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의 생애
-1. 어린 시절
이광재 신부님은 농부이신 아버지 이만현 가브리엘과 어머니 김수산나 사이에서 차람(둘째)으로 태어 나셨습니다, 디모테오 신부님의 어미니께서는 10여 년 간 가슴앓이 병에 시달리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신부님은 어린 시절에 고생도 많이 하셨고 가정형편이 늘 어려웠지만 늘 순명하며 지내셨어요, 그리고 어려운 일이나 괴로운 일을 할 때도 "싫다" "못한다"는 불평 없이 열심히 하셨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기브게 지냈던 것은 바로 가족이 매일매일 무주기도 (묵주기도 인거 같음 - -;)를 바쳤기 때문이었답니다.
디모테오 신부님은 어릴 적 마음이 착해 어머니를 정성스레 간호하고 형 광익 필립 보와도 사이 좋게 지냈습니다.
신부님이 아홉 살 때에 두 형제가 뒷산으로 올라가 버드나무로 호루라기를 만들려다 그만 디모테오의 왼쪽 둘째손가락 마지막 마디를 낫으로 자르게 되었답니다. 어머니께서는 칡넝쿨로 완전히 잘리지 않은 손가락을 묶으셨고 다행이 손가락은 붙었지만 약간 삐뚤어지게 된 손가락은 옆에서 보면 뱀의 머리 모양처럼 되어서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곤 하였답니다. 그리고 후에 신학교에 가서 차부제품을 받을 때에 이 손가락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답니다.
어린 디모테오 신부님은 형과 함께 약 20리를 걸어 매일 미사를 거르지 않고 참례하였답니다. 당시 신학생 자격으로 이곳을 방문해 지도하던 노기남 신학생 (후에 대주교가 되심)은
디모테오 신부님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은연중에 이 재현 요셉과 함께 디모테오 신부님을 장래의 사제 감으로 생각하게 되셨답니다. 그리고 얼마후 노기남 주교 님의 주선으로 디모테오 신부님이 용산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셨답니다.
-2.신학교 시절
소학교를 다니지 않은 채 신학교에 진학을 한 디모테오 신부님은 여러모로 학교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협소한 외모로 생긴 마흔 별명중 '작은 촌놈'이라는 별명은 항상 붙어 다녔어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급 행들은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그이 피나는 열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함에 감화되어 그를 '8품신부'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언제나 반듯한 태도로 주의 깊게 남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에서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방학생활 중에도 신학교의 생활습관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사제가 된 뒤에도 이 습관은 흐트러지지 않게 생활하셨답니다.
1931년 11월 21일 삭발례를 받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33년 아버지 이만현 가브리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디모테오 신부님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고 그러던 중 차부 제품을 앞에 두고 어린 시절 다쳐서 비뚤어진 손가락 때문에 서품예식이 정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교수회의를 소집하고 교황청에 문의한 결과 성체 축성을 할 때 면병을 만지고 거양성체를 하는데 지장이 없다는 판정이 내려져 차부제품을 받았고 다음해인 1936년 3월 28일 드디어 사제가 되어서 풍수원 성당의 보좌 신부님으로 임명 되셨습니다.
-3.신부님 시절
정규하 신부님이 주임신부님으로 계시던 풍수원 성당은 당시 12개군 29공소를 관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은 몸을 아끼지 않고 정신부님을 도와 순회사목을 하셨고 이 시기에 오기선 신부님과 함께 수도명 '안토니오'라는 본명을 가지고 우리 나라 최초로 재속 프란치스코 3회로 입회하여 청빈,겸손,정결의 생활을 하게 되셨답니다.
하루는 횡성 공근 근처에 사는 신자가 종부 성사를 부탁했습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주임신부님은 날이 새면 다녀오라고 했으나 디모테오 신부님은 다음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왕복 40리 약 16km가 되는 길을 걸어서 종부성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또 어느 날 폐결핵으로 죽어 가는 소녀가 봉성체를 영하던 중에 피를 토하여 신부님의 옷을 버려 놓게 되자 신부님에게 병이 옮겨질까 봐 한 신자가 신부님의 옷을 잡아당기자 " 누가 감히 정결의 띠를 만지느냐?"하시며 "죽어 가는 영혼에게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데 나 살겠다고 신부가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잇느냐" 며 꾸짖으셨답니다.
1939년 신부님은 양양본당 주임신부님으로 부임을 하셨습니다.
신학교 때부터 몸에 밴 기도 습관으로 신부님이 계신곳은 어디든 기도의 장소가 되었으며 신자들에게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강원도도 산골마을을 누비며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셨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에 대한 존경심으로 신부님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신부님이 사시는 곳에는 기적과 치유의 손길이 그치지 않았고 나쁜 습관을 고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신자들이 많았답니다.
이렇듯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은 '착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신부님의 좌우명처럼 정말 자신의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양떼의 구원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신부님이셨습니다.
-4공산당치하에서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양양성당 주임신부님이셨던 디모테오 신부님은 평신도와 함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성직자, 수도자들을 도와주셨어요, 북쪽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어떻게든 앙양에 도착하기만 하면 남쪽으로 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질 수 있었고 말 그대로 누구든지 디모테오 신부님께 맡겨지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답니다.1950년 본격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신부님들이 잡히고 순교하신 소식을 듣자 디모테오 신부님은 공산당의 눈을 피해 몰래 신자들을 돌보러 다니셨습니다. 점점 상황이 위험해 지는 것을 느낀 신자들이 신부님에게 탈출을 권하자 사제가 떠나면 그 빈자리는 누가 채우는가 하며 신자들에게 반문을 하셨답니다. "난 교우들을 두고는 못 간다. 교우들이 다 가면 내가 그 뒤를 따라가겠다. 나마저 떠나고 나면 이곳의 신자들은 누가 돌보겠느냐? 그 한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몰라도 우리주님은 알고 계신다. 마지막 양떼 한 마리를 위해서라도 나는 북녘 땅 신자들을 외면할 수 없다"
신자들은 더 이상 신부님을 설득할 수가 없어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순교자의 노래를 불렀답니다. "장하다 순교자..."그 노래를 들으며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은 비장한 각오를 했다고 합니다 '그려야지 순교자가 되어야지' 그렇게 모두가 울면서 헤어졌답니다.
신부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주로 밤 시간에 미사를 드리고 낮 시간에는 이동을 하며 여러곳을 다니면서 성사를 주셨어요." 나는 엿장수로 변장하고라도 함경남도, 평안남북도, 그리고 압록강 두만강을 찾아 성사를 주고 싶다" 디모테오 신부님은 단 한사람의 신자만 있어도 사제는 마땅히 성사를 위해 양떼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하느님의 특별하신 보호로 탄압 아래서도 신부님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었답니다.
-5체포에서 순교까지
공산당은 1948년 6월 중순에서 38도선 이북 천주교 성직자들을 모두 검거하여 평안북도 강제 수용소에 강금하였고 원산성당을 몰수하여 종각 십자가를 파괴하고 성당내부에 제대를 처분하였어요, 신부님들이 납치되신 후에 양양성당의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께서는 무명 양복에 고무신을 신은 사복차림으로 이천 김 마오로 신부님과 번갈아 북한 일대의 목자 잃은 양들을 먹여 살리러 다니셨습니다. 1950년 봄에 디모테오 신부님은 북한에서 일하는 것을 알려진 마지막 성직자였습니다 .그때 북한에 남아있던 신자들은 밤마다 신부님을 찾아가 38선 이남으로 탈출하도록 설득을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터지기 3일전에 100마일 북쪽 신자들로부터 그들을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답니다. 디모테오 신부님 게서는 양양에 있는 신자들에게 마지막 강복을 주고 신자들에게 행복한 날이 다가올 것이니 계속 살았으라고 말씀하시고는 북쪽으로 떠나셨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디모테오 신부님께서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신부님을 형무소에 자리를 깔고 덮지 않는 생활 습성을 길렀던 것을 보면 신부님은 언제든지 체포될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디모테오 신부님은 감옥에서도 신부님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답니다 .불편한 감옥 안에서도 이웃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10월8일 늦은 밤 와우동 형무소를 나와 반공 호에서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어 다음날 10월 9일 새벽녘에 하느님의 품에 오르셨답니다.
** 송마리아 요셉 수녀님의 증언
신부님께서는 학비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의 학비를 대신 지불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에는 "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활동하는 교우가 했다"고 하시며 항상 겸손한 태도를 취하셨다.
어느 겨울날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을 때 성당마당을 지나가시다가 어떤 거지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시고 신부님의 버선을 벗어 주셨다.
하루는 수녀님 댁에 밥먹으러 온 거지가 새로 만든 명주바지 저고리를 입고 가기에 아버지께서 "어디서 그렇게 좋은 옷을 얻었느냐?" 고 물으시자 디모테오 신부님께서 주셨다고 했다. 그 옷은 디모테오 신부님께서 추운 겨울에도 얇은 와이셔츠를 입고 계시는 것을 본 어느 여교우가 손수 명주를 짜서 정성 들여 만들어 드린 것이었는데 그것을 거지에게 주신 것이다.
본당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에는 시골이라 교실난로는 장작으로 피웠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데 동산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나기에 올라가 보니 디모테오 신부님이 장작을 패고 계셨고 학교 화장실 청소도 남모르게 하시는 것을 가끔 보았다고 신자들은 감탄하며 감격해 하였다.
신부님께서는 고해성사를 청할 때는 언제나 해주셨으며 꼬마가 청해도 즉시 응하셨고 고백은 반드시 성당에서 해 주셨는데 시골 신자들이라 시간관념이 없어 아무 때나 가서 청했으므로 고해 소에서 금방 나오시면 또 한 사람이 가서 청하곤 해서 수 없이 왔다갔다하시게 되어도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영혼 하나 하나를 정성껏 지도해 주신 성인 신분이셨답니다.
** 박데레사 할머니의 증언 (이광재 신부님의 식복 사를 하셨던 분)
신부님께서는 시간만 나시면 교우들과 이야기를 하시며 그 교우들에게 더욱더 많은 신앙심을 불어넣어 주시는 인자한 바람의 역할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성체 조배와 묵상, 교우들과의 담화경본과 성서 책을 보셨고 또 교우들과 성체조배와 미사, 이 같은 일을 매일매일 하루도 어김없이 행하신 완벽한 주님의 사제 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성서의 말씀대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심지어는 어머니와 나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생각하지 말라며 늘 겸손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던 신부님께서는 평양에 계신 김신부님이 북한군에 의해 돌아가셔서 그곳 교우들은 미사와 고해를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신부님들은 그곳에 가시기를 두려워하니 내가 그곳에 가서 그곳 교우들을 돌보아야 하신 다며 즉시 평양으로 출발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신부님께서 못 가시도록 말렸지만 막무가내로 호통을 치시는 바람에 우리는 더 이상 말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신부님의 마지막 길이셨습니다.
** 한준영 목사님의 증언
사제로 가득찬 방공호 안에는 신음소리가 가득했어요
"물..물...아이고 목말라"
"응, 내가 물 떠다주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목소리는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이었어요.
"이 신부님, 이 신부님.."하고 누군가 신부님을 불렀지만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는지
"응, 응, 내가 가서 구해주지..."하는 소리만 되풀이 하셨어요.
디모테오 신부님 게서는 최후 운명의 순간까지도 남아 있는 온 정신력을 모아 주위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에 대답을 하고 있으셨던 거에요, 신부님 몸 역시 꼼짝없이 죽어 가는 마당에 자기자신의 일보다는 오직 남의 일만 생각하는 거룩한 희생정신은 예수 님의 사랑 그것이었어요,
" 이 신부님, 이 신부님"
"응 내가가요...응 내가 가요"
디모테오 신부님이 입에서는 여전히 이렇게 무의식중에 중얼대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답니다. 신부님의 이런 대답은 약 스무번 이상이나 되풀이되었고 마침내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의 음성도 차츰 기력을 잃어가더니 그만 그쳤답니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이 반공 호에서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을 발견했을 때 신부님의 얼굴을 총탄으로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신부님을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증거는 어린 시절 신부님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었던 비뚤어진 손가락이었답니다.
** 이광재 신부님께서 살아생전 하신 말씀
"응, 내가 물 떠다주지, 응 내가 가서 구해주지...."
"전 교사 여러 생명 구해 주시고 내 생명 하나 바치는 것이 천주님 뜻이라면 영광으로 알겠다"
"깨끗하게 더 깨끗하게 살아가시오"
"너희들이 원한다면 간다. 그러나 북한 신자 한사람도 빠짐없이 남쪽으로 다 내려가고 난 뒤에야 내가 뒤를 따를 테니 그리 알아라. 목자는 양을 버릴 수 없다"
(강원도 양양성당 중고등부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