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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10월 9일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St. Joannes Leonardi, C


San Giovanni Leonardi Sacerdote


Diecimo, Lucca, 1541 - Roma, 9 ottobre 1609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의 루가 태생인 그는 처음에는 약제사가 되었지만 요한 콜롬비니가 세운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특히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쳤다.


병원과 감옥의 사목활동에 힘을 기울였던 그는 많은 후원자와 협력자를 얻게 되었다.


 


이때 열리고 있던 트렌트 공의회에선 프로테스탄트가 당당하게 활동하였는데,


요한과 그 후원자들은 새로운 교구 사제회 구성을 계획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3 세로부터 승인을 받고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성 필립보 네리의 도움이 매우 컸다.


 


이 수도회의 이름은 "천주의 모친 성직수도회"이며,이탈리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신앙 전파를 위하여 최초의 사제회를 설립하였으며, 이 사제회를 교황들이 확충시켜 포교성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마땅히 이 기구의 창설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사랑과 슬기로써 다른 여러 수도회의 기율도 바로잡았다. 1609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왜 내가 그일을 해야 하는 가?" "그것은 내게 무슨 이유인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있음에 대한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요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이러한 문제에 답했다.


즉 그는 한 인간으로서 사제가 되기로한 것이다.


서품 후에 그는 열심히 사목 활동을 했으며 병원과 교도소 사목에 열성적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과 표양으로 몇 명의 젊은 평신도들이 그를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후에 사제가 되었다.


 


요한은 종교 개혁과 트렌트 공의회 이후의 쇄신 시대에 살았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교구 사제들의 새로운 모임을 계획했다.


결국 승인은 받았으나 이 계획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심한 정치적 반발을 일으켜,


그는 고향인 이탈리아의 루카에서 추방되어 남은 생애를 타향에서 보냈다.


그는 필립보 네리 성인의 격려와 도움을 받았는데


필립보 네리 성인은 그에게 자기의 숙소를, 그의 고양이까지 덧붙여서 주었다.


 


그는 1574년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를 세웠으며,


1579년 교리 연구협회를 만들어


’그리스도교 교리의 개요’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19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


 


레오나르도 신부와 동료 사제들은 이탈리아의 이익을 위해 큰 힘이 되었으며


그 회는 1595년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인준했다.


그는 전염병 환자가 내민 손을 잡아 주다가 전염되어 68세에 세상을 떠났다.


창랍자의 사려 깊은 방침에 의해 천주의 성모 성직자회는 15개 이상의 본당은 절대로 맡지 않고


오늘날까지 대단히 작은 단체로 머물러 있다.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일 ’크리스토퍼노트’라는 팜플렛을 보아도 많은 일이 있음을 알 것이다.


모든 성인의 생애를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느님과 한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일생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바라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우리 각자는 요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켜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형제 자매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사용할 재능을 각자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루가 12,32-33)


 



 


성 필립보 네리 축일:5월26일. 게시판1182번,178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요한 레오나르도 사제가 교황 바울로 5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Epist. Pro universali totius Ecclesiae reformatione: in archivo Ordinis Clericorum Regularium Matris Dei)


 


사람아, 주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보여 주겠다.


 


사람들의 습성을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영광을 찾으면서


힘들어도 보람이 있는 이 개혁의 성취를 위해서 만물의 원천이신 분의 도움을 기대하고 또 청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개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앞에다 등경 위에 놓은 등불처럼 자기 자신을 온갖 덕행의 거울로서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 생활의 고결성과 덕행의 광휘로써 하느님의 집에 사는 모든 이에게 빛을 비추어 주어,


강요함으로써 보다는 온유로써 개혁에로 이끌어 줄것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령에 따라, 머리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몸에서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주님 가족 전체의 견고한 질서가 손상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별 있는 의사들처럼 교회를 괴롭히는 여러 급성 질병들을 완벽히 진단하여


각 질병에 대해 적절한 치료제를 투입하도록 열의를 다해야 합니다.


 


전체로서의 교회가 요구하는 치료제들에 대해 살펴본다면


그 개혁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지도자에게건 어린이들에게건, 관계없이 단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이의 책임을 맡고 있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의를 돌려야 합니다.


거기에서 걔혁을 추진한다면 수하 사람들에게까지 그 개혁이 흘러내려갈 것입니다.


 


따라서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 그리고 본당 사제들, 한마디로 영혼의 직접적인 양육을 책임 맡는 모든 이들을 택하는 데 있어,


즉 주님 양떼의 지도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임명하는 데 있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위가 가장 높은 이들로부터 가장 낮은 이들에게, 말하자면 지도자들로부터 어린이들에게까지 내려가 보도록 합시다.


교회 관습의 개혁은 그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에게 유아 때부터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과 건전한 생활자세를 교육시키는 데 필요한 것을 한 가지라도 그냥 내버려두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선, 다른 누구도 아닌,


착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수중에 어린이들을 맡겨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치는 교육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교황 성하, 이 점들이 바로 현재의 중대한 위기에 처하여 주님이 저에게 제시해 주신 것들입니다.


이 방법들이 처음 언뜻 보기에는 수행하기 지극히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의 중대성에 비할 때 지극히 쉬운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웅대한 변화는 웅대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면 올 수 없으며,위대한 일은 위대한 사람들이 하여야 합니다.


 



 


[ICON]The mother of God.XV c., P. Korin, Moscow


 


1938년 4월 17일에 부활 축일을 맞이하여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는 새로운 세 명의 성인을 시성하는 장엄한 예식이 거행되었다.


이 새로 시성된 성인들은


예수회의 성 안드레아 보볼라 순교자와 프란치스코회의 성 살바도르 및 성 요한 레오나르디이다.


 


 


*성 안드레아 보볼라 축일:5월16일.게시판1766번.
*성 살바도르 축일:3월18일. 게시판1050번.1667번.
*성 요한 레오나르디 축일:10월9일.게시판1413번.


 


요한은 1543년 이탈리아의 디에치모 촌에 사는 레오나르디 집안의 7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심이 두터운 부모는 소년을 근처에 있는 어느 신부에게 위촉해 교리와 기타 교육을 받도록 했는데,


그때문인지 일찍이 신부가 되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온순한 성격인 그는


아버지의 의향대로 그런 소원을 체념하고 루가 읍에 나가 어떤 약제사의 조수로서 7, 8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었다.


그러는 한편 도미니코회 신부의 지도 밑에 조직된


그 마을의 가톨릭 청년회에 가입해 독실하고 경건한 행동과 그 덕행으로 일반 회원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나이 20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아직도 신부가 되려는 뜻을 버리지 않은 요한은


고해 신부와 상의한 끝에 그것이 성소임을 깨닫고 처음에는 요한 콜룸비니가 세운 수도회에 들어가 성직에 대한 준비에 착수했다.


연소자들 사이에 끼여 라틴어를 배우고 다음은 철학, 신학을 배워 비로소 신품을 받아 그가 동경하던 성직을 손에 잡은 것은 그의 나이 30이 된 때였다.


 


그의 최초의 부임지는 역시 루가 마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무를 잘 이행했으며 기회 있는 대로 병원이나 형무소를 방문해 병자를 위로하고 죄인들을 회개시키며,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고해 성사를 주었다. 그 외에 어린 소년, 소녀들의 순박한 마음속에 진리의 씨를 뿌리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또 그는 예전에 그 일원이었던 가톨릭 청년회를 적극 협조하며,


그 회를 베풀게 하며 교리를 연구케 하여, 흔들리기 쉬운 젊은 마음속에 진리와 은총의 빛이 깃들게 하고,


그들을 위험한 유혹에서 보호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요한은 사제들의 성무 이행에 대한 열성을 분기시키도록 성직자의 신심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1574년 성 필립보 네리 신부의 원조로 창립된 하느님의 성모 성직자회의 선구요,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 수도회는 요한 티오니와 제오르지오 아리조 두 신부가 요한 레오나르디와 뜻을 합해 마리아 데 라 로사 성당 근처에 집 한 채를 빌려 동거하고,


그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요한은 다만 종이에다 순명이라는 두 자만을 크게 써서 주었다 한다.


즉 그는 장상을 하느님의 대리자로 인정하고 순명하는 것만이 수도 생활의 근본 정신이라 믿었다.


 


물론 이 회의 앞길도 평탄하지 않았다. 시기도 있고 반대도 있었으나, 요한은 이 모든 것을 잘 감수 인내했다.


거기에 하느님의 도우심이 항상 그회를 따라다녔으며, 때로는 참으로 신기한 주님의 섭리가 뚜렷이 나타날 때도 있었다.


 


요한이 창립한 이 회의 인가는 1593년에 이르러 나왔다. 장구한 시일을 두고 대망하던 그 인가를 손에 쥐었을 때 그의 기쁨과 감사는 어떠했으랴!


회의 총장으로서 가끔 로마에 상경하게 된 그는, 교회로부터 각 수도회의 개혁에 관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지방을 순시하도록 명령받았다.


포교성성의 설치며, 로마에서의 병원, 학교 등의 개선은 그의 활동에 의한 힘이 컸던 것이다. 이같이 교회와 사회를 위한 분주한 몸이지만,


그는 결코 사제로서의 행할 본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해성사를 주며 모든 사업에 주님의 풍성한 은총이 내리게 하기 위해 끊임없는 극기의 생활을 했다.


 


요한은 1609년 10월 9일, 66세를 일기로 로마에서 영면했다.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 바로니오 추기경은 "요한 레오나르디는 필립보 네리에 비해도 손색없는 훌륭한 성인"이라고 격찬했다.


 


 


 



 


 


♬16.Cherubic-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San Giovanni Leonardi Sacerdote


9 ottobre - Memoria Facoltativa
 
Diecimo, Lucca, 1541 - Roma, 9 ottobre 1609


Prese a cuore vivamente la formazione catechetica del popolo, la difesa della fede e l'azione missionaria. Fondò per questo scopo la Congregazione della Dottrina Cristiana, i Chierici della Madre di Dio e, insieme a Giovanni Battista Vives, una scuola per i futuri missionari, precorritrice del collegio Urbano di Propaganda Fide (1627) e di quello delle Missioni Estere di Parigi (1663). Servendo gli appestati contrasse il male che lo portò alla fine dei suoi giorni. (Mess. Rom.)



Etimologia: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A 26 anni è farmacista in Lucca, la prospera repubblica colpita poi da una grave crisi. Giovanni Leonardi soccorre i poveri lavorando con il sodalizio dei “Colombini”. L’esperienza lo porta a diventare prete nel 1572. Un prete targato Trento: cioè con la passione per l’insegnamento religioso, prescritto dal Concilio concluso nel 1563. Incomincia insegnando ai bambini, poi il vescovo gli affida la catechesi degli adulti. Redige un apprezzato catechismo. Fonda la “Compagnia della dottrina cristiana” per laici. Nel 1574 dà vita alla famiglia religiosa detta poi dei “Chierici Regolari della Madre di Dio”. Diventa un protagonista della riforma cattolica.
Ma in Lucca ogni novità insospettisce. Non piace ad ambienti vicini alla riforma protestante. Ma disturba pure certo clero che non ama la riforma cattolica. Così, nel 1584 – durante un soggiorno a Roma – lui si trova bandito in perpetuo da Lucca. Chiede spiegazioni e gli rispondono che disturba l’ordine pubblico e manca di rispetto all’autorità costituita. C’è pure chi lo dice mandato dall’Inquisizione... Arrivano poi le inquietudini e le divisioni tra i suoi stessi religiosi. Ma nell’insieme la comunità resiste a questa prova, mentre a Roma cresce il prestigio del suo capo: Clemente VIII lo manda a riordinare congregazioni religiose, a riformare monasteri, a liquidare controversie.
Con Giovanni Vivés, promuove nel 1603 quello che sarà poi il Collegio Urbano di Propaganda Fide: l’evangelizzatore di Lucca ha ormai per orizzonte il mondo. I suoi “Chierici” già nel 1601 hanno aperto una loro casa a Roma, dove li chiameranno “Leonardini”. Sempre a Roma conclude la sua esistenza Giovanni. Il corpo, sepolto dapprima a S. Maria di Portico, verrà poi trasferito a S. Maria in Campitelli. Qui c’è tuttora la casa generalizia dell’Ordine “leonardino”. Giovanni Leonardi sarà proclamato santo da Pio XI nel 1938.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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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1-Oct-2001
Letto da 1919 pers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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