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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창보자료

정평환 지침서 1부 4장

조회 수 3345 추천 수 0 2004.06.12 09:03:40
정평환 지침서 1부 4장은 "관상 정평환을 위한 일과 하느님과 일치" 입니다.

정평환을 위한 일과 관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자주 오해에 빠진다. 마치우리 복음적 삶의 중요한 모습들인 이것들은 부적절하게 정형화한다. 어떤이들은 정평환을 위한 일과 관상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관상은 활동들이나 사회사업으로부터 물러나
우리의 역사나 개인적 삶과 관계되어 겪는 고통, 혼돈, 의문들을 피하는 고요하고, 평화롭고, 추상적인 대면이라고 생각한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일부 사람의 마음을 사회 문제들이나 도전들에 빼앗기게 하는 더 외적인 활동으로 보인다.


정형화된 사고방식이 확장되면, 우리는 관상기도는 개인적이고 고집된 영역으로 물러남이라 말할 것이다. 정평환을 위한 일에 헌신하는 것은 정치 질서에 도전하고 변화시키도록 목적된 분노에 의해 자극된 일부 형제들의 몫으로 여긴다. 긴급한 사회문제에 사로잡힌 활동을 조용한 숙고를 위한 장소나 시간을 올바로 평가하지 않는다.


관상과 묵상은 종종 혼돈된다. 묵상은 우리의 관심과 의식을 특정 초점에 제한, 집중하는 활동이다. 지적인 활동으로 묵상은 집중을 위해 지적인 훈련과 감정적 물러남을 필요로 한다. 관상도 그와 같은 특성들을 일부 가진다. 그 예로 관상은 우리 관심의 집중이다. 그러나 관상의 목적은 다르다. 관상은 주목에 만족하지 않는다. 관상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지성, 감성, 육체성 즉 전인격을 필요로 한다. 관상을 주목이라기 보다는 의식적 일치이다. 묵상과 관상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들이 이용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깨어있는, 그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에 민첩하게 행동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훈련을 하기를 요구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진주 중 가장 좋은 것을 찾는 상인과 같다. 상인이 그것을 발견할 때, 그는 단연코 그것을 가지기 위해 행동한다. 하느님 나라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에 비유된다. 신부는 그들 등잔의 불을 지키며 개어있기에 신랑이 다가오면 신랑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느님 나라는 그의 주인이 돌아오기는 기다리는 하인과 같다. 하느님 나라는 밤에 도둑처럼 닥칠 것이다. 너는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에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제자는 삶의 의미를 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깨어 준비하지 않고 섬기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깨어 준비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내가 왔기에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충분히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의 비유들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가 다른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함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예로, 신랑과 함께 하기 위해, 주인을 기다리는 하인의 이야기에서 섬기기 위해 깨어 있다. 관상은 연민의 길을 따른다. 알아차리고, 행동하고, 일치한다. 이 단계들은 공동체, 개인의 삶의 자리에서 행해지는 숙고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이들은 프란치스코가 프란치스칸 삶에 대해 묘사한 것 같이 그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투신, 행동, 변화를 향하도록 한다. 하느님 나라는 밀가루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누룩에 비유된다. 다른 이들을 위한 누룩은 빵이 됨으로써 새로운 것이 되고 다른 이들을 돕는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관상안에서의 움직임을 가장 단순하고 간결하게 묘사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사마리아인은 깨어있으며 연민을 실행함으로 하느님 계획에 일치한다. 이 비유에서 사제는 생각에 빠졌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만짐으로 제례적으로 불순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 강도 당한 사람을 지나쳤다. 율법과 예언들을 알고 있었던 율법학자도 그 희생자를 지나쳤다. 사제나 율법학자들은 외적인 법들, 규제들, 판단들에 의해서도 보호받는 자신의 내적인 세계에 빠져있었다. 비록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이를 보았더라도, 그들은 고통과 불행한 이를 피한 합법적, 종교적, 실제적 이유들을 가질 것이다. 깨어 준비한 이는 보고 응답한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피조물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았고 거기에 부합하여 행동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당한 이를 돌봄과 같은 연민은 사랑 안에 적극적 반응이었다. 그의 반응은 새마음을 일치시켰다. 사마리아인의 마음, 강도 당한 이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 종종, 연민의 행동은 사명감이나 긴급상황의 몰두에 의해 일어난다. 그리고 후에 생각을 하면 우리가 하느님 생명과 활동에 동참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마리아인의 반응과 같이 프란치스코의 삶은 유사한 태도를 가진다. 즉 보고, 연민을 가지고 행동하였다. 프란치스코의 개인적 회개는 우리의 프란치스칸 관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회개는 다른 태도들과 수준들을 포함하는 하느님과의 정서적 일치의 순간이었다 ; 체험, 그 경험에 대한 그의 숙고와 이해 그리고 그 경험을 하느님에 의한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증언. 그 은총은 외진 산다미아노 성당이나 수바시오 산 조용한 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어느날 아씨시 성밖 길에서 하느님과 자유의 일치를 체험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문둥병자를 갑자기 만났고 자발적으로 그를 포옹하고 입맞춤했다. 나중에 그는 그의 문둥병자를 포옹하는 순간 하느님께서 그를 포옹했고, 그의 전 삶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란치스코가 연민의 행동으로 넘쳐나는 자신의 감정을 묘사한 "감미로움과 밝음"은 상처받은 이에게 환대했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온정주의적 보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히 사랑하기 위한 마음의 일치에 의한 결과였다. 숙고의 과정이 아닌 길 위에서의 이 체험을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프란치스코는 각각 항상 조용한 곳에서 있을 때 개인적이고 내밀한 기도의 순간을 가졌다.


우리는 이 내밀한 순간들을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성서와 프란치스코 전기는 그들이 사람들과 피조물과 관계하는 동안 하느님을 직접 만났다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하느님 대면을 꿈에서 한 것이 아니라 요르단강에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앞에서 서 있을 때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의 체험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셨다.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기 위해 거기에 가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의 만날 때 하느님과의 직접적 일치를 점진적으로 체험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가 치유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이 육체적으로 그를 통해 움직인다는 것을 느꼈다. 예수님께서는 폭풍우가 잠잠해 지도록, 무화과나무가 시들도록 명령할 수 있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의식적 연결, 일치, 거룩한 곳에 머무름은 활동중 관상이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도 사람과 피조물 가운데서 하느님 안의 무아경을 묘사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그렉치오, 태양의 찬가, 새들에게 설교). 예수님은 사막으로 프란치스코는 산으로 물러났는데, 거기서 그들은 자신의 삶 안에 자신과 관계하시는 분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나자렛 예수안에 하느님 육화에 대한 사랑은 서양교회안의 사회적 이해의 발견에 있어 중요했다.


프란치스코는 당시 그의 사회에서 무시당하던 사람이었던 문둥병자를 포옹했고, 아씨시 밖 문둥병자들 집단으로 들어갔는데, 이 사건은 새로운 관상의 길을 열었다. 그의 기쁘고 열정적인 하느님 사랑의 육화 포용은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했고 우리의 역사안에 항상 관계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게 했다. 부준적으로 이것은 수도회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로 나병환자들 가운데 간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는 모든 형제들은 무시당하고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보여야 한다. 형제들은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GG.CC. 96, 1-2). 육화에 대한 성장하는 신뢰와 이해, 그 의미들은 서양교회와 문명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반대로, 동방교회는 아씨시 프란치스코를 가지지 못했으며 거룩한 신비의 대부분은 주로 이콘, 음악, 향 안에만 남아 있지만 병원들, 고아원들, 학교, 교회의 사회적 문서들 안에는 없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정의는 책벌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재판관은 훔친 것이나 부서진 것을 복구하는 정의의 행동을 수행했다. 때때로 재판관은 모든 것을 갚을 때까지 사람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성서중 창세기와 묵시록은 에덴 동상과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창조, 자비, 회복의 계획을 보인다. 정의가 실현되므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그럼으로 인류는 하느님 현존안에 평화롭고 자각하며 살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우리 전통에 충실키 위해선 우리는 관상과 정의를 위한 일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이 생기는 것을 물리쳐야 한다. 이 이분법은 우리의 삶을 이원론으로 이끈다. 하느님에 의해 더 작은 형제가 되도록 불리움 받은 각각의 우리 작은형제는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준비할 책임을 가진다. 즉 회복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일에 동참하기 위한 보는 것과 준비하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


작은형제들은 하느님 백성 안에 하나된 자들로서 자매의 새로운 표징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변화되어 가는 세상에 항상 응답해야 한다(GG.CC. 4, 1). 성찰기도는 하느님 구원활동 체험을 보호하고, 증언하며 강화시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 역사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활동에서 물러나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더 정성껏 우리 주위의 하느님 활동에 부합시키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식별은 성령께서 어디로 우리 사회를 이끄시는지 알게 한다. 우리가 가진 계획들과 구주들,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교제나 협력, 선의의 의도의 조직들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우리를 더 깨어있도록 이끌어야 하고, 부분적으로 우리가 회피하고 싫어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현실을 포옹하도록 이끌어야 하고 나아가 하느님께서 계시고 활동하시는 곳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의 구조를, 사건들, 일, 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함으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도래 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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