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4일 마르 6,7-13
"아이고 어려워라!"
오늘 복음말씀은 프란치스칸들에게는 매우 낯익은 말씀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마티아 사도 축일에 들은 마태오 복음 말씀과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듣고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이것이 내가 바라던 바다. 이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기뻐하였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씀이다.
문자 그대로 살아가기에는 용기가 없는 것일까?
의식주의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평신도들에게
오늘 말씀은 복음이라기 보다 오히려 억압같이 느껴진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다 이렇게 무소유인채 살아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떻게 이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가혹하리만치 철저한 가난의 삶을 살아야 하는 대상은
그분의 제자들이다.
곧 예수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여요 예수님의 제자 아닌 사람은 없으니
이렇게 철저하게 살라하시면 평신도인 우리들은 조금 곤란하다.
그렇다면 평신도들에게 이 말씀이 왜 복음인가?
먼저 제자들이 그런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의무가 평신도들에게 있다.
사제들이 이런 삶을 살도록 배려하고 가난한 삶의 동행이 되어주어야 한다.
두번째로 소유하려하거나 지배하려하는 마음을 비워내는 일,
그것이다.
실제로 집착하지 않고 남을 섬기려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겉옷을 가난한 차림으로 입고 있는 일보다 더 큰 가난의 행위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일,
물론 뻔히 다 알고 있는 사람, 그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를 섬기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내적 가난의 삶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 주는 일이다.
정말 쉽지 않다.
여기에는 온전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고 서로에게 충실함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
가난의 행위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되새겨 본다.
내적으로 가난하게 살려는 사람은
외적인 가난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외적인 가난은 자기를 치장하는 겉옷을 벗고 이웃을 향한 마음의 발로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눔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의 가난하게 살라는 오늘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내외적 태도에 대한 요구가
얼마나 철저한지를 묵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