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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Visitation-ALBERTINELLI, Mariotto


    1503.Oil on wood, 232 x 146 cm.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축일:8월12일(12월12일)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까 드 샹탈 수도자


Santa Giovanna Francesca de Chantal Religiosa


St. Joanna Francisca Fremiot de Chantal


ST. JEANNE de CHANTAL


St. Jane Frances de Chantal


28 January 1572 at Dijon, Burgundy, France-


13 December 1641 at the Visitation Convent, Moulins, France; relics at Annecy, Savoy


Beatified:1751. Canonized:1767


Memorial:12 December; 18 August (United States); formerly 21 August


Giovanna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요안나 프란체스카는 아내요 어머니였으며, 수녀인 동시에 수도 공동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난 지 18개월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나고


프랑스 디종의 국회 의장이었던 아버지가 그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섬세하며 성격이 쾌활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성장했다.


21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샹탈 남작과 결혼하여 여섯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셋은 어려서 죽었다.


그녀는 자기가 거처하는 성에서 매일 미사에 참여했으며 여러 가지 자선 사업에도 신중하게 참여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한지 7년 만에 살해되었고, 그녀는 깊은 실의에 잠겨 친정에서 4개월 동안 있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그녀가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75세의 노인으로 난폭하고 무례하며 허풍쟁이였다.


요안나 프란체스카는 시아버지와 그의 횡포한 관리인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명랑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32세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만났다.


그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전임 영적 지도자가 그녀에게 부과했던


몇 가지 무리한 부담을 덜어 주었다.


그녀는 수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이 결정을 연기하도록 설득했다.


그녀는 수절할 것과 자기 영적 지도자에게 순종할 것을 서원했다.



3년 후에 살레시오는 건강 때문에 혹은 나이나 그 외에 다른 이유로


이미 설립된 기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여성 단체를 설립할 계획에 대해


요안나 프란체스카와 의논하였다.


그곳은 봉쇄 구역도 없고 자유로이 영적 일과 육체적 일을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우선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의 덕행인 겸손과 온순함을 본받고자 했다.


여기서 그들의 이름인 ’방문회 수녀’(Order of the Visitation of Our Lady)란 말이 생겼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31일.게시판1187번.1792번.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프란치스코 드 살)주교 축일:1월24일.게시판905번,158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The Visitation



흔히 그렇듯이 그들은 반대를 받게 되었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 수녀회를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에 따라 봉쇄 수녀원으로 만들어야 했다.


살레시오는 그들을 위하여 그의 유명한 저서’신애론’을 썼다.



이 수녀원은 세 명의 부인(마리파브르, 샤를론 브레샤르, 안느 코스트)으로 시작되었고


그때 요안나 프란체스카는 45세였다.


요안나는 크나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즉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죽고 그녀의 아들이 살해되었으며


전염병이 온 프랑스를 휩쓸었고 그녀의 며느리와 사위가 죽는 등 어려운 일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전염병과 희생자들을 위하여 지방 관리들을 설득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으며


병자들을 위해 사용되도록 수녀원의 모든 재산을 내놓았다.



그녀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한때 커다란 영적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그것은 내적 고민과 암담함,영적 무미 건조함이었다.


그녀는 공동체의 분원들을 방문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내적 고민과 암담함, 영적 무미 건조를 느꼈다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놀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은 일반적으로 죄 많은 ’보통’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영적 활력이 결핍된 것은 사실 어느 정도 우리의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어디까지나 믿음 속에서 사는 것이며


때로는 어둠이 너무나 짙어 믿음의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빈첸시오 아 바울로 성인은 요안나 프란체스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일생 동안 그에 상반되는 생각으로 고통을 당했다.


외적으로는 그녀가 완덕의 높은 경지에 이른 영혼의 안락한 마음과 평화를 즐기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녀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애써야 할 만큼


온갖 종류의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가끔 나에게 말할 정도로 내적 시련으로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 모습은 위엄을 잃지 않았으며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요구한 충실함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금까지 지상에서 만난 가장 거룩한 영혼 가운데 하나로 그녀를 바라본다."


(버틀러,’성인전’)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The Visitation-UNKNOWN MASTER, Spanish


1480-1500.Panel, 126 x 155 cm.Museo del Prado, Madrid



1572년 프랑스의 디종에서 태어났다. 샹탈의 남작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들을 경건히 길러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지도하에 완덕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고


특히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가운데에 자선사업을 많이 했다.


’방문회’라고 하는 수녀회를 설립하여 슬기롭게 지도했다. 1641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까 수녀의 제자가 쓴 [비망록]에서


(Francoise-Madeleine de chaugy, Memoires sur la vie et les vertus


de Sainte J.-F. de Chantal, III, 3: 3th edit., Paris 1853, pp. 306-307)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



어느 날 복되신 요안나는 다음과 같은 열정적인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즉시 충실히 기록되었다.


"지극히 사랑하는 딸들이어, 교회의 기둥인 우리의 많은 교부들은 순교를 당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러했다고 생각합니까?" 자매들 각자가 이 질문에 대답한 후 복되신 어머니는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것은 사랑의 순교라고 하는 또 다른 순교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교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이 생명을 존속시키시어 그들이 동시에 순교자와 증거자가 되게 하십니다.


방문회의 자매들은 이러한 순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여러분 중 그것을 청하는 가장 복된 이들은 이 순교를 이룰 것입니다."



이때 어떤 자매가 이런 순교를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친다면 그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실상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데까지 당신의 칼로 찔러 넣으시어,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잘라 내시기까지 하십니다.


나는 어떤 폭군이 칼로 영혼을 육신에게서 잘라 내듯 사랑이 자기가 좋아했던 모든 것에서


잘라 버리게 한 한사람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어머니께서 자신에 대해 이 말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자매가 이러한 순교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어머니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낌없이 바치고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으며


사랑을 충실히 섬기는 사람에게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연약한 사람이나 사랑과 항구심이 부족한 사람에게 이 순교의 은혜를 주시지 않고,


다만 그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평범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끝으로 누군가가 이러한 사람의 순교가 육신적 순교에 비교될 수 있는 순교인지 여쭈어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교에 대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하튼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육신적 순교에 못지않게 이 사랑의 순교도 위대합니다.


사랑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려 할 때,


순교자들이 신앙과 사랑과 충실성을 증명하려고 일천 번 목숨을 바칠 때보다 생활하는 동안


일천 번 더 잔혹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가톨릭홈에서)







상류 계급 출신의 여인으로서 부인이나 혹은 과부로 혹은 수녀로 각기 그 신분에 적합한 덕을 닦고


중인이 모범으로서 성녀가 된 예는 극히 드물지만,


요안나 프란치스카는 그런 드문 분 중의 한 분이다. 요안나는 세례명이고,


프란치스카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모하며 따르기 위한 그녀의 견진 본명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주 디종 시의 귀족 프레미오가의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주(州)의회 의장을 겸한 근면(勤勉)한 인사였으며,


생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를 여읜 요안나를 측은히 여겨 특별히 관심을 갖고 그녀의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요안나는 아직 나이 20세 미만이었을 때에, 어떤 부유한 귀족인 청년에게 구혼을 받았으나


그가 이단을 따르는 자란 것을 알자 즉시 거절해 버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그녀는 국왕의 충신이며 신앙심이 깊은 신자인 바롱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의 구혼을 받고


이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승낙을 해 연분을 맺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는 이 새 가정에는


봄 날씨와 같은 온화함이 깃들었고 즐거움뿐이었다.


남편인 샹탈이 혼인 전에는 가사보다도 국사(國事)에 치중하여 분망했던 관계로,


집안에는 약간의 부채가 있었으나 그것도 주부인 요안나의 알뜰한 살림에 의해


얼마 후에는 깨끗이 청산을 했다. 그로부터 9년간 그들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 자녀들의 교육도 알뜰히 시켰다.



그러나 세상이란 것은 믿지 못할 일이어서 보름달같이 원만하던 그녀의 가정에도 우수가 깃들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와 더불어 사냥을 간 남편이 친구의 오발로 인해 불의의 큰 부상을 입고 신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따뜻한 간호도 보람없이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에 정이 두터웠던 부부였던 만큼 프란치스카의 비통한 모습을 보는 사람은


저마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도 만나기 싫어 방안에 들어앉아 있던가,


혹은 산속에 가서 외로이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런 비통한 마음이 사라지고 동시에 하느님의 빛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물을 씻고 머리를 들어 앞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리운 그분의 유물인 아이들을 잘 길러내서


초토에 파묻힌 남편의 영전에 보답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상(喪)을 벗은 요안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마테본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갔다.


시어머니는 본래 무뚝뚝한 성격에다가 그녀가 신임하는 여종까지 요안나를 눈에 티처럼 여겨


그 시어머니에게 여러 가지 나쁜 말을 했으므로 자연히 그녀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안나는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 모든 것을 잘 참고 시어머니나 그 여종이나 또는


그 여종의 아이들에게까지 한결같이 친절로써 대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요안나는 33세가 되었다.


그 해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있는 친정에 갔었는데,


때마침 유명한 프란치스코 드 살이 그곳에 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당에 가서 그의 설교를 들은 그녀는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곧 그의 지도를 청했다.


이때부터 요안나는 성인의 지도를 받으며 성덕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에게 육신의 고행보다도 영신적 극기에 대해서 지도를 받았고,


숨은 선덕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녀는 실수로 인해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을 물론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만나서, 지금까지 맺혀있었던 모든 원한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뜻으로


그 사람의 딸의 세례 대모가 되어 주었다.



자녀들이 이제는 다 컸으므로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일도 적어졌다.


그래서 요안나는 소녀시절에 품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그녀는 지도 신부인 성 프란치스코에게 그뜻을 밝혔다. 그녀는 가르멜회 입회를 원했지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전부터 있던 수녀원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과부들을 위한


새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던 참이므로 그 계획은 즉시 실현되어 요안나는 그 계획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곧 ’방문회’의 시초이다.



수녀가 되려면 물론 사랑하는 자녀와 정든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정이 많았던 요안나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한결같이 수도원 입회를 반대했으므로 그녀의 고민은 더욱 커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줄 안 요안나의 신념은 동요됨이 없이


결국 사랑하는 자녀와 아버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수도 서원을 발했다.


그 외에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선한 것이라 인정되는 것은 꼭 실행한다는 서원도 발했다.



그녀는 새로운 수도회의 총장으로서 그 자매들에게 될 수 있는 데까지


어머니다운 태도로써 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기회 있는대로 건축한 분원(分院)의 수는 그녀의 임종 직전만 해도 무려 75개소에 달했다.



그동안 그녀의 성덕을 시기해 고의로 그녀의 사업을 방해하는 이도 있었다.


또 유게노 전투에서 큰아들을 잃었고, 딸과도 사별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다 그녀에게는 비애의 날카로운 칼이 되었다.


그 중에도 가장 비통한 일은 그녀의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서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더욱 분발해 많은 자매들을 이끌고 덕행의 길로 매진하는 한편


수도회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본부의 소재지인 아네시이에 무서운 페스트가 만연하자 사보아의 공작 부처는


요안나의 신변을 염려해 안전 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녀는 자매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다고 하며 도리어 시내에 나가 환자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위안의 천사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1641년, 요안나는 파리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아네시이로 돌아오는 도중 폐렴에 걸려 위독하게 되어


물렝에서 12월 13일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곁에 묻혔다.


그녀는 클레멘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그녀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한때 커다란 영적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그것은 내적 고민과 암담함,영적 무미 건조함이었다.


샹탈은 영적인 무미건조함을 겪고 또 영혼의 어둔 밤을 수차례나 경험하면서 영성적으로 더욱 성장하였다.


그녀는 공동체의 분원들을 방문하는 중에 세상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곁에 묻혔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이 수녀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펴져나갔으며


생존시에 이미 60여 수도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성녀는 1767년에 시성되어 중세시대의 수도자 영성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으로 공경받는다.






♬Lauda Sion - 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JEANNE de CHANTAL



Also known as


Jane Frances of Chantel; Jane Frances Fremiot de Chantal


Memorial


12 December; 18 August (United States); formerly 21 August


Profile


Born to the nobility, the daughter of the president of the Parliment of Burgundy who raised her alone after the death of her mother when Jeanne was 18 months old. Married in 1592 at age twenty to Baron de Chantal. Mother of four. Widowed at 28 when the Baron was killed in a hunting accident and died in her arms. Taking a personal vow of chastity, she was forced to live with her father-in-law, which was a period of misery for her. She spent her free time in prayer, and received a vision of the man who would become her spiritual director. In Lent, 1604, she met Saint Francis de Sales, and recognized him as the man in her vision. She became a spiritual student and close friend of Saint Francis, and the two carried on a lengthy correspondence for years. On Trinity Sunday, 6 June 1610 she founded the Order of the Visitation of Our Lady at Annecy, France. The Order was designed for widows and laywomen who did not wish the full life of the orders, and oversaw the founding of 69 convents. Jeanne spent the rest of her days overseeing the Order, and acting as spiritual advisor to any who desired her wisdom. Visitationist nuns today live a contemplative life, work for women with poor health and widows, and sometimes run schools.


Born


28 January 1572 at Dijon, Burgundy, France


Died


13 December 1641 at the Visitation Convent, Moulins, France; relics at Annecy, Savoy


Beatified


1751


Canonized


1767


Patronage


forgotten people, in-law problems, loss of parents, parents separated from children, widows


Readings


When shall it be that we shall taste the sweetness of the Divine Will in all that happens to us, considering in everything only His good pleasure, by whom it is certain that adversity is sent with as much love as prosperity, and as much for our good? When shall we cast ourselves undeservedly into the arms of our most loving Father in Heaven, leaving to Him the care of ourselves and of our affairs, and reserving only the desire of pleasing Him, and of serving Him well in all that we can?



Saint Je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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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d your eyes on God and leave the doing to him. That is all the doing you have to worry about.



Saint Je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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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was full of faith, and yet all her life long she had been tormented by thoughts against it. Nor did she once relax in the fidelity God asked of her. And so I regard her as one of the holiest souls I have ever met on this earth.



Saint Vincent de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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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Saint Jane spoke the following eloquent words, which listeners took down exactly as spoken: "My dear daughters, many of our holy fathers in the faith, men who were pillars of the Church, did not die martyrs. Why do you think this was? Each one present offered an answer; then their mother continued. "Well, I myself think it was because there is another martyrdom: the martyrdom of love. Here God keeps his servants and handmaids in this present life to that they may labor for him, and he makes of them both martyrs and confessors. I know," she added, "that the Daughters of the Visitation are meant to be martyrs of this kind and that, by the favor of God, some of them, more fortunate than others in that their desire has been granted, will actually suffer such a martyrdom."



One sister asked what form this martyrdom took. The saint answered: "Yield yourself fully to God, and you will find out! Divine love takes its sword to the hidden recesses of our inmost soul and divides us from ourselves. I know one person whom love cut off from all that was dearest to her, just as completely and effectively as if a tyrant’s blade had severed spirit from body."



We realized that she was speaking of herself. When another sister asked how long the martyrdom would continue, the saint replied: "From the moment when we commit ourselves unreservedly to God, until our last breath. I am speaking, of course, of great-souled individuals who keep nothing back for themselves, but instead are faithful in love. Our Lord does not intend this martyrdom for those who are weak in love and perseverance. Such people he lets continue on their mediocre way, so that they will not be lost to him; he never does violence to our free will."



Finally, the saint was asked whether this martyrdom of love could be put on the same level as martyrdom of the body. She answered: "We should not worry about equality. I do think, however, that they martyrdom of love cannot be relegated to a second place,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 For the martyrs of love suffer infinitely more in remaining in this life so as to serve god, than if they died a thousand times over in testimony to their faith and love and fidelity."



from the memoirs of the secretary of Saint Jane Frances de Cha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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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delity toward God consists in being perfectly resigned to his holy will, in enduring everything that his goodness allows in our lives, and in carrying out all our duties, especially that of prayer, with love and for love. In prayer we must converse very familiarly with our Lord, concerning our little needs, telling him what they are, and remaining submissive to anything he may wish to do with us...



We should go to prayer with deep humility and an awareness of our nothingness. We must invoke the help of the Holy Spirit and that of our good angel, and then remain still in God’s presence, full of faith that he is more in us than we are in ourselves.



There is no danger if our prayer is without words or reflection because the good success of prayer dependsd neither on words nor on study. It depends upon the simple raising of our minds to God, and the more simple and stripped of feeling it is, the surer it is.



We must never dwell on our sins during prayer. Regarding our offenses, a simple humbling of our soul before God, without a thought of this offense or that, is enough...such thoughts act as distractions.



Saint Jeanne de Chantal, from Wings to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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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a Giovanna Francesca de Chantal Religiosa



12 agosto - Memoria Facoltativa


Digione, Francia, 1572 - Moulins, 13 dicembre 1641



Giovanna Fremiot e modello di perfezione evangelica in tutti gli stati di vita. Sposa al barone di Chantal e madre di sei figli, rimasta vedova, segui l’itinerario di vita devota sotto la guida di san Francesco di Sales, esercitando in modo speciale le opere della carita verso i poveri e i malati. Fondo ad Annecy l’Ordine della Visitazione (1610). (Mess. Rom.)




Etimologia: Giovanna = il Signore e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Alla figura di questa grande Santa francese, morta il 13 dicembre dei 1641, ma ricordata oggi nel Calendario universale, non si puo non avvicinare quella di San Francesco di Sales, che fu suo direttore e guida spirituale, e di cui ella fu seguace e al tempo stesso ispiratrice, penitente e insieme collaboratrice.


Cosi, Santa Giovanna di Chantal e San Francesco di Sales formano una delle due coppie piu celebri e piu alte nella spiritualita francese del ’600 - e anche nelle opere di assistenza. L’altra coppia, non meno grande, e formata da San Vincenzo de Paul e da Santa Luisa di MarilIac.


Il grande predicatore e direttore d’anime, Vescovo di Ginevra, l’aveva vista la prima volta quando predicava la Quaresima del 1604, a Digione. Giovanna era sulla trentina, e indossava severi abiti vedovili. Al primo colloquio, il modestissimo abbigliamento della vedova non parve abbastanza modesto a San Francesco di Sales, il quale le domando:


o Lei ha intenzione di rimaritarsi, Signora? ".


o No ", rispose Giovanna. " Bene ? soggiunse il Santo, con un rapido cenno degli occhi - Allora sara meglio ammainare le insegne ".La rinunzia interiore, che formava il nocciol dell’insegnamento del Vescovo di Ginevra, doveva essere accompagnata e sottolineata anche dalla rinuncia esteriore. E tale passo non fu facile, per la figlia del ricchissimo Presidente Fremyot, nata a Digione nel 1572, e vissuta nel castello di Bourbilly accanto al Barone d Chantal, da lei sposato a venti anni, in un matrimonio affettuoso e felice, dal quale nacquero numerosi figli.


Un incidente di caccia le aveva tolto il marito quando Giovanna aveva ventotto anni. La donna fu sull’orlo della disperazione. La salvo la necessita di curare i figli, ancora piccoli, e soprattutto la forza della sua fede, che ebbe in lei aspetti quasi virili, di grande coraggio e ardimento.


Dopo il primo incontro, San Francesco di Sales ne assunse la direzione spirituale, con quella leggerezza di tatto che era il carattere distintivo del grande Santo savoiardo. Ella avvertiva sempre di piu il desiderio di ritirarsi dal mondo, e di vivere soprattutto per Dio. Fino all’ultimo, il direttore di spirito volle metterla alla prova. " Ascoltate - le disse un giorno - bisogna che voi entriate a Santa Chiara ". " Padre mio - ella rispose - sono prontissima ". " No - riprese il Santo. - Non siete abbastanza robusta. Dovrete farvi suora nell’ospedale di Beaune ". " Tutto cio che vi parra " accondiscese Giovanna. E Francesco: " Non e ancora cio che voglio: dovrete essere Carmelitana ". " Sono pronta ad obbedire " ripete la vedova.


Dopo aver cosi saggiato a lungo lo zelo e l’obbedienza della donna, il Santo le espose il suo progetto, di una nuova fondazione intitolata alla Visitazione e destinata all’assistenza dei malati. Di questa nuova fondazione’ ella doveva essere cofondatrice e prima direttrice.


Giovanna di Chantal si disse di nuovo pronta, ma questa volta con maggior fervore, con un sussulto del cuore. Ma occorsero alcuni anni, prima che la figlia del Presidente di Digione, sistemati i figli e disposto dei suoi beni terreni, potesse diventare la prima suora della Visitazione.


L’Istituto che ebbe ad Annecy la prima sede, conobbe una rapida e vasta fortuna nella Savoia e nella Francia. Attorno a Giovanna, diventata Suor Francesca, si moltiplicarono le caritatevoli Visitandine, come le sue suore erano chiamate e presto universalmente note e amate.


Prima della sua morte, le case della Visitazione erano 75, quasi tutte fondate da lei, Giovanna Francesca di Chantal, nello spirito di carita del grande San Francesco di Sales.





Fonte:


Archivio Parrocc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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