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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포르치운쿨라(작은몫) 성당 내부의 제대 벽화



이 벽화는 본래의 자그마한 포르치운쿨라 성당 벽화입니다.


첼라노는 성 프란치스코의 포르치운쿨라 성당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프란치스코는 몸집이 작고, 마음은 겸손하였으며, 수도서원에서 작은 형제였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작은 몫(portiuncula)을 차지하였으니,


세상에서 가진 것 없이는 그리스도께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떨어진 땅이 예부터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로 불리었으니, 이는 하느님의 예언적인 섭리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님 다음으로 모든 성인들의 화관이 될 만한 공로를


탁월한 겸덕으로 세우신 동정 성모의 성당이 이곳에 세워졌다.


이 성당에서 작은 형제회가 태동하였다.


견고한 기초인 양 그 위에서 형제들의 수가 늘어갔고 형제회의 고귀한 건물이 솟아올랐다.


성인은 이 곳을 어디보다도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곳을 특별한 경의(敬意)를 가지고 받들도록 명하였다.


그는 그 소유권을 다른 이에게 주고,


자기는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그 사용권만을 가짐으로써


이곳이 형제회의 겸손과 극도의 가난의 표본으로 언제나 보존되기를 원하였다.”


(2생애 18항).





축일 :8월 2일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Perdono di Assisi (Indulgenza della Porziuncola)


Our Lady of the Angels



포르치운쿨라 Porziuncula(작은 몫)
작은 형제회의 머리이고 어머니이시며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성당(전대사축일:8월2일)

"성인은 이 곳을 어디보다도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곳을 특별한 경의(敬意)를 가지고 받들도록 명하였다.
그는 그 소유권을 다른 이에게 주고,
자기는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그 사용권만을 가짐으로써
이곳이 형제회의 겸손과 극도의 가난의 표본으로 언제나 보존되기를 원하였다.”(2첼라노)




세라핌적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 특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고


’천사들의 성 마리아’, 혹은 ’포르치운쿨라’라고 불리우는 소성당을 큰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곳에서 작은형제회와 성글라라 수도회가 축복된 기원을 두었고 성인이 삶을 마감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 프란치스코는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서 이 성당에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얻었다고 하며


여러 교황들께서 다른 많은 교회에 이 전대사를 확대하였다.


세라핌 수도가족은 이러한 여러 이유에서 이 성전 축성일을 경축하며 천사들의 성 마리아를 기린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신 인사



성 프란치스코



1) 거룩한 부인이요 여왕이시여,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 동정녀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2)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간택하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며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협조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3) 당신은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하셨으며
지금도 가득하시나이다.


4) 천주의 궁전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장막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집이시여, 기뻐하소서.


5) 천주의 의복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여종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어머니시여, 기뻐하소서.


6) 그리고 거룩한 모든 덕행들이여,
당신들도 기뻐하소서.
성령께서 당신의 은총과 비추심으로
당신들을 믿는 이의 마음에 부어 주시어
당신들로 인해 불충한 이가 하느님께 충실한 자 되게 하리이다.







포르치운쿨라 소성당 위에 건축된 대성당



포르치운쿨라라 불리우는 천사의 성 마리아 소성당은


아씨시 읍에서 약4km가 떨어진 곳에 있는 천주의 동정 모친께 헌납된 낡은 소성당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상의 어느 곳보다 이 곳을 사랑하셨다.



성인께서 형제회를 설립하시고 발전시키신 곳이 바로 이성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 많은 초기 형제들이 복음 선교를 떠나기 전에 이 성당에서 영신적인 준비를 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이 조그만 성당을 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을 정도로


이 곳은 작은 형제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곳이었다.



성 비오 5세는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작은 성당을 보존하기 위하여 큰 성당을 덧씌워서 짓도록 명령하였고,


성 비오 10세는 이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을


모든 프란치스칸 성당의 모 성당으로 선포하고, 대성당과 교황 기도소의 명예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세라핌 가족들은 이 성전의 축성일을 경축하며 천사들의 성 마리아를 기린다.



"내 아들들이여, 이곳을 절대로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한 쪽 문으로 밀려 나거든 다른 쪽 문으로 다시 들어오십시오.
왜냐하면 여기는 정말로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어머니께서 기거하시는 곳입니다."
(완덕의 거울83)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의 창립



이곳 포르치운쿨라 소성당은


성 프란치스코가 하늘의 감도로써 작은 형제회를 창립한 곳이며


1212년 3월 18일 성글라라 수도회가 축복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쿨라에서 수난성지 주일에 성녀 글라라를 받아들임



성인은 이곳에서 자신의 소임을 깨닫게 된 곳이다.


1209년 2월 24일 어느 사도의 축일 미사에 참석했던 성인은


이날 봉독된 복음에서 자신의 소임을 깨달으셨다.



이날 복음의 내용은 우리 주님이 당신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하시면서


복음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대목이었다.(마태 10,9-10)



프란치스코 성인은 사도들은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했고,


여행을 위한 식량자루나 여벌의 옷이나 신,


그리고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다.





성 마티아 축일에 읽힌 복음



성인은 사도적 가난에 대한 사랑 안에 그 귀절의 의미를 즉각 이해하고 그 말씀을 암기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해 갈망하는 바다"라고 소리치며


즉석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지팡이를 내던졌고,


어느 종류의 돈이거 재산이건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재앙을 인식하여


단 한벌의 옷만 입었고 가죽벨트를 띠로 바꾸었다.





I Compagni di San Francesco.

초기 형제들이 복음선교를 떠나기 전에 이 성당에서 영신적 준비를 하였으며
둘씩 짝지워 파견하신 곳이며 돌아와서는 이 작은 성당을 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고 한다.
첫파견은 에지디오형제(아시시의 복자 에지디오 축일:4월23일)와 베르나르도 형제였다고 한다.
(에지디오는 “dicta beati Aegidii”복된 에지디오의 금언록에서 자신의 영적인 체험에 대해 기록하였다)





포르치운쿨라의 전대사



성 프란치스코는 교황 호노리오3세에게서 이 성당에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교황들께서 다른 많은 교회에 이 전대사를 확대하였다.



형제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1226년 10월3일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말년의 성인은 심한 고행과 오상으로 인해 쇠약해져 거의 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죽음울 임박했음을 깨달은 성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씨시 읍을 축복했고 마지막 시각엔 알몸으로 맨땅에 눕혀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형제인 죽음이여, 너를 환영한다"고 말하고서


안젤로 형제와 레오 형제더러 형제인 죽음을 노래불러 달라고 명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편을 노래하고 자신에게 재를 뿌리라고 하고서,


그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에서 형제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www.ofmconv.or.kr)





건너감 경당의 모습



형제회의 환자 병실로 쓴 곳으로 왼쪽 문은 성인 당대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경당의 외벽의 벽화는 1226.10.3. 사부님께서 형제적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땅에 누워 시편141(142),과 요한복음을 봉독하게 하셨다.





Madonna Enthroned with the Child, St Francis and four Angels-CIMABUE.


1278-80.Fresco,320 x 340cm. Lower Church,San Francesco, Assisi



성 프란치스코는 누구인가...


가톨릭의 성인들 중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만큼 널리 알려진 성인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쓰여진 책이 그토록 많은 성인도 드물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왜 이렇게 유명할까요?
종파를 초월하여, 개신교는 물론 종교를 모르는 이들까지도
성인의 삶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과연 시대를 초월한 성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여기 성인의 삶과 정신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


프란치스꼬는 12세기 말 이탈리아 소도시 아씨시(Assisi)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느님을 만나는 회개 체험을 통하여 회개 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그의 회개 생활을 함께 하려고 형제들이 모여들었을 때,
그는 곧 교황청의 인가를 요청하여,
1210년에 생활 양식에 대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구두 인준을 받았다.



점점 형제들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프란치스꼬는 자신이 형제들의 유일한 생활 규범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인준받지 못한 두 개의 회칙에 이어 최종적으로 회칙을 작성하여,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프란치스꼬는 처음부터 선교 소명을 가졌다.
그는 복음의 파견 말씀을 자신과 형제들에게 주신 것같이 받아들여 초기부터 두루 다녔고,
이 평화의 메시지를 이탈리아에만 전파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전세계를 여행해야 한다는 강한 선교 소명을 느꼈다.



프란치스꼬는 회개 생활 6년째인
1212년 사라센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시리아로 가려 했으나 실패했고,
두 번째의 모로코 선교 여행을 시도하였으나 스페인에서 열병에 걸려 포기해야 했다.



1217년 뽀르찌운꿀라에서 성령 강림 축일에 총회가 열렸는데
총회의 결정 사항들 중 하나는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꼬는 회교도들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형제들의 수효가 불어나 3,000여 명이 참석한
1219년 돗자리 총회에서 새로운 선교단의 파견 결정을 하였고,
프란치스꼬 스스로 회교도의 술탄을 만나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평화를 전했다.



프란치스꼬는 자신의 선교 여행과
1220년 모로코 마라께스에서의 베라르도와 동료들의 순교 소식의 결과로써
1221년 회칙 안에 수도회 회칙으로는 최초로
사라센인들과 다른 비신자들 가운데 가는 형제들에 대한 내용을 등장시켰다.



성 프란치스꼬의 제자들은 시초부터 모든 이들에게로 향하였다.
이들은 마호멧교도들이 있었던 아프리카와 시리아,
다양한 부류의 신앙을 지니고 있던 소아시아와 동유럽,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를
보충하기 위한 발트 해안, 아시아의 몽고 등지까지 선교 활동을 하였다.





성인의 영성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Saint Francis of Assisi)
언젠가 프란치스코가 천사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맛세오 형제와 지내고 있을 때
맛세오 형제가 농담조로 "왜 당신을...,왜 당신을..왜 당신을..." 하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겠지요. 그러자 맛세오 형제는 "왜 세상은 당신을 따라가며, 또 왜 누구나 다 당신을 보고 싶어하고,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 하며, 그것을 순종하려고 합니까? 당신은 미남도 아니고, 학식이 별로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귀족도 아닌데, 왜 온 세상이 당신을 그처럼 따르는 것입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성인의 겸손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의도로 맛세오 형제가 물어 보았던 질문이었습니다.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같은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13세기에 살았던 아씨시의 거렁뱅이 프란치스코. 그가 살았던 복음적 삶은 어떤 매력이 있기에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3세기의 성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소개합니다.
A Gospel Way of Life-Roy M. Gasnick, O.F.M.



교회가 국가와 지나치게 동일 시 했을 때, 주교들과 아빠스들과 심지어는 교황들까지 종교 지도자들이라기 보다는 권력자들이 되었을 때, 크리스찬들이 종교와 규범으로써 복음 대신 봉건적 예법과 권위체제를 수용했을 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교회를 재건하고 복음자체가 지니는 진리와 기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은 세상이 차가와 지고 있었을 때, 당신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도 불타오르도록 복된 프란치스코의 육신에 당신 수난의 거룩한 흔적을 박아 주셨나이다..."


프란치스코는 복음 전체에 대한 증인이었음에도 사람들이 거의 이해하지도 못했고 실천하지도 못한 복음의 그 관점들을 역설하는데 이바지했습니다.


이 관점들 가운데 다음의 것들이 탁월성을 지닙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Fatherhood of God)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당신의 법을 거스리는 범법의 수효를 계속 헤아리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복종해야 하는 엄한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개인적으로 친밀한 <어떤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들과 딸들의 성공을 보기를 원하고, 그들에게 성공의 필요한 은총을 주며, 그들이 자유의지로써 수용하거나 혹은 거절하도록 여지를 남겨 두시는 <아버지>이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아들로서의 온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근심을 하느님께 던지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 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간성 (The Humanity of Christ)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간의 애정 관계에 대해서는 하등의 의심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중세 말엽의 회화들 속에 그렇게도 많이 나타나는, 최후의 심판을 맡으신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이 되신 베들레헴의 그리스도이었고, 영적으로 굶주린 인간을 위해 음식으로서 자신을 내주었던 최후 만찬의 그리스도이시며, 인간이 자기 자신의 비인간적 상태로부터 일어날수 있도록 희생재물로서 죽으셨던 갈바리산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던 프란치스코 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사람이여 보십시요! 육신에 있어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모상에 따라 그대를 지으시고 형성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얼마만큼 탁월하게 그대를 들어 높이셨는지를!"



보속, 회개 (Penance-Conversion)
우리가 그같은 아버지(하느님)와 그같은 형제(그리스도)를 가졌음을 발견하면서 압도 당할 때 전적인 회개이외에, 곧 자신의 옛 생활을 슬퍼하거나 거부하는 것 이상의,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버리는 애정관계 같은 그 회개 외에 다른 응답이란 불가능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의 회개 그이 보속은 대단히 기쁨의 일들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완전한 충족감을 주었고, 만약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으면, 결고 자기를 버리질 않을 신부인, 다른 어느 신부보다도 더 뛰어난 신부(정배)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의 회개에 대해서 , 프란치스코는 "나에게 쓰디쓰게 보였던 것이 영혼과 육신의 감미로움으로 변했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생활양식으로서의 복음 (The Gospel as a way of life)
그러한 회개이후, 프란치스코는 크리스찬으로 남아 있기 위한 최소한의 의무들만을 이행하고는 더 이상 살수 없었습니다. 그는 법을 초월하고, 법보다 훨씬 더 멀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삶과 동화되는 정도로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복음이라는 도전과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간성을 넘어 오르도록 해 주고 또 세상으로 하여금 그것이 지닌 집합적인 죄악을 넘어 오르도록 복음이 문을 열어준 그 가능성들이 프란치스코의 영혼 안에 있는 현을 너무도 힘차게 진동시키어 그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온 마음과 영혼으로 그리던 것이다."



계속 되는 육화 (The Continuing Incarnation)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육화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역사적인 사건만은 아니었습니다. 육화는 과거에 이루어 졌지만 또한 현재에도 일어납니다. 복음적 생활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의 자신의 역할에서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도록 계속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수임 받습니다. 지극히 독특한 표현으로 프란치스코는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



형제애 (Brotherhood)
프란치스코의 유언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구절은 아마도 그가 그의 첫 번째 제자들과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시작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한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주께서 나에게 몇몇 형제를 주셨습니다."
계급 구분이 경직화되고 수도원의 규칙에서조차 제 2계급의 시민들에겐 평수사 직분만 허용되었을 때, 또한 주인과 하인 귀족과 농민, 특권 상류층과 평민하층의 계급이 있었을 때, 또 의혹과 불신이 친구들 사이에서조차 그 시대의 하나의 질서가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적어도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참된 형제애가 아직도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수도회를 작은 형제들의 회라고 이름지었을 때, 형제애란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적 행위에 그리스도께서 도전하시는 것은 물론 자신도 도전하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작음 (Minority)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수도회를 형제들의 수도회로 보았다면, 그는 또한 그것을 특별히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로 보았을 것입니다. 소수 혹은 작음이란 말이 가난하고 무력하며 침묵을 지켜야 하는 소수 그룹에 대해 말할 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어떤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과 특권과 지위에 대한 추구와의 절연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무력하며 무방비 상태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들, 곧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욕망이었습니다. 그것은 봉사 받지 않고 봉사하려는 욕망이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함께 나누며, 서로 관심을 갖고 도와주며 서로 유용한 자가 되려는 욕망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려는 욕망, 즉 인간의 가장 악한 경향을 극복 하려는 욕망입니다.



가난 (Poverty)
재산, 풍요 그리고 개인재산과 물질에 대한 집착, 이것들은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형제애 및 하느님과의 일치에의 장애물로 보였습니다. 그 삶이 돈과 돈으로 살수 있는 것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보다는 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자연질서의 가장 나쁜 악용 가운데 하나인데, 대단히 빠르게 개인을 비인간화에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재산보다 더 중요하고 사람들이 물건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확실히 그런 것에 대한 증거자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인격주의 (Personalism)
채스터톤(G.K. Chesterton)은 프란치스코의 인격주의에 관해 아마도 결정적인 말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군중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더 사실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존경했고, 이는 그가 사람들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들 모두를 존경했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놀라운 인격적 힘을 주었던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교황으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술탄으로부터 숲 속에서 기어 나온 누더기 옷을 입은 강도에 이르기까지 불타는 그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 본 사람은 누구나 프란치스코가 진정으로 '그 사람'에게 관심 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개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졌고 그 사람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고 진지하게 대하였습니다."



기도 (Prayer)
기도, 특히 관상기도는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너무도 중요해서 한때 그는 세상에 대한 사도직 사명을 포기하고 관상 생활로 은퇴하려는 유혹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 해주셨듯이 그의 임무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굴에서건 장터에서건 라 베르나 산에 있는 백작의 저택에 있건, 홀로 있건 형제들과 함께 있건 노동하는 중에 있건 간에, 프란치스코는 늘 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관상기도를, 때로는 자유기도를, 때로는 형제들과 함께 공동기도를, 때로는 노동기도를 바쳤습니다.



고통의 수용 (Acceptance of Suffering)
고통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모든 대가를 치루고서 피해야 하는 악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경외심을 가지고 고통에 접근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다음의 메시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고 고양시키기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프란치스코는 고통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 고통의 남은 부분을 나의 몸으로 채우겠다"고 했듯이 고통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평화 (Peace)
프란치스코는 전쟁상태에 있는 귀족과 하인, 크리스챤과 모슬렘 교도, 아씨시의 귀족계급과 하층 서민계급 사이의 분쟁에서 평화의 건설자로서 인정받았습니다. 그 스스로가 평화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입술로 평화를 선포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의 가슴속에 평화를 더욱더 충분히 간직하도록 힘쓰십시오. 어느 누구든 당신 때문에 분노나 모욕적 언동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당신이 보이는 자제의 결과로서 평화와 선의, 자비에로 움직여야 합니다"라고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존경 (Respect for the Church)
교회는 본질적인 교의 및 윤리영역에서 보다 다른 영역, 즉 인간적 나약함과 심지어 오류에 항상 떨어 질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에 있어서 교회 안의 인간적 나약성은 대단히 커서 교회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의 표지가 거의 되지 못하였습니다. 교회는 정치적 권력을 지님으로 인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성직자의 대다수가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며, 反聖職(Anticlericalism)主義가 충분히 근거를 지닌 채 만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가 보다시피, 폐허가 되어 가고 있는 나의 교회를 수리하여라"고 프란치스코를 부르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성직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파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직자들의 부족함을 우리들이 보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평화의 자녀들처럼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성직자도 사람들도 함께 얻을 것이고,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성직자의 타락에서 사람들만 구 하는 것 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오늘에 있어서의 프란치스칸 증거 (Franciscan Witness Today)
세상은 프란치스코의 시대 이래 여러번 변화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슬프게도 똑같은 조건들과 문제들이 우리의 시대에 너무도 많이 되돌아 왔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상황을 변화시키며, 냉담자들을 깨우치는가 하는 방법들을 권고하는 수 백만개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다수의 말들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상투적인 말에 불과 합니다. 또한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순된 소리였으므로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말한 것에 대한 파괴적 논리를 갖게 됩니다. 폴 사이몬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것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의심하게 된 것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때 진실이라고 주장했던 모든 것을; 나는 신념도 없이 홀로 서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진리는 당신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너 역시 나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아마도 그분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알게 될 유일한 진리는 개개인, 신앙인,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 애정 깊고 평화를 애호하며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일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당신은 당신의 이웃이 항상 읽게 되는 유일한 복음이 될 것입니다"


- Secular Franciscan Order (재속프란치스코회홈에서)





태양의 노래



태양의 노래(“Canticum Fratris Solis”) 혹은 피조물의 노래는


프란치스코가 움브리아 지방 방언으로 지은 시이다.



아시시 사본 338은 이 찬가의 가사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적고 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께서 병중에 산 다미아노에 있을 때,


하느님을 찬미하고 현양하기 위해 지은 피조물의 찬가의 시작.”


이 사본은 악보를 적을 수 있도록 빈칸을 남겨놓기까지 하였지만


불행히도 그 자리에 작곡을 해 넣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찬가가 지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은 페루지아 전기 43-44항과 100항


그리고 완덕의 거울 101항에서도 전하고 있다.


이 찬가는 세 차례의 단계를 거치면서도 쓰여졌다.



이 찬가의 첫 번째 부분은 피조물을 통해 하고 있는 하느님의 찬미로서


프란치스코가 산 다미아노에서 병을 앓고 있을 때인 1225년 봄에 지은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때 사실상 눈이 멀었었다.


그러나 이 가난뱅이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바라보고 감탄할 수 없었음에도


피조물의 경이로움으로 인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 노래를 지었던 것이다.



이 찬가의 두 번째 부분은 용서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한 형제를 보내어 아시시의 주교와 시장 앞에서


이 찬가의 첫 번째 부분을 부르게 함으로써,


이들 사이의 갈등을 화해시켜 주었을 때 지어진 것이다.



이 찬가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의 자매인 육체의 죽음”에 관한 것인데,


성 프란치스코가 죽기 얼마 전에 지어진 것이다.



체스터톤(연대기 작가)은 이 피조물의 노래가


“무척이나 독특한 작품이며 프란치스가 가지고 있었던 특성은


거의 이 작품 하나를 통해 복원해 낼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찬가는 프란치스코와 피조물과의 심오한 일치를 입증해 주고 있는데,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을 하느님의 선물로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치는 모든 피조물이 프란치스코에게는 “형제 자매”가 되는


그런 보편적(우주적) 형제애의 범주 위에 세워진 것이다.






태양의노래



1)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2)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3)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4)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5)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6)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7)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8)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9)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10)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11)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12)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13)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14)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 민순 신부 역)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뽀르지웅쿨라 성당의 내부 모습



전대사 全大赦
라틴어 indulgentia plenaria
영어 plenary indulgence



죄에 대한 유한(有限)한 벌을 모두 취소할 수 있는 사면.
신을 제외하고는 어는 누구도 자기가 언제 전대사를 받을 지, 혹은 받았는 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만이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전대사를 주거나, 주지 않는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내적 조선과 외적 조건이 주어지는데,
내적 조건은 "소죄(小罪)를 포함한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고,
외적 조건은 고해성사, 성체배령, 교황이 지시한 기도 등 3가지다.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고,
만일 어느 하나라도 불충분하다면 한 대사(限大赦)밖에 받을 수 없다.
전대사는 하루에 한 번만 주어진다.





대사 大赦
라틴어 indulgentia 영어 indulgence 독일어 Ablass

죄를 지은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교회는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는 사면되었다 할지라도 그 죄에 따른 벌, 즉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잠벌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보속(補贖)을 통하여 사면될 수 있는데, 현세에서 보속을 하지 못한 경우 연옥에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을 대사라고 한다. 대사는 교황이나 주교들이 줄 수 있는데, 대사의 근거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 놓은 공로의 보고(寶庫, treasury)에 있는 공로를 교회의 권리로 각 영혼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대사는 보통 전대사(全大赦, indulgentiae plenariae)와 한대사(限大赦, indulgentiae partiales)로 나눠진다. 전대사란 죄인이 받아야 할 벌을 전부 없애 주는 것이고, 한대사란 그 벌의 일부분을 없애 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전대사나 한대사를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해 대신 받을 때 그것을 대원(代願, suffrag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대사제도는 초대 교회 박해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교회의 보속규정에 의하면 죄인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일정기간, 예컨대 40일, 혹은 80일, 300일, 혹은 몇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보속하는 속죄기간을 거쳐야 그에 해당하는 벌을 사면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해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규정들을 지키기 힘들었고 후에 신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는 데 일종의 장애요소로도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특별한 경우 주교들은 속죄기간을 단축하여 주기도 하였다. 이 속죄기간의 단축이 대사의 기원을 이룬다.
그 후 중세 초가 되면 속죄기간의 단축 대신 속죄를 사면(redemptiones)하는 관습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른 속죄 규정서가 나왔다. 이것이 이른바 대사의 원형이다.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사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나 십자군을 위하여 재산을 기부하는 자에게 주어졌다. 십자군운동이 끝난 후에는 일정의 공익사업을 위해 기부하는 자에게도 대사가 주어졌다. 중세 말이 되면 소위 ‘대사설교가’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대사를 남용하면서 소위 ‘면죄부’라고 알려진 증서를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교회는 이의 규제를 등한시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규정을 만들어 대사의 남용을 규제하였다. 잇달아 교회법에 규정되었던 엄한 보속은 폐지되었고, 교황 바오로 6세는 대사에 대한 법을 제정하며 대사의 의미와 규정을 명확히 하였다. 이에 따라 대사를 받기 위해 신자들이 해야 할 의무들도 대폭 완화되었다. 즉 대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신자로서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고, 성당참배를 하고, 교황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보통 대사는 성년(聖年)에 베풀어지지만 성년이 아닌 경우에라도 교황이 정하는 바에 따라 대사는 이뤄질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사가 벌의 사면에는 효과를 갖지만 죄 자체를 사면하는 효력은 없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뽀르지웅쿨라 성당의 프란치스코 성인상(비둘기 두마리가 같이 있음)








♬태양의 찬가



























Perdono di Assisi (Indulgenza della Porziuncola)


2 agosto




La maestosa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in Porziuncola, costruita su interessamento di S. Pio V a partire dal 1569 e che sorge a circa 4 chilometri da Assisi, racchiude tra le sue mura l’antica cappella della Porziuncola, legata alla memoria di S. Francesco d’Assisi, essendo la stessa culla degli ordini francescani.
Oggi, essa sulla sua facciata ha un affresco raffigurante l’istituzione del Perdono di Assisi, opera di G. F. Overbek di Lubecca (1829-1830), il quale ha così voluto decorare quell’insigne luogo. Le volte annerite, le pareti sobrie con tracce di affreschi del XIV sec., all’interno, creano un ambiente suggestivo che invita alla preghiera. Dietro l’altare vi è uno splendido polittico, con fondo in oro del prete Ilario da Viterbo (1393), nel cui centro è raffigurata “L’Annunciazione” e nei riquadri circostanti episodi della vita di S. Francesco in relazione sempre alla concessione dell’indulgenza del Perdono.
Il santo pontefice Pio X ha elevato la Chiesa di S. Maria degli Angeli alla dignità di Basilica Patriarcale, con Cappella Papale e le ha confermato il titolo di “Capo e Madre di tutto l'Ordine dei Frati Minori”.
E non poteva essere diversamente, visto il grande affetto che Francesco nutriva per questo posto. Il Santo fissò “qui la sua dimora - dice S. Bonaventura nella “Legenda Major” - per la riverenza che aveva verso gli Angeli e per il grande amore alla Madre di Cristo”, cui la chiesina era dedicata (Leg Maj III, 1).
Lo stesso Poverello – racconta il suo biografo Tommaso da Celano – raccomandava ai suoi frati: “Guardatevi dal non abbandonare mai questo luogo. Se ne foste scacciati da una parte, rientratevi dall’altra, perché questo è luogo santo e abitazione di Dio. Qui, quando eravamo pochi, l’Altissimo ci ha moltiplicato; qui ha illuminato con la sua sapienza i cuori dei suoi poverelli; qui ha acceso il fuoco del suo amore nelle nostre volontà. Qui, chi pregherà con devozione, otterrà ciò che ha chiesto, e chi lo profanerà sarà maggiormente punito. Perciò, figli miei, stimate degno di ogni onore questo luogo, dimora di Dio, e con tutto il vostro cuore, con voce esultante, qui, inneggiate al Signore” (1 Cel. 106:503).
In questa umile chiesa, già appartenuta ai monaci benedettini di Subasio e restaurata dallo stesso Poverello, fu fondato l’Ordine dei Frati Minori (nel 1209). Qui, nella notte tra il 27 e 28 marzo 1211, Chiara di Favarone di Offreduccio ricevette dal Santo l'abito religioso, dando origine all’ordine della Clarisse. Nella Porziuncola, nell’anno 1221, si riunì il famoso “Capitolo delle stuoie”, al quale presero parte ben cinquemila frati, provenienti da ogni parte d'Europa, per pregare, ragionare della salute dell'anima e per discutere la nuova Regola francescana. Sempre qui Francesco piamente spirò, steso sulla nuda terra, al tramonto del 3 ottobre 1226.
Ancora in tale santo luogo, il Santo d’Assisi ebbe la divina ispirazione di chiedere al papa l’indulgenza che fu poi detta, appunto, della Porziuncola o Grande Perdono, la cui festa si celebra il 2 agosto.
È il Diploma di fr. Teobaldo, vescovo di Assisi, uno dei documenti più diffusi, a riferirlo.
S. Francesco, in una imprecisata notte del luglio 1216, mentre se ne stava in ginocchio innanzi al piccolo altare della Porziuncola, immerso in preghiera, vide all’improvviso uno sfolgorante chiarore rischiarare le pareti dell’umile chiesa.
Seduti in trono, circondati da uno stuolo di angeli, apparvero, in una luce sfavillante, Gesù e Maria. Il Redentore chiese al suo Servo quale grazia desiderasse per il bene degli uomini.
S. Francesco umilmente rispose: “Poiché è un misero peccatore che Ti parla, o Dio misericordioso, egli Ti domanda pietà per i suoi fratelli peccatori; e tutti coloro i quali, pentiti, varcheranno le soglie di questo luogo, abbiano da te o Signore, che vedi i loro tormenti, il perdono delle colpe commesse”.
“Quello che tu chiedi, o frate Francesco, è grande - gli disse il Signore -, ma di maggiori cose sei degno e di maggiori ne avrai. Accolgo quindi la tua preghiera, ma a patto che tu domandi al mio vicario in terra, da parte mia, questa indulgenza”.
Era l’Indulgenza del Perdono.
Alle prime luci dell’alba, quindi, il Santo d’Assisi, prendendo con sé solo frate Masseo di Marignano, si diresse verso Perugia, dove allora si trovava il Papa. Sedeva sul soglio di Pietro, dopo la morte del grande Innocenzo III, papa Onorio III, uomo anziano ma molto buono e pio, che aveva dato ciò che aveva ai poveri.
Il Pontefice, ascoltato il racconto della visione dalla bocca del Poverello di Assisi, chiese per quanti anni domandasse quest’indulgenza. Francesco rispose che egli chiedeva “non anni, ma anime” e che voleva “che chiunque verrà a questa chiesa confessato e contrito, sia assolto da tutti i suoi peccati, da colpa e da pena, in cielo e in terra, dal dì del battesimo infino al dì e all’ora ch’entrerà nella detta chiesa”.
Si trattava di una richiesta inusitata, visto che una tale indulgenza si era soliti concederla soltanto per coloro che prendevano la Croce per la liberazione del Santo Sepolcro, divenendo crociati.
Il papa, infatti, fece notare al Poverello che “Non è usanza della corte romana accordare un’indulgenza simile”. Francesco ribatté: “Quello che io domando, non è da parte mia, ma da parte di Colui che mi ha mandato, cioè il Signore nostro Gesù Cristo”.
Nonostante, quindi, l’opposizione della Curia, il pontefice gli accordò quanto richiedeva (“Piace a Noi che tu l’abbia”).
Sul punto di accomiatarsi, il pontefice chiese a Francesco – felice per la concessione ottenuta – dove andasse “senza un documento” che attestasse quanto ottenuto. “Santo Padre, - rispose il Santo - a me basta la vostra parola! Se questa indulgenza è opera di Dio, Egli penserà a manifestare l'opera sua; io non ho bisogno di alcun documento, questa carta deve essere la Santissima Vergine Maria, Cristo il notaio e gli Angeli i testimoni”.
L’indulgenza fu ottenuta, quindi, “vivae vocis oraculo”.
Il 2 agosto 1216, dinanzi una grande folla, S. Francesco, alla presenza dei vescovi dell’Umbria (Assisi, Perugina, Todi, Spoleto, Nocera, Gubbio e Foligno), con l’animo colmo di gioia, promulgò il Grande Perdono, per ogni anno, in quella data, per chi, pellegrino e pentito, avesse varcato le soglie del tempietto francescano.
Tale indulgenza è lucrabile, per sé o per le anime del Purgatorio, da tutti i fedeli quotidianamente, per una sola volta al giorno, per tutto l’anno in quel santo luogo e, per una volta sola, dal mezzogiorno del 1° agosto alla mezzanotte del giorno seguente, oppure, con il consenso dell’Ordinario del luogo, nella domenica precedente o successiva (a decorrere dal mezzogiorno del sabato sino alla mezzanotte della domenica), visitando una qualsiasi altra chiesa francescana o basilica minore o chiesa cattedrale o parrocchiale.
Nel 1279, il frate Pietro di Giovanni Olivi scriveva che “essa indulgenza è di grande utilità al popolo che è spinto così alla confessione, contrizione ed emendazione dei peccati, proprio nel luogo dove, attraverso san Francesco e Santa Chiara, fu rivelato lo stato di vita evangelica adatto a questi tempi”.
Nel 1303, Perugia, città che aveva avuto l’onore di ospitare in più occasioni la curia papale, ricevette dal pontefice Benedetto XI (1302-1304), ancora solo “vivae vocis oracolo”, un’indulgenza “ad instar Portiuncule”, cioè plenaria come quella della Porziuncola.
La diffusione del movimento francescano contribuì anche all'espansione dell’indulgenza legata al Perdono di Assisi, tanto che divenne una pratica consolidata in tutta la cristianità.
Paolo VI, nel riordinare le indulgenze, nella Costituzione Apostolica “Indulgentiarum doctrina” del 1° gennaio 1967, chiariva che “l’indulgenza è la remissione dinanzi a Dio della pena temporale per i peccati, già rimessi quanto alla colpa, che il fedele, debitamente disposto e a determinate condizioni, acquista per intervento della Chiesa, la quale, come ministra della redenzione, autoritativamente dispensa ed applica il tesoro delle soddisfazioni di Cristo e dei santi” (Norme n. 1). Prescriveva, ancora, che “l’indulgenza plenaria può essere acquistata una sola volta al giorno … Per acquistare l’indulgenza plenaria è necessario eseguire l’opera indulgenziata ed adempiere tre condizioni: confessione sacramentale, comunione eucaristica e preghiera secondo le intenzioni del sommo pontefice (almeno un Padre nostro, un Ave ed un Gloria al Padre, ndr). Si richiede inoltre che sia escluso qualsiasi affetto al peccato anche veniale” (Norme nn. 6 e 7).
Ed, infine, stabiliva che “nelle chiese parrocchiali si può lucrare inoltre l’indulgenza plenaria due volte all’anno, cioè nella festa del santo titolare e il 2 agosto, in cui ricorre l’indulgenza della Porziuncola, oppure in altro giorno opportunamente stabilito dall’ordinario. Le predette indulgenze si possono acquistare o nei giorni sopra stabiliti, oppure, col consenso dell’ordinario, la domenica antecedente o successiva” (Norme n. 15) e che “l’opera prescritta per lucrare l’indulgenza plenaria annessa a una chiesa o a un oratorio consiste nella devota visita di questi luoghi sacri, recitando in essi un Pater e un Credo” (Norme n. 16).
La Sacra Penitenzieria Apostolica il 29 giugno 1968 pubblicava l'“Enchiridion indulgentiarum” o “Manuale delle indulgenze” il cui par. 65, intitolato “Visitatio ecclesiae paroecialis”, statuiva che l'indulgenza plenaria al fedele che piamente visita la chiesa parrocchiale nella festa del Titolare od il giorno 2 agosto, in cui ricorre l'indulgenza della “Porziuncola”, può essere acquistata “o nel giorno sopra indicato, oppure in un altro giorno da stabilirsi dall'Ordinario secondo l'utilità dei fedeli. La chiesa cattedrale e, eventualmente, la chiesa concattedrale, anche se non sono parrocchiali, ed inoltre le chiese quasi-parrocchiali, godono delle medesime indulgenze. Nella pia visita, in conformità alla Norma 16 della Costituzione Apostolica (Indulgentiarum doctrina, ndr), il fedele deve recitare un Padre Nostro e un Credo”.
Tale disposizione è stata sostanzialmente mantenuta inalterata anche nell’attuale edizione (la quarta) dell’“Enchiridion indulgentiarum - Normae et concessiones” pubblicato il 16 luglio 1999 dalla Paenitentiaria Apostolica (conc. 33, par. 1, nn. 2°, 3°, 5°).


Nel santuario della Porziuncola, ad Assisi, invece, grazie anche ad uno speciale decreto della Penitenzeria Apostolica datato 15 luglio 1988 (Portiuncolae sacrae aedes) si può lucrare, alle medesime condizioni, durante tutto l‚anno, una sola volta al giorno.
Autore: Francesco Patruno






Our Lady of the Angels
Also known as
La Negrita; The Little Black One; Virgin de los Angeles
Memorial
2 August
Profile
The image of Our Lady of the Angels is only about three inches high, and is carved in a simple fashion on dark stone. She has a round, sweet face, slanted eyes and a delicate mouth. Her coloring is leaden, with scattered golden sparkles. She carries the Christ Child on her left arm. Only the faces of Mary and the Child are visible; the rest is covered by a cloak that is gathered in pleats. The statuette is displayed in a large gold monstrance that surrounds it and enlarges its appearance.


While searching for firewood on 2 August 1635, the feast of the Holy Angels, a poor mestizo woman called Juana Pereira discovered this small image of the Virgin sitting beside the footpath near Cartago, Costa Rica. Juana took it home with her, but it soon disappeared only to be re-discovered at the same place beside the same path. The statue repeated this behavior five more times - taken to homes and then the parish church - and returning on its own to the site where Juana found it. The locals finally took this to mean that Our Lady wanted a shrine built there, and so it was.


The shrine soon became a point of pilgrimage, especially for the poor and outcast. The image was solemnly crowned in 1926. In 1935 Pope Pius XI declared the shrine of the Queen of Angels a basilica. The stone on which the statue was originally sitting is in the basilica, and is being slowly worn away by the touch of the hands of the pilgrims. A spring of water appeared from beneath the stone, and its waters carried away to heal the sick.
Patronage
Costa 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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