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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6월3일(10월11일)


복자 요한 23세 교황


Pope JOHN XXIII


Beato Giovanni XXIII (Angelo Giuseppe Roncalli) Papa


(재위 : 1958.10.28∼1963.6.3).


1881 at Sotto il Monte, Italy - 3 June 1963 at Rome, Italy


Beatified: 3 September 2000 by Pope John Paul II at Saint Peter’s Square, Rome


Canonized: pending



 


원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1881년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소토 일 모테에서 출생하여 1904년 사제서품되고,


라디니 테데스키 백작이 베르가모의 주교로 임명된 동안 그의 비서 겸 신학교수로 근무하였다.


 



 


뒷날 비오 11세가 된 아킬레라티와 친분을 맺었고,


1차 세계대전 후 교황청에서 행정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1025년 아레오폴리스의 명목상의 대주교 및 1935년 아레오폴리스의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불가리아 그리스의 교황 사절,


파리주재 교황청 대사(1944∼1953년)를 거쳐 1953년에는 사제추기경으로 임명,


1958년 비오 12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최초의 업적은 23명의 새 추기경을 탄생시킨 일(1958.12)인데,


1962년까지 87명으로 늘어났다.


 


1959년 추기경들에게 세 가지 과제를 제출,


모라를 위한 교구 시노드와 일치공의회를 개최하고 교회법전의 개정 등을 제안하였고,


1960 년의 시도느는 로마의 지방문제를 토의하였다.


 



 


1962년의 제 2 차 바티칸공의회는 그의 재위기간 중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 교인의 일치라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교회의 종교생활을 쇄신하고


그 가르침과 조직을 현대에 맞도록 개혁한다는 취지를 펼쳤다.


 



 


이 밖의 괄목할 만한 개혁으로는


그리스 멜키테 총대주교 막시모스 4세의 호소를 받아들여


비잔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허가하는 한편,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에 대한 새로운 전례법규를 인가(1960년),


미사법전에 성 요셉의 이름을 삽입하였으며,


교회법 개정을 위한 교황위원회를 구성(1963년)한 일 등을 들 수 있겠다.


 


또한 1960년 교회일치 진흥을 위한 사무국의 개설,


이듬해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의 대표가 참가하였으며


바티칸 공의회에도 비 가톨릭 인사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되는 등 일련의 쇄신이 이어졌다.


 



 


 


바티칸공의회公議會  


Concilium Vaticanum. Councils of Vatican


 


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20차 공의회)


교황 비오(Pius) 9세에 의해 바티칸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회의.


 


㉮ 트리엔트 공의회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개최된 이후


거의 300년 동안 교회회의가 소집되지 않았었다.


그 동안 일반사회 내에서는 합리주의, 자유주의, 유물주의 등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어


하느님 계시의 가능성에 대한 교리의 거부,


하느님의 실재 거부, 영혼성의 실재 거부 등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와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4넌 12월 예부성성(禮部聖省) 추기경회의에서 공의회 개최에 대한 의견이 제출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공의회에서 취급되어야 할 안건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뒤 1867년 6월 공의회 개최에 대한 공식발표를 함과 아울러


준비위원회로는 중앙위원회 산하 교의. 교회규율. 수도회. 포교 등 그 부속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868년 6월 비오 9세의 칙서 의 발표로 바티칸 공의회가 1869년 12월 8일 개최되는 것이 공식화되었다.


 



 


㉯ 1870년 로마가 함락되어 무기한 휴회될 때까지


모두 4차 회기로 진행된 공의회에서는 많은 의제들이 논의되었지만,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또 공의회 회기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교황의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에 대한 것이었다.


14번의 총회와 64번의 연설에 걸친 토론 끝에,


결국 1870년 7월 18일 공개회의 투표에서 통과되어 교황은 정의를 발표하고 교령들의 비준을 선포하였다.


이 때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내용은 한 교령 중의 하나의 장(章)으로 채택되어 통과되었다.


 


이로써 공의회 우위설과 교황권 제한주의에 대해서는 종지부를 찍은 셈이나


교황 무류성에 대한 문제와 세계 공의회가 교리적 정의를 마련하기 위한 근거에서 볼 때


한낱 교황의 자문기관이냐 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 제4차 회기가 끝난 뒤 교황에 대한 주교들의 관계 등


다른 의제들에 대한 결정이 유보된 채


이탈리아 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로마 점령에 의해 교황은


단 한 평의 교황령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유명무실해진 공의회를 해산시킬 적당한 이유를 마련해 줌에 따라


1870년 10월 비오 9세는 바티칸 공의회의 정회를 선포하였다.


이로써 신앙과 계시의 속성(屬性)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들을 반포했을 뿐 그 밖의 문제들은 유보되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부정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독립된 종교단체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로써 구가톨릭 교회가 탄생될 수 있었다.


 



 


②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0.-1965.12)(21차공의회)


요한(Joannes) 23세에 의하여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개최된 세계 공의회.


 


㉮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 등에 관한 헌장을 반포하고


이탈리아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로마 점령에 의하여 무기한 휴회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거의 100년 동안 세계공의회는 열리지 않고,


다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대처하기 위하여 레오(Leo) 13세, 성 비오(St. Pius) 10세,


비오 11, 12세들의 회칙들만이 반포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교황 요한 23세는 1958년 말 교황청 국무성성 장관과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공의회 개최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1959년부터 준비토록 하여 1962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니,


결국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별적으로 변화된 교회의 모습을 통합시켜 새롭고 진보적인 가톨릭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 그 기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 1960년 6월 5일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최를 위한 중앙예비위원회 및


부속위원회와 사무국을 설치하여 자신이 중앙예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2년 7월에는 교황회칙 <회개하기 위하여>(Paenitentiam agere)를 반포하여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회개하여 쇄신될 것을 촉구하였고,


이 ’회개와 쇄신’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기본정신이 되었다.


 


전체 4차 회의로 진행된 공의회는 회의 전 13개 예비위원회에서 67개의 논의사항을 준비토록 하였으나


실제 회기 동안에는 10개의 위원회와 한 개의 사무국이 활동하였다.


최종적인 헌장 초안을 마련하는 위원회의 위원은 모두 24명으로서 15명은 선출되고


나머지 9명은 교황이 임명토록 하여 전체적인 회의가 진행되도록 하였다.


 


그 밖에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하여 초대된 각 교파의 성직자들이 입회인으로 참석하였고,


이들은 또한 요한 23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일치사무국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졌다.


 



 


㉰ 제 1차 회기가 시작되면서 토의되기 시작한 주제들은


전례, 계시, 그리스도교의 일치, 교회의 본질,


매스 미디어로서 이들 중 전례와 매스 미디어에 관해서는


2차 회기 때 헌장과 교령이 각각 반포되었다.


 


그러나 1차 회기가 끝나갈 때, 즉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는 사망하고,


밀라노의 지오반니 몬티니 추기경이 바오로(Paulus)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새로운 교황 바오로 6세는 중단되었던 공의회가 계속될 것임을 발표하고, 9월 29일 속개토록 하였다.


제3차 회기 때 논의된 주제로는 교회, 신성한 계시, 주교들의 사목적 임무, 평신도 사도직,


그리스도교 일치, 종교적 자유, 현대세계 속에서의 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주제들은 제4차 회기 때까지 계속되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회기가 끝날 때에는


모두 16개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즉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계시헌장>(Dei Verbum), <현대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등


4개 헌장과, <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동방교회에 관한 교령>(Orientalium Ecclesiarum),


<주교들의 교회사목직에 관한 교령>(Christus Dominus),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Perfectae caritatis),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


<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Presbyterorum Ordinis) 등


9개 교령과,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등


3개 선언이 그것이다.


 



 


결국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한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대사전에서-


 



 


 



 


복자 요한23세교황의 유해-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그는 14세 때 3회원이 되었다(14세는 당시 3회원 입회를 위한 최소한의 연령이었다).


1959년4월4일 프란치스꼬회 창설 750주년을 맞아 프란치스칸 가족 4명의 총장들이


라테란 바실리카(Lateran Basilica)에 왔을 때 교황은 스스로 자신을 "요셉 형제"라 불렀다.


-김용철,재속프란치스꼬회회칙 비교연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1996,109쪽.




♬시편15(16)편


 



 


 


 


 


Pope JOHN XXIII


Memorial


11 October


Profile


Italian peasant. Educated at Bergamo and the Seminario Romano, Rome. Ordained in 1904. Secretary to the bishop of Bergamo from 1904 to 1914, during which he wrote the basis for his 5-volume biography of Saint Charles Borromeo. Served in World War I in the medical corps, and as a chaplain. Worked in Rome after the war, and reorganized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 Archbishop in 1925. Vatican diplomatic representative to Bulgaria, then Turkey, and Greece. Named papal nuncio to France in 1944 where he mediated between conservative and socially radical clergy. Cardinal and patriarch of Venice in 1953. Elected pope on 28 October 1958.


 


As pope, he stressed his own pastoral duties as well as those of other bishops and clergy. Promoted social reforms for workers, poor people, orphans, and the outcast. He advanced cooperation with other religions including Protestant, Greek Orthodox, Church of England, and even Shinto. In April 1959, he forbade Catholics to vote for parties supporting Communism. His encyclical Mater et Magistra of 14 July 1961 advocated social reform, assistance to underdeveloped countries, a living wage for all workers, and support for socialist measures that promised real benefit to society.


 


He nearly doubled the number of cardinals, making the college the largest in history. On 25 January 1959, he announced his intent to call a council to consider ways to renew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 promote diversity within the unity of the Church, and consider reforms promoted by ecumenical and liturgical movements. Convening the council, known as Vatican II, on 11 October 1962, was the high point of his reign.


 


His heartiness, his overflowing love for humanity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and his freshness of approach to ecclesiastical affairs made John one of the best-loved popes of modern times.


Born


1881 at Sotto il Monte, Italy as Angelo Giuseppe Roncalli


Papal Ascension


28 October 1958


Papal Canonizations


1959: Saint Charles of Sezze


1959: Saint Joaquina de Vedruna de Mas


1960: Saint Gregory Barbarigo


1960: Saint John de Ribera


1961: Saint Bertilla Boscardin


1962: Saint Anthony Pucci


1962: Saint Francis Mary of Camporosso


1962: Saint Martin de Porres


1962: Saint Peter Julian Eymard


1963: Saint Vincent Pallotti


 


Died


3 June 1963 at Rome, Italy


Beatified


3 September 2000 by Pope John Paul II at Saint Peter’s Square, Rome


Canonized


pending


Patronage


papal delegates


Additional Infomation


L’Osservatore Romano


L’Osservatore Romano


Images


Gallery images of Pope John XIII


Writings


Last Will and Testament, 29 June 1954


Ad Petri Cathedram: On Truth, Unity and Peace, 29 June 1959


Sacerdotii Nostri Primordia: On Saint John Vianney, 1 August 1959


Grata Recordatio: On the Rosary, 26 September 1959


Meditation for the Feast of the Guardian Angels, 2 October 1959


Princeps Pastorum: Prince of the Shepherds, 28 November 1959


True Christian Peace, 23 December 1959


Counsels for Seminarians, 28 January 1960


One, Holy, Catholic, Apostolic, 13 November 1960


The Roman Synod And The Priest, 24 November 1960


Sanguis Christi: On Promoting Devotion to the Most Precious Blood of Our Lord Jesus Christ, 30 June 1960


Mater et Magistra: On Health and Apostolic Benediction, 15 May 1961


The Way of Peace, 10 September 1961


Aeterna Dei Sapientia: On Saint Leo the Great, 11 November 1961


Veterum Sapientia: On the Promotion of the Study of Latin, 22 February 1962


Paenitentiam Agere: On Penance, 1 July 1962


The Art Of Spiritual Direction, 9 September 1962


Address at the Opening of Vatican Council II, 11 October 1962


Pacem in Terris: Peace on Earth, 11 April 1963


Meditation for the Feast Saint Francis of Ass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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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Everyone remembers the image of Pope John’s smiling face and two outstretched arms embracing the whole world. How many people were won over by his simplicity of heart, combined with a broad experience of people and things! The breath of newness he brought certainly did not concern doctrine, but rather the way to explain it; his style of speaking and acting was new, as was his friendly approach to ordinary people and to the powerful of the world. It was in this spirit that he called the Second Vatican Ecumenical Council, thereby turning a new page in the Church’s history Christians heard themselves called to proclaim the Gospel with renewed courage and greater attentiveness to the "signs" of the times. The Council was a truly prophetic insight of this elderly Pontiff who, even amid many difficulties, opened a season of hope for Christians and for humanity. In the last moments of his earthly life, he entrusted his testament to the Church: "What counts the most in life is blessed Jesus Christ, his holy Church, his Gospel, truth and goodness".


 


-Pope John Paul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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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o Giovanni XXIII (Angelo Giuseppe Roncalli) Papa


 


11 ottobre


 


 


Sotto il Monte, Bergamo, 25 novembre 1881 - Roma, 3 giugno 1963


 


(Papa dal 04/11/1958 al 03/06/1963).


Angelo Roncalli nacque a Sotto il Monte, piccolo borgo del bergamasco, il 25 novembre 1881, figlio di poveri mezzadri. Divenuto prete, rimase per quindici anni a Bergamo, come segretario del vescovo e insegnante al seminario. Allo scoppio della prima guerra mondiale fu chiamato alle armi come cappellano militare. Inviato in Bulgaria e in Turchia come visitatore apostolico, nel 1944 è Nunzio a Parigi, per divenire poi nel 1953 Patriarca di Venezia. Il 28 ottobre 1958 salì al soglio pontificio, come successore di Pio XII, assumendo il nome di Papa Giovanni XXIII. Avviò il Concilio Vaticano II, un evento epocale nella storia della Chiesa. Morì il 3 giugno 1963. Un breve ma intenso pontificato, durato poco meno di cinque anni, in cui egli riuscì a farsi amare dal mondo intero. È stato beatificato il 3 settembre del 2000.


 


 


 


Nell’aria c’era già l’odore dell’estate, ma il giorno era triste. Quel 3 giugno 1963 una luce si spegneva nel mondo: il “Papa buono” era morto. Calde lacrime solcavano il viso delle tante persone che appresero in quei momenti la notizia della sua scomparsa. Nel suo breve ma intenso pontificato, durato poco meno di cinque anni, Papa Giovanni era riuscito a farsi amare dal mondo intero, che adesso ne piangeva la perdita. Ma già subito dopo la sua morte incominciava il fervore della devozione popolare, che doveva avvolgere la sua figura di una precoce quanto indiscussa aureola di santità, e prendeva avvio il processo di beatificazione: un lavoro ciclopico, durato ben 34 anni, con l’avvicendarsi di diversi Postulatori e montagne di documenti da vagliare prima di pronunciarsi sulla sua eroicità. (…)Il 12 ottobre 1958 Angelo Roncalli era partito alla volta di Roma per partecipare insieme agli altri cardinali al conclave, ma non immaginava assolutamente di essere eletto Papa. Il suo desiderio era sempre stato quello di essere un pastore di anime, modesto e semplice come un parroco di campagna. Era nato a Sotto il Monte, piccolo borgo del bergamasco, il 25 novembre 1881, figlio di poveri mezzadri che lo battezzarono il giorno stesso della sua nascita nella locale Chiesa di S. Maria; la stessa dove, divenuto prete, avrebbe celebrato la sua prima Messa, il 15 agosto 1915, festa dell’Assunzione. Angelino era molto intelligente e terminò le scuole in un lampo, tanto che in seminario era il più giovane della sua classe. A 19 anni aveva completato i corsi, ma per la legge ecclesiastica non poteva essere ordinato sacerdote prima dei 24 anni, così fu mandato a Roma per laurearsi alla Gregoriana. Divenuto prete, rimase per quindici anni a Bergamo, come segretario del vescovo e insegnante al seminario. Allo scoppio della prima guerra mondiale fu chiamato alle armi come cappellano militare. Nel 1921 Roncalli è a Roma e, successivamente, viene inviato in Bulgaria e in Turchia come visitatore apostolico: iniziava così la sua carriera diplomatica. Nominato Nunzio a Parigi nel 1944, diventa Patriarca di Venezia nel 1953. Un’esistenza piuttosto appartata, senza fatti eclatanti, fino all’elezione al soglio di Pietro. Aveva allora 77 anni ed aveva già fatto testamento. Intendeva essere sepolto a Venezia e si era fatto costruire la tomba, nella cripta di S. Marco. Era naturale che ritenesse ormai imminente il suo commiato dal mondo. L’anno prima, 1957, aveva scritto infatti nel suo diario: “O Signore, siamo a sera. Anni settantasei in corso. Grande dono del Padre celeste la vita. Tre quarti dei miei contemporanei sono passati all’altra riva. Dunque anch’io mi debbo tener preparato al grande momento…”. Ma le vie del Signore sono sovente imprevedibili. Il 28 ottobre 1958 l’allora cardinale e patriarca di Venezia salì al soglio pontificio, come successore di Pio XII, e molti ne restarono sorpresi. Un vecchio avrebbe dovuto reggere la Chiesa? I giornali presto ci ricamarono su perché veniva da una famiglia di contadini. “Il papa contadino”, cominciarono a chiamarlo. Ma Roncalli aveva ben chiara la propria missione da compiere. “Vocabor Johannes…”. Mi chiamerò Giovanni, esordì appena eletto. Era il primo punto fermo del suo pontificato. Un nome che era già tutto un programma. E non si smentì. Nel 1959, un anno soltanto dopo la sua elezione, “tremando un poco di commozione, ma insieme con umile risolutezza di proposito”, come disse ai cardinali riuniti, annunciò il Concilio Vaticano II. Un evento epocale, destinato a cambiare il volto della Chiesa, a segnare un netto spartiacque nella storia della cristianità. (…) Fu il leit-motiv della sua vita e del suo pontificato. Dopo la S. Messa, nulla era per lui più importante del Rosario. Ogni giorno lo recitava per intero, meditando su ogni mistero. “Sono entusiasta ? egli diceva - di questa devozione, soprattutto quando è capita ed appresa bene. Il vero Rosario è il cosiddetto Rosario meditato. Questo supplisce a molte altre forme di vita spirituale. È meditazione, supplicazione, canto ed insieme incantesimo delle anime. Quanta dolcezza e quanta forza in questa preghiera!”. Mons. Loris Capovilla, suo segretario e fedele custode di memorie, ha detto che Papa Giovanni “durante tutta la sua esistenza si comportò con Maria di Nazareth come un figlio con la madre, uno di quei figli che un tempo davano del lei o del voi alla propria genitrice, manifestando amore dilatato dalla venerazione e rispetto alimentato dall’entusiasmo”. Una venerazione tenera e forte, delicata e incrollabile, in cui possiamo vedere racchiuso il segreto della sua santità. Durante il suo pontificato fu pubblicato su “L’Osservatore Romano” un suo “Piccolo saggio di devoti pensieri distribuiti per ogni decina del Rosario, con riferimento alla triplice accentuazione: mistero, riflessione ed intenzione”: in una scrittura limpida e chiara c’è il succo delle riflessioni che egli veniva maturando nella personale preghiera del S. Rosario. “Nell’atto che ripetiamo le Avemarie, quanto è bello contemplare il campo che germina, la messe che s’innalza…”, diceva con efficace metafora presa da quel mondo contadino a lui così familiare. “Ciascuno avverte nei singoli misteri l’opportuno e buon insegnamento per sé, in ordine alla propria santificazione e alle condizioni in cui vive”. Papa Giovanni auspicava che il Rosario venisse recitato ogni sera in casa, nelle famiglie riunite, in ogni luogo della terra. Ma quanti oggi si radunano per fare questo? Il vento gelido della secolarizzazione ha finito per spazzare via questa antica consuetudine. Le case assomigliano oggi a isole di solitudine e incomunicabilità e se ci si riunisce è per celebrare i rituali del “caminetto” televisivo che mescola con la stessa indifferenza massacri etnici e telequiz, futilità e orrori. (…)Il suo paese natale da oltre un trentennio è meta incessante di pellegrinaggi. Lo si era immaginato come un papa di transizione, che sarebbe passato in fretta, presto dimenticato, ma non è stato così. Per un disegno provvidenziale di Dio la giovinezza della Chiesa si è realizzata attraverso l’opera di un vecchio. Fu veramente un dono inatteso del Cielo. Attento ai segni dei tempi, Papa Giovanni promosse l’ecumenismo e la pace. Uomo del dialogo e della viva carità, fece sentire a tutti gli uomini, anche ai non cattolici e ai lontani, l’amicizia di Dio. La sua spiritualità, delicata e robusta al tempo stesso, aveva, come abbiamo visto, le sue radici in Maria. A Lei sempre si rivolgeva, in Lei confidava. Non si staccava mai da Lei, né mai si macerava nel dubbio: la sua fede era limpida e sorgiva, riposava in Maria, attraverso il Rosario. Anche il miracolo, la guarigione “clinicamente inspiegabile” di una suora malata di cancro, grazie a cui è ora elevato alla gloria degli altari, si è realizzato nel segno di Maria. Suor Caterina Capitani, delle Figlie della Carità, era affetta da un tumore allo stomaco che l’aveva ridotta in fin di vita. Papa Giovanni era morto da soli tre anni e la suorina con le consorelle l’aveva pregato a lungo, con grande insistenza e fiducia. Quel giorno, era il 25 maggio 1966, il “Papa buono” le apparve e le disse di non temere, perché sarebbe stata guarita, aggiungendo: “Me l’avete strappato dal cuore questo miracolo…”. Prima di scomparire però le fece una grande raccomandazione: di pregare sempre il rosario. Era il suo chiodo fisso durante la vita, era il segreto della sua santità nell’alba eterna che non conosce tramonto.


 


 


 


 


 


 






가타리나

2009.10.09 15:34:41

금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황으로 기억되는 요한 23세로 인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영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잘 느끼셨던 교황님이 우리 3회원이시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만큼 나 자신도 영의 움직임에 민감하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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