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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10월 16일


성 제라드 마젤라


ST. GERARD MAJELLA


San Gerardo Maiella Religioso


Muro Lucano (PZ), 1726


- Conv. di Materdomini presso Caposele (AV), 16 ottobre 1755


Canonized: 11 December 1904 by Pope Saint Pius X


 



 


남 이탈리아의 무로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이 사망하자 양복공의 도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느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려는 열정으로 가푸친에 입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거절당한 후, 라체돈가 주교관의 일꾼이 되었다.


1745년, 그 주교가 서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양복점을 열었다.


그 후 그는 1748년에야 뜻을 이루게 되었는데 구속주회의 평수사로 허가받은 것이다.


다행히 그는 1752년에 창설자이신 성 알폰소 리구오리에 의하여 서약을 발하였다.


수도원에서도 그는 양복 일을 하면서 병자들을 돌보았는데, 특히 몇 가지 초자연적 은혜가 크게 돋보였으니,


예를 들면,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는 일(Bilocation), 예언, 탈혼, 환시 그리고 천상적인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성인은 아주 연약한 체구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며. 성인은 자신 스스로 많은 고행과 보속을 했다.


그 이유는 졸포수사라는 이름이 붙은 마귀가 끊임없이 유혹했기 때문이다.


이 성인은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특히 보는 자리에서 몸이 사라지는 일, 그리고 동시에 두 곳에 발현하는 기적을 행했다.


 


그는 수녀들의 몇몇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도 활약하였고,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그의 성덕과 애덕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1754년, 그는 네리아 카찌아노라는 어느 여성으로부터 호색한으로 고발되었으나, 후일 그녀는 모든게 거짓이었음을 고백하였다.


그 후 나폴리로 파견되었으나 그를 만나려는 방문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므로,


몇 달 후에 카포셀레로 가서 그곳의 문지기로 봉사하면서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1904년에 시성되었고, 아기 출산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으신다.


 



 


어머니들의 성인 제라드 마젤라


 


구속주회홈에서 www.cssrkr.com


Thomas E, Tobin, C.Ss.R.  


 


왜 많은 사람들은 성 제라드 마제라를 "어머니들의 성인"으로 부르고, 그에게 기도 하는 것일까?


남자였고, 평수사였던 그에게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제라드는 남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몇마일 떨어지지 않은 무로라는 작은 시골에서


1726년 4월 6일에 아버지 베네딕타 고렐라 마젤라와 어머니 도미니크의 다섯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매우 약했기 때문에 급히 주교좌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그가 다섯 살이었을 때,


그는 벌써 집에서 가까이 있는 작은 성당에 기도하는데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성당에 다녀서 집에 올 때 그는 빵조각을 들고 오곤 했다.


가족들이 이에 대해서 물으면 그는 "아주 아름다운 소년"이 그 빵을 주었다고 대답했다.


 


한번은 그의 누이인 엘리자베스가 성당에가는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가 아기 예수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성상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그녀는 이상한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기 예수님이 성모 마리아의 팔에서 내려와 제랄드와 함께 노는 것이 아닌가.


그뒤에 그 아기 예수님은 제라드에게 빵 조각을 주고 다시 그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것은 미카엘 대천사가 그의 첫영성체 때에 성체를 준 기적의 서곡을 알릴 뿐이었다.


 



 


일꾼


제라드가 12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떠나 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재봉사의 견습생이 되게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는 것이었다.


그의 고용주는 이상하게도 그를 싫어해서 자주 그를 때리거나 욕을 했다.


제라드는 이런한 박해들이 그의 영적인 것을 위하여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한번은 그가 고용주에게 맞는 동안 웃는 얼굴을 보인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고용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때리는 동안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손이 나를 때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재봉사로서의 그의 견습생활이 끝난 후에, 제라드는 가끔씩 무로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와 있는 라케도니아 주교의 집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점에서는 매우 성급한 기질이 있는 이 주교를 침묵으로 잘 견디어내어 그의 인내의 덕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그의 기적들 중 하나가 일어났다. 어느날 그는 잘못하여 집의 열쇠를 우물에 빠뜨리게 되었다.


거룩하지만 단순하게도 그는 조그만 아기 예수님의 성상을 우물속으로 넣었다.


제라드가 그 성상을 끌어올렸을 때, 잃어버렸던 그 열쇠는 그 성상의 손에 걸려있었다. 구경꾼들은 그것을 보고 놀랐다.


 



 


수도 성소


젊을 때 그는 당연히 수도적 삶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약한 건강 때문에 세 번씩이나 한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을 거절 당했다.


그는 계속해서 평수사가 되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무로에서 선교를 위해 특별한 활동을 하고 있는 구속주회 사제는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는 구속주회에 지원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물었지만


그가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을 해낼 수 있을만한 건강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원장이었던 바오로 가파로 신부는 그의 어머니에게 그가 그들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그들이 떠나는 밤에 그를 방에 가두어두라고 부탁했다. 제라드의 어머니는 그의 부탁에 따랐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잠겼던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시트가 묶여있는 창문과 비어있는 침대를 발견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서 "나는 성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라는 메모를 발견했다.


 


제라드는 그들이 그 마을을 떠나려는 할 때 그들을 붙잡았다. 수많은 간청과 거절 후에 가파로 신부는 결국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를 일리체도에 있는 구속주회의 책임자에게 "쓸모없는 평수사 한명을 당신에게 보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보냈다.


 


이 "쓸모없는" 평수사는 그와 함께 일했던 이에 진술에 따르면 네명의 사람들을 위해서 일했다.


구속주회원으로서 짧은 6년의 기간동안 제라드는 급격히 성덕으로 나아갔다.


그의 기도 생활은 끊임없었고, 그의 순명의 정신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여러번 그는 부재중인 그의 원장의 무언의 요청에 응답하여 먼 거리의 장소에 나타났다.


구속주회 형제들조차도 그를 성인으로서 존경하게 되었다.


 


수사로서의 많은 생활을 그는 선교사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여행으로 보냈다. 그들은 그를 매우 가치있는 형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고해성사에 많은 죄인들을 성공적으로 데려왔고, 그들의 지난 나쁜 과거를 고백하도록 권유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든 사람들은 그를 따랐고 항상 그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크나큰 시련


진정한 신성(성인)은 항상 십자가의 시험을 받는다. 1754년 제라드는 크나큰 시련을 받았다.


그 하나는 어머니들과 그의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열심한 그의 일들중의 하나는 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소녀들을 돕고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가끔씩 그는 다른 방법으로는 수녀회에 들어갈 수 없는 가난한 소녀들의 지참금을 마련해 주었다.


 


네리아 카지아노(Neria Caggiano)는 제라드로부터 도움을 받은 소녀들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자기가 싫어하는 수녀회에 들어갔고, 3주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행동을 설명하자면, 네리아는 수녀회의 삶에 대해 거짓말을 퍼트렸다.


그리고 제라드가 추천하는 수녀원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들을 무로의 착한 사람들이 믿기를 거부했을 때,


제라드의 이름을 실추시킴으로서 그녀 자신의 평판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제라드의 장상이었던 성 알폰소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녀는 제라드가 그가 선교활동을 하며 종종 머물렀던 집의 가족 중에 어린 딸과 불순한 죄를 지었다고 고발했다.


 



 


제라드의 품행(행동)


제라드는 이러한 고발해 답하도록 성 알폰소에 의해 불려졌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보다는 그의 거룩한 주님의 모범을 따라 침묵을 지켰다.


사실 그의 침묵에 대해 성 알폰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젊은 수도자들에게 가혹한 고행을 부여했다.


제라드는 모든 외부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고, 성체를 모시는 특권을 거부했다.


 


영혼의 이익을 위한 그의 노력(변명)을 포기하는 것은 제라드에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서 성체를 모실수 없도록 하는 것에 비하면 작은 고행이었다.


그는 제단에서 사제의 손에 의해 축성된 성체를 빼앗고 싶기까지 한


격정적인 충동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싶을 만큼 강렬함을 느꼈다.


 


얼마후 네리아는 중병에 걸렸고,


그녀는 성 알폰소에게 자신의 행동은 제라드를 반대하기 위한 완전한 거짓이며 중상이었다는 고백의 편지를 썼다.


성 알폰소는 자신의 아들(수도회의 회원)의 순결의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그러한 시련에도 우울해 하지 않았던 제라드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명예가 회복됨에도 크게 우쭐되지 않았다.


이러한 두 개의 사건 안에서 그는 하느님의 뜻이 충만해짐을 느꼈고, 그를 채워주시는 것을 느꼈다.


 



 


기적의 일꾼


몇몇 성인들은 성 제라드의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기록했다.


그의 시복과 시성과정에서 그의 기적들이 광범위하고 풍부했던 것이 드러났다.


그는 종종 하느님이나 그분의 거룩한 뜻을 묵상하는 중에 탈혼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의 몸은 땅에서 몇 피트 정도 떠올랐다.


또한 그는 같은 시간에 두 장소에서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특별한 기적을 행하였다는 믿을만한 기록도 있다.


 


그의 기적들 중의 대부분은 다른 이들을 위해 행했다.


이와같은 특별한 일들은 어떤 이가 그의 삶을 독서할 때 공공장소에서도 행하여졌다.


그는 높은 절벽에서 떨어진 한 소년의 삶을 돌려주었다.


그는 가난한 가족에게 부족한 밀가루를 축복하여 내년 추수 때까지 먹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여러번 그는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분배해준 빵을 증가시켰다.


하루는 그는 폭풍우의 파도로 인해 거의 죽게된 어선의 뱃길을 기슭으로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 물을 걸어갔다.


여러번 제라드는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이들의 영혼의 감추어진 죄들을 이야기했고, 그들을 참회와 용서로 이끌었다.


 


어머니들을 위한 그의 기적적인 사도직 또한 그의 생애에 시작되었다.


한번은 제라드가 피로팔로라는 친구의 집에 자신의 손수건을 두고서 잊고 떠날 때 그 가족의 딸들중의 한명이 그를 불렀다.


그 순간 제라드는 예언자적인 영감으로 "보관하세요. 언젠가 당신에게 이것이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손수건은 제라드의 귀중한 기념품으로 간직되었다.


몇 년 후에 제라드가 손수건을 준 그 소녀는 출산중에 죽음을 겪게 되었다.


그녀는 제라드의 말을 기억하고 손수건을 몸에 대었다. 거의 순식간에 위험은 지나가고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태중의 아기가 위험했던 어떤 한 어머니는 제라드의 기도를 바쳤다.


그녀와 그녀의 아기는 그 위험에서 안전히 빠져나왔다.


 



 


그의 죽음


항상 건강이 허약했던 제라드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1755년에 그는 급성 뇌출혈과 이질에 걸렸고, 그의 죽음이 급박했다.


그가 순명의 힘에 대해 위대한 가르침을 가르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장상은 그에게 만일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병에서 나으라고 명령하였다.


갑자기 그의 병은 사라진 듯 보였고, 침대에서 일어나 공동체에 다시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고 단 몇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 후에 제라드는 다시 그의 침대로 돌아왔고 그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완전하게 하느님의 뜻에서 소외되었고, 그의 방문에는 이러한 표시가 있었다.


"하느님의 뜻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으로서 머지않아 그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끔 그는 "나의 하느님, 저는 지극히 거룩한 당신의 뜻에 따라 죽기를 원합니다"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1755년 10월 15일 자정이 되기 조금 전에 그의 순결한 영혼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영광(시성식)


제라드가 죽었을 때, 성당지기 수사는 흥분하여 그의 죽음을 알리는 대신에 축일때처럼 종을 울렸다.


수천명의 신자들이 "그들의 성인"의 시신을 보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나중에 종종 그들을 도왔던 그의 마지막 기념품을 찾으려 하였다.


그의 죽음 후에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제라드의 간구 덕분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시작했다.


1893년 교황 레오8세는 그를 시복하였다. 그리고 1904년 12월 11일 교황 바오로 10세에 의해 그는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날의 놀라운 일꾼


제라드에 대한 신심은 이탈리아를 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그는 종종 죄인들이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놀라운 일꾼"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진실한 고해성사의 수호성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어떤 이들은 어린 재봉사의 견습생으로 그를 존경했고, 구속주회 평수사로, 일꾼들의 수호성인으로 존경했다.


또한 제라드는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너무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었고,


아주 많은 소녀들이 수녀회에 들어가도록 도왔기에 종종 성소의 성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머니들의 성인


이러한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이탈리아의 어머니들은 그들의 마음속 깊이 제라드를 간직하고 그들의 성인으로 모신다.


그의 시복 절차가 진행될 때 한 증인이 그는 출산의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렇게 보호하는 그의 명성은 퍼져나가서


세계의 많은 나라의 어머니들은 성 제라드의 메달을 가지지 않고서는 출산하러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신심은 북아메리카의 미국과 카나다 모두에서 매우 유명하게 되었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그의 힘을 체험했다.


 


많은 병원들은 그들의 산부인과를 제라드에게 봉헌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들의 환자들에게 성 제라드의 기도문과 메달을 주었다.


성 제라드가 그들이 건강한 아이를 갖도록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해 주었다고


확신을 갖는 부모들에 의해서 수많은 아이들이 제라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한 소녀들에게도 이러한 이름이 주어졌다. 여러 가지 형태로 "제라드"라는 이름이 여성화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중에서 인기많은 이름들은 제라다, 제랄린, 제라르딘, 제리안네, 그리고 제라뎃 이다.


 



 


단지 도우실뿐만 아니라


성 제라드는 어머니들과 아이들에게 대단한 은총을 얻도록 하지만 그것만이 그의 임무는 아니다.


그는 또한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에게, 그들의 삶 안에서의 의무를 가르친다.


오늘날 혼인 안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과 사회적 악은 피임과 낙태의 죄이다.


많은 이들이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 혹은 경제적 부족이라는 이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이유아래,


교회에 의해 인식된 죄스런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의 가족을 제한하게 하는 다른 이들의 말을 따른다.


이러한 악에 대항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하느님께 무한한 신뢰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은 혼인성사를 만드셨고,


모든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그분이 혼인을 위하여 만든 혼인법으로 필요한 모든 은총으로 충만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제라드의 특별한 덕 중의 하나는 신뢰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모토는 "하느님이 준비해 주신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그가 어떤 신학생과 순례를 떠나는 도중에, 마지막 남은 동전을 제대에 바칠 꽃을 사기위해 사용했다.


그는 제대앞에 그 꽃을 봉헌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저는 당신을 위해 이 꽃을 사왔습니다. 이제 당신이 저와 저의 학생을 보호해 주소서."


그러자 주님은 여행에 충분한 돈을 준비해 주셨다.


 


또한 거짓된 고발이 그를 힘들게 했을 때,


자신을 변호하라는 모든 친구들의 충고에 대해 "이것은 하느님을 만나뵙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허약한 건강과 죽음의 위험 안에서도 제라드는 하느님께 대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제라드는 만약 그들이 반생명적인 것들을 회피한다면,


어머니들이 그들의 혼인이 반드시 하느님께 기초하고,


하느님 안에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본받을 수 있는 모범으로서 자신을 보여주었다.


 


성 제라드 마젤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축일:8월1일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인창동성당게시판1296번


 


구속주회는 1732년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1696-1787,주교,윤리신학자이며 고해사제의 수호성인)


성인에 의해 세워진 대표적인 활동 수도회로서


현재 약 6000여명의 회원들이 로마에 총원을 두고 78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Our Mother of Perpetual Help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드리는 구일 기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를 저희에게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신뢰와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부르나이다.


온갖 아쉬움과 위험과 고통 중에 드리는 자녀들의 청원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이 유래 깊은 성화 앞에서 구일 기도로 청하는 저희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어


그 힘있는 전구를 깊이 체험하게 해주소서.


 


자애로우신 어머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을 서로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 안에 실천하게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이 저희 안에 날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원의 힘을 얻게 됨을 믿게 하시고,


믿는 이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저희의 삶이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해주소서. 아멘.


 


구속주회홈에서 www.cssrkr.com


 


 



 


♬시편97(98)


 


 


 


 


 


 


 


 


 


 


 


 


 


 


 


 


 


 


 


 


 


 


GERARD MAJELLA


 


Memorial


16 October


Profile


Son of a tailor who died when the boy was 12, leaving the family in poverty. Gerard tried to join the Capuchins, but his health prevented it; accepted as a Redemptorist lay brother serving his order as sacristan, gardener, porter, infirmarian, and tailor. Wonder worker.


 


When falsely accused by a pregnant woman of being the father of her child, he retreated to silence; she later recanted and cleared him, and thus began his association as patron of all aspects of pregnancy. Reputed to bi-locate and read consciences. His last will consisted of the following small note on the door of his cell: "Here the will of God is done, as God wills, and as long as God wills."


Born


23 April 1725 at Muro, Italy


Died


1755 of tuberculosis


Canonized


11 December 1904 by Pope Saint Pius X


Patronage


childbirth, children, expectant mothers, falsely accused people, good confessions, lay brothers, motherhood, mothers, pregnant women, pro-life movement, unborn children


 


Readings


The Most Blessed Sacrament is Christ made visible. The poor sick person is Christ again made visible.


 


-Saint Gerard Maj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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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ee in my neighbor the Person of Jesus Christ.


 


-Saint Gerard Maj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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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ider the shortness of time, the length of eternity and reflect how everything here below comes to an end and passes by. Of what use is it to lean upon that which cannot give support?


 


Saint Gerard Maj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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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except God can give you peace? Has the world ever been able to satisfy the heart?


 


Saint Gerard Majella


 


 


 


 


 


 


San Gerardo Maiella Religioso


16 ottobre - Comune


Muro Lucano (PZ), 1726 - Conv. di Materdomini presso Caposele (AV), 16 ottobre 1755


 


Nato presso Potenza nel 1726, morì nel 1755. Di famiglia povera, tentò invano di diventare Cappuccino, come uno zio materno. Fece il noviziato nei Redentoristi sotto la guida di Paolo Cafaro ed emise i voti come fratello coadiutore, svolgendo poi nel convento le mansioni più umili. Incaricato di organizzare pubbliche collette, ne approfittava per fare opera di conversione, per mettere pace e per richiamare al fervore religioso altri monasteri. Calunniato da una donna e, per la sua anima semplice incapace di difendersi, soffrì molto. Trasferito nella vallata del Sele, svolse in paesini isolati una grande opera di apostolato, comunicando a coloro che l’avvicinavano la sua ricchezza spirituale. Fin da giovanissimo, si erano rivelati in lui slanci mistici che lo portavano all’unione con Dio e, come ogni contemplativo, amava la natura e il bello.


 


Patronato:Cognati


Etimologia: Gerardo = valoroso con la lancia, dal tedesco


 


Gli dicono tutti di no. Cappuccini e Redentoristi non possono accoglierlo perché sta poco bene. Suo padre comincia a insegnargli il mestiere di sarto, ma muore troppo presto. Gerardo va al lavoro da un altro sarto di Muro Lucano, e più tardi si metterà in proprio, ma dovrà chiudere bottega. Torna a insistere con i Redentoristi, guidati dal loro fondatore Alfonso de’ Liguori, e infine la spunta. Ma ha già 26 anni quando può pronunciare i voti nel convento di Deliceto (Foggia) col rango di fratello coadiutore, subordinato. Ma a lui va benissimo.


Uscendo poi dal convento per questue e altre incombenze, s’immerge nella vita di paesi, persone, famiglie mortificate dalla miseria e dall’ignoranza, soggette ai signori, alle epidemie e alle crisi dei raccolti. Ne adotta lo stato d’animo, possiamo dire: ma lo arricchisce di fiducia.


Non è certo un riformatore sociale: i grandi problemi gli sfuggono. Ma vede le persone, la loro sofferenza, e anche quella dei loro animali. S’ingegna, per esempio, di curare i muli, umilissimi strumenti di comunicazione nelle campagne che spesso sono anche senza strade. Accorre dove c’è un malato, dove sta nascendo un bambino. Hanno una grande fiducia in lui anche le partorienti, e questo stato d’animo diventerà poi devozione affettuosa e duratura. Nell’animo popolare la figura sempre amica di fra Gerardo lascia segni che dureranno nelle generazioni fino a noi, come testimoniano feste e pellegrinaggi in suo onore.


Ma ecco arrivargli una prova inaspettata. Una lettera gli attribuisce relazioni almeno sospette con una ragazza, e lo stesso Alfonso de’ Liguori sembra crederci. Allora, indagini, interrogatori, spostamenti vigilati da un convento all’altro, divieto di fare la comunione... Lui potrebbe ampiamente discolparsi: ma non ci pensa neppure. Non dice una sola parola. Lascia che dicano e facciano gli altri, prendendo tutto come una prova voluta per lui da Chi può discolparlo se e quando vorrà. Ed ecco infatti che l’accusa crolla, senza che lui abbia aperto bocca. E con questo silenzio mite e vittorioso l’umile fratello coadiutore “tiene lezione”: ammaestra tutta la comunità.


I confratelli scoprono di avere in casa un santo, e gli chiedono di mettere in scritto per loro il “regolamento di vita” che si è dato. Nel 1755 mentre è al convento di Materdomini presso Caposele, molte famiglie sono alla fame per il maltempo, e lui interviene organizzando la distribuzione di viveri. Una prova di capacità organizzativa, che fa poi nascere voci di miracolo, come è già accaduto altre volte.


Nello stesso anno, Gerardo è colpito dalla malaria durante una questua. E dopo un breve miglioramento si spegne a Materdomini, a soli 29 anni d’età. Subito le popolazioni dell’Irpinia, della Basilicata e della Puglia lo considerano santo. E san Pio X lo canonizzerà nel 1904.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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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5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안젤라 2009-10-10 6142
677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6일 성녀 헤드비히 안젤라 2009-10-16 7027
»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6일 성 제라드 마젤라 안젤라 2009-10-16 5378
675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6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 안젤라 2009-10-16 6175
674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7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안젤라 2009-10-16 6966
673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8일 성 루가 복음사가 안젤라 2009-10-16 6003
672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9일 십자가의 성바오로 사제 안젤라 2009-10-16 10084
671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9일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 안젤라 2009-10-16 5522
670 프란치스칸 성인 10월19일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사제(1회) 안젤라 2009-10-16 6392
669 프란치스칸 성인 10월20일 경탄하올 어머니MATER ADMIRABILIS 안젤라 2009-10-19 5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