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며,,,5
육이오 동란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짖밟아 오던 날을 ~~~
1950년 새벽에 북한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기습적으로 침공함으로서 일어난 전쟁이 3년 뒤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선이 확정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휴전상태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육이오 동란이 일어 난지도 올 해로 어언 60년이 되었다. 당시에 육이오 전쟁으로 서울을 비롯해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시골로 피난을 갔었는데 우리 집은 역으로 시골에서 전주로 피난을 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에 우리 아버지가 지새마을 이장 직을 맡고 있었는데, 산속에 숨어 지내던 빨치산들이 밤이면 나타나 먹을거리를 착취하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지어 전라북도의 도청소재지인 전주로 우리 온가족이 피난을 가게 되었다. 전주시 태평동에 전매청 뒷골목에 두 칸 방의 셋집에서 8명의 가족이 살면서 입에 풀질을 할 수가 없어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고 봄이면 들녘에 나가 논에서 자라나는 자운영 풀을 뜯어다 먹기도 하였으며, 안근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등에 짊어지고 와서 방에 군불을 때고 살았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다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그때 당시 구호물자로 들어온 안남미 쌀이라고 가늘고 길쭉한 쌀로 밥을 지어 입으로 불으면 날아갈 것 같이 진기와 영양가가 없는 외국에서 원조 받은 쌀도 무척 귀하게 여길 때였다.
식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아버지는 전매청에 노동직으로 취직을 하였고 계모님은 전매청에서 직원들이 퇴근하면서 몰래 훔쳐 나오는 담배를 싸구려로사서 각 지방으로 팔러다는 일을 하여 그런대로 생활을 꾸려 나가게 되었다. 당시 우리 형은 안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왔기에 전주공고에 입학을 하고 나는 안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왔기에 집에서 약 4k 떨어진 전주농고와 함께 외진 곳에 있는 전주동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논길 밭길 오솔길을 근 한 시간 걸어서 가야하는 먼 거리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그때 당시 나는 사춘기 에다가 그동안 싸이고 싸였던 많은 불만들의 비뚤어진 생각으로 좋지 않은 친구들과 사귐을 가짐으로 집에서는 학교에 간다고 책가방을 울러 메고 나와서는 학교는 가지 않고 도중에 3명의 친구들과 개울에서 가재나 고기를 잡거나 또는 못된 장난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녀온 것처럼 이중 생황을 몇 개월 하다 보니, 드디어 들통이 나서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하고 집에서는 쫓겨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오도가도 갈 데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내가 자라 난 시골 지새 마을에 아버지의 바로 밑에 동생인 작은아버지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지새 부락에서 몇 년을 지내다보니 뜻밖에도 누님을 만나는 기회도 주어졌다. 나의 나이가 19세가 되던 해에 막연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고민 고민 하던 끝에 서울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전주 까지 걸어와서 집에도 들리지 않고 무일푼으로 서울행 완행열차를 무임승차 하여 승무원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생전 처음 서울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는 서울역 앞과 남대문시장 부근에는 허름한 판자 집들이 즐비하였다. 당시 남대문시장노점에서는 메리아스를 비롯하여 허름한 상품들을 길거리에 놓고 파는데, 한 사람이 ~골라잡고 천원~하고 크게 소리치면 따리라고 5-6명이 둘러싸고 있다가 지나가던 고객이 모여 들면 하나둘씩 메리아스를 사가지고 가는 시늉으로 고객들을 유인하는 호객 상행위가 판을 치고 있었는데 나는 그 틈에 끼어들어 몇 푼씩 받는 돈으로 입에 풀칠을 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남산에 올라가는 경사진 길목에서 아줌마들이 싸구려 음식을 파는 노점에서 비빔밥 점심을 먹는데 그 때가 한여름이라 느닷없이 소나기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어디 비를 피할 곳도 없고, 잠시 동안에 빗물이 비빔밥그릇에 흥건하게 고인 것을 배는 고프고 버릴 수가 없어서 그것을 먹어치운 기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