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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부 !

조회 수 2078 추천 수 0 2008.06.10 15:59:07

+평화를 빕니다 !


프란치스코성인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들/공부 하면서*****
김영우(시몬) | 2007·06·30 12:30 | HIT : 130 | VOTE : 12 |


1. 프란치스칸 역사 연구와 자료
2. 프란치스코와 형제회의 기원(1)
3. 프란치수코와 형제회의 기원(2)
4. 프란치스코와 형제회의 기원(3)
5. 첫 번째 변화와 위기
6. 프란치스코 사후-1517년까지의 1회 역사(1)
7. 프란치스코 사후-1517년까지의 1회 역사(2)
8. 1517년 이후의 1회 역사
9. 2회의 역사(1)-글라라의 생애와 영성
10. 2회의 역사(2)
11. 3회와 정규 3회의 역사
12. 교회 안에서 프란치스칸 가족의 봉사
13. 성인들과 신비가들
14. 각종 현황과 한국의 프란치스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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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프란치스칸 역사 연구와 자료

1. 프란치스칸 역사 연구

프란치스칸 역사 뿐 아니라 역사연구는 왜 하고, 공부는 왜 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더욱 더 아니다. 역사연구는 과거적 현재를 탐구하는 것이다. 나의 지금과 지금의 나는 숱한 과거의 축적이요 집적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부모의 역사까지 축적되어 있고, 나에게 영향을 준 사건에 영향을 준 사건까지 축적되어 있다. 어렸을 적 친구들과 친구들과의 사연이 축적되어 있으며, 친구들의 가족사와 사건도 축적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적 현재를 연구함으로써 지금의 나 안에 축적되어 있는 존재들과 사건들이 왜, 어떻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게 되고 그런 것들은 왜 그런 영향을 그렇게 주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들로 어떻게 지금의 나를 형성하셨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칸 역사연구는 지금 나의 한 부분 또는 큰 부분이며,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프란치스칸 삶이 왜, 이런 영향을 주게 됐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이 프란치스칸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나를 형성하셨는지 깨닫게 된다.

역사 연구는 과거적 현재를 알게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미래적 현재를 잘 살아가기 위해 과거의 미래적 현재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배우게 된다. 프란치스코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의 미래를 하느님과 사람들과 함께 열어갔고, 그 후예들은 프란치스코의 삶을 그 상황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며 자기들의 미래적 현재를 살아갔는지를 배우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역사를 통 털어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2천 년대를 끝내가며 타임지가 설문조사한 것을 보면 2천 년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란치스코였다. 어떤 사람은 나와 똑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은 영향을 받는가 하면 같은 상황인데도 다른 영향을 받았음을 배울 것이고, 어떤 프란치스칸 후예는 나와 다른 상황에서 다른 영향을 받았음도 우리는 프란치스칸 역사연구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같은 프란치스코지만 각 사람과 각 상황에 따라 수많은 조합으로 영향을 주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프란치스코에 대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프란치스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우리의 연구는 이런 기록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 기록이 너무도 방대하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프란치스코에 대한 이해, 프란치스칸 이상과 정체성에 대한 이해, 프란치스칸이 세상과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해가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다. 기록의 선택과 그 해석에 따라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의 영향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 것이 바로 “프란치스칸 논쟁(Quaestio Franciscana)"이다.

프란치스칸 논쟁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프란치스칸 역사 연구의 흐름을 교회 역사학의 흐름 안에서 일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속한 저 중세 시대(1200-1600년)는 성인전의 기술이 시성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기 시작한다. 즉 누가 성인품에 오르게 되면 그 성인의 삶을 신자들이 본받아 실천하게 할 목적으로 바로 성인전을 쓰게 하는데 그래서 성인전의 이름이 대개 Legenda(전기), Specula(거울), Exempla(본보기) 식이다. 프란치스코나 안또니오나 글라라처럼 사후 바로 시성되었을 경우는 그 전기의 역사적 신빙성이 크지만 보나벤뚜라처럼 늦게 시성되었을 경우 그만큼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진다.

1600년대 이후 Bollandist들이 등장하는데 성인들에 대한 역사적, 과학적 연구와 비판이 시작된다. 앞의 고 중세나 저 중세의 전기는 성인들을 본보기 삼아 신자들이 성인들의 덕을 실천하게 하려는 목적이 강했기에 영성적이고, 경우에 따라서(특히 고 중세의 전기들) 상상이나 추리 등으로 지어낸 얘기들도 있었는데, Bollandist들은 이런 역사기술을 배척하고 역사적, 과학적으로 역사를 접근하였다. 이 연구는 예수회원들이 주축을 이루었기에 많은 프란치스칸 편집본과 사본 연구가 예수회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프란치스칸 역사가 중에는 루카 와딩이 대표적인 Bollandist이다.

180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현대적인 역사 연구가 이루어지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연구가 작은 형제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와 개신교 학자들에 의해 인본주의 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표적 연구가로 “태양의 찬가”를 저술한 요셉 괴레스, “아시시 프란치스코”를 지어 르낭에게 영향을 준 칼 하세, 프란치스코에 대한 프랑스 개신교 연구 그룹의 대부격인 르낭, 그리고 르낭의 제자로 프란치스칸 논재을 촉발한 사바띠에르가 그들이다. 프란치스칸 논쟁은 폴 사바띠에에 의해 촉발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개신교 목사요 신학자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칸 기록들에 대한 연구는 가톨릭 내에서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프란치스칸 안에서도 별 연구가 없었다. 이에 비해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무신론자들과 개신교 신학자와 역사 연구가들 사이에서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칸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두 그룹의 공통점은 프란치스코가 제도교회를 넘어서는 참 자유인으로서 교회 개혁자요 인간 해방자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중의 대표자가 폴 사비띠에이다. 이에 자극을 받아 과라키와 같은 프란치스코 연구소들이 세워지고 잡지들이 출간되어 가톨릭과 프란치스칸들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기록들에 대한 선택과 정리가 다음과 같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 사료들

가. 프란치스코에 대한 사료들

1) 첼라노의 전기들

첼라노의 토마스는 118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214년 말이나 1215년 초 프란치스코가 모로코 선교여행을 떠났다가 실패하고 스페인에서 돌아왔을 때 유식한 형제들의 무리가 입회를 하였는데 이때 토마스는 입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1221년 독일에 형제회를 설립할 때 설립 요원으로 독일에 파견되어 보호자직을 수행하였고, 1223년 다시 이태리로 돌아와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들과 성녀 글라라의 전기를 기술하고 1260년 경 지도신부로 있던 마르키아 지역의 성녀 글라라 수녀원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토마스는 유식한 형제였으며, 문학적이고 매우 영적인 형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토마스 첼라노의 전기는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들에 영성적으로 품격이 높은 풀이를 문학적으로 화려하게 끼어놓는다. 그래서 그의 전기는 전기를 읽는다기보다는 영성서적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것이 그의 전기의 탁월함이면서도 주관적 해석이 많이 들어감으로서 전기로서는 객관성에 의심을 받게도 한다. 그는 또한 중세의 전기적 특성대로 프란치스코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렸고 성성과 초월성을 가능하면 부각시키려 하였다.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의 시성을 앞두고 그를 공경하기 위한 대성당의 건립을 명하였는데 이때 성인 공경을 위한 또 하나의 작업으로서 성인전 집필을 명했는데 이렇게 해서 쓰인 것이 제 1생애이다. 파리 필사본에 따르면 1229년 2월 25일에 교황에게 헌정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전기는 그 전에 완성되었을 것이고, 적어도 1230년 5월 25일 전에 완성되었다. 왜냐하면 성인의 유해가 새로 지어진 대성당에 안치하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제 1생애는 다시 3부로 나뉘는데 1부는 프란치스코의 회개에서부터 수도회 창설, 그리고 그의 거룩한 행적과 말을 역사적 순서에 따라 기록하였고, 2부는 마지막 2년간의 삶을 기술하는데 오상과 죽음과 장례식에 관한 기록이고, 3부는 시성식 때 접수되어 낭독되었던 기적 모음이다.

제 1생애는 제일 먼저 쓰인 전기이기에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가장 높고 중요한 전기이지만,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저술 기간이 짧아 자료 수집을 충분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누락되거나 잘못 기록되었다. 특히 프란치스코의 회개과정에 대한 기술이 빈약하고 엉성하며, 회개에 있어서 하느님 은총에 의한 극적인 반전을 부각시키기 위해 회개 이전의 프란치스코를 사실 이상으로 불량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엘리아에 대한 묘사가 제 2생애와 달리 좋게 되어있는 것도 문제점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제 1 생애가 쓰일 때는 엘리아가 총 봉사자였기에 좋게 쓸 수밖에 없을 수도 있을 것이고, 나중에 잘못을 많이 했지만 그 때까지는 엘리아가 프란치스코의 훌륭한 제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누락과 왜곡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 프란치스코의 전기가 다시 쓰여야 한다는 요구가 점증되었다. 1244년 총회에서 총 봉사자는 프란치스코의 생활과 오상과 기적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토마스 첼라노에게 보내도록 하였고, 이에 초기 동료 레오, 안젤로, 루피노와 형제들은 자기가 직접 경험했거나 들어 알고 있는 것을 첼라노에게 보냈다. 첼라노는 형제들이 보낸 자료들과 그간 자신이 직접 수집한 내용들을 가지고 제 2생애를 집필하는데, 초기 세 동료가 자료와 함께 편지를 보낸 것이 1246년 8월 11일인 것으로 보아 제 2생애가 완성된 것은 1246년에서 1248년 사이일 것이다.

제 2생애가 쓰인 목적은 앞서 보았듯이 누락되고 왜곡된 것, 특히 회개 부분에서 누락되고 왜곡된 것을 보완하는 것이었기에 1부에서 이 부분을 특별히 다루고, 2부에서는 나머지 생애를 연대순이 아니라 완덕의 본보기 차원에서 주제별로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다룬다. 그러다가 2부 후반부에 다시 역사적 연대 순으로 돌아가 프란치스코의 생애 말년을 기술한다.

제 3생애는 성 프란치스코의 기적을 더 보강해야 한다는 형제들의 요청에 따라 당시 총장, 요한 빠르마가 지시하여 쓴 기적모음집이다. 이는 2생애를 쓸 때부터 교회 안에서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칸을 더 영예롭게 해야 한다는 형제들의 원의가 있었는데, 이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형제들이 다시 요청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첼라노의 태도는 마지못해 하는 것이었다. 권고 6번의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2) 보나벤뚜라의 전기

1260년의 나르본 총회는 총 봉사자인 보나벤뚜라에게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다시 쓸 것을 요구한다. 기록에는 다시 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특별히 없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있는 것들을 하나의 전기로 일치되게 통합하는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1266년 총회는 이 대전기만을 유일한 공식전기로 삼기로 결정하고, 이 대전기 외의 다른 전기들은 다 태어버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 대전기는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일한 공식 전기였다(그러나 실제로 형제들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10년 후 다시 다른 전기를 쓸 것을 요구하였고, 그래서 그 이후 다른 많은 편집본들, 완덕의 거울, 뻬루지아 전기, 세동료 전기 등이 나오게 된다).

보나벤뚜라는 이 전기를 통해서 당시 교황청이 작은 형제들을 중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 그 중에서도 파리 대학 교수들에게 프란치스코가 제 2의 그리스도이며 여섯째 봉인의 천사임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것이 대전기의 대외적인 작품의도였다면 대내적인 작품의도는 완전한 형제의 모습을 작은 형제들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도들 때문에 대전기는 역사적인 전기라기보다는 신학적이고 신비적인 전기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3중도적인 역사기술, 성서의 숫자 등에 프란치스코를 끼어 맞추는 것 등은 억지스럽기까지 하였다.

3) 비공식 사료들

첼라노의 전기들과 보나벤뚜라의 대전기가 교황청과 형제회의 공식 인준을 받은 전기들이라면 세동료 전기,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 페루지아 전기(아시시 편집본), 완덕의 거울,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등은 저자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고 교회나 형제회의 공식인준을 받지 않은 사료들이다.

왜 이런 전기들이 생산되었을까? 그것은 왜 그렇게 많은 프란치스코의 전기들이 있는가와 관련이 있다. 프란치스코에 관한 전기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프란치스코가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얘기고, 그것도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랑할 만큼 프란치스코의 폭이 넓었다는 것이고, 프란치스코가 어느 한 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비근한 예로 가톨릭의 성인이고 교회를 쇄신한 사람이 개신교에서도 자기들의 선구자로 받들고, 불교와 이슬람도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기존의 공식 전기들은 이러한 프란치스코를 드러내고 알리는 데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었기에 형제들로부터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썼는데, 그 중에서 연대적으로나 체계적인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가치 있는 전기들이 앞에서 열거한 것들이다.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는 이런 비공식 전기 중에서 스피라의 율리아노 형제의 성무일도용 전기(1232-5) 다음으로 1240-1에 쓰인 전기이다.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로 불리지만 예수회 회원이 처음 발견하였을 때는 저자가 분명치 않아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라고 하였을 뿐 페루지아의 요한이 그 저자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전기는 프란치스코의 전기라기보다는 형제회 초기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렇게도 초기 역사의 상당 부문을 차지하는 프란치스코의 얘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 나온 것이 세 동료의 전기다. 세 동료의 전기도 이름은 세 동료, 즉 프란치스코와 절친했던 초기 동료, 안젤로, 레오, 루피노가 쓴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이 세 형제가 쓴 편지가 모든 사본에 붙어있는 것일 뿐 다른 저자의 작품이다. 이 전기는 폴 사바띠에르가 프란치스코를 역사적으로 가장 잘 묘사하는 작품이고, 저작 시기도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주장을 폄으로써 소위 프란치스칸 논쟁을 촉발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전기는 제일 먼저 쓰인 것이 아니라 1246-7 사이에 쓰였으며 첼라노 제 1생애와 스피라 율리아노의 성무일도 용 전기와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를 그대로 인용하거나 따르면서 새로운 요소를 첨가한 전기이다.

그에 비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실제 세 동료들이 편지와 함께 총 봉사자에게 보낸 자료 모음이 페루지아 전기(또는 아시시 편집본)일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세 동료의 편지를 보면 “어느 들판에 핀 무수한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마음가는 대로 골라 모으듯 하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적 순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세 동료의 전기는 이런 면에서 형제들의 이야기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꾸민 것인데 반해 페루지아 전기야말로 세 동료 편지의 말처럼 형제들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그대로 모아 편집한 것이다. 첼라노 제 2생애에 없는 얘기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세 동료들이 보낸 자료 중에서 일부는 첼라노가 사용치 않았음도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다.
완덕의 거울은 그 당시 유행하던 중세 성인전이나 문학에서 완덕의 모범을 제시하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즉 프란치스코를 형제들이나 신자들이 따라야 할 완덕의 모범이요, 새로운 聖性의 모범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성인의 말과 행적을 덕에 따라 엮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완덕의 거울은 첼라노 제 2생애 2부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좀 서투르게 편집을 한 반면 손을 많이 대지 않은 점이 역사적인 면에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완덕의 거울은 새 전기(Legenda Nova)라 불린 보나벤뚜라의 대전기를 빗대서 옛 전기(Legenda Antiqua)라고도 하는데 영적인 형제들이 보나벤뚜라에 반대하여 편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완덕의 거울인 편집된 것은 1311년으로 추정한다.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도 마르카의 영적인 형제들에 의해 쓰였다. 즉 마르카의 우고리노라는 형제가 선배 형제들, 특히 마르카의 야고보 형제를 통해 수집한 얘기를 가지고 대략 1330년경에 쓴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에서 봐 알 수 있듯이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라기보다는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를 따른 후예들을 그린 것이고, 마르카 관구가 유식하고 현실적인 형제들에 의해 다스려지던 관구들을 피해 간 영적인 형제들의 관구인 만큼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영적이고 이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그 후예들도 영적인 형제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반면 엘리아나 보나벤뚜라 성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본래는 Actus B. Francisci et sociorum ejus였는데 이태리어로 새로 편집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Fioretti(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가 되었다.

나. 작은 형제회에 관한 역사서들

1) 13세기 연대기들
-지아노 죠르다노의 연대기(1262년): 게르만 국가들과 동방에서 형제회 역사
-토마스 에클레스톤의 연대기(1259년): 영국의 형제회 역사
-살림베네의 연대기(1282-8): 살림베네가 많은 여행을 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역사

2) 14세기 역사서들
-안젤로 끌라레노의 “작은 형제회의 일곱 가지 고통의 역사”(1323-5): 영적인 형제들의 우두머리였던 저자가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이상을 참되게 계승하려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역사를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다룸
-24 총 봉사자 연대기(1365년): Arnaldo da Sarrant가 지은 역사서로 풍부한 참고문헌과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음
-“복되신 프란치스코와 주 예수의 일치된 생애(De conformitae vitae beati Francisci ad vitam Domini Jesu): 1385-90년 사이에 피사의 바르톨로메오가 쓴 역사서로 그 당시 프란치스칸들이 프란치스코가 제 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얼마나 많은 면에서 닮았는지 역설하던 작품들 중의 대표작이다. 그러는 가운데 많은 정보들과 통계를 담고 있다.

3) 작은 형제회(Observantes) 역사서들
-“옵세르반티 작은 형제들의 연대기”(1480): 아퀼라 베르나르디노가 영적인 형제들과 옵세르반띠 형제들의 역사를 바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꼰벤뚜알 형제들의 역사는 배제하고 기록한 역사서
-“작은 형제회의 거울”(15세기 말): 페루지아의 야고보 오디가 저술
-“세라핌적 수도회의 기원”(16세기): 프란치스코 곤자가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지은 역사서로 옵세르반띠들이 수도원을 창설한 역사를 주로 기록하고 있고, 통계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역사서임.
-작은 형제회 연감(1625): 루카 와딩이 인본주의와 역사학적 방법론에 의거해 기록한 역사

4) 꼰벤뚜알 역사서
-“세라핌 수도회 역사”(16세기): 토시노의 베드로 리돌피가 꼰벤뚜알이 성 프란치스코 시대 이후로 면면히 이어온 역사를 꼰벤뚜알을 옹호하는 측면에서 인본주의적으로 기록한 역사서

5) 까푸친 역사서
16세기 중반 까푸친 형제들이 Observantes에서 다시 개혁을 하며 까푸친 형제회의 역사를 영적인 형제들과 직접 연결시키며 개혁의 기원과 이상을 기술한 역사서들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데르카토 사라체노의 마리오의 연대기(1569-79년)
-“까푸친 수도회의 기원에 관한 역사”(1580년):콜페트라초의 베르나르디노가 저술
-“까푸친 역사”(1587년): 살로의 마티아 벨린타니가 저술
-“까푸친 형제들의 연감”(1632년): 살루쪼의 자카리아 보베리오가 총회의 요청을 받아 공식적으로 기록한
역사서****이상/

2장 프란치스코와 형제회의 기원

1. 정치, 사회, 경제적인 변화와 당시 상황

가. 경제 상황의 변화

10-11세기부터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유럽은 급작스런 인구의 증가가 있었고, 일손이 늘어났지만 전통적인 농업은 이 일손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다른 변화는 수공업의 발달이다. 수공업의 발달과 병행 발전한 것이 상업의 발달이다. 화폐가 발달하고, 화폐가 발달하자 무역과 금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 세 가지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가 도시의 발달이다. 상공업이 활발한 곳에 도시가 형성되자 농촌이 다 수용할 수 없는 인구는 도시로 집중하였다.

나. 사회적 변화

경제상황의 변화가 가져온 사회는 실로 엄청났다. 지금까지 농업과 농촌 중심의 안정적인 사회가 인구의 이동으로 유동적인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특징은 유동성(Mobility)이었다. 갑작스런 인구의 도시집중이 가져온 또 다른 결과는 도시빈민의 출현이다. 통계에 의하면 도시인구의 80%가 절대빈곤층이었다.

다. 정치적인 변화

귀족계층(Majores)과 평민계층(Minores)의 대립도 중요한 정치 사회적 변화였다. 중세의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황제가 교황에게, 귀족이 왕에게, 평민이 귀족에게, 철학은 신학에, 이성은 신앙에 종속되는 것이 당연하였는데, 상공업의 발달로 농촌에서 영주의 보호를 받고 소작을 내며 안정되게 살던 농노들이 상공업에 종사하게 되고, 이 상공업 부문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봉건주의 쇠퇴와 더불어 시민자치단체의 출현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결과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2. 종교적인 변화

가. 그레고리오 개혁(1073-1085년)

프란치스코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 아니 그 전부터 중세교회는 개혁의 시도가 있었다. 개혁의 시도가 있었다는 말은 그만큼 교회가 부패되어 있었다는 얘기인데, 교황청과 우호조약을 맺고 있던 프랑크 왕국의 국력이 약화되면서 로마를 둘러싸고 있던 세속 권력들이 교황청을 지배하고 교회를 좌우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황의 선출이 세속 권력에 의해 이루어져 자연히 교황은 수위권을 상실하였고, 성직 서임권을 가진 이들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직을 돈을 주고 사고팔았다. 그 결과 성직자들은 첩과 정부까지 두고 살기까지 하였다. 수도회 또한 부자나 귀족이 수도원을 세워 자기 하인들 중의 하나에게 수도원 운영 관리를 맡겼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오 개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 1049년부터 시작되어 1123년까지 이어진 개혁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진 개혁은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지만 크게 4가지인데, 교황의 수위권 강화, 클루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수도회 개혁, 성직자들의 생활 쇄신, 평신도로부터 교회의 자유 확보이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개혁이라고 한다면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 정신은 복음의 재발견이었다. 가난한 그리스도의 재발견과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재발견이었다.

분도 수도원의 시토회의 개혁은 그 대표이다. 시토회는 장엄한 전례와 지적인 노동으로 대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클루니 수도원들과 대조되게 소박한 전례와 단순하고 엄격한 생활로 자기 자신을 닦는데 충실하였다. 까마돌과 카르투시안도 분도회의 이런 개혁과 맥을 같이 하는 개혁 수도회이다. 이러한 수도회의 개혁에 궤를 같이 하는 성직자들의 개혁은 공주 사제단(Canonici Regulares) 형태로 나타났다. 성직자들의 수도회로서 아오스딩 성인이 작성한 회칙에 따라 사제들이 공동생활을 하던 전통을 이어 받은 수도회이다. 수도승 생활과 공주 사제단 생활이 합쳐진 수도생활이 쁘레몽뜨레 수도회이다. 이것이 탁발 수도회의 원조인 셈인데, 공주생활을 하면서 사목을 하는 형태이다.

나. 회개 운동과 이단들

교회의 부패에 대한 개혁이 교황들과 수도회들에 의해 위로부터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아래로부터의 개혁 움직임도 왕성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교회의 인정을 받은 회개 운동가들도 있었지만 제도교회를 부정하는 이단들도 있었다. 공통점은 복음, 가난, 재산의 공동소유, 형제적 일치 등 초대교회의 이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프란치스칸 회개운동, 또는 탁발 수도회들의 전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1) 회개 운동들

-후밀리아띠(1178년 창립): 열심하고 비천한 사람들의 자치적 수공업자 길드가 그 시초로 서원도 공동생활도 하지 않았지만 노동으로 함께 모였다. 세 부류가 있었는데, 자기 집에 머무는 부류와 남녀 따로 공동생활을 하는 부류와 공동생활을 하면서 정식 수도회를 조직한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단체였다. 가난하고 단순한 생활, 노동, 자선 등의 생활을 하였는데, 설교를 하게 되면서 교회의 파문을 받았다가 이노첸시오 3세에 의해 1201년 회칙이 인준되었다.

-베귄 회: 후밀리아띠와 비슷한 시기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시작되었으며 성격도 비슷하다.

-가톨릭의 가난한 자들(The Poor Catholics): 원래 이단인 발도파의 지도자였었던 두란도가 오스마의 디에고와 성 도미니코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순종을 서약하고 이노첸시오 3세 교황으로부터 1208년 회칙을 구두 인준 받았다. 롬바르디아의 가난한 자들의 회칙은 1210년에 인준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난을 살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선포하는 복음적인 활동을 하였다.

2) 이단들

-발도파: 1179년 교황으로부터 발도가 인가를 받아 시작한 회개 운동이지만 설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설교를 하고 성서를 지방어로 번역하여 대중화함으로써 교회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의 경우나 나중의 개신교의 개혁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의 내용과 행위 방식을 교도권이 독점하는 것에 대한 반기이다. 교도권이 이를 허용하지 않자 이들은 교도권을 부정하고, 교회의 인정에 따라 사제와 성사가 유효한 것이 아니라, 즉 사효적인 것이 아니라 인효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카타리파(알비파): 이원론 근거한 신앙에 따라 물질적인 것을 죄악시하고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였다. 엄격한 가난과 금욕, 재계를 강조하였고, 이러한 것을 잘 실천하는 신자를 완전자(perfecti)라고 하여 일반 신자(Creednti)와 구분하였다.

3. 탁발 수도회의 출현과 성 프란치스코

가. 탁발 수도회의 출현

교회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볼 때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전통이 있다. 문화사적으로 얘기하면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이고, 교회사적으로 얘기하면 다윗의 전승과 모세의 전승 또는 왕조 전승과 광야의 전승이다. 농경문화는 자연이 인간에게 풍요를 주고 안정을 주기에 자연의 이치를 잘 깨치고 순응함으로써 인간의 안위를 구한다. 이에 비해 유목문화권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은 극히 적고 많은 경우는 오히려 위협적이기에 하느님께 구원을 의탁한다. 당연히 유목문화권에서는 유일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는데 비해서 농경문화권에서는 신을 언급하지 않거나 자연신들을 섬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구약은 떠돌이(유배)와 정착을 반복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돌 때 일정한 영토가 없었기에 의식주를 안정되게 확보할 수 없었고, 오직 하느님 자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도 없었고, 잘 짜인 국가제도나 법도 없었으며, 미래를 계획할 수도 없었다. 하느님의 보호가 안위를 지키는 힘이었고, 그때, 그때 예언자를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명령이 질서였고 계획이었다. 반면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군대를 양성하며 안정되게 의식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자연히 하느님께 대한 충성심과 의탁이 약화되었고, 절대적인 유일신 대신 풍산신들을 섬기게 되었다.

신약을 일별하면 초기의 매우 불안정한 신앙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크리스도교의 국교화와 봉건 사회의 확립과 더불어 안정적인 신앙의 시대가 있었다. 이런 안정적인 신앙 시대의 도래에 크게 기여를 하고, 봉건사회에 맞는 영성이 바로 정주영성이었다. 그러나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유동성과 도시빈민이 사회의 새로운 현상으로 등장하면서 나그네 영성, 탁발 영성이 요청되었다. 과거 봉건시대에는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모든 삶이 영위되었고 신자들이 교회를 찾아갔지만 이제는 교회를 찾지 않는 가난한 유동인구를 찾아가는 교회이어야 했다. 이에 부응한 것이 앞에서 본 회개운동들이고, 회개운동의 결실이요 완성이 바로 탁발 수도회들이고, 그 삶의 양식이다. 대표적인 수도회들이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와 도미니코의 설교자 회이고, 아오구스띠노 회와 갈멜회이다. 그 중에서도 도미니코 회는 이단들의 회개와 정통신앙의 수호를 위해 설교중심적인 순회생활을 양식으로 삼았고, 작은 형제들은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고,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복음적인 생활양식을 행동의 설교로 전하기 위한 순회생활을 양식으로 삼았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선택한 복음적인 가난은 나그네의 실존적인 가난이다.

나. 작은 형제회의 설립

페루지아와의 전쟁에서 평민군대로 출전하여 포로가 된 프란치스코는 1년간의 감옥생활의 후유증으로 중병을 앓게 되었다. 젊은 시절 하느님의 이런 섭리적인 이끄심에도 세속적 추구를 계속하던 프란치스코를 하느님은 스뽈레또의 현시로 회개를 시작하도록 하셨고, 나환자와의 포옹을 통해서 완전히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도록 섭리하셨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존재적인 변모를 하였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교회쇄신의 사명은 한참 뒤 제자 파견의 복음을 통해 프란치스코에게 명확해졌다.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그네와 순례자의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1208년 첫 제자들이 리보또르또에서 생활하면서 첫 선교 여행을 하였고, 형제들의 수가 12명으로 늘어나자 프란치스코는 원회칙(Regular Primitiva)을 작성하고 1209년 이노첸시오 3세로부터 구두인준을 받았다. 이것은 앞서 보았듯이 통찰력과 지도력이 뛰어났던 이노첸시오 3세를 하느님께서 보내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로 프란치스코가 이 회칙을 인준 받기 위해 로마를 향하였을 때 프란치스코의 지지자였던 아시시의 귀도 주교와 교황청의 추기경들은 분도 회에 들어가거나 분도회의 회칙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소명을 고집하였고, 역사적인 탁발 수도회의 출현을 가져왔다. 자신이 받은 사명, 은사에 대한 고집은 1215년 또 다시 시련을 맞이한다. 제 4차 라따란 공의회는 새로 시작한 수도회들은 기존의 인가된 수도회의 회칙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정을 하였는데, 그 결과 도미니코 회는 성 아우구스띠노 회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노첸시오의 구두 인준 때문인지 다른 회칙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은사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집착은 성 도미니코가 두 수도회를 합치자는 제의를 할 때도 정중하게 거절함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면 프란치스코가 프란치스칸 은사로 끝까지 고수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첫째는 영적이고 복음적인 자유를 간직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제도 교회에 대한 순종을
그렇게 강조하는데, 이는 주님의 영과 그분의 거룩한 활동에 대한 순응을 더 중요시하는 것에 대한 염려의 표시다. 유언에서 그는 아무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지 않았고 주님 친히 알려주셨다고 얘기하고, 형제들도 주님 친히 주셨다고 하며, 회개생활의 시작도 주님이 하게 해주셨다고 얘기한다. 법과 제도를 최대한 간소화하고 그때, 그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그리고 복음 그대로 해석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둘째는 가난과 작음의 복음적 불안정이다. 좋으신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 자비의 도구인 사람의 선의에 온전히 의탁하여 안전장치를 두지 않는 것이다. 작은 자이기에 일을 하여 먹고 살아야 하지만, 일의 보수가 충분치 않을 때는 하느님과 사람들의 선의에 의탁하며 애긍을 청한다. 일을 하지만 책임을 맡는 일은 아니고, 낮은 자의 일을 하고 보수도 돈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형제들이 가장 즐겨하는 일은 그래서 나환자를 돌보는 일이었다. 셋째는 형제성(Fraternitas)이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모든 존재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형제회 안에서는 성직과 평형제의 구별도 장상과 수하의 차별도 없다. 넷째는 복음의 선포, 설교의 은사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도미니칸의 설교와 달리 교리적인 설교가 아니라 행동의 설교이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설교이다. 당연히 지적인 봉사는 지극히 경계하였다.


제 3장 첫 번째 변화와 위기

은사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집착이 중대한 시련을 맞이한 것은 외부에서로부터가 아니라 내부에서로부터였다. 형제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그리고 유식한 형제들이 많이 입회하면서 내부로부터 형제회 내의 걱정스런 현상에 대한 도전이 있게 되었다. 형제들의 수가 늘어나고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영향을 직접 받지 않은 형제들이 늘어나면서 프란치스코가 손수 자신의 형제로 여기지 않고 가톨릭 신자로도 여기지 않겠다고 얘기할 정도 이단과 구분이 가지 않는 형제들도 형제회 안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형제들이 늘어난 것은 프란치스칸 삶이 주는 대단한 매력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식별 없이 입회를 허용하고 교육 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게 내버려 둔 것도 큰 이유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골리노 추기경과 유식한 형제들은 프란치스코의 결점을 보완해 주는 세력이었다. 자청해서 보호자 추기경이 된 우골리노 추기경은 프란치스코를 매우 존경하였지만 유식한 형제들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프란치스코도 우골리노 추기경을 존경하였고, 그래서 그를 보호자 추기경으로 받아들이고 조언을 받아 들였지만 은사의 보존에 있어서는 갈등의 관계였다.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인 첫 번째 결과는 관구의 분할이다. 넓은 지역의 많은 형제를 돌보는 데는 관구 제도는 제도를 수용한 것이면서도 수도승 제도와 다른 독특한 제도이다. 수도원이라는 한 곳을 넘어서는 지역을 나눔으로써 아무런 제재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수도원이라는 한 곳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었던 제도였다. 이로써 장소적 수도원이 아닌 관계적 수도원의 특징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인 두 번째 결과는 수련제도의 도입이다. 당연히 수련소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고, 서원을 한 후에는 수도회를 떠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들이지만 거부한 것들도 있다. 1219년 프란치스코가 이슬람 선교를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대리로 임명된 유식한 형제들이 취한 조치들을 무효화하였다. 수도승적 단식제의 도입을 반대하였고, 가난한 자매들에 대한 보호칙서를 무효화하였으며, 나환자들의 수도회 설립과 공부를 위한 수도원 설립은 저지하였다. 그러나 뽀르지웅꿀라의 본부 수도원 설립은 아시시 관리들이 그 소유권이 자기들 것이라고 하였기에 저지할 수 없었다. 이 사태가 가져온 것은 프란치스코의 총 봉사자의 직무에서의 사퇴와 회칙의 작성이었다.

1220년 프란치스코는 총 봉사자에서 물러나 후임에 베드로 까따니를 임명하고 그에게 순종을 서약했다. 유능한 법률가였지만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었지만 곧 사망을 하였기에 엘리아가 임명되었다. 총 봉사자에서 물러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의 요청에 자신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회칙을 작성하였다. 스삐라의 체사리오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이 회칙은 그동안 원회칙에 라떼란 공의회와 총회의 결정사항과 호노리오 3세의 칙서를 반영하였고, 1221년 총회에 상정하였을 때 형제들이 추가적으로 요구한 것을 포함하여 완성되었다. 이 회칙은 법률적이라기보다는 복음적 권고이다. 상당수가 복음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고, 따라서 형제들의 복음적 자유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식한 형제들, 특히 봉사자들에게는 불만이었다. 교황의 인준을 받지 못한 것은 이들의 불만이 반영된 것일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레오 형제와 보니쪼 형제와 함께 리에띠 계곡에 들어가 오랜 기도와 단식 끝에 레오 형제에게 받아쓰게 하여 다시 회칙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엘리아가 고의로 분실하여 다시 작성하였고, 우골리노 추기경과 호노리오 3세의 조율을 받아 1223년 최종 인준되었다. 이 회칙은 1221년의 회칙보다 당연히 법적인 요소가 강화되었고, 문장은 간결하고 분명하였다. 그러나 이 회칙에서 아직도 강하게 금하고 있는 장소(loci)의 소유가,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1224년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를 보면, 1224년에 가면 불과 1년 만에 불가피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공동기도와 미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비록 수도승적인 수도원은 아니어도 정주하는 형제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가 프란치스코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때였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초기 이상을 벗어나 형제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전기에 의하면 큰 고민을 하고 있는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께서는 환시로 형제회의 주인이 당신임을 깨닫게 하심으로 근심걱정과 함께 완전히 자기를 비우게 하셨다. 근심걱정이란 완전히 버리고 비우지 못한, 그래서 뭔가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설자로서 회칙 작성의 의무를 다하고, 이렇게 형제회마저 하느님께 돌려드린 다음 프란치스코는 이제 완전히 가난한 자가 되어 기도와 복음 선포의 삶을 전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때를 보내고 이제 완전히 가난해진 프란치스코는 더 더욱 아무런 방해 없이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1124년 십자가 현양 축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그 수난의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똑 같이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프란치스코는 오상을 받게 된 것이다. 오상으로 걸을 수조차 없음에도 프란치스코는 이태리 중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던 프란치스코는 1226년 봄 건강이 극히 나빠져 시에나에서 유언을 작성한다. 건강이 조금 회복되어 아시시로 돌아올 수 있게 되자 프란치스코는 산 다미아노의 글라라 수녀원에 머물며 억지로 치료를 받는데, 이때 프란치스코는 밤새 쥐들이 들끓고 갖가지 고통과 볼 수 없는 상황인데도 태양의 찬가를 짓는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그대로 받아 적게 한다. 이 유언은 다른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프란치스코의 생각을 온전히 담고 있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과 형제들에게 주신 성소를 상기시키며, 교회와 사제와 신학자들에 대한 존경, 성체와 말씀에 대한 존경을 당부하고, 프란치스칸 은사에 충실할 것과 교황청에 특전이나 추천을 요청하지 말 것과 회칙을 해석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1226년 10월 3일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요한복음의 수난기와 시편 141편을 읽어주는 동안 뽀르지웅꿀라에서 임종하였다. 벌거벗은 채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따라 벌거벗은 채 재를 덮고 생을 마감하였다.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처음 교회 수리의 사명을 받고, 글라라 자매들이 살고 있는 산 다미아노 성당을 거쳐 어렸을 때 공부를 했던 산 지오르지오 성당에 묻혔다. 1228년 7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제 4장. 1517년 이전까지 1회의 역사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회칙을 해석하지 말고 지키라는 유언의 말씀이 형제 회 내부적 갈등이 핵이 되어 버렸고, 로마 교황청과의 밀접한 관계는 지역교회의 성직자들과 파리 대학 교수들과의 갈등의 핵이 되었다.

1. 형제 회 내부적 갈등

가. 유언과 회칙의 준수 문제

프란치스코 생애 말기부터 이미 유식한 형제들이 형제회를 이끌어가는 주도세력이 되었지만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영향력이 더 커져갔다. 엘리아에 이어 총 봉사자가 된 요한 빠렌티는 프란치스코의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고, 이 조화를 형제회내에서 이루어내려 하였지만 총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봉사자들은 회칙 준수와 유언의 관계를 교황청의 힘을 빌어 해결하려 하였다. 이에 과거 보호자 추기경이었고 그래서 작은 형제회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유식한 형제들과 입장을 같이 했던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1230년 “Quo Elongati"라는 회칙을 반포하였다. 이 칙서는 나중에까지 길이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사실상 유식한 형제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칙서는 1) 회칙을 해석하지 말고 글자 그대로 준수하라는 유언의 말은 법적인 구속력은 없으며 2) 복음적 권고도 회칙에서 언급한 것만 반드시 준수해야 하고 나머지는 말 그대로 권고 사항일 뿐이며 3) 형제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은인들의 대리인 Nuntius를 두는 것은 회칙과 반대되지 않고 4) 형제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지만 책과 장비들에 대해서는 사용권을 가질 수 있다고 유권 해석을 하였다.

나. 형제회의 성직화

이렇게 교황청의 힘을 빌어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봉사자들의 힘에 밀려 요한 빠렌띠는 총 봉사직을 사임하고 엘리아가 다시 1232년 총회에서 총 봉사자로 선출되었다. 뒤에서 다룰 성 보나벤뚜라와 함께 초기 형제회 역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프란치스코가 그를 총 봉사자 대리로 임명하고, 형제들이 그를 다시 총 봉사자로 선출한 것을 보면 그가 뛰어난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총 봉사자가 된 엘리아는 개인적으로나 공적인 직무 수행에서나 많은 악표양을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말을 타지 말라는 회칙을 어기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시종과 개인 요리사를 대동하고 다님으로써 가난과 작음을 어겼고, 공적인 직무 수행에서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평형제 대리인들을 통해 관구를 권위주의적으로 관리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관구 봉사자와 수호자들을 평형제들로만 임명하고 총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회를 크고 영향력이 큰 수도회로 만들려는 그릇된 형제회에 대한 애정도 지닌 행정의 달인이었다. 거대화 정책을 취함에 따라 영적인 형제들을 완전히 소외시켰고,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무리하게 짓기도 하였다.

이에 관구장들은 엘리아를 교황청에 고발하고 그레고리오 9세의 입회하에 총회를 열었다. 이 총회는 첫 번째 회헌을 만들어 공포함으로써 총 봉사자의 관구 봉사자와 수호자의 임명권을 박탈하고, 관구장들과 총회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총회에서 선출된 시찰자들이 관구를 방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엘리아의 평형제 중용 정책에 대한 반발로 평형제들이 형제회의 행정직에 영원히 임명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평형제들은 외부 활동도 할 수 없었고, 오로지 집안일을 하는 형제로 전락하였고 형제회는 이 때 이후 성직 수도회가 되었다.

다. 형제회의 수도승 수도회화

유식한 형제들이 형제회의 지도력을 행사하면서 형제회는 급격하게 수도승화하였는데, 순회적인 생활은 급격히 약화되고 도심 밖에 소박한 거처(Locus)에 머물던 형제들은 도심의 대수도원에 머물게 되었으며 손노동 대신 애긍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수도승들처럼 공동생활을 강화하여 갔다. 성무일도와 미사를 같이 하고 대침묵과 단식이 강조되었다.

라. 보나벤뚜라의 총 봉사자직(1257-74)과 체제 완비

빠르마의 요한은 에지디오 형제가 “오기는 잘 오셨는데 너무 늦게 오셨군요!”라고 할 정도로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되살리려고 애썼던 총 봉사자였다. 그는 1247년부터 57년까지 10여 년 간 겸손과 모범으로 형제회를 잘 이끌었다. 유언이 회칙의 가장 훌륭한 해석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Quo Elongati 이후의 칙서들에 의해 주어진 특전들은 다 취소하였다. 모든 형제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달리 공격할 방법이 없던 소수의 유식한 형제들은 요아킴이즘을 고리로 요한을 총 봉사자에서 사퇴케 하였다. 이에 요한은 1257년 총회를 열어 형제들의 요청에 따라 40대의 보나벤뚜라를 자신의 후임으로 지명하였다.

보나벤뚜라에 대한 평가는 그의 개인적인 성덕과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입장에 따라 매우 다를 수 있다.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의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자신의 통치목표로 삼았기에 그 자신 영적인 형제들과 함께 은둔소에 자주 머물며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면서도 학문이나 효과적인 사목을 위해 도시 안에 거주하는 공동체 형제들의 삶과 활동도 긍정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그가 통치하던 17년간 형제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일치와 안정을 이루었고, 그 결과 외부로부터, 특히 성좌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그에 대해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이지만, 프란치스칸 이상을 추구하는 영적인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성덕과 프란치스칸 이상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형제회를 결정적으로 공동체화한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똑 같이 성덕에 뛰어났고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똑 같이 사랑했지만 빠르마의 요한은 유언을 회칙의 가장 완전한 해석으로 보는 이상주의자였고 영적인 형제들의 편이었다면 보나벤뚜라는 Quo Elongati를 회칙의 합법적인 해석으로 보았다. 두 총 봉사자의 27년간의 통치기간에 형제회는 일치와 안정을 이루었지만 이후 보나벤뚜라에 대한 반발로 공동체 형제들과 영적인 형제들의 갈등이 심화된다.

마. 갈등의 심화

보나벤뚜라가 한 일 중의 하나가 요아킴주의를 배척하고 억압하는 것이었는데, 보나벤뚜라 사후 영적인 형제들은 요아킴주의에 깊이 빠져들어 형제회와 반목할 뿐 아니라 성좌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게 되었다. 요아킴주의란 피오레의 요아킴 아빠스의 구원론과 종말론을 따르는 것으로서 영적인 형제들 뿐 아니라 그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이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보나벤뚜라도 이 사상에 일부 동조하였으니, 그는 대전기를 지으면서 프란치스코를 구세사의 세 번째 시대인 성령의 시대를 여는 여섯 번째 봉인의 천사이며 따라서 작은 형제회는 요아킴이 예언한 성령의 시대의 새 수도원이고, 이 새 수도회가 가난을 기치로 내걸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적인 교회를 건설할 것임을 암시한 바 있다. 영적인 형제들이 보나벤뚜라와 다른 점은 역시 가난의 문제였고, 조화냐 극단이냐의 문제였다. 영적인 형제들 중에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훌륭한 형제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일부가 교황과 형제회와 제도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교황들 중에도 이러한 영적인 형제들에게 관용적인 교황도 있었지만 일부 교황은 이들을 단죄하고 투옥하고 끝까지 버티던 영적인 형제들을 심지어 화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영적인 형제들의 대표자는 까살레의 우베르띠노(-1329)와 안젤로 끌라레노(-1337)였는데 이들은 교황과 형제회의 이런 극단적인 조치들에 반발하여 합법적으로 인정된 독립적인 수도회를 세우려고 하였다. 결국 인정을 받지 못한 그들은 형제회에서 쫓겨난 한 분파들로써 남게 되는데, 프라띠첼리와 끌라레니라 불리며 15세기까지 명맥을 이어간다.

바. 옵세르반띠의 출현

영적인 형제들이 빠지기 쉬운 세 가지 잘못이 있었는데 유별난 수도복의 채택, 가톨릭 신앙에서의 이탈,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단죄가 그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형제들은 교황이 법으로 보장한 회칙의 현실 적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 형제들(Conventual)을 변질자로 비판하고 단죄하며 자신들만이 회칙의 참된 준수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비판과 단죄보다는 그저 겸손하고 가난하게 회칙을 충실히 준수하며 살고자 한 형제들(Observantes)도 있었다. 이들은 애초에는 공동체 형제들이었지만 교회와 형제회의 허락을 받아 회칙의 철저한 준수의 삶을 삶으로써 자신과 공동체 안에서 원하는 결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334년 발레의 요한(-1351)은 4명의 형제와 함께 은둔소에 들어가 교황의 해석 없이 회칙을 살 수 있는 허락을 받아 살았고, 트린치의 바올루쵸는 총 봉사자의 직속 하에 은둔소에서 살게 되었는데 한 때 관구장들의 반대로 받았지만 교황의 보호와 총 봉사자들의 후원 하에 개혁운동은 이태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들은 다 공동체 형제들이었고, 평형제들이었는데 수련자들을 따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원하는 곳에 집을 소박하게 짓고 살았다.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도 14세기 말부터 교회와 형제회의 허락과 후원 하에 Observantes가 생겨났다.

Observantes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평형제들 중심의 1세대를 이어 이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이 운동에 합류하면서부터이다. 1402년에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1414년에는 카피스트라노의 성 요한, 1415년에는 살떼아노의 알베르또, 1416년에는 마르카의 성 야고보가 이 Observantes에 입회함으로써 급격히 그 세를 확산하였다. 이들은 회칙을 영적으로 준수하고, 침묵 가운데서 관상기도에 전념하기도 하고(평형제들의 1세대), 그 반대로 설교의 직무에서 큰 활력을 주기도 하였다(사제 형제들의 2세대). 이들은 대체적으로 은둔과 외부 활동 간의 조화, 단순함과 학문 간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갔다.

사. 다른 개혁 운동들

꼴레따니 개혁은 꼬르비의 성녀 꼴레따의 개혁에서 비롯된다. 1406년 성녀 꼴레따는 교황으로부터 프란치스칸 전체 가족을 쇄신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형제들을 개혁의 물결에 끌어들였는데, 프랑스 지역에서 그 호응이 컸다. Observantes의 흡수 노력이 있었지만 총 봉사자의 직속 하에 따로 회헌과 자치수단을 가지며 수련자도 받았다.

아마데이띠 개혁은 아마데오 메네세스(-1482)가 이태리에서 시작하였으며 총 봉사자와 Conventual 관구장 권하에 있었지만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끌라레니 개혁은 안젤로 끌라레노의 추종자들이 Observantes 운동에 자극을 받아 형제회에 편입되어 주교 또는 총 봉사자의 재치권 하에서 자신의 장상을 가지며 생활하였다.

2. 형제회 외부와의 갈등

가. 파리 대학 교수들과의 갈등

파리와 볼로냐와 같이 명성이 있는 대학들에서 도미니칸을 필두로 해서 탁발 수도회의 교수들도 강좌를 개설하게 되었는데 1252년 드디어 갈등이 불거졌다. 탁발 수도회의 교수들의 비중이 커지자 재속 교수들은 탁발 수도회 교수들이 두 가지 특전의 해당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탁발 수도회 교수들이 강단에 서는 것을 반대하여 왔는데, 1252년 파리 대학이 마침내 수도자들의 학교에 한 강좌 이상의 개설을 금하도록 결정을 하였고, 학교에 소속되지 않은 수도자들은 대학에서 가르칠 수 없도록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학내의 다른 문제로 교수들이 시위를 할 때 탁발 수도회 교수들이 동참하지 않자 학사규정을 어기고 두 개 이상의 강좌를 개설한 탁발 수도회 교수들을 면직시켰다. 이에 수도회 교수들이 교황청에 고소를 하면서 재속 교수들과 수도회 교수들 간의 갈등은 내용을 달리 하면서 심화되어 갔다. 재속 교수들은 손노동으로 살아야 할 탁발 수도자들이 성직자들이 주로 하는 가르침과 사목을 하고 애긍을 하는 것에 대해서 반박을 하고, 더 나아가서 요아킴 피오레의 이론을 잘못 주석하여 “영원한 복음의 입문”이라는 책을 프란치스칸 제라르도가 쓰자 이것을 빌미로 탁발 수도자를 싸잡아 이단으로 몰아 파문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나. 지역교회 성직자들과의 갈등

성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가 살아있을 때부터 교황들은 탁발 수도자들이 교회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성 프란치스코는 작은 형제들이 고위 성직을 맡는 것과 크고 중요한 책임을 맡는 것을 반대하였다. 프란치스코 사후 교황들은 작은 형제들을 포함한 탁발 수도자들을 중용하고 많은 면속 특전을 주었다. 결정적으로 갈등을 빚게 된 것은
본당 사목을 포함한 사목활동을 탁발 수도자들에게 허용한 것이었다. 작은 형제들을 포함한 탁발 수도자들도 교황의 요청에 조심 없이 응답하고 잘못 처신하였다. 즉 프란치스코의 당부에도 불구하고(“그들의 뜻을 벗어나 그들이 거주하는 본당에서 설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다른 모든 사제들을 마치 나의 주인인 듯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원합니다.”) 지역교회 주교들과 성직자들에게 겸손하게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황의 이러한 정책과 탁발 수도자들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해 지역교회 주교들은 의구심을 가지고 가능한 교회법을 엄격히 적용하며 탁발 수도자들의 활동을 제한하려 하였다. 지역 교회 성직자들의 반대에 재속 교수들이 함께 연합 전선을 펴서 탁발 수도회를 공격하였는데, 공격의 핵심은 탁발 수도자들, 특히 프란치스칸의 가난 개념이다. 수도자들의 가난, 특히 애긍은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악 표양이고 다른 가난한 이들에게 가야할 것을 가로채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가 애초에 했듯이 손수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하고 보수가 없을 경우에만 애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해 방어의 선봉에 선 사람이 성 보나벤뚜라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보나벤뚜라의 논박의 요지는 1) 자발적 가난은 복음적 완덕의 극치이고 2) 가난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 복음을 잘 실천하는 것이며, 복음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 가장 잘 설교하는 것이며 3) 최고의 사제는 교황이기에 교황으로부터 설교와 사목권을 받으면 그것으로 유효함을 모두 인정해야 하고 4) 복음에도 애긍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으니 영적인 지도를 하는 사람이 손노동만 하고 애긍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반박이 있었지만 지역교회와 탁발 수도회 간의 갈등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고, 재속 교수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역과 밥그릇의 문제였기에 계속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다. 요한 22세(1321-1334)와의 갈등

외부의 반대자들에 대해 방어하고 반박하면서 형제회 내에 정체성 또는 영성과는 다르게 교만한 태도가 자라나고 있었다. 소유는 물론 사용에 있어서도 가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적인 형제들에 비해 공동체 형제들은 물건은 다 사용하면서도 소유권이 없이 사는 것으로도 가난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1321년 종교 재판관이었던 도미니칸 베온느의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아무 것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셨다.”는 한 베귄 자매의 주장을 단죄하자 프란치스칸들은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이런 반박에 요한 22세는 그 당시 공동체 형제들의 가난 관점과 실천에 대해 눈 가리고 야옹하는 식의 쓸데없는 가난이라고 반박하며, 그렇다면 그동안 형제회의 모든 소유권을 교황청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소유권을 형제회에 돌려주고 형제회 재산 관리를 위해 교황 대리 역할을 했던 Syndicus제도도 금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한 마디로 소유권이 없다고 하였는데 교황청이 형제회의 재산 소유권을 돌려줘도(소유 재산을 관리해 주지 않아도) 소유권이 없다는 것이냐는 반격인 것이다. 이러한 교황의 조처에 대응하여 형제회는 페루쟈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교황을 반박하는 편지를 교황과 신자들에게 보냈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개인과 공동체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단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톨릭적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프란치스칸의 이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러했을 지라도 프란치스칸들은 현재 그러한 주장대로 살고 있지 않으판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요한 22세는 정확한 지적을 하고 있었다.

칙서에서 1)복음적 완덕의 본질은 사랑이지 가난이 아니며, 따라서 2)가난은 사랑에 이바지하는 가난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저 가난만 집착하고, 3)그 가난도 참으로 가난한 것이 아니라 겉치레 가난이라면 말로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더 많이 소유한 것이고, 4)이제부터 법적인 사용이든 실제적 사용이든, 그 형태가 어떠하든 사용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을 별도로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합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요한 22세가 비록 부정적이고 반감적인 태도로 형제회를 대하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지적에 일리가 있음을 형제회는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형제회는 지금까지 해 왔듯이 프란치스코의 이상에서 멀어져 있는 자신을 겸손하게 인정하기보다는 합리화와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을 넘어, 극단적인 교황에 대해 극단적으로 대응하였다.

형제회는 가난에 대한 형제회의 주장은 이단이라고 단죄한 교황에 대해 이를 단죄하는 교황이 이단이라고 맞서고, 교황의 반대 세력이었던 황제 루도비꼬 바바로를 끌어들여 대립 교황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에 요한 22세 교황은 사임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에서 재 선출된 미카엘 체세나 총 봉사자와 주동자들을 파문하고 일부가 참석한 총회에서 자신을 대변하는 형제를 총 봉사자로 선출케 하였다. 이 문제는 대립 교황의 굴복과 요한 22세와 주동자들의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로마 교회에 충실할 것을 프란치스코의 당부를 저버린 뼈아픈 잘못으로 형제회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제 5장 1517년 이후의 역사

1. 완전한 분리

영적인 형제들에 비해 준수파 형제들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과 겸손이 밑바탕이 된 회칙의 준수 때문이었고, 일치와 사랑을 떠나지 않는 이상의 추구 때문이었다. 겸손과 사랑이 결여된 비판은 비판자가 아무리 옳고 비판의 내용이 아무리 옳아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불의의 비판보다도 정의의 실천이 더 정의를 구현하고, 정의의 외침과 실천보다도 사랑의 실천이 더 평화로운 정의를 가져다주는 법이다. 준수파 형제들의 이러한 실천이 점차 공동체 형제들의 지지를 얻어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준수파 형제들은 독자적인 장상을 갖게 되었고, 1438년에는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가 준수파의 초대 총 대리가 되었다. 그리고 1450년에는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가 죽은 지 6년 만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면서 준수파에로의 쏠림이 가속화하게 되었다. 이 가속화는 형제회 내 에서뿐 아니라 밖에서도 가속화되었으니 교황들도 제후들도 준수파를 지지하여, 1500년 스페인에서는 마침내 가톨릭 왕 Ferdinando와 왕비 Isabella의 뜨거운 지원 하에 형제회를 강제로 준수파로 통합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거부한 소수의 공동체 파 형제들은 모로코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형제회 내부에서는 총 봉사자 에지디오 델피니가 공동체 파 형제들을 개혁시키면서 통합을 추진하였다. 개혁과 통합을 동시에 이루고자 하였지만 공동체 파 형제들과 준수 파 형제들 모두 반대하였다. 그래서 1506년에 모든 개혁 그룹이 참석한 총회에서 에지디오 델피니의 사임이 받아들여지고 통합을 논의하고 교황이 1208년 규정까지 공포하였지만 이태리 준수 파 형제들이 이를 거부하여 개혁적인 통합의 마지막 노력과 기회도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여기에 여러 국가의 왕들이 교황에게 압력을 가하여 준수 파 형제들이 총대리가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총 봉사자를 갖게 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레오 10세는 1517년 모든 개혁 그룹이 참석한 로마 총회에서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였다. 이 총회에서 교황은 마지막으로 공동체 파 형제들이 개혁을 받아들이고 준수 파 총 봉사자를 두자고 제의하였지만 공동체 파 형제들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교황은 준수 파가 작은 형제회를 대표하게 되었고, 공동체 파 총 봉사자는 직인을 준수 파 총 봉사자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1517년 5월 29일 교황은 "Ite vos in vineam meam" 칙서를 반포하여 공동체 파 형제는 총 봉사자 선출에서 제외시키고 준수 파 총대리가 전체 작은 형제회의 총 봉사자가 되게 하였고, 관구 봉사자 대리는 관구 봉사자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칙서로 개혁 그룹은 모두 작은 형제회(OFM)로 통합되었고, 공동체 파에서 준수 파로 넘어갈 수도 없었고, 준수 파에서 공동체 파로 넘어갈 수도 없게 되었다.

2. 카푸친의 개혁

준수 파 형제들의 개혁은 성공과 더불어 제도화되어 갔다. 15세기 후반에 태어난 Mateo da Bascio는 이탈리아 안코나 지방 마르케스 준수 파 관구의 사제이고 설교자였는데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에서 벗어난 수도회의 모습에 실망하고, 장상에게 이상을 살려는 원의를 얘기하였지만 장상은 공동체 안에서 그 이상을 살라는 권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525년 어느 날 마태오는 가난한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 가난한 사람이 환시에서 본 프란치스코라고 생각하고 그 가난한 사람이 입었던 것과 같은 뾰족한 모자가 달린 수도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기 관구를 떠나 로마로 가 1년에 한 번 관구장에게 순종을 성원하는 조건으로 교황의 허락을 청하였다. 그러나 교황에게 약속한 대로 관구장, Fano의 Giovanni에게 갔을 때 관구장은 공동체를 떠나있는 것과 다른 수도복을 입은 것 때문에 감옥에 가두었다. 이 때 마태오를 구해낸 것은 백작 부인들이었는데, 이는 준수 파 형제들이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힘을 키웠던 것과 같았다. 이 때 많은 형제들이 그에게 합류하였고 카푸친 개혁의 실질적 지도자인 Fossombrone의 Ludovico 형제도 이 때 합류하였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은 이들이 꼰벤뚜알 형제회를 찾아가 자신들의 보호를 부탁한 것이고 꼰벤뚜알 형제회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관심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형제회는 파문을 포함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을 회유하고 압박하였고, 끝까지 형제회로 돌아가지 않은 마태오와 루도비꼬 형제는 후임 관구장 바울로의 허락 하에 꼰벤뚜알 관할권 아래 들어가 보호를 받게 되었다.

1528년 끌레멘스 7세 교황은 루도비꼬의 요청을 받아들여 칙서로서 그들의 삶을 인준하였는데, 그들의 고유한 수도복과 용모를 허용하고 꼰벤뚜알 관구장의 관할 하에 수도자를 받아들이고 은둔자의 옷을 입고 한적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였다. 1529년 이들은 총회를 열어 1) 엄격한 가난의 삶, 2) 기도생활, 3) 회칙의 준수, 4) 은둔과 침묵을 골자로 하는 회헌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자 교황은 끌레멘스 7세는 또 다른 칙서를 통해 카푸친의 개혁을 격려하였고, 그 결과 많은 Observantes 형제들이 카푸친 형제가 되었다. 그들 중에는 카푸친을 탄압했던 Fano의 Giovanni도 있었고, 당대의 유명한 형제들Bernardino D' Asti(후임 총 대리), Francisco da Jesi(교회 법 박사이자 후임 총 대리), Bernardino Ochino(가장 유명했던 설교가, 후임 총 대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격변의 시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마태오와 루도비꼬는 카푸친을 떠나게 된다. 마태오와 루도비꼬는 대조되는 인물이었다. 마태오는 총 대리로 선출되었어도 스스로 사퇴하고 그저 자유롭게 그리고 소박하게 살고자 했고, 그래서 자신의 영적인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며 수도원 밖에서 설교가로서 사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에 비해 루도비꼬는 엘리아와 같은 사람이었다.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엘리아처럼 총회를 소집하지 않고 독재적으로 통치를 하였으며 형제회에 심고자 했던 정신은 많은 회원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교황의 개입에 의해 총 대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카푸친을 떠났다. 그리고 Bernardino Ochino도 개신교로 개종하여 파문까지 당하게 됨으로써 카푸친 개혁은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Francisco da Jesi와 후임 총 대리들의 노력과 교황의 보호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1619년 꼰벤뚜알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3. Observantes 안에서의 새로운 개혁들

레오 10세의 Ite Vos 회칙으로 Observantes와 Conventual이 완전히 결별하고 둘 사이의 다툼이 완전히 해결되었지만 개혁 그룹들 사이의 일치와 조화의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1518년 교황의 명에 의해 리용 총회는 회헌을 작성하고 1523년 수정을 하였지만 이 회헌은 이전의 바르셀로나 회헌을 조금 고친 새로운 회헌에 불과하였고 그래서 Cismontana(이태리 쪽) 형제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Cismontana(이태리 쪽) Observantes 관구들은 따로 회헌을 갖게 되는데 1529년부터 1684년까지 12번의 회헌 개정을 하였고, Ultramontana(알프스 너머) Observantes 관구들도 두 차례 더 회헌을 수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회헌이 자주 수정되자 관구들은 안정을 찾기 위해 자기들의 고유한 회헌들을 가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형제회의 일치에 크나큰 피해를 주었다. 그 결과 유럽의 주도권을 놓고 스페인과 프랑스가 대결하는 형국이 되었고, 왕들은 교황의 선출에 그러했던 것처럼 형제회의 총회에 쓸 데 없이 개입하게 되었다. 1517년 이후 6년마다 Cismontana와 Ultramontana가 번갈아 총 봉사자를 배출했는데, 총 봉사자가 없을 때는 총 봉사자 Commissary를 두어 자치케 하였고, Ultramontana 내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이 전쟁을 벌어져 이것마저 어렵게 되자 스페인, 프랑스, 독일 관구들이 각기 총 봉사자 Commissary를 갖게 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자발적이든 강제로든 Conventual에 있다가 Observantes가 된 형제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와 특전들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총회와 총 봉사자들은 이런 것들을 강제로 포기케 하였으며, 재산 관리를 도와주던 “영적인 벗들”의 문제와 돈 사용 문제도 개혁 그룹과 공동체 형제들 사이에 있었다.

가. Retiros(은둔소들)

프란치스코 때부터 있어왔던 은둔소의 형제들은 회칙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는 Observantes들이 다시 이전의 Conventual 형제들과 같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회칙을 더 철저한 준수하며 살고자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스페인에서 강하게 일기 시작한 이 운동은 푸에불라의 요한이 아시시 카르체리 은둔소를 모방하여 세운 은둔소에서 엄격한 가난과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허락을 1487년 받음으로써 많은 은둔소들이 이에 합류하였고 그들만의 규정을 갖게 되었다. 1523년 푸에불라의 요한의 제자였던 로스 앙헬레스 퀴노네스의 프란치스코가 총 봉사자가 되어 이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그 관구의 은둔소들에 특별한 규칙을 주고 이 운동을 전 형제회로 확대시키려 하였다. 이 은둔소의 형제들은 기도와 침묵과 엄격함의 삶을 살았고 직접은 물론 영적인 벗들을 통해서도 돈을 받지 않았다. 장상들의 반대를 받지 않았다면 제도 안에 한 위치를 차지하였을 터이지만 후임자와 장상들은 이 운동을 위험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태리 쪽에서도 일어났는데 1518년서부터 1520년까지 총 봉사자였던 Francesco Lichetto는 이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이태리와 독일 오스리아 관구들을 법적으로 방문하면서 병든 형제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단 한 해에 72명의 수호자들을 면직하고 은둔소에 사는 형제들에 대해서는 격려를 하였다. 후임자와 장상들의 반대를 받았다.

이런 반대를 받기도 하였지만 이 운동은 대부분의 관구, 특히 리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의 관구에서 존재를 계속 유지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총 봉사자였던 곤자가의 프란치스코(1579-1587)의 도움을 받아 융성하였고 다른 개혁 가족인 Recollect를 탄생케 하였다. 이 은둔소들은 자신들의 장상 아래에서 살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독립적인 관구들로 발전하기도 하였는데, 다른 한 편 Discalced나 다른 개혁 가족과 합쳐지기도 하였고, 카푸친 개혁 운동으로 넘어가기도 하였다. 1676년 총회는 관구 내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 관구에 3-4개의 은둔소만 두도록 제한함으로써 관구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고, 설교자들은 이 은둔소에서 영적으로 힘을 얻어 설교에 열성을 다하곤 하였는데, 바르셀로나의 복자 보나벤뚜라(-1684)나 뽀르또 마우리지오의 성 레오나르도(-1751)나 코리의 복자 토마스(-1739)와 그의 제자 코르테의 성 테오필로스(-1740)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 자치 개혁 단체들

1) Discalced

푸에불라의 요한의 제자였던 과달루페의 요한(-1506)은 1496년 교황 알렉산델 6세로부터 몇 명의 동료와 함께 그라나다 은둔소에서 프란치스코가 입었던 수도복과 같은 형태의 수도복을 입고 복음과 회칙을 엄수하며 살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총봉사자에게 직속하며 교황의 파견을 받아 어디서든지 설교할 수 있었고, 회칙이 얘기하는 대로 짧은 수도복을 기워 입고 다녔으며 신발도 신고 다니지 않아 Discalced란 명칭을 받게 되었다. 1517년 수도회 분리 후 한 동안 Conventual에 속하기도 하였지만 알칸다라의 성 베드로 때에 Observantes로 넘어 와 고유한 회칙과 수도복을 입고 살았다. 알칸다라의 성 베드로 때문에 Alcantarines라고도 불린 이들은 점점 발전하여 필리핀 선교까지 하게 되었다. 이들은 상당히 독립적이고 자치적으로 살았고, 은수적 생활에서 힘을 얻어 활기차고 정열적인 활동도 하였다. 이들에게서 9명의 성인들과 복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성녀 대 데레사의 영적 지도자요 고백 사제였으며, 그래서 자신의 자서전에서 대단한 찬사를 보낸 알칸다라의 성 베드로(-1562)와 단순성과 성체 신심의 모범이었던 파스칼 바일런(-1592)과 필리핀과 일본에서 선교하다 죽은 요한 바티스타(-1597)와 동료 순교자들이 그들이다.

2) Reformati

Ritiros에 속했던 제시의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디노 다 아스티가 디스칼체드와 비슷한 삶을 살고자 시작하였지만 이들은 카푸친으로 넘어갔고, 다른 형제들에 의해 이태리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 시작하여 차츰 오스트리아, 독일, 크로아치아, 폴랜드, 항가리 등으로 퍼져 나갔다. 이들도 상당한 자치와 독립을 누렸고, 18세기 경에는 37개 관구에 19,000명의 형제들이 있었다. 디스칼체드만큼 질적이나 양적인 면에서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삶을 산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평형제인 성 베네딕또 무어(-1589)와 산 세베리노의 성 파치피코(-1721) 등이 이 개혁 가족에 속한다.

3). Recollects

Ritiros 운동이 스페인으로부터 프랑스로 퍼져 갔지만 종교 전쟁으로 성공을 못하다가 카푸친 개혁이 일어나자 의도적으로 Ritiros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들도 디스칼체드나 Reformati, 카푸친 개혁 운동과 같은 생활양식을 살고자 하였고, 다른 개혁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자치와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 Ritiros 또는 Recollection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1633년 총회가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을 결정했지만 Recollect로 계속 불렸다. 독일, 벨지움 등으로 퍼져 나갔으며, 18세기경에는 25개 관구에 11,000명의 형제들이 있었다.
4. 대 시련

작은 형제 회는 개혁 운동들의 자극으로 Observantes, Conventual, Capuccini 모두 끊임없이 내부 개혁과 쇄신을 하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래서 1760-70년 사이의 작은 형제들의 수는 Observantes 76,892명, Conventual 25,000명, Capuccini 34,029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때를 정점으로 작은 형제 회는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데 그것은 내부적 이유와 그 당시 교회 공통적으로 처한 외부적 상황 때문이었다.

가. 내부 문제

18세기 후반 유럽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는데, 문예부흥의 인본주의가 모든 분야에 스며들기 시작하여 반종교적인 사회가 형성되고 있었다. 탁발 수도회들은 그 시대 반 가톨릭 세력들, 백과사전파 계몽주의자들, 얀세니스트들, Freemason들의 주공격 대상이었는데 그것은 탁발 수도회들, 특히 형제회가 교황권과 교회 초국가주의의 가장 강력한 버팀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변화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혁 운동 단체들의 끊임없는 쇄신의 노력으로 형제회가 세상과 교회에 매력을 주고 신선한 영향을 계속해서 미치자 형제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자 힘을 가진 자들, 기득권자들이 보통 보이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도 형제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 계속되리라 안심하고, 세상의 요청에 민감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안주하며 이전의 그 끊임없는 쇄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렇게 밑으로부터의 개혁과 쇄신이 사라지자 위로부터의 개혁의 몸부림이 있었다. 국가주의, 파당적이고 세속적인 야망, 가난 정신의 쇠퇴, 젊은이들의 양성에 있어서 소홀함 등이 Observantes, Conventual, Capuccini 총 봉사자들이 끊임없이 염려하고 쇄신을 호소하던 주 주제였다. 아울러서 개혁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옛날의 그 은둔소의 정신과 삶을 재현하고자 하였지만 대부분 실패하였다 *******이상

****************************재속프란치스코 평화의사도 대전지구 리포트 김영우(시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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