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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8월8일(8월11일,8월2일)

복자 베드로 파브르

Beato Pietro Favre Gesuita

Blessed Peter Faber

Born: 13 April 1506 at Villaret, Savoy

Died: 1 August 1546 at Rome,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5 September 1872

Canonized: pending

Apostle of Germany






사보트의 빌라뎃 농가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르페브르이다.


그는 1525년에 파리의 쌩 바르브 대학에 갔으며, 여기서 프란치스꼬 하비에르와 같이 살면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를 만났다.


이들 세 사람은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베드로는 1534년에 서품되어,


예수회가 첫발을 내디딘 8월 15일에 몽마르뜨에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1537년, 그는 이냐시오와 디에고 라이네스와 함께 로마로 갔고,


얼마동안은 그곳의 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바오로 3세에 의하여 보름스와 라티스본 의회에 파견되었는데,


이 의회는 독일 내의 종교적 혼란을 진정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베드로는 이 지방의 성직자와 교회의 상황에 크게 실망하고,


최선의 치료약은 프로테스탄트와의 토의가 아니라 가톨릭 내의 개혁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끊임없이 설교하였고,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법에 따른 묵상을 지도하여


독일과 프랑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성공 사례 중의 하나는


베드로 가니시오와 프란치스꼬 보르지아를 예수회에 입회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교황에 의하여 트렌트 공의회의 신학자로 위촉되었으나,


공의회를 준비하던 중에 로마에서 운명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당신의 길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오 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보여 주시고,

당신의 길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당신의 진실 안에서

저를 인도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은 하느님,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복자 베드로 파브르



초연함을 구하는 기도


나의 주님,

당신에게서 나를, 나에게서 당신을

갈라놓는 그 무엇도

없애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당신의 시선, 당신의 섭리, 당신의 일깨워주심,

당신의 말씀과 대화,

당신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없애주소서.


당신을 보고, 듣고, 맛보고, 음미하고, 만지고,

당신을 경외하고,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당신을 알고, 믿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당신의 현존을 의식하고,

당신을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


이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청하고,

또 당신께 갈망하나이다.


-복자 베드로 파브르

( 이냐시오의 벗들. 2007년 8월호에서)




파브르 - 이니고의 첫번째 동료


렉스 패이 SJ (예수회)



이냐시오(이니고)는 로욜라성에서의 완전한 회심을 체험한 이후 처음에는 스페인의 알칼라에서, 그 다음으로는 파리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그곳에서 몇몇 친구들을 하느님께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이끌었다. 이들 동료들은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인내롭게 견디었지만 아무도 그와 오랫동안 남아 있지는 않았다. '이니고의 첫번째 동료'라는 제목은 베드로 파브르(불어로는 ‘삐에르 파브르’라고 알려진)를 지칭함인데, 1529년 파리에서 이냐시오를 알게 되어, 1546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들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그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파브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운 좋게도 파브르와 그의 메시지에 관하여 생의 마지막 4년간 간직했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기록은 우리에게 그가 어떻게 공부했으며 사도로서의 사목활동등, 그의 소중한 삶을 상세히 전할뿐 아니라, 특별히 그의 내적인 체험, 다시 말해 그의 삶 안에서의 하느님의 활동과 그의 응답이 어떠하였는지, 그가 어떻게 기도하고 식별했으며 모든 것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찾았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1. 그의 생애

파브르는 1506년 현재는 제네바 근처 프랑스 동부 지방이지만 그 당시엔 사보이 왕국이었던 빌라레라는 작은 마을의 신실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근처 수도원,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수도자였던 삼촌과 사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516년에 스위스 사제, 베드로 빌리아드로 부터 일반적인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는 개인적 거룩함을 찾는 이들에게 보급된 운동이었으며, 고전으로 잘 알려진 '준주성범'(Imitation of Christ)을 따른 '공동생활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에 파브르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청소년기에 사도적 소명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는 기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열두 살 무렵 성령께서는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을 섬기라는 충동을 내 안에 불러일으키셨다... 나는 들판으로 나갔으며... 기쁨과 순수에의 열망으로 가득 차서 주님이신 하느님께 끝까지 정결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1525년 10월에 파브르는 철학과 신학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 위하여 파리로 갔다. 그는 성 바바라 대학에서 기숙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첫번째로 그와 같은 방을쓰게 된 사람은 다름아닌, 스페인출신의 동갑나기였으며, 성직에 대한 열망을 품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로부터 4년 후에는 1527년 파리에 온, 그들 보다 열 다섯살 위인 이냐시오가 같은 방의 세번째 학생으로 합류하게 된다. 파브르는 개인적으로 그의 학업을 도와주는 임무를 맡았으며, 반대로, 이냐시오는 특별히 다음의 세 분야에서 인격과 영성을 성장시키는 도움을 파브르에게 주었다.


- 그의 성소: 그는 수도자, 성직자, 변호사, 또는 교사중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그를 괴롭히던 양심의 가책: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 겪었던 본인의 체험을 토대로 효율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었다.

- 하느님께만 온전한 신뢰를 둘것, 이것은 이냐시오가 이미 도달한 것이기도 했다.


파브르는 한참 후에 이렇게 회상한다: '그들은 같은 방에서 책상도 돈지갑도 함께 나누어 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나의 영적인 스승이 되었으며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을 인식하여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결국엔 우리들의 오늘을 이끌고 있는 삶을 채택하기로 의기를 투합하면서 하나를 이루었다. - 현재와 장래의 예수회원들 중에서 나는 참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1533년 6월 어머니를 여읜 파브르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6개월간 머무르면서 1528년에 사제로 수품된 친구인 끌로드 제이를 만난다. 1534년 1월 파리로 돌아온 파브르는 이냐시오의 지도 아래 영신수련을 받는다. 그는 5월 30일에 사제로 수품을 받고 7월 22일 첫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소신을 밝힌다.


'나는 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만한 가치도 없고, 그분의 선택을 받기에도 참으로 보잘것없지만, 사제의 직분은 위대한 소명이기에 내 몸과 영혼을 다하는 혼신의 노력으로 언제나 그 소명에 응답할 것입니다.'


그간 이냐시오는 다섯 명의 동료를 더 얻게 되었다. 네 명은 스페인 출신으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제임스 라이네즈, 알퐁소 살메론, 니꼴라스 보바디야이며 한 명은 포루투갈 출신의 시몬 로드리게즈이다. 1534년 8월까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제외한 모두는 이냐시오와 영신수련을 마쳤으며, 복음에 입각한 기본적인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8월 15일 몽 마르뜨르의 작은 경당에서 그들 중의 유일한 사제였던 파브르가 집전하는 미사를 드리며, 예수님을 따라 청빈과 순결의 삶을 살것을 서원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터키의 회교도들을 개종시키기로 서약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로마로 가서 교황을 위해 봉사하기로 한다. 그 당시엔 예수회에 관하여 생각지도 못했지만, 일곱명에 의한 공동서약은 예수회가 생기는 초기 역사에 중요한 발단이 되었다.


이냐시오가 오랜 병으로 고생하자 의사와 동료들은 스페인의 고향으로 돌아가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또한 동료들의 가족을 방문해줄 것을 권유했다. 이냐시오는 파브르에게 동료들에 대한 책임을 맡긴다. 1535년과 36년 동안 이들은 공부를 계속하고 베니스에서 이냐시오를 만나 성지(예루살렘)로 향하는 배를 타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동안 파브르는 끌로드 제이와 다른 두 명의 프랑스 학생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했다. 그들은 1524년에 수품된 파샤스 브뢰트와 쟝 꼬뒤르인데 이들 세 명도 모임에 합류한다.


1536년 11월, 이들 아홉 명은 파리를 떠나 베니스에서 1년 넘게 머물던 이냐시오와 마침내 다시 만나게 된다. 그곳에 있는 동안, 몇몇 병원에서 청소와 환자를 돌보는 일,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에 봉사한다. 1537년 부활절에 성지(예루살렘)로 가도 좋다는 교황의 승낙을 얻어 베니스 주변에 흩어져 배를 기다렸으나 그 해엔 터키와의 전쟁으로 배가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아주 기쁘게 환영해 맞이한 교황 바오로 3세를 알현하기에 이른다. 파브르는 '우리는 매우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그것은 그때도 그랬듯이 우리들 수도회 전체의 초석이 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교황이 우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제안에 만족할 것을 바라고 계셨던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2. 그의 사도적 활동


이태리에서:

1539년 4월 교황은 파브르와 라이네즈를 휠로나르도 추기경을 도와 이태리 북부의 팔마 교회를 개혁하도록 보냈다. 파브르는 개인과 단체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했는데, 그 중의 몇몇은 그들이 받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수련을 주기도 하였다. 9개월 안에 전체 도시는 지난 어느 때 보다 신앙적으로 격앙되고 충실하게 변화되었다.


팔마를 떠나기전 파브르는 그들의 영적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한 지침을 남겼는데 이것은 특별히 '자기성찰, 고해, 묵상, 기도, 자선'에 관한 것이었다. 초기 예수회를 위한 또 다른 귀한 수확은 훌륭한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여덟 중에 한 사람은 안토니오 크리미날리였는데, 그는 이후에 인도에 와서 지금의 동부 작은 마을인 타밀나두, 당시 베탈라이에서 1549년 예수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된다.


독일에서:

1540년 파브르는 스페인의 평신도 신학자인 페드로 올티즈 박사와 1541년에 개최되는 보름스 제국회의(Colloquy of Worms)에 동행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는다. 그는 가톨릭과 루터교간의 심의에 있어서 능동적인 부분을 조금밖에 담당하지 못했으나, 성사를 자주 볼것을 권장하고 중요한 몇몇의 인물들에게 영신수련을 줌으로써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히 다지는 사도적 활동의 풍부한 결실을 맺었다. 올티즈 박사와 함께 독일의 다른 도시를 방문하면서 파브르는 사도로서의 삶을 쇄신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대해 쓰고 있다. '각 도시마다 축첩의 풍습대로 살지 않으면서, 그밖에 여타의 죄도 범하지 않고 영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두 세명의 성직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있을 수만 있다면, 그렇기만 하면 분명히 주님의 도우심으로 보통의 단순한 사람들이 회심하여 돌아올 수 있으련만.... 사람들은 겉으로 좋아보이는 루터교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이렇듯 영혼의 표양이 되어야 하는 바로 그들의 잘못된 악행에 의해 타락의 길로 빠지고 있다...' 그는 가톨릭 교리문답을 썼으며 영적인 벗들을 위해 권유하는 목록을 남겼다. 이 중에 많이 암송되는 '아버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소서'라고 하는 기도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파브르는 이냐시오에게 보고한다.


'제가 편지로 알려드린 바 있는 사람들, 제가 영신수련을 주었거나 또 늘 제 영적인 자녀였던 바로 그 사람들 중에서 한명이 아닌 제가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거나 자신들이 지녔던 열정을 잃었습니다' (주: 종교개혁을 통해서 가톨릭 교회에서 이탈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거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을 잃게 되었다는 의미)


파브르의 영적 사업은 독일 가톨릭 쇄신의 첫번째 물결이었다.


스페인에서:

1541년 올티즈 박사와 함께 스페인으로 가는 중에 그들은 체포되어 리옹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프랑스와 스페인이 전쟁중이었기 때문), 감옥에서도 파브르는 그들을 체포한 사람들에게 호의로써 대한다. 그는 '그들의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위정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는 또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관습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 지방이나 왕국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존경받는 주요천사, 대천사, 그리고 성인들께 내 자신을 의탁하기로...'


그는 도시와 지방을 두루 다니며 일반사회와 교회의 많은 유명인사들을 만났으며 예수회에 대해 많은 호의를 얻게 되었다.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1542년 1월에 파브르는 다시 한 번 독일로 돌아가 그의 예수회 동료인 제이와 보바디야와 함께 가톨릭 쇄신을 촉진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는다. 4월에 슈파이어에 도착한 그는 선교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도 없이 영적 선교를 수행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그런 유망한 사목 활동을 위하여 더 많은 동료가 있었으면 하던 그의 염원은 챨스 5세 황제의 딸들이 그를 돕기 위해 두 명의 스페인 소속 군목사제를 보냄으로써 성취된다. 그들은 커다란 열정으로 영신수련을 마치고 예수회에 합류하게 된다.


파브르에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획득'은 베드로 카니시우스였다. 그들이 마인츠에서 만났을 때 서로를 마음에 품어오던 이상형으로 인식하게 된다. 영신수련을 마친 후, 카니시우스 또한 1543년 스물 두살이 되던 생일에 예수회에 합류한다. 후에 카니시우스는 파브르의 선업을 이어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톨릭 쇄신의 선봉에 서게 된다. 이냐시오의 명으로 포루투갈로 향하던 중 파브르는 벨기에의 루벵에서 병을 얻는다. 그곳에서 건강을 회복하기 까지 3개월을 머물러야 했는데, 그는 다시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었다. 다시 독일로 돌아온 그는 '거룩한 사람들, 그들의 표양으로 영적 냉전지대에 불을 붙이게 될, 매일 기도하고 외치며, 깊이 탄식하면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예수회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1544년에 포루투갈 왕의 요청에 따라 이냐시오는 파브르에게 그곳으로 가도록 권한다. 8월에 도착하여 6개월을 머무르는 동안 코임브라와 에보라에서 많은 학자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을 안내하고 지도한다. 그는 또한 예수회를 위한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는데, 바레또 두 형제는 후에 이디오피아와 고아 지방에서 탁월한 봉사를 하게 된다.


1545년 3월에 파브르는 스페인의 바야돌리드로 갔다. 그곳은 이전에 선교한 어느 곳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대화에 있어서 응답했던' 곳이다. 안토니오 아라오즈와 그는 포루투갈 예수회원들의 관대한 도움으로 알칼라, 바야돌리드, 바르셀로나에 예수회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예수회에 대한 결실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교황의 요청에 따라 이냐시오는 파브르에게 트렌트 공의회에 가도록 명한다. 그는 스페인을 떠나 1546년 7월 17일에 로마에 도착한다. 그에게 지난 7년간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걸쳐 10,000킬로미터가 넘는 긴 여정이었다. 피로에 지친 그는 매우 깊이 병이 든다. 7월 31일에 그는 고해성사를 보고 다음 날 미사에서 성체를 모신 다음 병자성사를 받은 후에 8월 1일 오후 평화로이 눈을 감는다. 이냐시오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예수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애처로운 세상에서 다음 세상을 향해 파브르가 떠난 이후, 로마에 있는 우리들은 확실한 희망에 차 있습니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 지상에서 그간 우리를 도왔던 것 보다, 아니 우리와 함께 남아서 이룩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그가 머무르는 천국에서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3. 그의 메시지

이상에서 언급된 파브르의 생애와 그의 사목적 활동은 그의 영성과 오늘날 우리들이 지닌 영성과 연결지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좀 더 중요한 요점들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1) 그의 섬세한 온유함

이것은 파브르를 알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부분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첫 동료들 중의 하나인 시몬 로드리게즈는 장문의 글을 썼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보기 드문 친절함과 매력을 지녔었다. 이제야 고백하건데, 이것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그는 다른 이들과의 우정을 쌓아 공손한 태도와 다정한 말로 사람들의 영혼이 점차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느님 사랑에 이끌리도록 사로잡았다.' 포루투갈과 스페인에서 파브르와 함께 지냈던 안토니오 아라오즈는 '그는 애정어린 다정함으로 가득한 영혼이다' 라고 말했다.


그의 진실함과 성실함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끌렸으며 그를 편안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교도들을 결코 힘이나 논쟁으로 개종시키려 하지 않고 인간적이고 이해심어린 접근에 의해 설득시키려 하였다. '사람들은 당신의 말과 행위는 잊겠지만, 당신으로 인해 그들이 느꼈던 감정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이 진실이라면, 파브르의 훌륭한 교훈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영감을 주는 것이다.


2) 영적 대화

그의 인자함과 친절함, 경건함에 이끌려 사람들은 그에게 어려움 없이 자신을 열어 보였으며 그의 사려 깊은 조언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그의 예수회원으로서의 짧지만 결실이 풍성했던 선교는 공식적인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라기 보다는 대부분이 개인적인 접촉과 대화를 통한 것이었다. 파브르를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막고있는 장애물을 치워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국가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었으나 그를 같은 동족으로 느꼈다. 사실 이냐시오가 중요한 사목 활동의 하나로 지목했듯이, 그는 영적인 대화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달인이었다. 이냐시오는 '파브르는 바위에서 물을 솟게 만드는 위력을 지녔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파브르가 사람들과의 교제를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을 판단하지 않고 다가갔기 때문이다. '타인의 잘못을 오래 기억하고자 하는 생각에 문을 닫아야 한다. 우리는 그 악행에 변명이 될만한 것을 찾는 것이 낫고 그것을 좋게 해석하면서 우리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에게 청하여 그들 안의 좋은 점을 발견하여 그들의 단점은 가볍게 여길 수 있는 방법을 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영적 대화란 단지 직접적이고 늘 '영적'인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경험을 예수님께서 바라보시고 이해하셨을 믿음 가득한 눈으로 깊이있게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다.


3) 영신수련

파브르는 어디에 가든지 영신수련을 통해 도움을 얻을 적당한 사람을 찾아냈으며 수련을 줄 시간을 마련하였다. 파리에서 이냐시오와 함께 했던 경험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유대, 식별력이라는 은총의 선물은 그로하여금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풍성히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중에 몇몇은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개인이나, 많게는 열에서 열 다섯 명 되는 사람들에게 영신수련을 주기도 했다. 수련의 전부분을 받은 몇몇을 제외하고, 다수의 수련자들에 의하면 파브르가 많은 사람에게 영신수련의 첫재주간을 18번에 의한 방법이나 19번에 의한 ‘일상생활안에서의 피정’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많은 것들에 참되고 지속적인 변화를 초래했는데 특히 성직자들을 변화시켜 교회 쇄신의 강력한 선봉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독일에서의 성과에 대해 '이 수련을 통하여 독일에서는 그때로부터 모든 선한 일들이 이루어져왔다'라고 적고 있다. 이 결실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는 특별히 기도, 양심성찰,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포함하는 실제적으로 유용한 지침을 남겼다.


고해성사 (지금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에 관하여 사제인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고해를 듣거나 고해성사를 줌에 있어서 자네는 언제나 온유하고 참을성 있는 관대한 마음이어야 하며, 친절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해야하고 절대로 고해자의 짜증나게 하는 행동에 귀찮거나 냉소적인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하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참아내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서있기에 이 위대하고 거룩한 임무가 자네를 성가시게 만드는 원인이 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되네.'


4)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기

늘 활동적이면서 여전히 자주 기도하는 가운데, 파브르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냐시오의 안내를 받았던 파리에서 이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자질은 그의 내면에서 수년에 걸쳐 성장하였다. 드 기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참으로 그는 어떤 것보다 기도에 의존하여 살았다. 그의 기도는 깊고도 진솔했으며 기쁨과 확신, 감사로 가득하고 삼위와 그리스도, 성모님, 성인들과 천사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으로 넘치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는 또한 끊임 없이 계속되는 여행중에도 지속적으로 바쳐졌다. 그는 타고난 ‘관상가'였거나 우리들이 오늘날 일컫듯 ‘활동중의 관상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변함없이 항구한 기도는 다른 자질들과 협력하여 하나의 통합된 총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1) 하느님께 대한 항구하고 온전한 신뢰 (2) '오로지 우리 주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 그것은 (3) 어떤 것에서도 자신의 영광과 흥미를 찾지 않는 이기심 없는 봉사에서 증명된다. (4) 댓가를 셈하지 않는, 언제라도 준비된 순명과 (5) 창조물과의 교감인데 피조물이 장애가 되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연결시켜 친교를 나누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는 아주 상반되는 것이며, 우리들에게 종종 영향을 미치는데, 자기 우월감, 개인주의, 공명심, 집착의 노예가 되는 것, 피조물에 대한 착취와 학대 등이 그것이다. 베드로 파브르의 삶은 우리에게 그가 어떻게 복음에 철저하면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았는지 보여준다. 어떤 회헌도 쓰여지기 이전에 그는 벌써 하느님께 뿌리 내린, 타인을 위해 온전히 내어주는, 진정한 예수회의 정신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오늘날 새로운 장을 엮어가는 진정한 예수회원이 되기를 고무한다.


렉스 패이 신부는 예수회원이며 위의 글은 인도 예수회 소식지인 Jivan에 실린 글임.

번역: 월든님 (순례자 소모임)

-성이냐시오의 영성 카페에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창설자 성 아냐시오 로욜라 사제


Sant’ Ignazio di Loyola Sacerdote


St. IGNATIUS of Loyola


Loyola, Spagna, c. 1491 - Roma, 31 luglio 1556


축일:7월31일. 게시판1295번.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St. Peter Canisius


San Pietro Canisi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8 May 1521 as Peter Kanis at Niemguen, Holland-1597 at Fribourg, Switzerland


Canonized:1925 by Pope Pius XI


축일:12월21일, 게시판1531번.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St. Francis Borgia


San Francesco Borgia Sacerdote


28 October 1510 at Gandia, Valencia, Spain-30 September 1572 at Ferrara


축일:10월10일.게시판1415번.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San Francesco Saverio Sacerdote


ST. Francisco Xavier


1506 at Javier, Spanish Navarre-2 December 1552 at Sancian,


China of a fever contracted on a mission journey


Canonized:1622 by Pope Gregory XV


Apostle to the Far East.


축일:12월3일.게시판150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On Earth As It Is In Heaven-Mission




예수회 Society of Jesus 성인들



2월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게시판1605번)

St. Paul Miki and companions, martyrs, San Paolo Miki e compagni Martiri



2월15일

성 끌로드 라 콜롱비에르(게시판1619번)

ST. C. LA COLOMBIERE, San Claudio de la Colombiere Religioso



3월10일

성 요한 오질비 순교자(게시판1653번)

San Giovanni Ogilvie Martire, St. John Ogilvie



5월16일

성 안드레아 보볼라 순교자(게시판1766번)

St. Andreas Bobola, M, St. Andrew Bobola, SJ M (RM)



6월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게시판1830번)

San Luigi Gonzaga Religioso, Saint Aloysius Gonzaga (Jesuit)



7월31일

성 이냐시오 로욜라 사제(게시판1295)

St. IGNATIUS of Loyola , Sant’ Ignazio di Loyola Sacerdote



8월8일(8월11일,8월2일)

복자 베드로 파브르(게시판1308번)

Beato Pietro Favre Gesuita



9월9일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게시판1358번)

San Pietro Claver Sacerdote, St.Peter Claver



9월17일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게시판1367번)

San Roberto Bellarmi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t. Robert Francis Romulus Bellarmine



10월10일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게시판1415번)

San Francesco Borgia Sacerdote, St. Francis Borgia



10월 19일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게시판1427번)

St. Joannes de Brebeuf, C. et MM, Santi Martiri Canadesi



10월30일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게시판1443번)

Sant’ Alfonso Rodriguez, St. Alphonsius Rodriguez, C



11월13일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가(게시판1887번)

St. Stanislaus Kostka, Santo Stanislao Kostka



11월23일

복자 미구엘 어거스틴 프로 순교자(게시판1488번)

Blessed Miguel Agustin Pro, Beato Michele Agostino Pro Martire Gesuita



11월26일

성 요한 베르크만스(게시판1493번)

St. John Berchmans



12월1일

성 에드문도 캄피온 순교자(게시판1501번)

Sant’ Edmondo Campion Martire, gesuita, St. Edmund Campion



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하비에르)Francisco Xavier(게시판1504번)

San Francesco Saverio Sacerdote, Saint Francis Xavier



12월21일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게시판1531번)

St. Peter Canisius, San Pietro Canisi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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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2007.8.4.








PETER FABER



Also known as

Apostle of Germany; Peter Favre

Memorial

8 August

Profile

Born to a farm family, he was a shepherd in his youth. Taught catechism to other children. Entered Saint-Barbe College, Paris, France in 1525. Friend of Saint Francis Xavier and Saint Ignatius Loyola. Ordained in 1534. Joined Ignatius' early band of Jesuits on 15 August 1534. Assisted at the diet of Worms in 1540. Assisted at the diet of Ratisbon in 1541. Preached in Parma, Speyer, Mainz, Cologne, Savoy, Portugal, Lisbon and Valladolid, revitalizing the laity, reforming the clergy and opposing Lutheranism. Helped Saint Peter Canisius realize his vocation. Worked with Saint Francis Borgia. The pope planned to send him to the Council of Trent as theologian of the Holy See, and Pope John III wanted him to be the Patriarch of Ethiopia, but his health failed and he could not take either of these responsibilities. Had a great devotion to the angels. His diary of his travels and work has survived.

Born

13 April 1506 at Villaret, Savoy

Died

1 August 1546 at Rome,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5 September 1872

Canonized

pending



Beato Pietro Favre Gesuita

1 agosto

Villaret, Savoia, 13 aprile 1506 - Roma, 1 agosto 1547


Il 22 luglio 1534 Pietro celebra la prima Messa, e il 15 agosto successivo è ancora lui a salire l’altare, nella chiesa di Santa Maria a Montmartre, quando sette giovani con alla testa Ignazio pronunciano i voti di povertà, castità e obbedienza, finalizzati al totale impegno missionario. Nasce in quel momento la Compagnia di Gesù, con cinque spagnoli (Ignazio di Loyola, Francesco Saverio, Giovanni Laínez, Alfonso Salmerón e Nicola Bobadilla), più il portoghese Simon Rodriguez de Azevedo, e Pietro Favre della Savoia.

Non essendo possibile l’andata in Terrasanta, i sette vanno a mettersi a disposizione del papa Paolo III Farnese in Roma: pronti per ogni servizio alla Chiesa, a qualsiasi livello. Il Pontefice manda Pietro Favre a insegnare teologia all’Università della Sapienza; qualche anno dopo, con la stessa obbedienza, lo troviamo a “fare catechismo” nelle campagne parmensi. Paolo III poi lo richiama, inviandolo in terra tedesca ai “colloqui di religione” tra cattolici e protestanti. La sua opera è così apprezzata che nel 1542 lo chiameranno un’altra volta in Germania. Sempre al servizio del Pontefice egli compie poi missioni in Portogallo e in Spagna (introducendo qui stabilmente la Compagnia di Gesù). Poi riceve l’ordine di tornare a Roma.

La sua è una vita faticosissima: Pietro Favre non si fa sconti nelle fatiche, nelle penitenze, nella povertà autentica. Paolo III lo chiama per inviarlo al Concilio di Trento che è incominciato nel 1545. Lui parte immediatamente, ma il suo organismo non regge più, sebbene abbia solo quarant’anni. Giunto nell’Urbe a metà luglio del 1546, due settimane dopo è già morto.



E' presente nel Martirologio Romano. A Roma, beato Pietro Favre, sacerdote, che, primo dei membri della Compagnia di Gesù, affrontò onerosi compiti in diverse parti d’Europa e morì a Roma mentre partiva per il Concilio di Trento.



Contemporaneo di s. Ignazio di Loyola, fu il primo sacerdote della nascente Compagnia di Gesù; nacque a Villaret, villaggio sulle pendici del Grand Bounard nella Savoia, il 13 aprile 1506; già all’età di dodici anni con il fervore dell’adolescenza, fece voto di castità.

Nel 1525 a 19 anni, si trasferì a Parigi per avviarsi allo studio della filosofia nel collegio di S. Barnaba, qui ebbe come compagno di stanza e di studio s. Francesco Xavier (Saverio) e dal 1529 anche s. Ignazio di Loyola, il quale gli fu di conforto nelle crisi spirituali che l’angustiavano.

Ottenuto il grado di baccelliere (laurea in legge) nel 1530, ritornò in patria, ma nel 1534 fece un mese di esercizi spirituali sotto la direzione di s. Ignazio e dopo la pia pratica si decise a seguirlo.

Fu consacrato sacerdote nel maggio 1534 e il 15 agosto seguente, insieme a s. Ignazio e altri cinque compagni, fece il celebre voto di Montmartre, cioè di vivere in povertà e di andare a Gerusalemme, promettendo di mettersi a disposizione del papa.

Nel 1536 si presentarono, con l’aggiunta di altri tre confratelli al papa Paolo III, rimandando il viaggio in Terra Santa causa la guerra fra Venezia ed i Turchi, ricevendo vari incarichi.

Pietro Favre insegnò teologia alla ‘Sapienza’ di Roma (1537-1539), poi si trasferì a Parma dove stette un anno prima di iniziare il suo apostolato itinerante come gesuita, in tutta Europa specialmente in Germania e la Penisola Iberica, dappertutto propagò la Compagnia di Gesù, predicò, diede gli esercizi, visitò monasteri, conquistò Pietro Canisio al nuovo Ordine.

Fu chiamato a partecipare al Concilio di Trento e intraprese il viaggio nonostante le cattive condizioni di salute, raggiunse Roma il 17 luglio 1546, ammalatosi morì in questa città il 1° agosto 1547.

Scrisse in lingua spagnola e latina il suo “Memoriale”, una specie di diario spirituale, questo documento stampato in varie edizioni e le sue lettere, sono la fonte per conoscere il suo carattere mite, la sensibilità, gli angelici costumi; amato e venerato da quanti lo frequentarono, uomo di preghiera secondo l’insegnamento di s. Ignazio.

Il culto di beato fu confermato da Pio IX il 5 settembre 1872.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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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30-May-2002

Letto da 1485 persone





Blessed Peter Faber

Born 13 April 1506 at Villaret, Savoy; died 1 August 1546, in Rome. As a child he tended his father's sheep during the week, and on Sunday he taught catechism to other children. The instinctive knowledge of his vocation as an apostle inspired him with a desire to study. At first he was entrusted to the care of a priest at Thônes, and then to a neighbouring school. Although without any defininte plans for the future, he resolved to go to Paris. His parents consented to the separation, and in 1525 Peter arrived in Paris. Here he acquired the learning he desired, and found quite unexpectedly his real vocation. He was admitted gratuitously to the college of Sainte-Barbe, and shared the lodging of a student from Navarre, Francis Xavier, the future saint, in a tower which still existed in 1850. They became intimately attached to each other, receiving on the same day in 1530 the degree of master of arts. At the university he also met Saint Ignatius of Loyola and became one of his associates. He was ordained in 1534, and received at Montmartre, on 15 August of the same year, the vows of Ignatius and his five companions. To these first six volunteers, three others were to attach themselves. Ignatius appointed them all to meet at Venice, and charged Faber to conduct them there. Leaving Paris 15 November 1536, Faber and his companions rejoined Ignatius at Venice in January 1537. Ignatius then thought of going to evangelize the Holy Land, but God had destined him for a vaster field of action.


After Ignatius, Faber was the one whom Xavier and his companions esteemed the most eminent. He merited this esteem by his profound knowledge, his gentle sanctity, and his influence over souls. Faber now repaired to Rome, and after some months of preaching and teaching, the pope sent him to Parma and Piacenza, where he brought about a revival of Christian piety. Recalled to Rome, Faber was sent to Germany to uphold Catholicism at the Diet of Worms. In reality the diets which the Protestants were enabled to hold through the weakness of Charles accomplished no good. From the Diet of Worms, convoked in 1540, he was called to that of Ratisbon in 1541. Faber was startled by the ruin which Protestantism had caused in Germany, and by the state of decadence presented by Catholicism; and he saw that the remedy did not lie in discussions with the heretics, but in the reform of the faithful - above all, of the clergy. For ten months, at Speyer, at Ratisbon, and at Mainz, he conducted himself with gentleness and success. It was above all by the Spiritual Exercises that he accomplished most of his conversions. Princes, prelates, and priests revealed their consciences to him, and people were astounded by the efficacy of an apostolate accomplished so rapidly. Recalled to Spain by Saint Ignatius, Faber tore himself away from the field where he had already gathered such a harvest, and won Savoy, which has never ceased to venerate him as a saint; but he had hardly been in Spain six months when by order of the pope he was again sent to Germany. This time for nineteen months Faber was to work for the reform of Speyer, Mainz, and Cologne - a thankless task. However, he gained the ecclesiastics little by little, changed their hearts, and discovered in the young many vocations. That he decided the vocation of Blessed Peter Canisius is in itself sufficient to justify his being called the Apostle of Germany. The Archbishop of Cologne, Herman of Wied, was already won over by the heresy which he was later publicly to embrace. It was also at Cologne that Faber especially exercised his zeal. After spending some months at Louvain, in 1543, where he implanted the seeds of numerous vocations among the young, he returned to Cologne, and there it may be said that he extirpated all heresy. But he was forced by obedience to leave Germany in August, 1544, going at first to Portugal, later to Spain. At the court of Lisbon and that of Valladolid, Faber was an angel of God. He was called to the principal cities of Spain, and everywhere inculcated fervour and fostered vocations. Let it suffice to mention that of Francis Borgia, which he, more than anyone else, was the means of strengthening. Faber, at forty, was wasted by his incessant labours and his unceasing journeys always made on foot. The pope, however, thought of sending him to the Council of Trent as theologian of the Holy See; John III wanted him to be made Patriarch of Ethiopia. Called to Rome, Faber, weakened by fever, arrived there 17 July 1546, to die in the arms of Saint Ignatius, the first of the following August. Those who had known him already invoked him as a saint. Saint Francis de Sales, whose character recalled that of Faber's, never spoke of him except as a saint. He was beatified on 5 September 1872; his feast is kept on 8 August.

- Pierre Suau, Catholic Encyclopedia




Blessed Peter Faber

Born Villaret, Savoy, 1506; died Rome, Italy, 1546. In 1525 he went to Paris and entered Saint-Barbe College, where he was a classmate and intimate friend of Saint Francis Xavier and where he met Saint Ignatius Loyola. He was ordained priest in 1534 and soon after joined the small band headed by Ignatius. He assisted at the diets of Worms and Ratisbon, and preached in Parma, Speyer, Mainz, Cologne, and Savoy, counteracting the influence of Lutheranism and reforming the decadent condition of Catholicism in those places. Part of his diary extant shows that he had an extraordinory devotion to the Angels. Beatified on 5 September 1872. Feast, in Jesuit churches, 8 August.



Bl. Peter Faber

Peter Faber, French priest, one of the first Jesuits, d. 1546. Feast day: 8 August.

Born 13 April, 1506, at Villaret, Savoy; died 1 Aug., 1546, in Rome. As a child he tended his father's sheep during the week, and on Sunday he taught catechism to other children. The instinctive knowledge of his vocation as an apostle inspired him with a desire to study. At first he was entrusted to the care of a priest at Thônes, and then to a neighbouring school. Although without any defininte plans for the future, he resolved to go to Paris. His parents consented to the separation, and in 1525 Peter arrived in Paris. Here he acquired the learning he desired, and found quite unexpectedly his real vocation. He was admitted gratuitously to the college of Sainte-Barbe, and shared the lodging of a student from Navarre, Francis Xavier, the future saint, in a tower which still existed in 1850. They became intimately attached to each other, receiving on the same day in 1530 the degree of master of arts. At the university he also met St. Ignatius of Loyola and became one of his associates. He was ordained in 1534, and received at Montmartre, on 15 August of the same year, the vows of Ignatius and his five companions. To these first six volunteers, three others were to attach themselves. Ignatius appointed them all to meet at Venice, and charged Faber to conduct them there. Leaving Paris 15 Nov., 1536, Faber and his companions rejoined Ignatius at Venice in Jan., 1537. Ignatius then thought of going to evangelize the Holy Land, but God had destined him for a vaster field of action.


After Ignatius, Faber was the one whom Xavier and his companions esteemed the most eminent. He merited this esteem by his profound knowledge, his gentle sanctity, and his influence over souls. Faber now repaired to Rome, and after some months of preaching and teaching, the pope sent him to Parma and Piacenza, where he brought about a revival of Christian piety. Recalled to Rome, Faber was sent to Germany to uphold Catholicism at the Diet of Worms. In reality the diets which the Protestants were enabled to hold through the weakness of Charles accomplished no good. From the Diet of Worms, convoked in 1540, he was called to that of Ratisbon in 1541. Faber was startled by the ruin which Protestantism had caused in Germany, and by the state of decadence presented by Catholicism; and he saw that the remedy did not lie in discussions with the heretics, but in the reform of the faithful — above all, of the clergy. For ten months, at Speyer, at Ratisbon, and at Mainz, he conducted himself with gentleness and success. It was above all by the Spiritual Exercises that he accomplished most of his conversions. Princes, prelates, and priests revealed their consciences to him, and people were astounded by the efficacy of an apostolate accomplished so rapidly. Recalled to Spain by St. Ignatius, Faber tore himself away from the field where he had already gathered such a harvest, and won Savoy, which has never ceased to venerate him as a saint; but he had hardly been in Spain six months when by order of the pope he was again sent to Germany. This time for nineteen months Faber was to work for the reform of Speyer, Mainz, and Cologne — a thankless task. However, he gained the ecclesiastics little by little, changed their hearts, and discovered in the young many vocations. That he decided the vocation of Bl. Peter Canisius is in itself sufficient to justify his being called the Apostle of Germany. The Archbishop of Cologne, Herman of Wied, was already won over by the heresy which he was later publicly to embrace. It was also at Cologne that Faber especially exercised his zeal. After spending some months at Louvain, in 1543, where he implanted the seeds of numerous vocations among the young, he returned to Cologne, and there it may be said that he extirpated all heresy. But he was forced by obedience to leave Germany in August, 1544, going at first to Portugal, later to Spain. At the court of Lisbon and that of Valladolid, Faber was an angel of God. He was called to the principal cities of Spain, and everywhere inculcated fervour and fostered vocations. Let it suffice to mention that of Francis Borgia, which he, more than anyone else, was the means of strengthening. Faber, at forty, was wasted by his incessant labours and his unceasing journeys always made on foot. The pope, however, thought of sending him to the Council of Trent as theologian of the Holy See; John III wanted him to be made Patriarch of Ethiopia. Called to Rome, Faber, weakened by fever, arrived there 17 July, 1546, to die in the arms of St. Ignatius, the first of the following August. Those who had known him already invoked him as a saint. Saint Francis de Sales, whose character recalled that of Faber's, never spoke of him except as a saint. He was beatified, 5 September, 1872; his feast is kept on 8 August.



Andreas Batlogg SJ: Peter Faber - Globetrotter des Glaubens (2. August)

Peter Faber (oder Pierre Favre, wie der 1506 in Le Villaret unweit von Genf Geborene nach seiner Muttersprache eigentlich heißt), war der erste Jesuit auf deutschem Boden. Seine Arbeitsaufträge - vom Papst oder von seinem Ordensgeneral Ignatius von Loyola - führten ihn durch halb Europa. Damals gab es aber natürlich noch keine Intercity-Züge, keine Düsenjets und andere Möglichkeiten, die eine Reise zum Vergnügen gemacht hätten. So kann es gar nicht überraschen, dass Faber im Alter von 40 Jahren völlig ausgepowert (wie man heute sagen würde) starb, genauerhin am 1. August. Tags darauf ist sein kirchlicher Gedenktag.


Vom Kuh- zum Seelenhirten


Dem Savoyarden mit den sanft-sensiblen Temperament und einem Hang zum Grübeln war es keineswegs in die Wiege gelegt, das Tal von Grand-Bornand zu verlassen und nicht wie seine Vorfahren Bauer, sondern Priester und Mitglied eines neuen Ordens zu werden. Im Alter von zehn Jahren hat der kleine Peter beim Viehhüten einen heftigen Wunsch verspürt: Studieren! Er offenbarte sich seinen Eltern, denen nichts anderes übrig blieb, als nachzugeben - ein Bruch der Familientradition! Statt Kühe zu hüten wurde er Seelenhirte. Zwei Jahre lang erhielt er Lateinunterricht von einem Priester, bevor er für neun Jahre ins Kolleg von La Roche kam. Während der Ferien 1518, so erzählt Faber später in seinem "Memoriale", habe er sich innerlich gedrängt gefühlt, Christus ewige Keuschheit zu geloben.


Skrupel und Depressionen


Auf Vermittlung seines Onkels Claude Perrisin, des Priors der Kartause Le Reposoir, kam Faber 1524 an die Universität nach Paris. Wohnung nahm er im Kolleg Sainte Barbe. Dort hatte er, als er sich nach sechs Jahren Studium auf den Magistergrad der Philosophie vorbereitete, einen baskischen Zimmergenossen, der 16 Jahre später den Jesuitenorden gründete: Inigo de Loyola. Sie waren vorerst nur Studienkollegen. Faber wusste selbst noch nicht, ob er heiraten, Arzt oder Jurist werden solle, ob er in Theologie promovieren und in den geistlichen Stand eintreten sollte. Schließlich entscheidet er sich, Inigos Weg zu gehen. 1534 wird er Priester. Erst in diesem Jahr hatte ihn Ignatius, der Laie (!), in die Geistlichen Übungen (Exerzitien) eingeführt. Am 15. August legt er zusammen mit Ignatius und fünf weiteren Gefährten, darunter der Navarrese Franz Xaver, in der Krypta von Montmartre Privatgelübde ab. Faber zelebriert dabei (als einziger Priester unter den ersten sieben Gefährten) die Messe.


Erster Jesuit nördlich der Alpen


Einige Jahre wirkte Faber in Oberitalien und Rom. 1538 bot sich die Gruppe um Ignatius, die auch "preti riformati" (Reformpriester) genannt wurde, Papst Paul III. an. Nachdem 1539 die Entscheidung gefallen war, sich als Orden zu etablieren (als offizielles Gründungsdatum gilt der 27. September 1540), machte der Papst von dem Angebot Gebrauch. Faber erhielt eine Mission für Parma.

Schon bald wurde er ein gefragter theologischer Berater und spiritueller Lehrmeister: auf den Religionsgesprächen in Worms, auf dem Reichstag in Regensburg, in Mainz, Köln und an vielen anderen Orten ist er anzutreffen. Faber war somit der erste Jesuit nördlich der Alpen. Er gab auch Exerzitien (auf Latein, Deutsch konnte er nicht) und betätigte sich als Seelsorger für gebildete Kreise. Faber sollte die Kluft zwischen Protestanten und Katholiken überbrücken helfen, um Europa gegen die Türken zu einigen. Mit den Reformatoren zu sprechen wurde ihm allerdings untersagt. Bis an sein Lebensende glaubte er fest an eine Wiedervereinigung.


Lehrer von Petrus Canisius


Nach einem Einsatz in Spanien wurde er 1542 ein zweites Mal nach Deutschland gerufen, diesmal nach Speyer und an den Rhein. Aus dieser Zeit datiert sein geistliches Tagebuch. Einer seiner Schützlinge wurde 1543 Peter Kanis (Canisius), der nach Exerzitien um Aufnahme in den Orden bat. Im Herbst desselben Jahres erlitt Faber totalen Schiffbruch mit einer Mission am Königshof in Portugal. Ein Jahr verbrachte er in Spanien, um von dort als päpstlicher Theologe zum Konzil von Trient zu reisen.


Er betete für den Papst, für Luther und die Türken


Peter Faber ist heute ein Vorbild für den Umfang mit Andersdenkenden und Andersgläubigen. Im Unterschied zur zweiten Jesuitengeneration, etwa einem Robert Bellarmin, hat er nicht Kontroverstheologie betrieben, sondern den Dialog gesucht und auf die Reform "von innen" gesetzt. Nicht Verketzerung, sondern das Gespräch wurde seine seelsorgliche Methode. Und Gebet. Es hieß schon etwas, öffentlich zu bekunden, man bete "für den Papst, für Luther, für Melanchthon, für Bucer und für den Türken". Mag Faber auch in manchen Punkten theologisch naiv gewesen sein, in Sachen Menschenkenntnis und -führung war er es nicht. Da war er Experte. Er verkörperte damit jene Haltung, die in seinem Orden die "discreta caritas" heißt. Dass er dabei wenig auf seine Gesundheit achtete, sich total verausgabte, führte wohl zu dem, was heute allgemein das Burn-out-Syndrom genannt wird.

Völlig ausgebrannt traf er am 17. Juli 1546 in Rom ein und starb kurz darauf am 1. August nach kurzer Krankheit. Sein Gedenktag ist der 2. August.

Aus: Jesuiten. Mitteilungen der österreichischen Jesuiten 69 (1996) H.3, 4-6.




Den salige Peter Favre [Faber] (fr: Pierre) ble født den 13. april 1506 i Villaret, en liten landsby i alpedalen Grand-Bornand i Savoia (i dag Frankrike). Han var eldste sønn av bonden Louis Favre og hans hustru Marie Périssin, gode katolikker som levde et regelbundet liv basert på solide religiøse tradisjoner. Som gutt var Peter gjeter for farens sauer på hverdagene, mens han på søndager underviste andre barn i katekismen. Som eldste sønn var han utsett til å følge i farens fotspor, men Peter var en svært intelligent gutt og lengtet etter utdannelse. Tolv år gammel avla han kyskhetsløfte.


To av hans slektninger var karteusere i klosteret i Reposoir, seksten kilometer fra Villaret, hans onkel Claude Périssin var prior, og de overtalte hans foreldre til å sende Peter på skole. Han fikk først undervisning av en prest i Thônes og deretter på et kollegium i La Roche, hvor han fikk en solid kunnskap om klassikerne, utmerket seg i gresk, lærte også litt filosofi og teologi. I 1525 bestemte han seg for å fortsette sin utdannelse i Paris.


Peter kom til Paris i urolige tider. Den lutherske reformasjonen hadde startet i Tyskland, og en som var på universitetet på samme tid, var Jean Calvin. Filip Melanchton kom i Favres tid for å holde diskusjoner med biskopen av Paris for å søke en rapprochement mellom lutheranere og katolikker. Denne uroen skulle danne bakgrunnen for Peters fremtidige liv på en måte han ikke forventet da han kom til Paris.


Peter begynte på kollegiet St. Barbara (Collège Sainte-Barbe). Han delte husly med en student fra Navarra, den hellige Frans Xavier (1506-52), og hans regent eller lærer, Juan de la Peña. Peter og Frans ble nære venner. I 1528 sluttet en student fra Salamanca seg til dem, den hellige Ignatius av Loyola (1491-1556), og han ble en nær venn av dem begge. Han var en vanfør, middelaldrende student som hadde tigget seg fra Spania til Paris for å lære latin.


Peter ønsket Ignatius velkommen og underviste ham i Aristoteles' greske filosofi, mens Ignatius ga den tidligere gjeteren undervisning i det åndelige liv. Han ga Peters liv en ny basis og oppmuntret ham til å søke prestevielsen. I 1530 mottok Peter Favre og Frans Xavier sin grad som Master of Arts på samme dag, men Peter brukte litt tid på å bestemme seg for et yrke. Både medisin, jus og undervisning virket attraktivt.


Til slutt bestemte han seg for å følge Ignatius, som i tillegg til Peter og Frans også hadde fått fire andre studenter til disipler: portugiseren Simon Rodríguez og de dyktige vitenskapsmennene Jakob Laynez og Alfons Salmeron, samt Nikolas Bobadilla, alle tre fra Spania. Disse seks ga han åndelige øvelser. Ignatius sa at siden han selv hadde gjennomgått de åndelige øvelsene for første gang, var det ingen som hadde gått gjennom dem med slik målbevissthet og glød som Peter Favre.


Peter ble viet til prest den 15. mai 1534, og den 22. juli 1534 feiret han sin første messe. Om morgenen den 15. august samme år feiret han messe i Mariakapellet i kirken Saint-Denis på Montmartre, som den gang ennå var ubebygd. Etter å ha mottatt den hellige kommunion avla de syv mennene fattigdoms- og kyskhetsløfte og et løfte om en pilegrimsreise til Jerusalem om mulig, og et liv i apostolisk tjeneste som misjonærer blant muslimene i Palestina.


Etter råd fra sin lege vendte Ignatius våren 1535 tilbake til Spania for å gjenvinne sin helse. Han ble enig med sine ledsagere om at de alle skulle møtes i Venezia for å finne et skip for å reise til Palestina. Peter fikk ansvaret for å føre dem dit. De forlot Paris den 15. november 1536, og i januar 1537 møtte de igjen Ignatius i Venezia. I mellomtiden var de fleste presteviet og økt til ti menn. Da de fant ut at krigen mellom Venezia og tyrkerne gjorde reisen til Palestina umulig, bestemte de at Ignatius skulle dra til Roma sammen med Peter og Jakob Laynez og tilby paven alles tjenester til hva som helst. De avtalte at hvis noen spurte hvilken kongregasjon de tilhørte, skulle de svare «Jesu Selskap», for sammen skulle de slåss mot løgner og laster under Kristi fane. På veien til Roma fikk Ignatius en visjon av Kristus mens han ba i et lite kapell i La Storta. Frelseren bar et tungt kors og sa: «Jeg skal være deg nådig i Roma».


I Roma ble de godt mottatt av pave Paul III (1534-49). Ignatius og de andre som fortsatt var legmenn, ble presteviet der i 1538. De trakk seg tilbake til en hytte ved Vicenza for å forberede seg på prestetjenesten. Paven ga gruppens medlemmer forskjellige oppgaver. Peter ble utpekt til å undervise ved universitetet Sapienza og Jakob til å utlegge Den hellige Skrift. Ignatius arbeidet med sine åndelige øvelser og undervisning for å reformere folkets levemåte, og de andre arbeidet også i byen. At ingen av dem ennå snakket italiensk skikkelig, hindret dem ikke. Paven sendte Peter til Parma og Piacenza, hvor han og Jakob Laynez skapte en religiøs fornyelse som fikk varige konsekvenser.


Snart ble det foreslått at de skulle organiseres i en regelbundet religiøs orden. De hadde allerede avlagt de to tradisjonelle løftene om fattigdom og kyskhet, og nå ble det bestemt også å avlegge det tredje om lydighet. Det skulle utnevnes en generalsuperior som alle skulle være forpliktet å adlyde, totalt underlagt Den hellige Stol. De bestemte også å foreskrive et fjerde løfte om å stå til pavens rådighet når som helst og hvor som helst han sendte dem for å frelse sjeler. For å gi tid til det praktiske arbeidet ble det bestemt at felles feiring av tidebønnene ikke skulle være en del av deres plikter, mens den private resitasjonen av dem forble obligatorisk. Dette var et revolusjonært skritt for en orden. Dette var starten på jesuittordenen eller Jesu Selskap (Societas Iesu – SJ). Deres motto var Omnia ad maiorem Dei gloriam – «Alt for Guds større ære».


Keiser Karl V (1519-56) innkalte en rekke konferanser, eller «riksdager», med katolske og protestantiske ledere for å løse de religiøse vanskelighetene i Tyskland. Pave Paul III utnevnte Peter til å reise til riksdagen i Worms i 1540, og han ble dermed en første av jesuittene som ble satt inn i arbeidet for å møte den protestantiske reformasjonen. Dermed begynte syv år med utrettelige reiser til fots og på muldyr gjennom Frankrike, Italia, Portugal og Spania i tillegg til Tyskland og Flandern, hvor han gikk over hundre mil i luftlinje, men hans kronglete rute tatt i betraktning, var den virkelige distansen den dobbelte.


Etter det mislykkede møtet i Worms deltok Peter året etter på den like mislykkede riksdagen i Regensburg. Peter avgjorde at Tyskland ikke trengte diskusjoner med protestantene, men en reformasjon i livet og disiplinen blant presteskap og legfolk. Peters synspunkter kunne ha støttet den nå velkjente tesen at den protestantiske og den katolske reformasjonen på mange måter var to sider ved samme sak: et forsøk på å gjenkristne, grundig instruere og til og med utdanne et uvitende og i praksis halvkonvertert Europa.


Mennesker strømmet til Peters skriftestol, men det var gjennom de åndelige øvelsene han bevirket de fleste konversjonene. Ignatius sa at ingen av de første jesuittene kunne gi de åndelige øvelsene som Peter, «han kunne drive vann ut av en stein». Doktorer i teologi begynte å preke, biskoper og abbeder reformerte sine bispedømmer og klostre og store flokker av studenter ble karteusere, fransiskanere og jesuitter. Peter holdt de åndelige øvelsene på latin, for han kunne ikke tysk.


Deretter ble han kalt til Spania av Ignatius. Da han reiste gjennom Frankrike, ble han fengslet i syv dager, og han avla løfte om ikke å motta stipender for å feire messe eller preke når han kunne gjøre det uten at det ble urettferdig for andre. I Spania og andre steder ga han retretter for legfolk og presteskap. Han brukte Ignatius' «Åndelige øvelser» og oversatte dem til latin for karteuserne i Köln. Blant dem i Spania som fikk sitt liv varig endret av Peter, var den hellige Frans Borgia, som da var hertug av Gandía, men senere ble jesuitt og ordensgeneral. Peter forberedte også den tiårige hellige Alfons Rodríguez for hans første kommunion.


Etter seks måneder i Spania kalte paven Peter tilbake til Tyskland. Han var sjokkert over apatien og det slette livet blant presteskap og folk, og i nitten måneder viet han seg til preking i Speyer, Regensburg og Mainz. I Mainz gjennomgikk den hellige legmannen Peter Canisius åndelige øvelser under hans ledelse og ble jesuitt. Peter Favre hadde et svært vinnende vesen, og med sin store dyktighet og utrettelige energi hadde han spesielt stor suksess i Köln. Der hadde erkebiskopen, Herman von Wied, blitt protestant. I 1544 grunnla Peter i Köln jesuittenes første ordenshus i Tyskland sammen med Peter Canisius.


Etter noen måneder i Leuven/Louvain (Löwen) i Flandern, hvor han la grunnlaget for en rekke kall, ble han tvunget av lydighet til å dra til Portugal og deretter Spania. Han ga de åndelige øvelsene ved hoffene i Lisboa og Valladolid, og var avgjørende for etableringen av jesuittene i Portugal. Kong Johan (João) III av Portugal ville at han skulle bli patriark av Etiopia.


Men pave Paul III ønsket Peter som sin teolog ved konsilet i Trient (Trento). Han dro sammen med erkebiskopen av Mainz til Roma, hvor han kom den 17. juli 1546. Men han var syk og det var en varm sommer, og reisen og hans slitsomme arbeid hadde slitt ham ut. Snart etter sin ankomst til Roma døde han i Ignatius' armer den 1. august 1546. Han var bare 40 år gammel.


Jesuittenes suksess var så stor at etter Peters død ble han mer eller mindre glemt. I det følgende halve hundreåret var det giganter i ordenen som fanget verdens oppmerksomhet. Frans Xavier overlevde ham med seks år, Ignatius med ti; Frans Borgia omformet ordenen. Deretter kom de hellige Robert Bellarmin, Aloisius Gonzaga, Edmund Campion og andre.


I 1600, 54 år etter Peters død, ble det bygd et kapell på stedet for hans hjem i Villaret. Alteret ble konsekrert i 1607 av den hellige Frans av Sales, hvis karakter minnet om Favres, som han aldri snakket om annet enn som helgen. Han ble saligkåret den 5. september 1872 ved at hans kult ble stadfestet av den salige pave Pius IX (1846-78). Hans minnedag er 11. august, men dødsdagen 1. august nevnes også.


Det finnes ikke noe autentisk portrett av Peter, og selv hans legeme gikk tapt.



Bl. Peter Faber

(1506-1546)

When Peter Faber (or better, Favre) came to Paris in 1525 to study at the University, he was undecided what career to follow: Medicine? Law? Teaching? But this brilliant son of a Savoy farmer happened to get as a roommate a young scholar from Spain named Francis Xavier. Both he and Francis met another university student there, a limping Spanish soldier, Ignatius Loyola. Both Francis and Peter fell under the spell of Ignatius, and decided to cast their lot with him. Having been ordained priests, they became part of the little group that pioneered the Society of Jesus in August, 1534.

St. Ignatius at first thought of taking his little company to the Holy Land, but in 1537 they went to Rome and placed themselves at the disposal of the pope. For a while Peter taught scripture at the Roman University of the Sapienza.

Although he was a good scholar, Peter Faber's forte was to be a mission preacher and giver of retreats.

He learned the need of these missions and retreats when the pope, Paul III, sent him to Germany in 1540. The pope had him attend the conferences that Catholic Emperor Charles V was conducting with Protestant leaders. The first conference or "Diet" was held at Worms. A second was held the following year at Regensburg. The Emperor had the idea that discussions would be sufficient to bring back the Protestants who were attracting more and more followers through erroneous preaching and political pressure.

Neither of these meetings accomplished anything. Father Peter saw the reason why. The Protestants could not be won back if the Catholics continued to give scandal by their unCatholic ways of life. Peter Favre immediately sought to stir up in those who remained Catholic a stronger sense of their Christian duties. Thanks to his efforts, Catholics in the Rhineland who might well have lapsed into Lutheranism (even the Archbishop of Cologne had done so), were reconfirmed in their Catholic conviction, and their territory remains chiefly Catholic to this day largely as a result of Blessed Peter's talking turkey to them. From Germany he was reassigned to Spain and Portugal.

There he continued his retreats to clergy and laity with equal good effect. Along the line he had had a great influence on many individuals. While in Germany, for instance, he persuaded St. Peter Canisius to become a Jesuit; and in Spain he had a strong impact on the Duke of Gandia, who later became the Jesuit, St. Francis Borgia. Pope Paul III also valued Favre as a theologian. He summoned him to take part in the great reform Council of Trent, then just about to open. Unfortunately, Blessed Peter Faber, worn out by his labors, took ill and died in Rome before he could reach the site of the ecumenical council.

Even though he was an outstanding representative of the Catholic reformation, and as such a strong opponent of Protestantism, Peter's gentle and winning spirit would not permit him to be harsh. As he said, "It is necessary that anyone who desires to be serviceable to heretics of the present age should hold them in great affection and love them very truly, putting out of his head all thoughts and feelings that tend to their discredit. The next thing he must do is win their goodwill and love by friendly dialogue and converse about matters on which there is no differing between us, taking care to avoid all controversial subjects that lend to bickering and mutual recrimination. The things that unite us ought to be the first ground of our approach, not the things that keep us apart."

This is precisely the angle that Catholics are taking today in their ecumenical dialogue. If all Catholics had followed Blessed Peter Favre's gentle approach in the 16th century and not encouraged polarization, who knows but what Protestantism today might no have had a much smaller following?

--Father Robert F. McNam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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