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6.
때론 동생처럼, 때론 친구처럼 연락을 자주하는 수녀님께 전화가 왔다.
"나 월피정 하려구요. 그 때 자매님 만나고 싶은데..."
"그래요? 그럼 같이 월피정 가요." 해서 나선 길.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옷을 잔뜩 껴입고 남양성지로 향했다.
오랫만에 만나 수다 떨 얘기도 많았지만
우선 각자 알아서 묵주기도를 하기로 했다.
남양성지에는 20단의 묵주기도 길이 있어 전국에서 행렬이 끊이지 않는데
그날은 날이 추워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묵주알을 손으로 짚으며 기도를 하는데
돌의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워낙 몸이 차가운 사람인데다가 추위를 유난히 타는 지라
묵주알을 짚지않으려다가
에라, 언제 내가 희생을 하랴 싶어 차가운 기운을 온 몸으로 받으며 묵주기도를 했다.
묵주기도 길 위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는데
어느 공동체에서 왔는지 십자가의 길이 바쳐지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묵주기도가, 위에서는 십자가의 길이...
묵주기도 길을 기도와 함께 걸으며 오랫만에 엄마 품속의 아기가 된 것같아
날씨는 어디 갔든지간에 포근하기만 했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나오면
마더데레사 동상과 오상의 비오 성인, 마리아 꼴베 신부님 성상이 나란히 있는데
비오성인이나 꼴베성인이 모두 프란치스칸이니
내가 프란치스칸이라는 것이 얼마나 뿌듯하던지...
그러나 이내, 그들의 영광만을 얘기하기 좋아한다는 영적권고 말씀이 떠올라
영적사치는 버리자고 나를 다그치며 성체조배실로 향했다.
큰 절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는
묵상을 하기 시작했다.
성체조배를 하면 잘 졸던 나인지라 안졸아야지 다짐을 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역시 꾸벅꾸벅.
졸면서도 어찌 그리 예수님과 나눌 얘기가 많은지...
수도 없는 많은 말들이 눈을 뜨면 완전 사그러지고 만다.
죄송한 마음에 무언가 아뢰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관념이 내재되어 있나보다.
보다 못한 수녀님이 나를 툭 친다.
그만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점심 때가 지났다.
즐겁게 수다를 떨며 수원으로 나와 비빔밥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수녀님은 당신 월피정을 내게 희생하겠다며
재속적인 월피정 방법에 동참하여 영화를 같이 보겠다고 동의하신 것이다.
'래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영화를 골랐는데
월피정이어서 마음이 그랬는지 영화가 한편의 수채화 같이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사랑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띄운 편지로 다시 맺어지는 얘기였다.
50년만에 다시 맺어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
그 사이에서 자라난 젊은 남녀의 사랑.
헌데 젊은이들의 사랑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이를 뛰어넘은 사랑이
훨씬 아름답고 은은하게 퍼졌다.
영화 배경은 주로 이탈리아의 베로나와 시에나였다.
이 풍경들은 나를 금방 아씨시로 데려다 주었다.
사부님 체취를 영화에서라도 맡으려는 심사가 아씨시와 움브리아 평원으로 나를 데리고 간 것이다.
수녀님을 바래주고 집으로 오면서 오늘의 피정 주제는 바로 "사랑"이라고 명명하였다.
저녁 때 하루를 마감하며 매월 하루 날을 잡아
재속에서의 삶 속에서도 월피정을 하리라 맘 먹었다.
월피정 동안 내 안에는 주님과 함께함의 현존, 형제인 사람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쳐
온기를 가득 지닐 수 있게 해주었다.
나를 당신의 월피정으로 불러주신 수녀님께 감사드리고
이런 방법으로 세상 속에서 빼내시어 나를 당신과 머물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다.
어느 때든 어떤 방법이든 내게 속삭여 불러내신 우리의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