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3일 마르 6,1-6
“예수께서 못하시는 것이 있다?”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을 가셨다.
고향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늘 돌아가고 싶은 회귀본능을 주는 말이 고향이다.
엄마의 젖가슴 같은 그리움이 늘 배어나는 말이 고향이다.
예수께서 고향으로 가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도 그리움이 배어나와 고향에서 조금 쉬고 싶으셨던 것일까?
복음을 보면, 고향에 가셔서 다른 곳에서 하시던 것처럼
그렇게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보다는
예수의 인간둘레를 알고 있기에,
그리고 그의 속내를 알고 있기에,
그의 가르침에 감동하기보다는 시험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통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병을 치유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고 만 것이다.
예수께서 못하시는 것이 있었다.
정말 예수께서 못하시는 것이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왜 못하셨을까?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상대방과의 통교를 먼저 원하신다는 것이다.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무엇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원하는 자와의 통교를 먼저 원하시는 것이다.
주님이신 분이 어찌 우리와의 통교를 원하실 수 있으며
통교가 없으면 기적조차 일으키실 수가 없단 말인가?
주님이신 분이 인간의 마음을 놓쳐버리면 기적을 일으키실 수가 없단 말인가?
이는 그분의 낮아짐이요 겸손하심이다.
기적을 일으키는데 사람의 마음이 필요하지 않으나
굳이 사람의 마음을 서로 주고 받아야 기적을 일으키시는 낮아짐이다.
그분의 낮아짐과 겸손하심을 묻어두고는 오늘 복음에서
오직 찾아내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 일과
나자렛 사람들의 완고함만을 보고 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나”를 필요로 하신다.
나와 서로 마주 보며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완고함이나 관습에서 벗어나 개방된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주님이신 분이 내게 통교를 원하고
내가 그분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못하시는
지극한 겸손!
그분이 바로 우리 앞에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