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삶을 뒤 돌아보며
나의 고향
~나에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내가 1939년도에 태어난 곳은 무진장 산골인 전북 진안군 안천면 신교리 지새 부락이다. ‘무진장’이란 말은 전라북도 무주군, 진안군, 장수군 이 세 개의 군을 합친 첫 머리 글자로써 세 개의 군 모두가 엄청나게 깊은 산골 오지마을들 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로 불리워 지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진안군 안천면 신교리 하면, 교정[구먹쟁이]과 지사[지새] 두 개의 마을을 말한다. 면소재지 안천으로 가는 자동차도로 한 길 가에 수 백 년 된 큰 정자나무가 있는 교정부락[구먹쟁]에는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구먹쟁이에서 동남쪽으로 동향면을 가는 오솔길로 약 3K정도 떨어진 참으로 구석진 오지산골인 지새 부락은 60여 가구로 아주 조그마한 시골 동네다. 동네마을 뒤로는 비탈진 커다란 대덕산을 옆에 끼고 있기에 농토가 논보다는 밭이 더 훨씬 많은 편이고, 동네 사람들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지만 주로 곰배정자 정[丁]씨 가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누구네 집에는 숟가락이 몇 개 인지도 서로 다 알정도로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동네이다.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상부상조하는가 하면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품 아시로 서로 일을 해주고 하는 아주 작은 공동체로써 친형제자매들과 같이 친교를 나누며 오붓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산골오지마을이다. 내가 어느 정도 철이 들고서 안 사실인데 우리 집안은 5대째 이곳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한 양반집 가문이다. 그 당시는 유교사상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게 되어 동네에서 머리가 하얀 노인네가[당시에 상놈] 나를 거리에서 만나면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라고 존대 말을 하며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한다. 그럴 때에 나는 어린 나이에도 몹시 어색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고 나의 머리에 각인되어있다.
그 당시에는 땅을 많이 소유한 부자가 일반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일 년에 얼마씩 소작료[도지]를 받아 소득을 챙기는 제도가 있을 때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안천면에서는 제일 큰 부자 집인 정[丁]씨 가문으로 데일 사위로 장가를 가시어 정씨 가문에 사위가 되면서 그 가문에서 소작료를 받아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게기가 되어 그 집에 재산을 가지고 해외 중국등지를 나돌아 다니시면서 바람을 피우시다가 그때 당시 북한 기생생출신인 노래를 아주 잘하는 여인[불식이 할머니]를 둘째 마누라로 데리고 귀향 하시어 지새부락 한 동네에서 두 집 살림을 하시는 통에 나의 친 할머니는 화병에 걸려 매일과 같이 머리에 흰 물수건을 두르고 누어서 괴로워 하셨던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때 나의 나이는 철이 들기 전 6-7세로 생각된다. 또 나의 기억에는 전혀 없는 내가 어린 네 살 어릴 때에 우리 아버지는 우리 2남 1녀[첫째 가 누님, 둘째가 형, 내가 막내]를 두고 우리 어머니가 몹쓸 병에 걸렸다고 강제로 쫓아내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철모르는 어린 나이에 생모님과 생이별을 하게 되어 고아아인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때 당시 10세였던 우리누님은 생모님을 따라가고, 바로 나의 위인 형[7세]은 고향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우리 아버지는 같은 동네에 살던 홀 어멈 남니[나에게는 서모]라는 여인과 막내[당시 4세]인 나만을 데리고 전주 노송동 전주북중학교 부근에 있는 병무청에서 근무하셨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식민지 이었던 왜정 때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이 되던 그해 폭격기 비행기가 하늘을 나르면서 폭격을 하면 일본사람들이 ‘구스게오 기이조’ [폭격을 하니 피신하라]라고 빨간 마이크를 손에 들고 크게 소리치던 소리가 지금도 나의 귀전을 맴돈다. 해방을 맞이한 그해 다시 우리는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고향인 진안군 안천면 지새 부락 바같 동네로 귀향하여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