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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자료게시판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에 관하여

조회 수 9886 추천 수 0 2009.06.11 17:30:19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탄신 100주년 기념미사]
(1909.6.9 - 2009.6.9 (사제서품 1936)

*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약력*


1909년 6월 9일생 (부: 이 가브리엘, 모: 김 수산나의 차남)

1923. 9. 16. 용산신학교 입학

1930. 9. 14. 용산 성심대 신학철학과 입학

1936. 3. 28. 사제서품

1936. 4. 9. 풍수원 교회 보좌 피명

1937. 9. 28. 재속프란치스코회(3회) 입회 (수도명 안토니오)

1939. 7. 25. 강원도 양양 교회주임

1950. 6. 24. 6.25 전쟁시 공산당에게 체포당함.

1950. 10. 8. 원산 교도소 뒷산 방공호에서 순교

1950. 10. 21. 원산 본당 사제관 뒷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의 생애

이광재 신부님은 1909년 6월 9일 강원도 이천군 냉골에서 태어나, 1923년 3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으셨다. 풍수원 성당 보좌로 3년을 지내신 후 1939년 7월 25일에 양양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셨다. 부임후 몇 년은 일제의 탄압시기였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면서 38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도 빼앗겨 가정집에서 미사를 드렸고, 소련군이 골롬반 선교회 신부님들을 추방함으로서 북쪽의 성당들이 비어 있어 이광재 신부님의 사목 활동범위는 평강, 원산까지 이르렀다.

신부님은 함흥교구와 연길에 있던 수녀원의 폐쇄로 피난하는 수녀들과 덕원 신학교의 신학생, 신부님들과 많은 신자들이 38선을 넘도록 도와 주셨다. (7~8회) 양양 성당은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이므로 38선을 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신부님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 공소와 신자 가정을 다니시며 몰래 성사와 미사집전을 하셨다. 신자들도 위험을 느껴 피신하라고 당부 드렸지만 신부님은 “내가 돌보아야 할 신자가 38선 이북에 하나도 없을 때 가겠다”며 거절하셨다.

1950년 5월 초순경 평강본당 백응만 신부님이 피랍되자 이광재 신부님은 그곳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성모 승천 축일 전에 돌아오신다 하면서 북으로 떠나신 후 평강에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 특별 감방에 3개월간 수감되셨다.

유엔군의 진군으로 후퇴하던 공산당은 10월 8일 콩비지를 특별 저녁식사로 제공한 후 밤 11시에 포로들을 한데 묶어서 산중턱 방공호로 끌고 갔다. 방공호 속에는 촛불과 총을 든 공산당들이 있었고, 그들의 발 밑에는 방금 숨진 포로들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신부님과 포로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시체 위에 엎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바로 총탄이 쏟아졌다.

사람들이 “살려 달라! 물을 달라!”고 소리치는 가운데 응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가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제가 물을 드리겠어요” 하는 소리였다. 자신도 총을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이광재 신부님의 목소리였다고, 같이 엎드렸으나 총을 맞지 않고 살아나온 한준명 목사와 평강 고교 학생이었던 권혁기 준이 증언했다. 이광재 신부님의 마지막을 본 목사님은 “가톨릭 신부는 위대하다”고 증언했다.

유엔군이 북진하자 방공호에서 시체를 찾은 미 해병대 월거 신부와 머디 신부가 이광재 신부와 김봉식 신부의 장례 미사를 드린 후 원산 성당 뒷산 성직자묘지에 안장했다.

이 신부님은 41세의 짧은 생애동안 시대의 어려움과 가난함과 자신의 열등한 외모와 사제로서 언변이 부족한 어려움을 안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으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위해 자기를 내놓은 착한 목자의 표상이었다. (기념미사 안내책자에서)


후기(국가회계 김경희 데레사님 글을 펌)


이 기념미사에서 우리는 의미있고 중요한 분들을 만났다.

이광재 신부님을 시신을 수습하여 입관하여 장례를 치르신 유동관 베드로 (87세) 할아버님을
만났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셨으나 아직도 그때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여 궁금해 하는 우리들에게 자세한 말씀을 해 주시면서, 그때 신부님께서 가정집으로 다니시면서 미사드리는 그 고생중에 따뜻하게 차 한잔이라도 대접해 드리지 못했음을 한탄하셨다. 할아버님은 지금 인구공소에서 관리장으로 일하고 계시다고 하면서, 당신 마음은 아무것도 바라는게 없는 ‘제로’ 라고 하시면서, 하느님께 보채지 말라고 나를 들여다 보시는 듯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시 신부님을 도와 38선을 8번을 드나들면서 교우들을 피신시키셨던 김경태 젤마나 할머님을 만날 수 있었다..지금은 고성군 ‘마태오 요양원’에 기거 하신다.

또 한분 이광재 신부님으로부터 어릴때 귀여움을 받고 자라난, 지금까지 독신으로 사시면서 기도생활에만 열중하시는 이영자 아뽈로니아 자매님을 만났다. (춘천교구 신부님의 누님)

이광재 신부님의 기념관의 책임자로서 신부님의 일생과 유품에 대해 시간 가는줄 모르고
열변을 토하시던 형제님이 계셨는데, 양양본당 김 두한 마지아 형제님(011-364-0373)

이광재 신부님의 자료를 찾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속프란치스코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지금 속초형제회 입회2반에 교육중 이시다.

이 모든 일을 허락하신 하느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차계남

2021.11.06 07:59:35
*.245.93.149

프란치스칸은 프란치스코의 삶 따르듯 살아야한다는 그 길 저도 가보도록 애쓰겠습니다.
예수님께 보채지 않는 삶ᆢᆢ

마리아

2009.08.27 21:32:29
*.16.93.93

감사함니다.역사의 어르신으뵈게되어 책에서 한번 읽기는하였지만 이리 자세하게는 처음인것같군요. 양성에 만은도음주시매 다시감사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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