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대적 요구에 적응하기 위한 명제들로 가득하다.
교회가 변하는 것보다 사회가 더욱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의 교회는 급변하는 물살에 둑을 쌓아
신자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물살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마치 아시리아의 거대한 힘을 북이스라엘이 막아낼 수 없었고
바빌론의 거대한 힘을 남부 유다가 막아낼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는 더 이상 하느님 백성을 보호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인권운동, 산업혁명, 여성참정권, 독일과 이탈리아의 독재,
인쇄술과 문화적 욕구 등으로 빠르게 변하는 사회,
제2차 세계대전과 그로 인한 피해와 복구, 그리고 일어나는 인간의 자존감,
그동안 교황은 교황청을 벗어날 수 없었고, 교황령은 몰수 되었다.
신자들은 개인 신심 위주로 활동하면서(레오13세 회칙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으로부터 정지된 교회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교황은 더 이상 둑으로 세상을 막을 수 없었다.
요한 23세는 명확하게 당시의 분위기를 파악하였고,
어떻게 해야 교회가 살아움직일 수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로마의 주교(교황)가 되면서 로마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희망과 새로움에 부풀어 있으면서도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그는 교회가 바티칸 궁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농부출신이었기에 세상 사람들의 움직임에 민감할 수 있었다.
즉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희망이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교황은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공의회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가 75주년을 맞이한다.
그러나 75주년이라는 숫자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현시대의 사회에, 현시대의 교회에, 그리고 우리 형제회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이 무엇인지 똑바로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시대적 적응-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한다.
지구마다 형제회마다 각기 다른 사정과 특수성이 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형제회 살림을 꾸려간다.
프란치스칸 정신을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이
정말 형제회가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강하게 일으킨다.
하지만 현재의 형제회생활은 무엇보다 월례회 중심이다.
월 720시간 중 월례회는 3-4시간, 길어야 6시간이다.
즉 월례회가 우리의 일상의 전부가 아니다.
월례회는 오히려 일상의 구심점이요 시작이다.
이제 각 지구는 그 고유의 사명을 찾아내고 지구의 특성에 맞게 적응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각 형제회가 내부적인 형제회생활에 매여 시대의 적응을 위한 일을 소홀하는 것은 아닐까?
지구 시노두스를 열어 교회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의견을 수렴하자고 하면 망언일까?
혹자는 말한다.
의식주 해결을 해야 하고, 전문인력도 없고, 그나마 월례회라도 나오는 것이 고맙기 그지 없는
현재의 인력구조를 외면하는 오만한 생각이라고.
귀족적이고 엄격했던 비오 12세(재속프란치스칸 교황)의 틀을 깨고
세상 속으로 들어 온 요한 23세(재속프란치스칸 교황)의 행보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가 바라보았던 바로 그 육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세상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
세상 사람들 속에 있어 행복해하시는 아기 예수님,
사람들에게 매여 있음에도 기뻐하시는 아기 예수님,
그 육화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우리도 월례회의 빗장을 열어보자.
월례회를 장소적 개념으로만 여기지 말고
재속프란치스칸이 모여 교회의 봉사자가 되고,
사회의 봉사자가 되는 일을 들추어내서 모으고, 각자의 소명을 형제회의 힘으로 응집시키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의 정기모임(월례회)이 되게 하자.
형제회에는 본당이나 교구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있고,
형제회 고유사업의 봉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형제회 내부 생활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다양성은 바로 프란치스칸의 특징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각각의 지체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듯이
생활터전과 처지가 다른 우리 형제들 각각이 모여 형제회를 이루지 않은가.
그렇다. 회칙과 회헌은 우리가 세상 한 가운데 있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 프란치스코처럼, 그리고 요한 23세처럼...
얼마나 큰 힘인가, 재속프란치스칸은!
재속프란치스칸이 형식에서 옷 벗을 때, 교회가 쇄신될 거라고 믿는다.
숫자라는 옷을 벗어보자.
출석일수, 월례회참석일수, 봉사횟수, 구역모임참석일수, 방문횟수, ...
숫자라는 옷을 벗으면, 거기에 사람- 우리가 부등켜 안고 살아가야 할 형제가 바로 거기 있지 않을까?
무엇을 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말씀봉사, 성령운동등등 각각의 자리에서 본질을 살고자 고뇌하는
모습을 비춰주는 재속프란치스칸일 때 변하리라 믿고 어떤 경로든 자주
나눕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