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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창보게시판

충분함의 윤리

조회 수 6020 추천 수 0 2006.11.08 10:14:50




백미정 안젤라 fmm


충분함의 윤리
저는 인천 석남동에서 가정환경이 결핍된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이들과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의 꿈이나 이상을 경제 즉 돈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고 있답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냐고 질문을 하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해 봅니다.
저희 공부방의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필요한 생필품들을 구입할 수 있고 소비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직장을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 다음 해에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좀 더 풍족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또 한편으로는 공해문제에 있어서 정부들은 좀 더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비닐하우스의 영향과 오존층의 파괴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쓰고 있으며, 자동차, 냉장고나 에어컨 사용, 헤어스프레이 등이 지구에 공해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의 문제 뒤에는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풍족하게 산다는 것과, 다음 해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풍족한 삶을 사는 것에 희망을 두는 데에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풍족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과연 이 시대에 어떤 정부가, 어떤 경제전문가들이, 어떤 은행이 우리는 반드시 “풍족함의 경제”로부터 “충분함(만족함)의 경제”로 바꿔야 한다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다음에서 우리가 왜 충분함으로서 가난, 충분함의 윤리에 대하여 용기 있게 외쳐야하는지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충분함의 윤리는 저희 수도회의 1996년 총회문서의 행동노선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오늘 나누는 충분함의 윤리에 대한 내용들은 저희 수도회의 정평창보 전담자이셨던 로즈 페르난도 수녀님이 각 관구에 숙고 자료로 보내주셨던 내용들을 모아 정리한 것입니다.


1) 왜 충분함의 윤리학인가?
다음의 통계는 인식을 이끌어내고 충분함의 윤리에 바탕을 둔 행동노선에 확신을 갖고 응답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시합니다. 그 숫자들과 사실들은 때로 우리에게 부자들에 대한 분노와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결코 누군가를 고발하여 손가락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그러한 경향을 살펴보자는 초대이며, 가능한 곳에서는 상황을 변화시켜 보도록 도우려는 것입니다.

▶ 인간 생명이 파괴되고 있는 상태
- 북반구에서는 10억 이상의 사람들이 최저소득기준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남반구의 12-15억이 절대빈곤 하에 살고 있다. 이것은 계속해서 커지기만 하는 빈부차이에서 기인합니다.
- 가장 부유한 20%가 세계 자원의 80%를 소비합니다.
- 인류의 80%가 세계 무역에 있어서 18%밖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 세계 인구의 10%가 나머지 90%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즉 90%의 인류는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 4만명이 매일 기아로 죽고 있습니다.
- 3만 5천명의 어린이들이 매일 영양실조로 죽고 있습니다.
- 8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매일 굶주리고 있으며,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공급의 압박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굶주림은 절대적인 식량부족 때문이 아니라 소득과 분배의 불균형 때문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세계적으로 40퍼센트 정도 되는 많은 양의 곡물이 가축사료로 사용되고 있지만 굶주린 사람들은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공식적인 시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12억의 사람들이 안전한 식수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 15 - 20억은 의료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10억 이상이 문맹이며, 약 1억 3천만명이 초등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 거의 10억의 사람들은 집이 없으며, 적절한 주거지를 갖지 못한 이들도 10억이나 됩니다.
- 세계 인구의 40%는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현 세상 속에서 한 종족의 말살이 조용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 2006년 지구 환경보고서에 의하면 아시아와 태평양에서는 대기오염, 안전하지 않은 물, 열악한 위생과 같은 환경문제로 인해 매년 2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합니다.

▶ 환경 속에서 생명이 파괴되고 있는 상태
- 해마다 23,000스퀘어의 경작지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 지난 50년간 열대 숲의 50%가 파괴되었다.
- 브라질의 아마존 산림벌채율이 2004-2005년 1년 사이에 6퍼센트 올랐습니다. 이는 벨기에 정도의 크기인 2만 6,000평방킬로미터의 숲이 사라진 것이고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손실입니다.
- 비옥한 토양이 침식되어가고 있습니다. 1988년 이후 지표면의 20%가 황폐화 되었습니다.
- 약 80개국에서 식수가 부족하며, 이는 세계 인구의 40%에 해당합니다,
- 오존층의 감소,지구 온난화(세계기상기구는 2004년이 기록상 네 번째로 더운 해였다고 보고합니다. 이는 100동안 가장 더웠던 10년이 1990년 이후에 있었던 경향이 이어진 것입니다. 2005년 9월 연구자들은 북극 얼음의 해빙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데 지난 30년간 얼음지역의 8퍼센트가 없어졌고, 2100년 이전에 얼음 없는 여름을 맞게 될 수도 있다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연재해의 급증하고 있습니다. (2005년 8월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의 80퍼센트를 물에 잠기게 하고, 1,250억달러로 추정되는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며 미국의 걸프 해안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는 대형 허리케인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 해안을 강타했을 때 해안습지(갯벌)와 주변 섬들이 방벽이 되어 태풍의 큰 파도를 완화시키는 생태계 기능을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에 있습니다. 1930년대부터 루이지애나에서는 49만 2,000헥타르의 해안습지가 소멸되었습니다. 태풍의 힘을 환충시켜 해안지역을 보호하는 자연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입니다. 일부 습지는 간척사업을 통해 상업시설로 채워졌고, 다른 지역은 상류의 공사 구조물이 미시시피강의 침니 운반을 감소시키면서 삼각주에 토양이 보충되지 않음에 따라 소멸되기도 했습니다. 카트리나는 자연생태계시스템의 파괴가 재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로 증대시킬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최근의 다른 기상이변들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2004년 5월과 9월의 태풍이 발생했을 때 아이티섬의 주민들 중 거의 5,000명이 생명을 잃었고 수 만 명의 주민들이 집을 잃었습니다. 이를 자연재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재난은 명백하게 인간의 활동, 즉 벌목에 의해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빈곤에 대한 대책의 부재로 인해 아이티의 빈곤층은 산지에 있는 대부분의 나무를 잘라서 땔깜과 숯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이로 인해 이들은 국지적 홍수유출의 완화와 토사 유출의 방지 등 산지유역이 제공하는 귀중한 혜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티를 절망에 빠트린 태풍 카트리나는 유역이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있는 이웃 푸에르토리코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듯이 2004년 12월 26일 쓰나미가 동남아시아 해안 국가를 강타하고 27만 3,000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등 240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힘에 따라 해안 망그로브 숲과 산호초가 발휘할 수 있는 태풍과 파도로부터의 보호 기능 등 생태계시스템의 기능이 소중하다는 점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습니다.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에서 자라는 망그로브는 뿌리가 서로 얽혀 있고 매우 밀식되어 자라기 때문에 태풍과 파도의 공격을 더욱더 잘 흡수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방호벽은 호텔, 새우양식장, 여러 상업시설로 인해 사라지고 있으며 태국의 해안 망그로브 숲의 절반이 이렇게 사라졌습니다.)
- 대기오염의 40%는 자동차 때문이다.
- 세계 인구의 20%가 상업용 지구 에너지의 82%를 소모한다.
- 매 12분마다 지구에서 생물 1종이 소멸되고 있다.
- 1989년과 1995년 사이에 90건의 무력분쟁이 있었으며, 이것은 인간과 환경 모두에게 있어서 생명 파괴의 원천이 된다.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은 생명을 누릴 권리가 있지만 점차 그 생명이 파괴되어가고 있다.)

2) 현존하는 세계문화 속에 있는 어떤 경향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역사상 처음으로 진보와 경제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지상의 모든 생명이 소멸될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생명파괴는 소비주의, 물질주의, 축재와 소배의 경향을 지닌 현 세상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개인이나 공동체, 단체나 조직들이 생명을 위한 분명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파괴의 원인이 되는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축재와 소비의 경향을 지닌, 현존하는 세계문화의 부정적인 측면들 편에 종종 부지불식간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배제시켜주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경향들은 경제상황이나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어떤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들 보다 일상적인 것입니다.

이 도전은 깨어있음으로써 그것에 맞서보려는 움직임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i) 우리 안에 있는 소비주의, 물질주의 등의 경향에 대하여 ;
- 물, 전기, 종이 등을 과소비하는 무의식적인 습관과 행위들
- 필요가 생길 때를 위하여 모으거나 축적해두는 것
ii) 낭비하는 경향에 대하여;
- 음식이나 옷, 기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 수돗물, 전기, 컴퓨터, 핸드폰 및 기타 전자제품들을 쉽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iii) 필요나 결핍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경향에 대하여(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구분)

3) 모든 수준에 있어서의 과소비 경향
과소비 경향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과외의 필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거나 혹은 과거의 부정적인 체험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혹은 대중매체의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 안에 인류의 대다수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즉, 경제적인 안정과 안전한 의료시설, 자동차, 각종 가전제품, 우편서비스, 질적이고도 양적으로 좋은 음식, 고등교육, 여행 등과 같은 것 말입니다.

4) 인류의 3중 위기
오늘날 세계의 경제 질서는 세 가지 위기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가난
- 환경 파괴
- 사회의 분열
이 세 가지는 상호연관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가난은 권세 있는 자들과 물질적인 부를 소유한 자들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는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난한 이들은 주변으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거의 완전히 소외당하고 있고, 그 결과 사회의 분열은 더욱 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증가되고 있는 환경 파괴는 인간의 탐욕스런 활동과 특정 사회와 상류 계층들의 과소비와 지나친 낭비에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되는 상황에 처한 이들은 계속해서 생필품마저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충분함의 윤리를 살아가자는 이 요청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지 자문해보자는 초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적당히 품위 있는 생활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충분한 것보다 그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면, 검소한 삶을 사는데 꼭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로부터 ‘검소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빼앗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5) 윤리적인 문제
인류가 침묵 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나 점진적인 지구의 파괴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이고도 윤리적인 문제입니다.
과소비(모든 수준에서)는 증가되고 있는 자기중심주의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우리가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다른 이들은 점점 더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원할수록 지구의 생존 위기는 더욱 더 심화됩니다.
이것이 영적이고도 윤리적인 문제라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합니다, 인간 안에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충분함의 윤리를 장려해나가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6) 충분함의 윤리를 통해 제자직을 살아가는 것
충분함의 윤리를 살고 장려해나가기 위한 우리의 선택은 단순히 사회적이고도 생태학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며, 그것이 제자직을 살아가는 우리의 소명에서 흘러나오는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도 그러했습니다.

13세기 아씨시는 아주 급속도로 경제가 성장하였습니다. 13세기에 이르러 진행된 봉건제도의 약화로 인해 영주를 정점으로 많은 농노가 농사를 짓는 봉건적 경제 구조도 붕괴되면서 상인 계급이 부상하였습니다. 발달된 교통과 많은 여행이 교역을 촉진하였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상인 계급이었고 그의 아버지도 옷장수였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회개 이후 돈을 만지지조차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의 회개는 아주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글라라의 전기에 의하면 그녀는 어릴때부터 거룩함을 즐겼다고 합니다. 귀족이었고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녀와 대조적으로 프란치스코는 무역으로 부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이 같은 급속한 경제 성장 상황에서 그들은 아주 분명하게 소유욕으로부터 벗어나 복음적 가난을 선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 돈과 신분에 대한 욕망, 더 가지려는 탐욕이 지배하던 당시에 소유욕을 거부하는 삶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수도회도 아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개인으로는 몰라도 수도원으로는 아주 부유한 이미지를 주었었습니다. 부자들이 입회할 때 자신들의 재산을 수도원에 헌납하였기에 수도원은 아주 쉽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기존 수도회 형태를 거부하고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말라고 권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순회 설교사들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회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는 뽀르찌웅꼴라에서 들었던 그 말씀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아주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칸 전기 학자들은 글라라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가난의 특권입니다. 프란치스코도 가난 부인을 선택하였다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왜 그는 “가난 부인”을 선택하였을까? 젊은 남자에게 여성은 매력적입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삶의 모든 것이 되는 여성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회개 후 그분은 가난을 그러한 여성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즉 가난을 삶의 모든 것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모든 기쁨과
행복을 여성에게서 보다 가난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성녀 글라라는 또 다른 선택, 즉 가난의 특권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은 성녀 글라라가 이 말로써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였는지를 다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모든 수도원은 교황님 직속이었고 교황님은 각 수도원에 보호자 추기경을 지정해 주었습니다. 글라라는 교황님에게 가난의 특권을 살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면서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경제적 안정도 가지지 않을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13세기 수도원의 상황에서 이 청원은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겠습니까? 성녀 글라라는 오직 하느님에 의존하여 살겠다는 의지로 교황님에게 이러한 청을 드렸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가난은 단지 하나의 서원만이 아니라. 하나의 특권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난을 서원이 아니라 특권으로 여긴다면 우리 삶에는 다른 면이 있을 것입니다. 글라라에게 있어서 가난은 특권이었습니다. 이 특권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가난을 그대로 사는 특권입니다. 글라라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서원이라기 보다는 특권이라고 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교황님께 청하고 보호 추기경에게 원했을 때 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이런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몰랐지만 글라라를 지지해 주었고, 결국 교황님도 허락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글라라의 방법으로 복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우리는 아주 강한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필요한 것을 만들고 있고 텔레비젼 광고는 그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아주 빠른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에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이러한 선택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요? 우리가 가난의 특권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가난이 특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충분함의 윤리에 바탕을 둔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충분함으로서의 가난’은 도움이 되는 개념입니다. 충분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구의 자원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할당될 수 있는 몫보다 더 많은 양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성프란치스코의 완전한 가난은 그 절대적이고 끝이 없는 요구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지구자원이 가져다주는 혜택의 대부분을 누리면서 이 자원을 고갈시키는 죄까지 범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인간지향적이고도 환경지향적인 크리스챤 양심에 바탕을 둔,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장려해나가도록 불리움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창세 1, 27)는 것에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지니셨던 그와 똑같은 존경심을 가지고 인간과 지구 자원을 대하라는 관리자로서의 소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 세상에서 우리 선교는 우리로 하여금 전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연민을 알리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파괴에 관하여 우리 생활양식을 통하여 고발하도록 강요합니다. 이는 지구 전반에 걸쳐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에서 힘 있는 증거가 됩니다, 현대 세계문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파괴는 더 많이 소유하려는 것과 관련된
것이므로, 대안적인 생활양식은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함으로써 용기 있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만 이는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윤리학과 영성은 하나의 과정이자 영적 여정입니다.

* 숙고를 위한 질문들
- 인간과 하느님의 피조물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생명파괴에 관한 인식을 계속 심화시켜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 우리가 만들어내려는 필요나 갈망들에 맞서 용기 있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충분함으로서의 가난을 더 깊이 숙고 위하여 다음을 살펴보면....

7) “우주선 생활 양식”
우주선 안에서 살아가는 우주 비행사는 소중하고 제한된 자산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면서 재활용되어야 하고 버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단 버려진 것은 다시 얻을 수 없습니다. 재활용하지 않고 쌓아둔 것은 생활공간을 더럽힐 따름입니다. 모든 이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고 또 미래를 위한 충분한 비축이 되어 있지 않는 한, 아무도 꼭 필요하지도 않는 소비를 하려들지 않습니다. 데이빗 콜텐(David C. Korten)은 자신의 저서인 ‘협력으로 세상이 다스려질 때’에서 케네쓰 불딘(Kenneth Boulding)의 고전적인 에세이인 “우주선 지구호의 미래의 경제학”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불딩은 지구라는 행성이 겪고 있는 문제는 아주 섬세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생태계를 가진 이 살아있는 “우주선”에 거의 58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비하여, 우리가 카우보이들처럼 한계를 모르는 개척자로서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을 옹호하고 있는 이들은 불딩의 제안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쓰고 버리는 사회를 장려하고 과소비를 조장하며, 세계 인구의 4/5가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환경 파괴에 무관심하며, 미래의 세대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 개인 숙고를 위한 질문
- 나의 생활 양식에는 어떤 경제 이론이 반영되어 있는가?
- 나는 마치 자원이 무한정 있다는 듯이 살고 있는가?
- 혹은 우리의 지구는 우주선처럼 제한된 자원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자원을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미래의 세대들과 나누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
- 나는 원하는 대로 이 자원을 이용하고, 원하지 않으면 쉽게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축적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 자원들을 이용하고 있는 가?
-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가능한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재활용하기 위해서 나는 어느 정도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또한 현대과학기술문명의 사용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 물건은 사람들을 영적 존재로서 활동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가 혹은 방해하는 것인가?
- 이 물건은 사람들을 이웃으로 활동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가 혹은 방해하는 것인가?
- 이 물건은 사람이 창조적이 존재로 활동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가 혹은 저해하는 것인가?
- 이러한 숙고의 결과 충분함의 윤리에 관하여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

8)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응답
자연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우주적인 형제애를 건설하기 위하여, 프란치스칸인 우리의 응답은 통합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다음을 요구합니다.
- 저항의 영성
- 우주적인 비젼
저항의 영성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상황에 반대되는 문화를 건설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소비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을 지닌 “세계화의 문화”속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저항의 영성은, 특히 우리의 생활양식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고,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들을 고발하라는 부르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원을 새롭게 바라보라는 것은 (1)‘가난이 심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복음적 가난을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철저하게 응답하면서: (2) 세계적인 파괴의 문화 속에서 용기있게 그리고 대담하게, 생명에 ‘예’라고 말함으로써: (3)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고 모든 이들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는 삶을 살기로 분명한 선택을 함으로써, 적절한 표지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우주적인 비젼은, 우주적 형제애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현 세상에 프란치스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우리의 삶과 사도직을 통하여 우주적 형제애를 증거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은 넓은 의미로 억압받는 지구에게 귀기울이고 하나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바위나 물, 공기처럼 지구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구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작가인 제임스 콜론은 “지구-정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지구-정의란 지구와 지구에 속한 모든 억압받는 것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칸 전통 안에서 지구-정의란 “우주적 형제공동체”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주적 형제공동체란 간단히 말한다면 인간이든 아니든 창조되어지고, 창조된 모든 것이 내 존재의 일부, 깊은 내면의 느낌인 것입니다.

우주적 형제공동체란 이 세상을 새로운 방법-새로운 지구, 새로운 인류, 새로운 창조의 탄생을 가져오도록 하는 우주적 성령강림(지구는 그 어느 시대보다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고통은 또한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의 우주적 성령강림을 희망하고 있습니다.)을 보도록 하는 그리스도 안의 하나의 영감, 하나의 초대인 것입니다. 우주적 형제 공동체는 다른 창조물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지구는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빌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인 우리를 지구 안에 포함시키기로 선택하셨기에 우리는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의 프란치스칸들도 선한 뜻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지구 모든 창조물들과 형제 자매로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근본적인 목표를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이 진실을 선포했고 살았습니다. 800년 이후의 오늘날까지 수많은 삶들이 매력을 느꼈던 그의 메시지는 바로 이 우주적 형제공동체였던 것이었습니다. 우주적 형제공동체는 우리 삶 안에서 분리됨과 이중성을 치유하도록 도전을 줍니다. 상처받는 지구, 희생된 지구와 실천적 연대를 맺는 것입니다. 우주적 형제공동체는 프란치스칸들을 정의의 사람들, 평화의 도구, 상호연관성의 촉진자, 창조의 짜임 안에서 단절된 것의 치유자가 되도록 초대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환경수호자이시며 평화의 모델이십니다. 그분은 그분 생애에 한 가지 근본적 구별을 두셨습니다. 그것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분입니다. 성인은 모든 피조물이 자매애와 형제애를 나누는 것을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이 한 분이신 창조주께 대한 사랑스런 상호의존의 관계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태양의 찬가는 우주적인 형제애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찬가는 프란치스코의 전 인격을 반영해 줍니다. ‘피조물의 찬가’는 하느님을 향한 위대한 찬미의 분출이며, 이 찬가는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한 형제적 친교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나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프란치스코는 피조물들을 무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분은 피조물 없이 적절하게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우주적 형제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느낌은 그의 동정심과 모든 피조물들과의 사랑스런 관계로부터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느낌은 그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들과 형제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주적 형제공동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구 공동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듯 그의 비전은 우주적이며, 그는 늘 하느님과 인간, 자연의 현존 안에서 살았습니다. 이 세 가지 실재들이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안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었으며, 그 중 하나와의 관계는 다른 실재와의 관계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우주적 형제공동체는 우리를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과의 보다 깊은 관계에로 투신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경축하기 위해 우주 안에서 우주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적 형제공동체는 지구와 그 안의 모든 형태의 생명체를 육성하고, 보호하고, 방어하도록 우리를 투신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우주적 관계로부터 우주적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것입니다.

9) 우주적 형제애는 현대의 3중 위기에 대한 응답입니다.
충분함의 윤리를 선택하는 것은 우주적 형제애를 선택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충분함의 윤리를 참되게 살아갈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과 물질적인 소유물,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며, 우주적 형제애라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심화시켜갈 수 있게 해줍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영성은 그의 작음과 가난, 평화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증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효과적인 것이 되려면 우리 또한 프란치스칸 작음과 철저한 가난, 평화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가난은 환경보존과 경제, 평화를 위한 프란치스칸 이름입니다. 이 지구의 물건들이 올바르게 분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폭력과 지구의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착한 관리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한 생활방식으로 산다는 것과 평화를 조성하는 자, 그리고 사회 안에서 평화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환경보존을 유지하는 사회는 성장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장이 무엇을 위하고, 누가 혜택을 받고, 비용이 얼마나 들고, 얼마나 그 성장이 오래가는지, 지구와 지구의 자원들을 고갈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질문 후에 성장을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양이 아닌 질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환경을 보존하는 사회는 경제성장에 관해서는 적게 관심을 보이고, 환경보존 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정부와 사업가들이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점점 더 투신할수록 지구의 자원은 급속히 고갈될 것이고, 지구는 천천히 죽어갈 것입니다. 사람들의 투신이 ‘경제성장 제일주의’에서 ‘충분함의 경제’로 변화되는 기본적인 자세가 바꿔지기까지는 먼 길에의 여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여행해야만 하는 먼 길인 것입니다.

한가지 유일한 도전이 프란치스칸인 여러분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 앞에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함으로써 용기 있게 ‘충분하다’고 말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삶 안에서 그와 같은 변화를 추구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미비할지라도 생태위기에 대한 인식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 것이며, 그에 대한 해결책은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올 것입니다.

* 숙고와 토론을 위한 질문들
- 당신의 방에 있는 물건들과 소유물의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 물건들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없어도 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지난 12개월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없어도 되는 것입니까?
- 가능한 곳이라면, 공동체(가정) 수준에서도 공동체(가정)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이러한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위의 질문에 대하여 숙고한 후:
- 충분함의 윤리와 관련하여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 우주적 형제애와 관련하여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 당신과 공동체(가정)는 현대의 소비주의 문화를 거슬러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혹은 태도나 경향에 있어서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합니까?
- 우리가 만들어 내는 필요와 갈망에 대해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이와 관련된 어떤 경험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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