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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 8월 25일

성왕 루도비코 9세

San Ludovico (Luigi IX) Re di Francia

St. Louis IX, King of France

SAINT LOUIS—CONFESSOR, KING OF FRANCE

Born :25 April 1214 at Poissy, France

Died :25 August 1270 at Tunis, Algeria

Canonized :1297

Ludovico = variante di Clodoveo

Name Meaning :famous warrior

재속프란치스코회(Ordo Franciscanus Saecularis) 3회 주보성인   


 



 


프랑스 국왕 루도비코 9세(1215 - 1270)는 빠리 근처 뽜시 출생으로 12살에 왕이 되었다.


젊은 시절 프란치스칸 교사들로 부터 교육을 받았고 후에 3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모범적인 왕이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현명하고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성직자들의 궁핍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십자군 원정 중 성지에서 사라센인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석방되자


프랑스에 돌아와서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두 번째 십자군 원정 중에 병든 병사를 간호하다 전염된 역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프란치스코3회의 주보 성인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성 루도비코는 ’정의’로 대변되는 사람이다.


그는 국왕으로 재위하면서 뇌물을 금지했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 증인을 채택하는 법을 세웠으며 법정 기록을 남기도록 하였다.


한번은 어떤 백작이 자신의 영지에서 토끼를 사냥하였다는 죄목으로 세 아이들을 교수형 시켰다.


진노한 왕은 평민 출신 재판관들에게 백작을 심판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만큼 자비로운 마음도 컸던 루도비코는


사형 대신 벌금으로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 벌금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였다.


 


정의라는 라틴어는 어원적으로 ’올바른 것(justitia)’뜻하는 반면,


’심판’이라는 말은 ’법(jus)’과 ’말하다(dicere)’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법을 말하는’ 심판에는 자비나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정의는 법을 자구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 정신에 따라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정의 안에는 항상 자비로움이 있어야 한다.


루도비코가 심판자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www.ofmconv.or.kr)


 



 


중세의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찬왕으로 알려진 성 루도비코는


1214(1215)년 프랑스왕 루이 8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두터운 신심에서 나온 정의와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결혼하여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고 친히 그들을 잘 길러냈다.


성 프란치스꼬 제3회에 입회하고 기도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탁월했다.


왕국을 다스릴 때 국민들의 평화와 물질적 진보만이 아니라 그들의 영신적 진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의 무덤을 자유로이 참배할 수 있도록 두 번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1270년 카르타고 근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왕이 되는 대관식에서 루도비코는


하느님이 도유하신 백성의 아버지, 평화의 왕으로 행동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다른 왕들도 물론 똑같은 맹세를 하지만


루도비코가 왕으로서의 의무를 신앙에 비추어 수행한 점이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이었다.


 


두 차례의 폭동을 겪은 후 그는 평화와 정의를 가져왔다.


루도비코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그의 어머니인 카스틸의 블랑쉬가 통치했다.


그는 19세 때 12세인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마르가리타의 건방지고 침착하지 못한 성질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사랑에 가득 찼다.


 


루도비코는 30세 때 십자군에 참전했다.


그의 군대는 나일강의 다미에타를 점령했으나 얼마 후 이질 때문에 허약해져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포위되어 마침내 포로가 되었다.


루도비코는 배상금과 함께 다미에타를 포기함으로써 군대를 석방시켰다.


그는 4년 동안 시라아에 머물렀다.


그는 십자군으로서도 칭송을 받았지만 더욱 큰 명성은


오히려 나라를 다스릴 때 드러나는 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그는 개혁 법안의 창시자로서 신하들에 대한 법규를 제정했다.


그는 신앙 증거의 시험 형태로 전쟁에 의해 시련을 겪었으며, 법정에서 성문화된 기록을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루도비코는 교황권을 항상 존중했지만 왕족의 이익도 수호했고


프리드리히 2세 황제를 파문하여 그를 공격하려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황제를 화해시켰다.


그는 병원을 짓고, 환자를 방문하고,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나환자를 돌보는 등 그의 백성을 위해 일했다.


(그는 성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3회원이었다.)


 



 


루도비코는 프랑스-영주와 읍민들,농부들 그리고 사제들, 기사들-를 그의 인격과 성덕의 힘으로 통일했다.


오랫동안 국가는 평화로웠으나 모슬렘이 시리아로 진격하게되자 평화는 깨졌다.


그는 1267년, 42세에 제2십자군을 이끌었다.


 


그가 이끌던 십자군은 루도비코의 형을 구하기 위해 튀니스로 향했다.


그의 군대는 한달 만에 질병으로 많은 사람을 잃었고 자기 자신도 이국 땅에서 44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27년 후에 시성되었다.


 



 


루도비코는 강한 의지와 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의 말은 매우 진실했고 행동에서는 용기가 뛰어났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점은 그가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


특히 주님의 비천한 양떼들에게 존경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백성을 위해 대성당,교회,도서관,병원,고아원을 세웠다.


그는 영주들을 정직하고 공정하게 다루었다.


그는 자기에게 생명과 가족과 조국을 주신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이 다른 사람을 대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대하기를 원했다.


 



 


루도비코는 매일 13명의 특별한 손님인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했으며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그의 궁전 가까이에서 식사를 제공받았다.


 


대림절과 사순절 동안에는 그에게 오는 모든이가 식사를 대접받았고,


루도비코 자신도 간혹 그들에게 봉사했다.


그는 통치 지역 전역에 걸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체계적으로 그들을 구제했다.


 



 


성 루도비꼬가 자기 아들에게 남긴 영적 유언에서


(Acta Sanctorum Augusti 5 [1868], 546)


 


의로운 왕이 이 지상을 진보시킨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무엇보다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아들아,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즉 온갖 대죄를 멀리해야 한다.


어떤 대죄를 범하기보다는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네게 시련이 닥쳐오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너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그것을 인내로이 견디어 내고,


그 시련은 네 유익을 위한 것이고 아마도 네가 그것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에게 어떤 좋은 선물을 베풀어 주신다면 주님께 겸손히 감사드리고,


헛된 영광이나 또는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해 그 선물이 너에게 더 해로운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주님께서 네게 주신 바로 그 선물을 가지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바치는 기도에 기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하여라.


그리고 교회 전례에 참여하는 동안 시선을 흩트리지 말고 잡담하지 말며


염경기도를 바칠 때나 묵상기도를 바칠 때나 경건히 주님께 기도하여라.


 


가난한 사람과 비참한 사람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네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돕고 위로해 주어라.


하느님께서 네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드려라.


그러면 한층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리라.


네 수하 사람들을 언제나 정의롭게 대하며 좌우 어느쪽으로건 기울어지지 말고 중도를 택하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못할 때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자 편에 있어라.


너의 모든 수하 사람들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들 가운데 평화와 정의가 깃들이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라.


 


우리 자모이신 로마 교회와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신 교황 성하께 공경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


네 왕국으로부터 온갖 죄악 특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와 이단을 몰아내는데 힘써야 한다.


지극히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강복을 너에게 내린다.


성삼위와 모든 성인들께서 너를 온갖 악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주께서 너에게 당신의 뜻을 이행할 은혜를 내려 주시어


네가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 드리며 현세 생활이 끝난 후


우리함께 그분을 뵙고 사랑하며 영원토록 찬미 바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아멘.


 



 


Scenes from the life of Saint Louis: king of France: (BNF, FR 2813) fol. 265


Grandes Chroniques de France .France, Paris, 14th Century. (220 x 145 mm; 75 x 70 mm)


 


13세기는 세도(世道)와 같이 인심이 퇴폐하고 신앙 도덕이 위기에 봉착한 한편,


하느님의 섭리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도미니코, 성녀 클라라 등


위대한 성인 성녀들을 배출하여 그 위기를 구원케 하신 때였다.


 


성 프란치스코가 창립한 제3회 회원들의 훌륭한 모범은 세상 사람들의 사기를 돋우었고,


그 감화력은 유럽 각국에 뻗쳤을 뿐 아니라 제왕의 궁전에 까지 미쳤다.


후에 프란치스코회의 보호자로서 추대를 받은 프랑스의 황제 성 루도비코는


아시시 성인의 청빈 및 사도적 열성에 감격하여 열심히 그 뒤를 따르기에 노력한 결과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된 분이다.


 



 


이 고귀한 신분인 성자는 1215년 4월 25일, 프랑스 포아시 궁저에서 루이 9세로 태어났다.


그가 후에 성인이 된 최초의 원인은 신심이 두터운 어머니 블랑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실로 그 어머니 블랑슈는 천성의 미인이요, 탁월한 재주와 그 위에 신앙과 성덕에 출중했으며,


그 아들 루도비코에게 어릴 때부터 경건한 생활의 길을 가르쳤다.


 


"나는 어떤 어머니에도 못지않게 너를 애정으로써 대한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주님의 마음을 거슬러 대죄를 범한다면


너는 내 앞에서 오히려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하며


부드러운 어린 마음속에 죄악을 두려워하는 정신을 깊이 박아 주었다.


그리고 루도비코는 이런 어머니의 교훈을 생전 잊지 않았다.


 


어머니 블랑슈는 종교 교육만으로 그치지 않고,


지육(知育) 체육(體育) 문무를 겸한 교육을 등한히 하지 않았다.


원체 다재(多才)인 루도비코는 하는것마다 안 되는 것이 없었으며, 어려운 라틴어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어,


이것으로써 그의 신학적 지식을 넓히는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방편으로 삼았다.


 


1226년, 부친 루이 8세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햇으므로,


어머니 블랑슈가 정권을 맡았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상파뉴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했으나,그녀의 현명함과 성덕으로 국가를 어려움에서 여러번 구출했다.


1234년에 왕자 루도비코가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문드의 딸인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자


어머니 블랑슈는 곧 정권을 아들에게 넘겼다.


 


루도비코는 자기의 약함과 왕위의 중책을 생각하여 구약 시대의 솔로몬 현왕과 같이


장수(長壽), 부유, 전승(戰勝)등을 탐구하지 않고,


오로지 국내에 선정을 베풀기 위해 칙서를 냄에 있어서도 성령의 지혜로 비춰 주시기를 청했다.


그러므로 그의 세대에는 과거나 미래에도 없을 선정이 베풀어졌으며,


국민 전부가 태평을 즐기게 되었고, 어디서든지 왕의 성덕을 구가(謳歌)하지 않은데가 없었다.


처음엔 신하들 가운데 임금의 나이 어림을 비웃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얼마 안되어 그들도 왕의 권위 앞에 굴복했다.


 



 


왕은 빈민 혹은 불행한 국민에 대해서는 한없는 동정을 베풀었고,


만일 어떤 고관이라도 이유없이 그들을 압박하든지 부정한 행위를 한 자에게 대하여는


추호도 용서함이 없이 처벌했다.


또 고리대금, 허식 및 겵 등 사회의 악을 배제하고 몸소 실천하여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주며 완덕의 생활을 장려했다.


 


기도는 보통 신앙인의 척도다.


루도비코가 기도하기를 즐겨한 것은 만민이 다 아는 바이다.


매일 두 대 혹은 세대의 미사에 참여하고 고해 신부와 더불어 성무 일도를 바치며


지금처럼 자주 영성체가 허락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도 그는 2개월에 한 번씩 꼭 영성체를 했다.


성체를 모시러 나올 대는 마치 주님의 대전에 대령하듯이 엄숙한 태도였으며,


천상의 만나를 받아 모시는 모습은,


마치 천사가 내려온 듯이 그이 경신(敬神)하는 마음이 얼굴에 뚜렷이 나타나 보였다 한다.


 



 


하루는 어떤 신하가 그의 신심을 비난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고 하자


왕은 "만일 내가 미사 참여가 아닌 사냥이나 노름으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면


귀관들은 나를 질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종교 문제라면 비난을 하니 실로 가소로운 일이 아닌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경건하고 독실한 루도비코인지라,


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 자연 외부에 나타났으며, 모두 미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도 신분에 적합치 않은 절제 금욕의 생활이며,


빈민 병약자에대한 자애심은 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성 프란치스코 제3회의 회원이 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는 성직자들을 깊이 존경하며 그들중에서 왕실 고문까지 선택했고,


프란치스코회의 수사들에게 대해서는 각별한 신뢰와 경의를 표명했다.


 



 


이러한 임금의 자선 미담을 두서넛 들어보자.


그는 매일 120명의 빈민에게 음식을 주었고 특히 사순절 동안에는 더욱 많은 빈민을 대접했으며,


손수 불쌍한 나병 환자의몸을 씻겨주고 이들을 친구로 삼기도 했다.


이러한 자비심은 국내에 뿐만 아니라 멀리 사라센 민족에게 노예가 되어있는 신자들에게까지 뼏쳐


그들의 석방을위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동 로마 황제 바르두인 2세는 루도비코의 성덕을 감탄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국보로서 보관하고 있던

예수의 가시관을 그에게 선물로 보내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루도비코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손수 그 성물을 받들어 모시고 행렬하며 이미 아름답게 꾸민 소성당에 안치했다.


 


그 후 왕은 중병에 걸렸으나 기적적으로 완치되어 이를 감사하는 뜻으로 사라센 인의 수중에 있는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을 일으키고, 1248년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했다.


처음에는 매우 순조롭게 연전 연승(連戰連勝)했으나 불행히도 악성 유행병이 만연하여 다수의 사병들이


사망했으므로  군의 사기는 상실되고 사라센 군에 패배하여 왕 자신도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요구하는 거액의 대가를 치르지 못하여 마침내는 생명의 위험에까지 직면했으나


인자하신 하느님의 안배로 간신히 그 대가를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 남은 장병을 모아 팔레스티나의 아콘에 가서 자기 홀로 성지(聖地)의 이곳 저곳을 순방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 블랑슈의 서거 비보를 받고 귀국했으나 그 사이 관리들의 풍기는 문란하고


탈세 등으로 사복을 채우고 백성들을 압박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그는 즉시 손을 대어 오리(汚吏)들을 엄벌에 처하며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사재(私財)를 털어 보상해 주었다.


 


그리고 십자군 유가족들의 위문 구호에 만전지책(萬全之策)을 강구하고


다수의 성직자들을 양성하며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유명한 소르본 대학을 창설했다.


 


루도비코 왕은 예전의 십자군의 대 실패를 잊지 못하고


1267년에는 파리에 신하 일동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성물과 가시관을 제시하며


뜨거운 눈물로써 일대 열변을 토하며 그들의 찬동을 얻어 십자군의 재기를 도모했다.


이리하여 그는 다시금 대군을 친솔(親率)하고 아프리카의 주니스에 상륙하게 되었으나,


뜻밖의 열병에 걸려 병석에 누운 지 6일만에 평소의 소원이던 지상의 성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하늘의 성지, 영원한 예루살렘으로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임종 때 그는 양손을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과 같이 벌리고,


"주여 나는 거룩한 당신 집에 들어가 주님의 성전에서 당신을 숭배하며,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나이다"하며 시편을 숨가쁘게 읊고나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2, 3개월 전에 사라센의 사자(使者)에게


"내가 당신의 황제에게 세례의 은혜를 줄 수만 있다면


나는 쇠사슬에 얽매어 사는 노예의 신세도 서슴지 않겠다’고 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더 위대한 생명을 희생한 것이다.


 


생전에 성인으로 존경을 받던 왕의 서거 비보가 전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그의 덕을 추모하며 자비로운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의 전구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당연 성인의 위에 오르게 되었고,


지금까지 둘도 없는 성왕으로서 그 이름이 청사에 남게 되었다.


 



 


1297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시성하였으며,


성인의 유해는 쌩 데니 수도원 성당(Abbey Church, Saint-Denis)에 안치 되었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가톨릭출판사)에서


 



 


St Louis of France and St Louis of Toulouse-SIMONE MARTINI


1317.Fresco, 215 x 185 cm.Cappella di San Martino,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성루도비코 주교 St.Louis of Toulouse(제1회)1274-1297:축일:8월19일.게시판132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예수성심성당(Sacre Coeur)-몽마르뜨(Montmartre)


 



 


예수성심성당 정면


 


가운데: 예수성심상


왼쪽: 성루도비코9세(축일:8월25일.재속프란치스코회 주보성인)가 왼손에 가시관을 들고 계신 기마상,


오른쪽: 잔다르크(축일:5월30일,3회원,프랑스의 수호셩녀)의 기마상.


 



 


♬가난함을 주소서.임석수작사,작곡


 



 


 


San Ludovico (Luigi IX) Re di Francia

25 agosto - Memoria Facoltativa 

Poissy, 25 aprile 1215 - Tunisi, 25 agosto 1270


Luigi IX, sovrano di Francia, nacque il 25 aprile 1215 in Poissy. Incoronato re di Francia, Luigi si assunse il compito, davanti a Dio e agli uomini, di diffondere il Vangelo. Nell'anno 1244 fu sorpreso da una fortissima febbre. Guarito, volle di persona guidare una crociata per la liberazione della Terra Santa. Sbarcato in Egitto, presso la città di Damietta, attaccò con successo i Saraceni. Ma una terribile pestilenza decimò l'esercito crociato, colpendo lo stesso re. Assalito nuovamente dai Turchi, venne sconfitto e fatto prigioniero. Dopo essere stato rilasciato, proseguì come pellegrino per la Terra Santa, dove compì numerose opere di bene. Tornato in Francia, governò con giustizia e cristiana pietà, fondando la Sorbona e preparando una nuova crociata. Ma a Tunisi una nuova epidemia colpì l'esercito. Luigi IX, sentendosi morire, si fece adagiare con le braccia incrociate sopra un letto coperto di cenere e cilicio, dove spirò. Era il 25 agosto del 1270. (Avvenire)


Patronato:Re, Ordine Francescano Secolare

Etimologia: Ludovico = variante di Clodoveo

Emblema: Corona, Globo

 

S. Luigi IX, re di Francia, nacque il 25 aprile 1215 in Poissy, dove ricevette anche il Battesimo. Ebbe per genitori Luigi VIII e la regina Bianca di Castiglia, donna di grande pietà e virtù.

A questo giovane principe la mamma procurò di ispirare fin dalla prima infanzia un singolare amore alla virtù e un grande orrore per il peccato, ripetendogli spesso quelle celebri parole: “Figliolo mio, vorrei piuttosto vederti morto, anzichè macchiato di un sol peccato mortale e in disgrazia di Dio”. Questa massima fece così grande impressione sul cuore di Luigi che se ne ricordò per tutta la sua vita.

Giunto alla maggiore età, venne consacrato e coronato re di Francia e Luigi riguardò poi sempre la sua consacrazione non come una semplice cerimonia, ma come un impegno e un obbligo che egli assumeva davanti a Dio e agli uomini di far regnare Gesù Cristo in tutti i suoi stati.

Gluidato da maestri dotati di pietà e di scienza, Luigi arrivò alla giovinezza così serio e dedito ai suoi doveri, così pio e virtuoso, che pareva immune da ogni passione. Semplice e modesto curava di conciliarsi il rispetto del popolo non tanto con il fasto esteriore, quanto con le opere buone e con un buon governo.

Per riempirsi la mente e il cuore di massime sante e di elevati sentimenti egli leggeva continuamente la Sacra Scrittura e le opere dei Santi Padri e ne consigliava la lettura anche ai suoi cortigiani.

In lui il valore si congiungeva alla pietà, senza nulla perdere del suo splendore.

Nell'anno 1244 fu sorpreso da un’ardentissima febbre per cui tutto il popolo, dolente, offrì a Dio fervide preghiere, ottenendone la guarigione. Guarito, volle di persona guidare una crociata per la liberazione della Terra Santa.

Sbarcato in Egitto, presso la città di Damietta, attaccò i Saraceni e li vinse: ma iniziata la marcia verso l’interno, una terribile pestilenza decimò l'esercito crociato e colpì lo stesso sovrano. Assalito nuovamente dai Turchi, venne facilmente sconfitto e fatto prigioniero.

Venuto a patti con il vincitore, potè liberare gran parte dei suoi soldati, soccorrere i feriti e proseguire come pellegrino per la Terra Santa. Qui mise mano a opere di cristiana e regale pietà che però dovette interrompere per far ritorno in Francia, essendogli in questo frattempo morta la madre. Si occupò del riordinamento del regno, e governò con somma giustizia e cristiana pietà. Abolì il duello giudiziario, fondò la Sorbona, la Santa Cappella, e si preparò a una nuova crociata.

Ma a Tunisi una nuova epidemia colpì l’esercito e lo stesso re, sentendosi morire, domandò gli ultimi Sacramenti. Fattosi poi adagiare sopra un letto coperto di cenere e cilicio, con le braccia incrociate sul petto, spirò pronunziando le parole: “Entrerò nella tua casa, o Signore, ti adorerò nel tuo tempio santo e glorificherò il tuo nome”. Era il 25 agosto del 1270.


Autore: Antonio Galuz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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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1-Feb-2001

Letto da 5465 persone

 


 




Louis IX

 

Also known as

Louis Capet

Memorial

25 August; formerly 24 August

Profile

Son of King Louis VIII and Blanche of Castile. King of France at age eleven; his mother ruled as regent until he reached 22, and he reigned for 44 years. He made numerous judicial and legislative reforms. Promoted Christianity in France; established religious foundations, aided mendicant orders, propagated synodal decrees of the Church, built leper hospitals, and collected relics. Married Marguerite of Provence at age 19, and father of eleven. Supported Pope Innocent IV in war against Emperor Frederick II of Germany. Franciscan tertiary. Led two Crusades and died on one.

Born

25 April 1214 at Poissy, France

Died

25 August 1270 at Tunis, Algeria of natural causes; relics in the house at Saint Denis, Paris, France; destroyed in 1793 during the French Revolution

Canonized

1297

Name Meaning

famous warrior

Patronage

barbers; Blois, France; builders; button makers; Carthage, Tunisia; construction workers; Crusaders; death of children; difficult marriages; distillers; embroiderers; French monarchs; grooms; haberdashers; hairdressers; hair stylists; kings; La Rochelle, France; masons; needle workers; city of New Orleans, Louisiana Oran, Algeria; parenthood; parents of large families; passementiers; prisoners; Saint-Louis, Haut-Rhin, France; archdiocese of Saint Louis, Missouri; city of Saint Louis, Missouri; sculptors; sick people; soldiers; stone masons; stonecutters; tertiaries; Versailles, France

Representation

crown of thorns; king holding a cross king holding a crown of thorns; nails


Readings

In order to avoid discord, never contradict anyone except in case of sin or some danger to a neighbor; and when necessary to contradict others, do it with tact and not with temper.


Saint Lou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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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rosperity, give thanks to God with humility and fear lest by pride you abuse God's benefits and so offend him.


Saint Louis 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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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dearest son, my first instruction is that you should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all your strength. Without this there is no salvation. Keep yourself, my son, from everything that you know displeases God, that is to say, from every mortal sin. You should permit yourself to be tormented by every kind of martyrdom before you would allow yourself to commit a mortal sin.


If the Lord has permitted you to have some trial, bear it willingly and with gratitude, considering that it has happened for your good and that perhaps you well deserved it. If the Lord bestows upon you any kind of prosperity, thank him humbly and see that you become no worse for it, either though vain pride or anything else, because you ought not to oppose God or offend him in the matter of his gifts.


Be kindhearted to the poor, the unfortunate and the afflicted. Give them as much help and consolation oas you can. Thank God for all the benefits he has bestowed upon you, that you may be worthy to receive greater. Always side with the poor rather than with the rich, until you are certain of the truth.


Be devout and obedient to our mother the Church of Rome and the Supreme Pontiff as your spiritual father.


In conclusion, dearest son, I give you every blessing that a loving father can give a sons. May the three Persons of the Holy Trinity and all the saints protect you from every evil. And may the Lord give you the grace to do his will so that he may be served and honored through you, that in the next life we may together come to see him, love him and praise him unceasingly. Amen.


from a spiritual testament by King Saint Louis IX to his son


 


St. Louis IX

King of France, son of Louis VIII and Blanche of Castile, born at Poissy, 25 April, 1215; died near Tunis, 25 August, 1270.


He was eleven years of age when the death of Louis VIII made him king, and nineteen when he married Marguerite of Provence by whom he had eleven children. The regency of Blanche of Castile (1226-1234) was marked by the victorious struggle of the Crown against Raymond VII in Languedoc, against Pierre Mauclerc in Brittany, against Philip Hurepel in the Ile de France, and by indecisive combats against Henry III of England. In this period of disturbances the queen was powerfully supported by the legate Frangipani. Accredited to Louis VIII by Honorius III as early as 1225, Frangipani won over to the French cause the sympathies of Gregory IX, who was inclined to listen to Henry III, and through his intervention it was decreed that all the chapters of the dioceses should pay to Blanche of Castile tithes for the southern crusade. It was the legate who received the submission of Raymond VII, Count of Languedoc, at Paris, in front of Notre-Dame, and this submission put an end to the Albigensian war and prepared the union of the southern provinces to France by the Treaty of Paris (April 1229). The influence of Blanche de Castile over the government extended far beyond St. Louis's minority. Even later, in public business and when ambassadors were officially received, she appeared at his side. She died in 1253.


In the first years of the king's personal government, the Crown had to combat a fresh rebellion against feudalism, led by the Count de la Marche, in league with Henry III. St. Louis's victory over this coalition at Taillebourg, 1242, was followed by the Peace of Bordeaux which annexed to the French realm a part of Saintonge.


It was one of St. Louis's chief characteristics to carry on abreast his administration as national sovereign and the performance of his duties towards Christendom; and taking advantage of the respite which the Peace of Bordeaux afforded, he turned his thoughts towards a crusade. Stricken down with a fierce malady in 1244, he resolved to take the cross when news came that Turcomans had defeated the Christians and the Moslems and invaded Jerusalem. (On the two crusades of St. Louis [1248-1249 and 1270] see CRUSADES.) Between the two crusades he opened negotiations with Henry III, which he thought would prevent new conflicts between France and England. The Treaty of Paris (28 May, 1258) which St. Louis concluded with the King of England after five years' parley, has been very much discussed. By this treaty St. Louis gave Henry III all the fiefs and domains belonging to the King of France in the Dioceses of Limoges, Cahors, and Périgueux; and in the event of Alphonsus of Poitiers dying without issue, Saintonge and Agenais would escheat to Henry III. On the other hand Henry III renounced his claims to Normandy, Anjou, Touraine, Maine, Poitou, and promised to do homage for the Duchy of Guyenne. It was generally considered and Joinville voiced the opinion of the people, that St. Louis made too many territorial concessions to Henry III; and many historians held that if, on the contrary, St. Louis had carried the war against Henry III further, the Hundred Years War would have been averted. But St. Louis considered that by making the Duchy of Guyenne a fief of the Crown of France he was gaining a moral advantage; and it is an undoubted fact that the Treaty of Paris, was as displeasing to the English as it was to the French. In 1263, St. Louis was chosen as arbitrator in a difference which separated Henry III and the English barons: by the Dit d'Amiens (24 January, 1264) he declared himself for Henry III against the barons, and annulled the Provisions of Oxford, by which the barons had attempted to restrict the authority of the king. It was also in the period between the two crusades that St. Louis, by the Treaty of Corbeil, imposed upon the King of Aragon the abandonment of his claims to all the fiefs in Languedoc excepting Montpellier, and the surrender of his rights to Provence (11 May, 1258). Treaties and arbitrations prove St. Louis to have been above all a lover of peace, a king who desired not only to put an end to conflicts, but also to remove the causes for fresh wars, and this spirit of peace rested upon the Christian conception.


St. Louis's relations with the Church of France and the papal Court have excited widely divergent interpretations and opinions. However, all historians agree that St. Louis and the successive popes united to protect the clergy of France from the encroachments or molestations of the barons and royal officers. It is equally recognized that during the absence of St. Louis at the crusade, Blanche of Castile protected the clergy in 1251 from the plunder and ill-treatment of a mysterious old maurauder called the "Hungarian Master" who was followed by a mob of armed men — called the "Pastoureaux." The "Hungarian Master" who was said to be in league with the Moslems died in an engagement near Villaneuve and the entire band pursued in every direction was dispersed and annihilated.


But did St. Louis take measures also to defend the independence of the clergy against the papacy? A number of historians once claimed he did. They attributed to St. Louis a certain "pragmatic sanction" of March 1269, prohibiting irregular collations of ecclesiastical benefices, prohibiting simony, and interdicting the tributes which the papal Court received from the French clergy. The Gallicans of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often made use of this measure against the Holy See; the truth is that it was a forgery fabricated in the fourteenth century by juris-consults desirous of giving to the Pragmatic Sanction of Charles VII a precedent worthy of respect. This so-called pragmatic of Louis IX is presented as a royal decree for the reformation of the Church; never would St. Louis thus have taken upon himself the right to proceed authoritatively with this reformation. When in 1246, a great number of barons from the north and the west leagued against the clergy whom they accused of amassing too great wealth and of encroaching upon their rights, Innocent IV called upon Louis to dissolve this league; how the king acted in the matter is not definitely known. On 2 May, 1247, when the Bishops of Soissons and of Troyes, the archdeacon of Tours, and the provost of the cathedral of Rouen, despatched to the pope a remonstrance against his taxations, his preferment of Italians in the distribution of benefices, against the conflicts between papal jurisdiction and the jurisdiction of the ordinaries, Marshal Ferri Pasté seconded their complaints in the name of St. Louis. Shortly after, these complaints were reiterated and detailed in a lengthy memorandum, the text of which has been preserved by Mathieu Paris, the historian. It is not known whether St. Louis affixed his signature to it, but in any case, this document was simply a request asking for the suppression of the abuses, with no pretensions to laying down principles of public right, as was claimed by the Pragmatic Sanction.


Documents prove that St. Louis did not lend an ear to the grievances of his clergy against the emissaries of Urban IV and Clement IV; he even allowed Clement IV to generalize a custom in 1265 according to which the benefices the titularies of which died while sojourning in Rome, should be disposed of by the pope. Docile to the decrees of the Lateran Council (1215), according to which kings were not to tax the churches of their realm without authority from the pope, St. Louis claimed and obtained from successive popes, in view of the crusade, the right to levy quite heavy taxes from the clergy. It is again this fundamental idea of the crusade, ever present in St. Louis's thoughts that prompted his attitude generally in the struggle between the empire and the pope. While the Emperor Frederick II and the successive popes sought and contended for France's support, St. Louis's attitude was at once decided and reserved. On the one hand he did not accept for his brother Robert of Artois, the imperial crown offered him by Gregory IX in 1240. In his correspondence with Frederick he continued to treat him as a sovereign, even after Frederick had been excommunicated and declared dispossessed of his realms by Innocent IV at the Council of Lyons, 17 July, 1245. But on the other hand, in 1251, the king compelled Frederick to release the French archbishops taken prisoners by the Pisans, the emperor's auxiliaries, when on their way in a Genoese fleet to attend a general council at Rome. In 1245, he conferred at length, at Cluny, with Innocent IV who had taken refuge in Lyons in December, 1244, to escape the threats of the emperor, and it was at this meeting that the papal dispensation for the marriage of Charles Anjou, brother of Louis IX, to Beatrix, heiress of Provençe was granted and it was then that Louis IX and Blanche of Castile promised Innocent IV their support. Finally, when in 1247 Frederick II took steps to capture Innocent IV at Lyons, the measures Louis took to defend the pope were one of the reasons which caused the emperor to withdraw. St. Louis looked upon every act of hostility from either power as an obstacle to accomplishing the crusade. In the quarrel over investitures, the king kept on friendly terms with both, not allowing the emperor to harass the pope and never exciting the pope against the emperor. In 1262 when Urban offered St. Louis, the Kingdom of Sicily, a fief of the Apostolic See, for one of his sons, St. Louis refused it, through consideration for the Swabian dynasty then reigning; but when Charles of Anjou accepted Urban IV's offer and went to conquer the Kingdom of Sicily, St. Louis allowed the bravest knights of France to join the expedition which destroyed the power of the Hohenstaufens in Sicily. The king hoped, doubtless, that the possession of Sicily by Charles of Anjou would be advantageous to the crusade.


St. Louis led an exemplary life, bearing constantly in mind his mother's words: "I would rather see you dead at my feet than guilty of a mortal sin." His biographers have told us of the long hours he spent in prayer, fasting, and penance, without the knowlege of his subjects. The French king was a great lover of justice. French fancy still pictures him delivering judgements under the oak of Vincennes. It was during his reign that the "court of the king" (curia regis) was organized into a regular court of justice, having competent experts, and judicial commissions acting at regular periods. These commissions were called parlements and the history of the "Dit d'Amiens" proves that entire Christendom willingly looked upon him as an international judiciary. It is an error, however, to represent him as a great legislator; the document known as "Etablissements de St. Louis" was not a code drawn up by order of the king, but merely a collection of customs, written out before 1273 by a jurist who set forth in this book the customs of Orléans, Anjou, and Maine, to which he added a few ordinances of St. Louis.


St. Louis was a patron of architecture. The Sainte Chappelle, an architectural gem, was constructed in his reign, and it was under his patronage that Robert of Sorbonne founded the "Collège de la Sorbonne," which became the seat of the theological faculty of Paris.


He was renowned for his charity. The peace and blessings of the realm come to us through the poor he would say. Beggars were fed from his table, he ate their leavings, washed their feet, ministered to the wants of the lepers, and daily fed over one hundred poor. He founded many hospitals and houses: the House of the Felles-Dieu for reformed prostitutes; the Quinze-Vingt for 300 blind men (1254), hospitals at Pontoise, Vernon, Compiégne.


The Enseignements (written instructions) which he left to his son Philip and to his daughter Isabel, the discourses preserved by the witnesses at judicial investigations preparatory to his canonization and Joinville's anecdotes show St. Louis to have been a man of sound common sense, possessing indefatigable energy, graciously kind and of playful humour, and constantly guarding against the temptation to be imperious. The caricature made of him by the envoy of the Count of Gueldre: "worthless devotee, hypocritical king" was very far from the truth. On the contrary, St. Louis, through his personal qualities as well as his saintliness, increased for many centuries the prestige of the French monarchy (see FRANCE). St. Louis's canonization was proclaimed at Orvieto in 1297, by Boniface VIII. Of the inquiries in view of canonization, carried on from 1273 till 1297, we have only fragmentary reports published by Delaborde ("Mémoires de la société de l'histoire de Paris et de l'Ilea de France," XXIII, 1896) and a series of extracts compiled by Guillaume de St. Pathus, Queen Marguerite's confessor, under the title of "Vie Monseigneur Saint Loys" (Paris, 1899).


 




Saint Louis, King of France 1214 - 1270

Louis IX, Saint and King, was the oldest son of King Louis VIII and Queen Blanche of France. Like every other royal prince, he had private tutors to teach him the arts and sciences, and the grace and dignity that were expected of every heir to the royal throne. But his devoted mother Blanche, reserved to herself the teaching of her first-born, a deep respect and reverence for everything associated with his religion. She did her work well. She used to say to him: "I love you, my dear son, with as much love as any mother can love her child; but I would rather see you dead at my feet than that you should offend God by mortal sin." The young prince never forgot those serious words of his saintly mother.

 

At the age of twelve, he was crowned King of France, and under the capable and strict regency of his mother, he became a beloved ruler of his people. His judgments were tempered with mercy and he grew to see the wise hand of God directing him in all his kingly responsibilities.

He bought back the Crown of Thorns from the Eastern Emperor in Constantinople and built a magnificent shrine for it in Paris. During his whole life, he had a great devotion to the Crown of Thorns and he is often represented in art as kneeling in humble meditation before his own royal crown beside the Crown of Thorns of his heavenly King.


It was the dominating dream of his life to win back the Holy Land from the Saracens and to open up for Christian pilgrims the shrines and places that were so intimately associated with the life and death of his beloved Redeemer. He led two crusades, but both ended in failure. He was taken prisoner in 1250 and his armies were scattered to end his first crusade. The second crusade ended in greater tragedy. On July 1, 1270, he sailed for Tunis in North Africa. Dysentery and other diseases broke out among the Crusaders on the African Coast, and Louis and his second son were among the victims. With the words, "Into Thy hands I commend my spirit" on his lips, he gave up his soul to God on August 25, 1270. A weeping nation received his bones and heart, and kept them enshrined in the Abbey of St. Dennis until they were scattered in the frenzy of the French Revolution.


A grateful Church recognized him as a King and a Crusader for God. He was canonized 27 years after his death and his feast is August 25.


His descendents occupied the throne of France for five hundred years, his name is held in veneration, and churches and shrines have been dedicated to his memory. It was only natural that when Father Augustine Verot, a loyal son of France and pastor of St. Paul's Church in Ellicott City, planned to build a mission chapel in Clarksville that he would choose as its patron St. Louis th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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