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며,,,10
개업을 하다
중간 상인을 직업으로 한 2년 하다 보니 시야가 좀 넓어져 큰 시장 서울로 뛰어들어 다량의 건과를 취급하게 된다. 그 때 당시 나는 주로 고산 5일시장에서 그 유명한 씨 없는 고산 곳감과 대추를, 순창과 담양에서는 알밤 등을 직접 농민들로부터 싼 값에 다량으로 구입하여 전주에서 판매하기 보다는 대한통운 화물 편으로 서울 종로5가[당시는 종로5가에 위탁상회가 많이 있었음]로 보내어 이득을 취하는 장사로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 다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건너가 밀감을 구입하여 서울과 전주로 보내는 작업도 하게 된다. 그때 당시는 밀감이 제주에서도 남쪽 서귀포 부근에서만 생산 되는 희귀한 과일로 일명 대학나무라고 밀감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아들이나 딸들을 대학을 보냈을 있을 만큼 수익성이 아주 높고 귀할 때였다. 나는 가을이면 제주도에 가기위해 광주에서 처음으로 30여석의 프로펠라 비행기를 타보았던 경험도 있다. 5·16혁명이후 새마을 운동이 활성화 되면서 제주도 전체에 많은 밀감나무를 심게 되어 요즘은 과잉생산으로 제주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과는 아주 대조적인 시기였다.
그런대로 몇 년 동안 장시가 잘 되는 덕분에 그동안 우리 집은 전주시내에서만 해도 태평동, 고사동, 다가동, 진북동 등등 여러 지역으로 남의 집의 문 칸 방이나 셋방살이를 전전하였는데 오랜만에 서부완산동 다가공원 옆 좁은 뒷골목에 세칸짜리 조그마한 초가집을 내가 구입하게 된다.
당시 전주에서 제일 큰 OOO한약방의 조카 되는 나의 친구는 녹용을 밀수입하여 각 한약방에다가 녹용을 팔아 짭짤한 재미를 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브라질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녹용을 선박 편으로 여수나 목포 등지로 밀수입은 쉬운 편이었으나 국내에서는 워낙 검사가 심해 녹용을 국내에서 유통시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때였다. 그 친구의 부탁으로 여수나 목포에서 구입해오는 해산물꾸러미에 녹용을 몰래 넣어 위장 포장하여 전주로 운반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을 하게도 되었다. 녹용을 밀수입하는 일에 껴들다 보니, 본업인 농수산물 중간상인의 역할로 생기는 수입보다도 후자 쪽이 훨씬 수입이 많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 화동상회라는 남의 상점에서 일을 하고 계실 때였다. 그때 당시만 해도 상점 하나의 가격이 만만치 않을 때었다. 하루는 그 친구와 상의를 하여 그 친구가 다소투자를 하여 남부시장에 가계를 하나 나의 이름으로 구입하여 서울상회라는 명칭으로 건어물위탁판매 상회를 개업하게 된다. 외형적으로는 건어물 위탁판매 상회이면서 그 내면에는 가계를 구입하는데 도움을 준 친구와 함께 녹용을 밀수입하여 판매하는 이중 역할로 수입이 짭짤한, 결과가 주어졌다. 그로 인해 뜬금없이 젊은 나이에 서울상회라는 상점에 사장이 되는 행운도 뒤따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