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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창보자료

[환경]생명

조회 수 3017 추천 수 0 2004.06.12 10:20:42
4장. 생명


작은 형제들의 회헌 96조 2항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껏 궁핍함과 불의와 압박에 매여있기에, 형제들은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정의와 해방 및 평화의 사회를 복구하는데 전념할 것이다. 그리고 각 상황의 원인들을 파악하고 사랑과 정의 그리고 국제적인 연대성의 사업에 참여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로부터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을 그 창조주와 관련시켰기 때문에(2 첼라노 165), 이 아씨시의 가난한 사람은 타고난 기쁨에 넘쳤다. 오직 죄만이 슬픔을 야기했지만 형제들은 다른 형제들의 죄를 보고 화를 내서는 안되었다(인준받은 회칙 7장). 영적인 것을 선으로, 물질적인 것을 악으로 보았던 알비파 역주: 알비파(Albigesi)라고도 하는 카타리파(Catari)는 프랑스 남부와 롬바르디아 일대에 흩어져 있었는데, 마니교의 이원론에 근거한 철학적 신학적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근본 교리 중 여러 가지를 부정하고, 구약성서를 거부하고, 외적인 경배 행위는 무엇이나 멸시했다. 이들은 신도(credenti)와 완전자(perfetti)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후자는 엄격한 윤리생활과 아주 극단적인 금욕생활로 자신들을 과시하였다. 참조. 작은형제회 수련소, 작은 형제회의 역사(미간행), 2-3쪽.
사람들과는 달리,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 의해서 축복 받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볼 수 있는 표지인 성사(聖事)에 자주 참여하도록 촉구했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가끔가다 이 가난뱅이는 프랑스어로 노래를 불렀는데, 한번은 막대기 두 개를 이용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흉내를 낸 적도 있었다(2 첼라노 127).

자신이 설교하는 바를 직접 살기 시작한 이래로, 프란치스코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었고, 굳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회개하게 하고 육체와 영혼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다(대전기 12, 8). 첼라노가 쓴 ‘성 프란치스코의 기적에 관한 보고’에는 프란치스코에 의해서 직접 행해졌거나 또는 그의 중재를 통해서 이루어진 많은 기적들 중에 단지 몇 개의 기적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프란치스코는 언제나 아픈 사람들을 연민으로 대했다.

그는 형제들에게 “형제들은 겉으로 슬퍼 보이거나 음울한 위선자들같이 보이지 말 것을 명심할 것이며, 오히려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명랑하며 분에 맞게 쾌활해 보여야”(인준받지 않은 회칙 7, 16)한다고 역설했다. 생을 마쳐갈 무렵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진전한 바가 거의 없다시피 하니, 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라고 말했다(1첼라노 103). 프란치스코는 몇 명의 특정 형제들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봉사자 형제에게 편지를 썼다. “어떤 형제가 죄를 짓고 나서 그대의 얼굴을 보고 용서를 구했는데도, 그 용서를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형제가 이 세상에 절대로 없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형제가 용서를 구하지 않았어도 그대는 그가 용서를 원하는지를 물어보십시오.”(어느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용서, 회개 그리고 연민을 가지고 한 일들은 그의 생애 내내 프란치스코의 사랑을 늘 새롭게 했다.


프란치스칸 전망

영국인 저자 체스터톤(G.K. Chesterton)은 프란치스코가 지닌 천재성의 한 부분을 발견했는데, 이 천재성이란 바로 프란치스코가 자신 앞에 있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목한 방식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결코 한사람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한사람 한사람에게, 나병환자에서부터 술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야고바 부인에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지닌 공손함의 표시였다. 프란치스코의 유명한 ‘피조물의 노래’에서, 프란치스코는 그의 관심과 존경심이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창조의 모든 측면에까지 이끌려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타자들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태도는 정확히 하느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고,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프란치스코의 시적(詩的) 직관과 창조적 시각은 프란치스칸 전통의 또 다른 천재들에 의해서 그 빛을 발하였다.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철학적 신학적 기초를 형성하면서 프란치스코의 영적 체험에 의존한다. 보나벤투라의 전 생애에 걸쳐 남아있는 창조의 이미지는 전도서 1장 7절,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구나, 강물을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흘러 내리는 것을”에서 나왔다. 여기서 작은 샘은 땅의 이곳 저곳을 흐르고 나서 다시 발원지로 돌아오는 강이 된다. 이처럼 보나벤투라에게 모든 생명은 하나의 신성한 원천에서 발하며, 신으로부터 나와 결실을 맺고 신으로 돌아간다. 보나벤투라 사상의 뼈대에서 창조된 많은 것들은 창조되지 않은 분에 의해 존재(existence)를 부여받고(유출, emanation), 피조물들은 그들의 창조주를 증거하며(모형성, exemplarity), 그 창조주에게로 되돌려진다(완성, consummation). 창조의 그런 모든 것들, 특히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모든 피조물들은 최상의 가치인 하느님, 또는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듯이 ‘지극히 높으시고’, ‘최고 선’이신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역주: 보나벤투라의 자연사상에 대해서는 호세 메리노, 김현태 옮김, ?프란치스칸 휴머니즘과 현대사상?,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268-275쪽을 참조.


둔스 스코투스는 보나벤투라와는 방법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매우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라핌 박사인 보나벤투라와 함께 프란치스코의 영감을 공유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둔스 스코투스의 창조관에서 지배적인 것은 죄가 아니라 선이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창조 역시 그분의 신성한 은혜(divine favor)로부터 제외될 이유가 없다. 창조에 있어서 하느님의 사랑은 명백한 것이고, 이는 육화에서 가장 여실히 드러난다. 결핍된 것이란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실존(existence) 역주: 여기서 existence는 문맥에 따라 실존(existence) 또는 존재(being)로 번역하였다.
하게끔 당신의 사랑을 주시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들에는 중요성과 존엄성이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란 하느님께서 구체적인 시대와 장소에서 어떻게 개별적인 인간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라는 고유성 안에서 피조물 하나 하나는 활동하시는 하느님 현존 이야기의 부분을 구성한다. 물론 육화야말로 창조의 최정점이지만, 이 육화는 창조된 세계의 가치를 지지하는 데에도 일조를 한다. 살, 육체성 그리고 질료성처럼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것들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스코투스는 사물들의 ‘바로 이것임’, ‘개별성의 원리’(haecceitas) 역주: 여기서 말하는 개별성의 원리란 이런 것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은 모두 인간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다르게 하는 바로 그것 또는 이것과 저것을 다르게 하는 바로 그것이 모든 존재자들 안에 담겨 있는데, 이것을 개별성의 원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라는 용어를 강조한다. 개별성의 원리는 어떤 사물을 유일하게 만들고, 본성을 공유하는 다른 것들과 다르게 하며,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실재의 가치를 강조한다. 각각의 존재자들은 자신들만이 드러낼 수 있는 그 무엇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된 생명의 가치에 대한 위협과 거부

프란치스칸 전망은 피조물 각자 각자가 지닌 천부적인 존엄성과 가치들을 강조하면서, 생명에 대한 근대 세계의 다른 뚜렷한 전망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이 대안적 전망 중 어떤 것들은 그 방향에 있어서 프란치스칸 전망과 대립하는 것도 있다. 어떤 전망들은 생명을 이바지할 수 있다고 제대로 이해된 것들을 왜곡한 것이거나 과장한 것이다. 각각의 전망들은 은연 중에나 혹은 노골적으로 가치들의 위계질서를 제안한다. 인간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한 인간이나 문화가 채용한 영향력 있는 작동 가치들(operative values)을 반영한다. 여기서 우리는 표면적으로 공언된 가치들(professed values)이 아닌 그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작동 가치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들, 특히 프란치스칸 가치들을 이론상으로 지지하기는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도덕적 실천이나 그 사회에 깊이 새겨져 있는 실제적인 가치들은 표면적으로 공언된 바와는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말은 이렇게, 행동은 저렇게 하는 위선의 문제이거나, 자신의 소명대로 살지 못하는 도덕적 나약함이 아니라, 신념과 행위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충분한 자기 비판이 없다는 도덕적 시각의 상실(moral blindness)의 문제이다. 이 치료방법은 비난하거나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생명과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이끌고 유발하는 힘들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더 큰 문제들에 대한 논평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완벽주의

생명에 대한 이 완벽주의 전망은 엄청난 무게를 생명의 가치에 두는데, 단 생명의 가치에 성공, 대중성, 그리고 자율성에 대한 장애나 역행이 없을 때에만 그렇게 한다. 이 완벽주의 전망은 인간 조건의 불완전성에 직면하게 되면, 이 세계관은 창조된 질서의 근본적 선과 존엄성을 계속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질환 또는 질병은 인간의 존엄성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인간들의 역할을 소외시켜서 결국 우리의 관심과 애정을 무가치하게 만든다고 본다. 완벽주의 전망에서 병자들에 대한 처우, 특히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처우는, 힘과 건강이 점점 쇠약해지는 사람들이 느끼고 체험하는 그 불안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래서 많은 지역에서 의사들이 환자들의 자살을 돕거나, 이 환자들의 죽을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을 펼치는데, 이런 운동은 고통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살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지지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는 생명이란 오직 사람이 그들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신체적 제한을 체험하지 않을 때에만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자주 접하는 일이지만, 근대 문화에서 이미지의 중요성은 결과적으로 신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가꾸는데 과도한 지출을 하게 만들고 엄청난 노력을 들이게 만든다. 우리는 외모가 일그러진 사람들이나, 우리 생명의 말초신경에 매력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추방하거나 소외시킬지도 모른다. 한 문화 속에서 미적인 표준이 되는 사람들, 그리고 매력의 표준이 되는 사람들을 사목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꾸려는 꿈에 사로잡혀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특히 동료들을 신체적 외모라는 단 하나의 기초 위에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연에 관해서 말하자면, “환경 디즈니 픽션” 역주: 월트 디즈니사가 만드는 만화는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처럼 아름답고 착하고 고운 것들만이 가치를 지닌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것이 자연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된다는 뜻이다.
에 대한 유혹을 들 수 있다. 즉, 도시의 여행자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거나, 유쾌하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한 모든 것을 제거함으로써 자연을 예쁘게 꾸미려는 강한 경향이다. 많은 가난한 나라들은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는 그들의 자연 환경의 여러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다시 만듦으로써 이 외부인들에게 호소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곤충들, 야생동물들, 가파른 언덕들, 그리고 산들, 바뀌는 해안선, 원주민들의 전통양식과 음식은, 이런 식으로 부여된 인간적 균질성(homogeneity)의 목표를 위해 희생될 수 있다. 이는 여가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에게 가족적이고 안락함을 주기 때문이다.

도덕적 완벽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마약중독에 빠진 사람들, 문제가 많은 생활양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부도덕한 행위를 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행위에 대한 판단을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변형하는 것은 쉽다. 그런 비난은 비난받은 사람들의 권리, 즉 정의롭지 못한 감금, 억압 그리고 낙인찍음, 고문, 그리고 사형 등으로 그들의 권리를 부인하는 데에까지 확장될 지도 모른다. 사람과 관계하는데 있어서, 심지어 회개를 찾으려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반드시 죄를 미워해야지 죄인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최대한 명심해야 한다.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우리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의식하면서 이 연약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반드시 생명의 나머지 모두를 향하여 사랑을 확장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미래에 완성하시기로 약속하였으나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과 희망을 드러내는 저런 형태들 안에서 우연히 그들을 만나게 될 때라도 말이다.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 역주: 도구적 이성이란 원래 로고스의 의미를 갖는 이성이 단지 계산하고 측정하는 도구적인 수준으로 축소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이성을 말할 때 이 수준에서만 이성을 논하기 때문에, 이런 이성에 부합하는 합리성이란 고작 도구로 쓰이는 합리성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담긴 용어.


놀라운 과학적 성취의 시대이자 기계기술의 경이로움이 다양한 분야에서 성취된 오늘날의 이런 시대 속에서는, 삶의 한 차원에서 타당한 사고양식이 타당하지 못한 부문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우리에게는 창조 질서의 여러 구성 요소들이 보다 높은 선을 달성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으며 그렇게 사용되기를 요청한다는 합법적 감정이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창조 질서의 여러 구성 요소들이 우리의 목적에 어떻게 봉사하는지를 보지 않고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러면, 우리는 사람과 사물들 그 안에 담겨 있는 풍요로움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다. 도덕적 삶을 살아가는데 다가오는 계속적인 위험은 존재들의 중심에 우리 인간 자신을 둔다는 것이다. 인간의 에고(ego)는 전 생애에 걸쳐 다양한 가면을 바꿔 써가면서 에고(ego) 그 자체를 강력히 옹호하는 그 교묘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프란치스칸들은 더 효과적으로 우리 자신을 사물의 중심에 두려는 에고의 자기 주장적인 경향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에고 중심적인 시각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사물들을 얼마나 나에게 유용한지 그 이익을 중심 가치로 판단하는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적인 사고 양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구적 합리성은 개인적이거나 단체적인(corporate) 표현들 모두에서 지배적인 가치로 등장하고 있다.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삶 속에서 위험에 처해질 수 있는 관계들 중에 하나는 바로 진정한 우정이다.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물망(network)을 잘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업에서건, 사회봉사에서건, 예술에서건, 혹은 직업에서건, 협조 요청을 받을 수 있는 연고자나 혹은 동료의 범위를 넓게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정은 한 사람의 삶에 현존하면서 다른 사람의 실존 안에서 밝음과 기쁨을 가져온다. 그러나 도구적 사고는 다른 사람을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으로만 본다. 일단 그 목적이 성취되면 그 관계는 대체된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우정을 동반하는 상호보호와 기쁨에 결코 기초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은 단순히 도구적 이성이 아니다. 도구적 이성이 지배적인 사고양식이 될 때, 그것은 다른 기초 위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관계들을 왜곡시킨다.

단체적으로 표현된 도구적 합리성은 창조 안에서 인간만을 모든 가치의 기준으로 보는 인간 중심적 자세 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데, 여기서 인간에게 유용한가 아닌가를 떠난 창조의 내재적 가치의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환경을 하느님의 것으로 보지 않고, 자연 자원을 보존하기 위해서 단순히 인간의 복지를 위한 것으로 보게 될 때, 청지기 직무론의 생태학 역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청지기(steward)로 삼아 자연을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직무를 내리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직무를 수행한다는 이론.
은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망가질 수 있다. 지나칠 정도로 자주 청지기 직무론의 언어는 단순히 우리에게 거시적인 시각과 그에 따른 자기 관심의 눈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요청하고, 공해, 유류 저장량의 감소, 또는 삼림파괴 와 같이 미래에 닥쳐올 문제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지구의 자원을 사용하도록 요청한다. 이런 식으로 보면, 여전히 환경은 인간에게 유용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적 시각은 도구적 합리성을 넘어서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창조주의 보다 더 큰 계획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단지 청지기들이 바라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천연자원이 아니라 창조된 질서를 내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도록 요청한다.


시장 논리(Market Logic)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만큼이나 여러 영역을 넘나들면서 지나치게 일반화된 적이 없던 것 같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제안했듯이, 적절하게 통제되면서도 자유로운 시장은, 복지를 촉진하는 서비스와 상품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시장들은 창조성과 기업정신, 다양성과 번영을 고무할 수 있다. 그러나 적절한 규제가 없다면 시장은 또한 치명적인 불평등, 생태적 파괴, 파괴적 경쟁, 약자들에 대한 착취로 이끌 수도 있다.

경제 생활에 대한 시장의 이점과 위험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프란치스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시장 중심적 사고(market thinking)에 대한 다른 관점이 있다. 여기서 시장 논리는 경제뿐만이 아닌 다른 여러 영역에로 확장되어 있고, 이 결과는 인간을 단순히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으로만 보며 생명의 나머지 부분을 단지 상품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니는 것으로 보는 환원주의(reductionism) 역주: 환원주의란 다양한 측면의 가치들을 한 가지 잣대와 기준으로 환원하여 본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인간의 모든 것을 경제의 가치로만 환원하여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다. 어느 비평가가 말했듯이, “시장은 모든 것의 가격은 알지만 그 어떤 가치도 모른다.” 시장 중심적 사고는 사고 팔아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금전적 가치를 두는 사회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사람들의 정치적이고 시민적 자유,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이자 근본적인 사회적 경제적 물품, 가족 친구 사이의 애정의 유대, 영예, 진실함, 그리고 사람에 대한 존중, 이런 것들은 팔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시장 논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그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 기뻐할 줄 아는 미적 감수성을 지워버린다. 그림의 가치, 음악의 즐거움, 물위의 석양이 지는 광경, 시의 운율 등을 가치절하하면서, 시장에서 팔아치울 것들만 염두에 둔다면 그들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관상(contemplation)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은, 관상하는 주체 안에 어떤 일에서든지 시장의 유용성보다 창조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는 점이다. 기도는 시장이 말하는 바와 관계없이 그 자체 안에 가치를 지닌다. 프란치스칸 전망에는 그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프란치스칸 전망이 무슨 금전적인 가치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프란치스칸 전망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들의 다양한 화려함 안에 생명을 주심으로써 이루신 일을 보고 느끼는 것을 끌어 올리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서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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