, con una infarinatura di letteratura. Però fin da piccola frequentò il conservatorio di Digione, dove trovò nella musica una forma di donazione e di preghiera, ottenne i primi premi di esecuzione al pianoforte.
In piena adolescenza, cominciò a sentirsi attratta da Cristo e – racconta lei stessa – “senza attendere mi legai a Lui con il voto di verginità; non ci dicemmo nulla, ma ci donammo l’uno all’altra in un amore tanto forte, che la risoluzione d’essere tutta sua divenne per me ancor più definitiva”.
Sentì risuonare nel suo spirito la parola ‘Carmelo’ per cui non ebbe altro pensiero che ritirarsi in tale sacra struttura. Ma trovò una forte opposizione nella madre, la quale rimasta vedova così giovane, aveva riposto nella figlia e nelle sue possibilità musicali, di avere un aiuto nella vita, pertanto si dimostrò contraria alla vocazione di Elisabetta, proibendole di frequentare il Carmelo di Digione, anzi proponendogli il matrimonio con un buon giovane.
Ma la giovane era ormai innamorata di Cristo e non c’era spazio per altri amori, ad ogni modo ubbidì alla madre per quanto riguardava i contatti con il monastero carmelitano, pur ribadendo la sua immutata volontà.
Solo quando raggiunse i 19 anni la signora Catez cedette, ma ponendo la condizione che avrebbe potuto entrare nel Carmelo solo nel 1901, quando avrebbe compiuto i 21 anni; nel frattempo la conduceva a varie feste danzanti della buona società, con la speranza che Elisabetta avrebbe cambiato idea.
Ma lei anche in mezzo al mondo, ascoltava il suo Gesù nel silenzio di un cuore che non voleva che essere che suo. Prima di uscire per queste feste, s’inginocchiava in casa, pregava, si offriva alla Madonna, poi con naturalezza e con un sorriso, viveva queste occasioni di festa gioiosa, tutta presa dal pensiero della Comunione che avrebbe ricevuta il mattino successivo e si rendeva estranea e insensibile a tutto quello che accadeva intorno a lei.
Si preparò così alla vita monastica, insegnando il catechismo ai piccoli della parrocchia, soccorrendo i poveri più abbandonati, in comunione stretta con la Trinità e con la Madonna. Il 2 agosto 1901 entrò nel Carmelo di Digione e l’8 dicembre ne vestì l’abito, dopo un fervoroso anno di noviziato, l’11 gennaio 1903 pronunciò i voti, prendendo il nome di Elisabetta della Trinità.
Ma la gioia di aver raggiunto la meta desiderata, dopo un inizio pieno di speranze e promesse, fu bloccata ben presto, perché il 1° luglio 1903, si manifestò nella giovane professa uno strano male, non diagnosticato correttamente e curato con terapie sbagliate, solo più tardi si diagnosticò per il terribile morbo di Addison (malattia caratterizzata da una profonda astenia, con ipotensione, dolori lombari, turbe gastriche, una colorazione bronzina della pelle, dovuta per lo più alla tubercolosi delle capsule surrenali).
Nessuno del monastero, ne i medici avvertirono subito la gravità del male, non conoscendone allora sintomi e terapia; il morbo ebbe una sua classificazione nel 1855 dal medico inglese Thomas Addison (1793-1860) da cui prese il nome.
Suor Elisabetta della Trinità accettava tutto con il sorriso e l’abbandono alla volontà di Dio, manifestando la sua “gioia di configurarsi al Crocifisso per amore” e diventando veramente “lode di gloria della Trinità”. Da un suo scritto datato, venerdì 24 febbraio 1899, rileviamo la conoscenza che lei aveva del suo male oscuro e la trasformazione della sofferenza in sublimazione: “Poiché mi è quasi impossibile impormi altre sofferenze, devo pure persuadermi che la sofferenza fisica e corporale non è che un mezzo, prezioso del resto, per arrivare alla mortificazione interiore e al pieno distacco da sé stessi. Aiutami Gesù, mia vita, mio amore, mio Sposo”.
Il 21 novembre del 1904 si era offerta “come preda” alla Trinità con la celebre invocazione: “O mio Dio, Trinità che adoro”, uscita di getto dalla sua anima. Gli anni dal 1900 al 1905 trascorsero tra alti e bassi della malattia, ma nel 1906 la situazione precipitò; le crisi si susseguivano opprimendola e soffocandola, mentre le viscere davano la sensazione di essere dilaniate da bestie feroci; non riusciva ad assumere né cibo né bevande, ciò nonostante non smise mai di sorridere.
In quell’estate del 1906 obbedendo alla priora, scrisse le sue meditazioni, frutto di quei mesi terribili, nell’”Ultimo ritiro di Laudem gloriae” e nel “Come trovare il cielo sulla terra”. La progressione del male ormai la consumava e scrivendo alla madre, diceva: “il mio Sposo vuole che io gli sia una umanità aggiunta nella quale Egli possa soffrire ancora per la gloria del Padre e per aiutare la Chiesa… Egli ha scelto la tua figlia per associarla alla grande opera della Redenzione”.
Parlava comunque e stranamente di gioia; eppure al martirio del corpo si era aggiunto quello dello spirito, con un senso di vuoto e di abbandono da parte di Dio, che tutti i mistici hanno conosciuto, ebbe persino tentazioni di suicidio, superate nella fede dell’amore per Cristo.
Il morbo ebbe un decorso piuttosto lungo e doloroso, verso l’autunno sembrò avviarsi verso la fine; giunto il 1° novembre parve giunta l’ultima ora estrema e in quel giorno disse le sue ultime considerazioni: “Tutto passa! Alla sera della vita resta solo l’amore. Bisogna fare tutto per amore…”, poi per nove giorni si prostrò in uno stato precomatoso; in un ritornare momentaneo della coscienza, fu udita mormorare: “Vado alla luce, all’amore, alla vita”.
Morì il mattino del 9 novembre 1906, a soli 26 anni. Come s. Teresa del Bambino Gesù anche Elisabetta della Trinità fu una grande mistica, che seppe penetrare l’essenza dell’Amore “troppo grande” di Dio, in intima comunione con i suoi “TRE” come Elisabetta si esprimeva familiarmente parlando della SS. Trinità, perno della sua vita di oblata claustrale carmelitana.
Pur essendo vissuta nel monastero poco più di cinque anni e di cui tre in una condizione di ammalata grave e irreversibile, quindi con pochi contatti con l’esterno, essa dopo morta godé subito di una fama di santità, che fece pensare ben presto alla sua glorificazione.
Per diversi motivi il primo processo informativo si ebbe negli anni 1931-41 a Digione e il 25 ottobre 1961 venne introdotta la causa. Il 12 luglio 1982 furono riconosciute le sue virtù vissute in modo eroico, dandole il titolo di venerabile; infine papa Giovanni Paolo II l’ha beatificata il 25 novembre 1984.
Il ‘Martirologio Romano’ riporta la sua celebrazione al 9 novembre. Viene invece onorata come memoria dall'ordine carmelitano scalzo nel giorno 8 novembre.
Autore: Antonio Borrelli
ELIZABETH of the Trinity
Also known as
Elizabeth Catez
Memorial
8 November
Profile
Daughter of Captain Joseph Catez and Marie Catez. Her father died when she was seven, leaving her mother to raise Elizabeth and her sister Marguerite. Noted as a lively, popular girl, extremely stubborn, given to fits of rage, with great reverence for God, and an early attraction to a life of prayer and reflection. Gifted pianist. Visited the sick and taught catechism to children.
Much against her mother's wishes, she entered the Discalced Carmelite monastery in Dijon, France on 2 August 1901. Though noted for great spiritual growth, she was also plagued with periods of powerful darkness, and her spiritual director expressed doubts over Elizabeth's vocation. She completed her noviate, and took her final vows on 11 January 1903. She became a spiritual director for many, and left a legacy of letters and retreat guides.
Born
Sunday 18 July 1880 in a military camp in the diocese of Bourges, France as Elizabeth Catez
Died
9 November 1906 of Addison's disease, a hormone disorder whose side effects are painful and exhausting; her dying words: I am going to Light, to Love, to Life!
Name Meaning
worshipper of God
Beatified
25 November 1984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pending
Patronage
bodily ills; illness; loss of parents; sick people; sickness
Readings
I think that in Heaven my mission will be to draw souls by helping them to go out of themselves in order to cling to God by a wholly simple and loving movement, and to keep them in this great silence within which will allow God to communicate Himself to them and to transform them into Himself.
-Saint Elizabeth of the Tr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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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a little cell in your heart for Jesus of the Agony; take refuge there, when you hear Him outraged by men, try to make reparation; you, at least, love Him and keep your heart quite pure for Him. Oh! If you only knew how the good God love pure hearts! It is there that He loves to reign.
-Saint Elizabeth of the Trinity
Bl. Elizabeth of the Trinity
Elizabeth Catez of the Trinity was born in 1880 in the diocese of Bourges. In 1901 she entered the Discalced Carmelite monastery of Dijon. There she made her profession of vows in 1903 and from there she was called "to light, to love and to life" by the Divine Spouse in 1906. A faithful adorer in spirit and in truth, her life was a "praise of glory" of the Most Blessed Trinity present in her soul and loved amidst interior darkness and excruciating illness. In the mystery of divine inhabitation she found her "heaven on earth," her special charism and her mission for the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