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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The Holy Trinity, St Jerome and Two Saints - ANDREA DEL CASTAGNO.


c. 1453.Fresco.SS. Annunziata, Florence


 


축일: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ST. JEROME


St. Hieronymus, C. et D. E
San Girolamo (o Gerolam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Stridone (confine tra Dalmazia e Pannonia), ca. 347 - Betlemme, 420 )
Born:347 at Strido, Dalmatia
Died:419; relics at the Basilica of Saint Mary Major in Rome
Girolamo = di nome sacro, dal greco(of sacred name, from the Greek)


 



 


달마시아의 아퀼레이아 교외 스트리도에서 출생한 에우세비오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는


그당시 저명한 문법학자인 도나투스의 문하생으로 로마에서 공부하고,


라틴어와 희랍어 지식은 물론 고대 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 업적으로 명성을 날리다가,


360년에 교황 리베리오로부터 로마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트레비스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하다가 골 지방을 여행한 뒤,


그는 발레리아노 주교가 이끄는 일단의 학자 그룹에 가입하면서부터,


370년경에는 아퀼레이아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말썽을 일으키게 되자. 그는 동방으로 여행하여 안티오키아에 정착하였다.


이대 그는 라오디체아의 아뽈리나리스의 강의를 들었고, 또 그리스고의 환시를 보게 되었다.


이 환시에 따라 그는 시리아 사막의 칼치스로 갔고,


중병을 앓고난 뒤부터 4년 동안이나 기도와 단식으로 생활하는 은수자가 되었고,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웠으며, 테베스의 성 바오로의 전기를 썼다.


 


그 후 안티오키아에서 돌아오던 길에 성 바울리노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고,


바울리노를 지원하려는 목적에서 멜레시아노의 이단 논쟁에 개입하였다.


예로니모는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제노의 지도 아래 성서를 공부할 목적으로 콘스탄티노블로 갔고,


382년에는 바울리노와 성 에피파니오와 더불어 로마로 가 공의회에 참석하고,


자신은 성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계속 머물게 되었다.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제노 축일:1월2일.게시판833번,1548번.


성 다마소 1세 교황 축일:12월11일.게시판795번,1518번.


성 바울리노 축일: 8월31일.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이때 다마소의 제의에 따라 그는 4복음서와 성 바오로 편지


그리고 시편의 라틴어 사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헬비디우스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를 반박하며서"라는 글을 발표했다.


 


헬비디우스는 마리아가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일단의 귀족 부인들을 권고하여 성서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수많은 자신의 반대자를 상대로 하여 사제 독신제와 거룩한 생활을 역설하였다.


그의 후원자이던 다마소가 서거하자,


그의 반대자들과 또 나쁜 루머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는 동방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바울라와 에우스또치움 및 일단의 로마 그룹과 합류하여 에집트로 갔다가,


386년에 팔레스티나로 와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는데,


여기는 바울라가 여자 수도원 3곳과 남자 수도원 1곳을 세웠고, 예로니모가 남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서의 라틴어 번역에만 보냈으나,


그 당시에 있었던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 예컨데 오비니아의 성모 마리아 동정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하여도 그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예로니모의 가장 큰 논쟁은 자신의 옛 친구이자 오리겐의 지지자이며


성서 번역에도 공이 있던 루피노와의 사건이다.


이리하여 그는 루피노를 반박하는 호교론을 썼다.


 



 


그의 가장 큰 성공은 390년에서 420년까지 이룩된 구약 번역이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서의 번역도 이 동안에 완성된 것이다.


이 사본은 소위 불가타본으로 불리고,


1546년 트렌트 공의회에 의하여 가톨릭의 공식 라틴어본으로 선언되었다.


불가타(Vulgata.대중라틴말성서)


 


405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서 주석서를 남겼고, 그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415년에는 펠라지아노스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이듬해인 416년에 무장한 펠라지아노스 수도자들이 베들레헴 수도원을 불태우고 그를 해치려 하였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같이 하느님께 위탁받은 사명을 완수한 예로니모는 420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교회 박사로 공경을 받는다.지금 그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성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성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봉헌축일:8월5일.게시판1303번


성모 대성전 봉헌 축일(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


Dedicazione della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그는 상반된 성격과 다양한 기질의 소유자로서 상당히 복합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불같은 성격과 눈물 많은 다정다감한 성품, 냉철한 이성과 엄격하고도 열정적인 마음,


허술한 듯 빈틈이 없는 일 처리, 단식과 금육 엄수 및 노동에 의한 삶의 촉구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생애 전반기는 종교적 체험과 고행 등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동서방의 긴 여행과


다마소 교황의 비서로 일했던 시기이다.


두번째 기간은 다마스의 서거 이후 성서 번역과 주석 작업에 열중하던 베들레헴 시절이다.


이 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빛난 업적을 남기는데 관상 생활과 성서 연구로 일관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회박사로 공경을 받는다.


 



 


성 예로니모 사제의「이사야서 주해 서문」에서


(Nn.1.2: CCL 73,1-3)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처럼 "너희는 성서를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는


성서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성서를 파고들어라." 그리고 "찾으라. 얻을것이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명에 순종할 때,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 처럼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권능이시고 하느님의 지혜이시라면


성서를 모르는 이는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창고에서 새 것과 옛것을 끄집어 내는 집 주인을 본받고 싶으며,


또 아가에게 "아, 임이여, 햇것도 해묵은 것도 임을 기다리며 마련해 두었답니다."고 말하는


그 신부를 본 받고 싶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예언자 이사야를 예언자로서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자요 사도로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다음 말씀을 자기 자신과 다른 복음 전파자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그리고 하느님께서 흡사 사도에게 말씀하시듯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하고 물어보시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그러나 내가 몇 마디 말로 주님의 모든 신비를 포함하는 이 성경 책의 내용을


다 취급하려 한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사실 이사야서에서는 주님이 동정녀에서 탄생하신 임마누엘로,


여러 놀라운 일들과 기적들을 행하시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분으로,


그리고 만백성의 구세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물리, 도덕, 논리에 대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성서 전체에 나오는 모든 것과 인간의 혀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인간의 이해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 말씀에서 이 신비들의 깊이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계시되었지만, 그것은 밀봉된 책에 쓰여진 말씀과 같다.


글 아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책이 밀봉되었는데 어떻게 읽겠느냐?’고 할것이다.


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나는 글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증명이 만일 어떤 이에게 너무 빈약하게 보인다면 사도 바울로의 다음 말씀을 들으십시오.


"두세 명의 예언자들만 말하도록 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곁에 앉은 사람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경우에는 먼저 말하던 사람은 중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침묵을 지키건 말을 하건 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영께 의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침묵을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예언자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의 뜻을 깨닫고 있다면, 만사는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귀에는 자신들이 하는 말소리의 진동만이 가 닿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언자들은 다음 말씀으로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 천사가 내 안에서 말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마음 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의 말씀을 내 듣고 싶사옵니다."


 



 


St Jerome- LEONARDO da Vinci.


c. 1480.Oil on panel, 103 x 75 cm.Pinacoteca Vaticana, Vatican, Rome


 


우리가 성인들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그들의 뛰어난 미덕이나 또는


그들이 실천한 헌신적인 봉사 등을 기억하지만,


예로니모는 그의 나쁜 성질 때문에 기억되고 있다.


 


그가 아주 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신랄한 비평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은 너무도 열렬했으며,


그에게 오류를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적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예로니모는 그의 강력하고도 때로는 풍자적인 글로써 그들을 공격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 학자였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정신적 영감의 큰 근원이 된 주석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열심한 학생이었고 완벽한 학자, 비범한 서간문의 작가였으며, 수도자,주교,교황등의 상담자이기도 했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예로니모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일찍이 안 사람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예로니모는 특히 불가타라고 불리는 성서를 번역한 인물이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성서는 아니지만,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떤 현대 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예로니모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니모 이후 몇세기 동안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데 적격이었을 뿐이다."


 


트렌트 공의회는 새롭고 정확한 불가타 성서의 출판을 요구했으며,


그것이 교회에서 사용될 진정한 성서임을 공표했다.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는 스스로 훌륭한 준비를 했다.


그는 라틴어뿐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와 칼데아어까지 능통한 대가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달마티아에 있는 스트리돈-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예비 교육을 마친 후 그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로마로 갔다가 독일의 트리어로 갔는데,


그곳에는 학자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는 가장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하여 매우 애쓰면서 가는 곳마다 몇 해씩 머물렀다.


이렇게 공부를 위한 준비를 한 후,


그는 진정한 공경심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던 흔적을 살피면서 팔레스티나를 두루 여행했다.


 


그는 신비주의자였으며, 기도,참회,연구에 자신을 맡기고자 칼키스 사막에서 5년을 보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믿어지는 동굴이 있는 베들레헴에 정착해서 살았다.


예로니모는 420년 9월 30일, 베들레헴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성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예로니모는 강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덕성과 더불어 대담 무쌍한 비평가가 지닌 단점과


인간이 지니는 일상적인 윤리 문제를 가진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는 덕이나 악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든 중간 입장을 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빨리 화를 내는 반면 빨리 후회하는 성격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더 가혹했다.


 


돌로 가슴을 치는 예로니모의 초상화를 보면서 한 교황이 말하기를


"당신이 그 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 하신 일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교회가 결코 당신을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버틀러, ’성인전’)


 



 


 


"황량하고 돌투성이인 사막의 가장 외진 곳,


그곳에는 수도자조차도 두려워하는 뜨거운 태양열이 불타고 있었는데,


나는 나 자신이 기쁨 가운데 그리고 로마 군중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지옥의 두려움 때문에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처벌한 이 추방과 감옥에서,


나는 여러번 눈앞에 로마 처녀들의 춤추는 광경을 마치 내가 그들 가운데 있는 것처럼 상상을 했다.


그것은 나의 차가운 육신 안에서 그리고 나의 바짝 마른 근육 속에서 죽은 것 같았으며, 열정만이 살아 있었다.


이 열정의 원수와 함께 나는 혼자서 예수의 발 아래 몸을 던졌으며


나의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리고 나는 몇 주일 단식함으로써 나의 육체를 길들였다.


나는 내가 받은 유혹을 폭로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슬퍼한다."


(성 유스토키움에게 보낸 편지)


 



 


St Jerome in his Study - ANTONELLO da Messina


c. 1460.Wood, 46 x 36,5 cm.National Gallery, London


 


서방(西方) 가톨릭 교회의 유명한 네 교부 중의 한 사람인 예로니모는


2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구약성서의 라틴어 역(불가타)으로 단연 이름이 난 분이다.


그는 이 성서 번역으로 교회 내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그의 심원한 학식의 최대 결실이라 하겠다.


 


*4대 공교부:


성 암브로시오(축일:12월7일.게시판790번,1509번.)


성 아우구스티노(축일:8월28일.게시판607번,1336번)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축일:9월3일.게시판617번,1346번)


성 예로니모(축일;9월30일.게시판670번,139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예로니모는 기원 후 342년경 판노니아의 국경 근처에 있는 달마시아의 스트리돈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무척 부유하며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그 당시의 습관을 따라 예로니모가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이미 장성한 후였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원기 활발한 소년으로 354년경 로마의 어느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로마는 그 당시 콘스탄티노 대제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나서 겨우 40년이 지났을 무렵인데,


이교신의 우상이나 이를 제사지내는 신전 등 옛날의 이교의 잔재는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기심에서 가톨릭 신자가 된 사람 중에는 이교의 사상을 버리지 않은 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 중에도 학문이나 예술, 정치 방면에도 그 좋지 못한 영향이 명백히 드러났던 것이다.


 


의지가 아직 견고하지 못하고 혈기왕성한 청년 예로니모도


이런 향락적인 이교의 감화를 받아 죄악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후 곧 중병에 걸려 병상에서 신음하는 신세가 되자


비로소 과거를 반성하고 그 고통도 하느님의 징벌이라 생각했고,


회복된 후는 다시 태어난 사람과 같이 신앙의 길을 걸으며 정결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엘리오 도나토라는 유명한 학자에게서 수사학과 고전문학,


특히 치체로와 비질리오의 라틴어 고전문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라틴어와 희랍어 지식은 물론 고대사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로 명성을 날린 분이다


이때 그는 세속 학문에 전념하였지만, 주일에는 사도들과 여러 순교자들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며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성사를 받고 신앙 도덕에 위험이 많은 로마를 떠나


당시 로마 황제의 수도였던 독일의 트리엘 시에 갔다.


 


그곳에서 오로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결심을 하고 성직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오


아리우스 이단자들의 반대 때문에 3년간(335-337년) 트리어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동방교회의 수도생활을 소개하였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트리어에 머무는 동안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 축일:5월2일,게시판1137번,1742번.


 


그는 370년에 고향인 아퀼리아에 돌아와 발레리아노 주교의 지도 아래 같은 뜻을 갖고 있던


친구 루피노, 보노소 크로마치오, 엘리오도로 등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힐라리오 등 위대한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교회와 융합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다음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주교에게서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다다랐을때 열병에 걸렸던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완쾌할 때까지 그리스어를 배웠던 것이다.


 


이 지식이 뒷날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신·구약 성서의 라틴어역을 완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완쾌된 예로니모는 은둔하여 수도에 전념할 결심을 하고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카르치스의 광야로 가서


그곳에 사는 많은 은수자들과 더불어 기도와 고행과 공부에 힘쓰며 수년간 속죄의 생활을 했다.


 



 


그러나 예전의 화려했던 향락의 시기를 회상하고서


종종 현재의 적막하고 부자유스러운 생활에 깊은 의혹의 마음을 가진 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서운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는 거의 이에 압도되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갈까 망설인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는 그 유혹을 물리치는 한 방편으로 가장 어려운 히브리어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공부하며,


그가 은수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치체로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꾸중하셨다고 한다.


 


예로니모는 성직자의 반열에는 들어가 있었으나 아직 사제의 자격은 없었다.


동료들은 이를 애석히 생각하고 신품 성사를 받도록 권유했다.


그후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 이단 문제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379년에 광야에서 나와 안티오키아에 돌아와서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성 바올리노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바울리노를 지원하려는 목적에서 멜레시아노의 이단 논쟁에 개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서의 라틴어 번역에만 보냈으나,


그 당시에 있었던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 예컨데 오비니아의 성모 마리아 동정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하여도 그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던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와도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나지안조의 주교 성 그레고리오의 권유로 오리게네스이 호교서와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등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의 심오한 학식은 그로 말미암아 일시에 세상에 널리 퍼져, 그의 명성은 로마에까지 전해졌다.


그랬던 만큼 382년 교회 회의가 개최되자 당시의 교황 다마소에게 초청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축일:1월2일.게시판833번,1548번.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축일: 3월 9일.


성 다마소 1세 교황 축일:12월11일.게시판795번,1518번.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예로니모는 교황을 보좌하며 여러 문제의 의정(議定)에 공헌한 바가 컸고,


또한 그의 명을 받아 이제까지 사용해오던 이딸라 성서 중의 오역(誤譯)을 수정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로는 위대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로니모는 382년에는 바울리노와 성 에피파니오와 더불어 로마로 가 공의회에 참석하고,


자신은 교황 다마소의 비서로 계속 머물게 되었다.


이때 다마소 교황은 신.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교회 안에는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예로니모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로마에는 사치와 냉담의 나쁜 풍습이 만연했다.


예로니모는 이를 매우 염려해 진실한 사람들을 규합하여


그 지도자가 되고,그들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가톨릭의 참된 정신을 고취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예로니모는 귀족 부인들을 권고하여 성서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또한 수많은 자신의 반대자를 상대로 하여 사제 독신제와 거룩한 생활을 역설하였다.


이같이 뜻깊은 사업에 협력과 원조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원로원 의원 판마키오와 그의 친구들,


집정관 미망인 성녀 마르셀라, 귀족부인 성녀 바울라 및 그녀의 두 딸인 성녀 프리실라와


에수스토치움 등 상류계급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적대자들이 여자들 집에 들락거리는 예로니모를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원자이던 다마소가 서거하자,


그의 반대자들과 또 나쁜 루머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는 동방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예로니모는 80세 가까이 된 다마소 교황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물망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384년에 그를 지원하던 다마소 교황이 사망하고 예상과는 달리


시리치오 교황이 선출되자 상황이 돌변하였다.


적대자들이 그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바울라와 에우스또치움 및 일단의 로마 그룹과 합류하여


이집트의 니트리아 사막의 은수자들을 방문한 다음 ,


386년에 팔레스티나로 와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는데, 여기는 바울라가 여자 수도원 3곳과


남자 수도원 1곳을 세웠고, 예로니모가 남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또 그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하였다.


 


예로니모는 자신의 경험에서 혼자 수도에 힘쓰는 은수자 보다도 한 지도자 밑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서로 도와 주며 나아가는 것이 훨씬 수덕에 빠른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 친히 수사들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성당에 모여 성무 일도서를 같이 합송하고,


아침 미사에는 완덕에 관한 유익한 설교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적당히 노동에 종사하기로 했다.


또한 여가를 이용해 신·구약 성서의 사본을 작성케 하고 이를 사방에 보내주었다.


 



 


예로니모는 다시 신약·구약 양 성서를 쉽게 또한 정확하게 다시 번역할 것을 결심하고,


우선 카르데아어(語)를 배우고 나서


386년부터 404년까지 끈기있게 집필을 계속해 드디어 위의 대사업을 완성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유명한 불가타(대중라틴말성서)역 성서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모든 교부의 저서나 성서의 각서에 대한 주석설명서도 저술하고,


바쁜 중에도 각 방면의 명사와 편지, 서신왕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들레헴의 수도원은 마치 가톨릭적 생활의 중심지와 같은 감을 주었고,


점차로 순례지처럼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래서 루시니오라는 스페인의 한 부호가 예로니모의 집필로 된 서적을 모조리 수집하기 위해


필사본을 뜨는 사람들 6명을 파견한 적도 있었고,


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독일 등지에서는 주교, 사제들이 그의 교훈을 청하러 오기도 했고,


또한 이탈리아의 총독이나 갈리아의 귀부인들은 신조에 관한 설명을 들으러 오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의 학식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져 주었다.


중세기에 이르러서 그의 저서는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생존시 이미 당시에서 가장 큰 역사가로서 유명해졌다.


그만큼 유명하고 세인에게 칭찬을 받던 예로니모였지만, 하느님의 시련과 악마의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없었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은 수십년간이나 그를 못 견디게 했던 것이다.


이에 그가 패배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열렬히 기도하는 한편,


늘 몸을 잘 조심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같은 내부의 우환 뿐아니라 소아시아에서 야만족이 팔레스티나에 침입한 것 등의 외환도


두 번이나 있어, 파괴된 수도원 부흥에 크나큰 심로를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410년 고트족이 로마에 침입해 거의 전 시가를 페허로 만들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을때 그는


"교회의 손해를 듣고, 비통에 가슴이 찢어질 듯하여 통곡하고 체읍하며 말문이 막힐 뿐이다"라고


어느 서한 중에 술회했다 한다.


 


또한 394년부터 그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와 서신 연락을 하면서 당시 교회의 큰 골칫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몰아내는 데 공동 보조를 맞추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사업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칭송하였다.


 



 


St Jerome and the Angel - VOUET. Simon.


1620s.Oil on canvas. 144.8 x 179.8 cm.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교회는 9월 30일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그를 ’신학교의 주보’ 또는 ’수덕생활의 주보’로 모신다.


그는 아마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분이었고,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예로니모는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으며,


밍네의 라틴 교부 총서(PL) 제22-30권에 그의 저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총서 한 권은 요즘의 400쪽으로 된 책 40-50권 분량이나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방대한 저서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들은 성서 주석서, 성서 번역서, 교의신학서,


이단 논쟁서, 수덕신학서, 역사서, 강론, 서간 등 다양하며, 저서 목록만 열거하더라도 엄청나게 많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오래 살기도 했지만,


수도원 안에서 학문 연구에 열정적으로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성화들이 많은데,


상체를 벗은 은수자의 모습으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가장 큰 성공은 390년에서 420년까지 이룩된 구약 성서 번역이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구약성서의 경우에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에서 번역하였다가


후에 히브리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신약성서의 번역도 이 동안에 완성된 것이다.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Vulgata.대중라틴말성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예로니모 당시가 아니라 훨씬 뒤인 13세기부터였다.


 


예로니모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트 공의회에 의하여 가톨릭의 공식 라틴어본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이 성서 번역으로 교회 내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그의 심원한 학식의 최대 결실이라 하겠다


그는 유명한 그리스 교부들의 성서 주석서들,


특히 오리게네스의 주석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교회에 소개하였다.


게다가 예로니모는 자신이 직접 구약성서의 창세기, 시편, 전도서, 모든 예언서,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서, 사도 바오로의 필립비서, 갈라디아서,


에페소서, 디도서 등에 대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405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서 주석서를 남겼고, 그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예로니모는 처음에는 은유적 주석방법을 선호하였지만


점차 성서의 본문과 역사를 중시하는 문자적 주석방법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이처럼 주력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이 외에도 예로니모에 관한 유명한 전설이 있다.


그것은 어느 날 한마리의 사자가 절룩거리며 그에게 가까이 와서 앞발을 내밀어 자세히 보니,


거기에 커다란 가시가 박혀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를 빼주니까 사자는 자못 기쁜듯이 갈기로 덮여진 머리를


성인의 몸에 비비고 그 후는 성인의 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예로니모가 사자와 같은 용기로써 교회를 위해 투쟁하고,


자신을 극기하고, 자기의 결점,악습과 같은 가시를 제거하는데


끊임없이 노력한 사실을 상징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St Jerome and St Augustine - CRIVELLI, Carlo


c. 1490.Tempera on wood, 187 x 72 cm.Gallerie dell’Accademia, Venice


 


불가타 Vulgata


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불가타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예로니모(Sophronius Eusebius Hieronymus)가 번역하였다.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였고,


신약성서는 이미 번역되어 있던 라틴어 역본(譯本)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해서 정정한 것인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 신빙성을 공인받았다.


1907년 성 비오 10세는 베네딕토회 수사들로 구성된 불가타 위원회를 로마에 설치하여


새로운 개정판 간행을 촉진하였다.


[참고문헌] S. Berger, Histoire de la Vulgate, 1893/


W.E. Plater and H.J. White, A Grammer of the Vulgate 1926.


-가톨릭대사전에서-


 



 


♬7.Rorate Caeli-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update 2004.9.30.


 


 


 


 


 


 


 


 


 


 


 


 


 


 


 


 


 


JEROME


 


Also Known As


Eusebius Hieronymus Sophronius; Girolamo; Hieronymus; Man of the Bible


Memorial


30 September


Profile


Born to a rich pagan family, he led a misspent youth. Studied in Rome. Lawyer. Converted in theory, and baptised in 365, he began his study of theology, and had a true conversion. Monk. Lived for years as a hermit in the Syrian deserts. Reported to have drawn a thorn from a lion’s paw; the animal stayed loyally at his side for years. Priest. Student of Saint Gregory of Nazianzen. Secretary to Pope Damasus who commissioned him to revise the Latin text of the Bible. The result of his 30 years of work was the Vulgate translation, which is still in use. Friend and teacher of Saint Paula, Saint Marcella, and Saint Eustochium, an association that led to so much gossip, Jerome left Rome to return to the desert solitude. Lived his last 34 years in the Holy Land as a semi-recluse. Wrote translations of Origen, histories, biographies, and much more. Doctor of the Church, Father of the Church. Since his own time, he has been associated in the popular mind with scrolls, writing, cataloging, translating, etc. This led to those who work in such fields taking him as their patron - a man who knew their lives and problems.


Born


347 at Strido, Dalmatia


Died


419; relics at the Basilica of Saint Mary Major in Rome


Patronage


archeologists, archivists, Bible scholars, librarians, libraries, schoolchildren, students, translators


 


Representation


cardinal’s hat; lion; aged monk in desert; aged monk with Bible


 


Woman’s Work In Bible Study And Translation, The Catholic World, July 1912


Spiritus Paraclitus, Pope Benedict XV


 


 


Readings


What Jerome is ignorant of, no man has ever known.


 


Saint Augu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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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remotest part of a wild and stony desert, burnt up with the heat of the scorching sun so that it frightens even the monks that inhabit it, I seemed to myself to be in the midst of the delights and crowds of Rome. In exile and prison to which for the fear of hell I had voluntarily condemned myself, I many times imagined myself witnessing the dancing of the Roman maidens as if I had been in the midst of them: in my cold body and in my parched-up flesh, which seemed dead before its death, passion able to live. Alone with this enemy, I threw myself in spirit at the feet of Jesus, watering them with my tears, and I tamed my flesh by fasting whole weeks. I am not ashamed to disclose my temptations, but I grieve that I am not now what I then was.


 


Saint Jerome’s letter to Saint Eustoch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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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asure of our advancement in the spiritual life should be taken from the progress we make in the virtue of mortification; for it should be held as certain that the greater violence we shall do ourselves in mortification, the greater advance we shall make in perfection.


 


Saint Je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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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ay in your book that while we live we are able to pray for each other, but afterwards when we have died, the prayer of no person for another can be heard.... But if the apostles and martyrs while still in the body can pray for others, at a time when they ought still be solicitous about themselves, how much more will they do so after their crowns, victories, and triumphs?


 


Jerome from Against Vigilantius, 406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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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nterpret as I should, following the command of Christ: "Search the Scriptures," and "Seek and you shall find." For if, as Paul says, Christ is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and if the man who does not know Scripture does not know the power and wisdom of God, then ignorance of Scriptures is ignorance of Christ.


 


No one should think that I mean to explain the entire subject matter of this great book of the prophet Isaiah in one brief sermon, since it contains all the mysteries of the lord. It prophesies that Emmanuel is to be born of a virgin and accomplish marvelous works and signs. It predicts his death, burial and resurrection from the dead as the Savior of all men. Whatever is proper to holy Scripture, whatever can be expressed in human language and understood by the human mind, is contained in the book of Isaiah.


 


-Jerome: from a commentary on Isa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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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Latin Fathers are represented in a group, Saint Jerome is sometimes in a cardinal’s dress and hat, although cardinals were not known until three centuries later than his time, but as the other Fathers held exalted positions in the Church, and were represented in ecclesiastical costumes, and as Saint Jerome held a dignified office in the court of Pope Dalmasius, it seemed fitting to picture him as a cardinal. The Venetian painters frequently represented him in a full scarlet robe, with a hood thrown over the head. When thus habited, his symbol was a church in his hand, emblematic of his importance to the universal Church. Saint Jerome is also seen as a penitent, or again, with a book and pen, attended by a lion. As a penitent, he is a wretched old man, scantily clothed, with a bald head and neglected beard, a most unattractive figure. When he is represented as translating the Scriptures, he is in a cell or a cave, clothed in a sombre coloured robe, and is writing, or gazing upward for inspiration. In a few instances, an angel is dictating to him.


 


- from Saints in Art, by Clara Irskine C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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