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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 7월23일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Santa Brigida di Svezia Religiosa


Saint Bridget (Birgitta) of Sweden - Benedictine


(Uppsala, Svezia, 1303 - Roma, 23 luglio 1373
Born:1302-1303 at Finsta Castle, Uppsala, Sweden
Died :23 July 1373 at Rome, Italy; buried in 1374 at the Vadstena,
Sweden convent she founded
Canonized:7 October 1391 by Pope Boniface IX
Brigida (come Brigitta) = alta, forte, potente, dall'irlandese
(like Brigitta) = high, strong, powerful, dall'irlandese


Third Order Franciscan








스웨덴 업랜드의 총독이며 부유한 지주인 비르겔 페르쏜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잉그보르그 벵츠도터의 딸로 브리지타는 1303년 7월 14일에 태어났다.


브리지타가 12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자, 그녀는 아스펜나스에서 성장하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환시를 여러 번 체험하였다.


그녀는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로 당시 18세의 귀족이던 울프 구드마쏜과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의 하나가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이다.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 축일:3월24일. 게시판1678번



남편이 된 울포는 아직 어리지만 성스러운 아내에게 합당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내를 깊이 존경하고 그 성덕을 본받으려 노력했다.


그들은 다같이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가 서로 격려하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1335년, 그녀는 스웨덴의 왕 마뉴스 2세와 막 결혼한 나무르의 불랑슈의 시녀가 되었다.


브리지타의 큰 딸이 결혼에 실패하고, 또 그녀의 막내 아들이 1340년에 죽게 되자,


그녀는 노르웨이 트론디엠의 성 올리프 경당으로 순례여행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궁중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꼼포스뗄라로 재차 순례길에 올랐다.


그러나 아라스에서 병을 얻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알바스트라의 씨토 수도원에서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4년을 지냈다.



이 때에도 그녀는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받았고, 고해신부는 그녀의 모든 환시가 올바르다고 보증해 주었다.


이러한 계시에 따라 그녀는 1344년애 바드스테나에 수도원을 세웠고,


이것이 성삼회(비르지타회)의 시작이다.


바드스테나는 15세기 스웨덴의 지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그녀는 이방인 렛트와 에스토니아인들을 대항하는 국왕 마뉴스의 십자군 지원을 거부하였다.



그녀는 당시 아비뇽에 유배 중이던 교황 끌레멘스 6세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환시 내용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교황은 안전하게 로마로 돌아가실 것이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평화에 교황이 중재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지내면서, 매우 엄격한 생활과 빈민구제에 온 정열을 쏟았으며,


당시의 심각한 교회와 정치사이의 문제에 대하여 기탄 없는 충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엄격한 생활과 성덕,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에 대한 관심 및


교황의 로마 귀환에 대한 노력 등이 로마 전체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로마 주변의 수도원들을 개혁하였고, 빈민구제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373년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예언과 고위직책에 대한 탄핵은 유명하였다.


그녀는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는 문제를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으나,우르반 교황만이 잠시 귀향하였고,


그의 후임자 그레고리오 11세는 여전히 아비뇽에 있었다.


그녀의 구술로 적은 "계시"라는 책에는 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내용으로


당시대에 강한 반항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그녀의 시성과 콘스탄티노 공의회에서 그러하였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녀가 정통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역설한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그의 체험들은 모두가 진실하며 교리와도 부합된다고 갑론을박하였다.


그녀의 사후, 트랜트 공의회는 요한 토르케마다가 저술한 그녀의 "계시"를 세심히 검토케 하였는데,


결국 신자들이 읽어도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말했다.


"책과 비교될 만한 배는 없다. 책은 우리를 먼 곳으로 보내 준다.


" 당신이 만약 무인도에 간다면 꼭 가져가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아마 책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비르지타도 책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엄격한 청빈 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구입하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수도회의 회칙을 정하면서 일정 소득 이상의 수입은


모두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써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을 세웠지만


책만큼은 누구든지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었을 정도였다.


비르지타는 수도 생활을 하기 전 28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 8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처럼 책을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8명의 자녀 중 한 명은 성인이 되었지만


다른 자녀들은 불륜을 저지르는 등 올바른 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 www.ofmconv.or.kr)





Revelations of St Bridget of Sweden - MINIATURIST, Italian


c. 1400.Illumination on parchment, 26,8 x 19 cm.Pierpont Morgan Library, New York





성녀 비르지따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기도문에서


(Oratio 2: Revelationum S. Birgittae libri, 2, Romae 1628, pp.408-410)



구세주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영혼의 승화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죽음을 예고하시고, 최후만찬 때 물질인 빵을 축성하시어


신묘히 당신의 보배로운 몸으로 변형시키시고,


그것을 당신의 지극히 숭고한 수난의 기념으로 사도들에게 인자로이 남겨 주시며,


당신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손으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위대한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예 받으소서,


당신은 수난과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그 순결한 몸에서 피땀을 흘리시고


원하신 대로 우리 구속을 성취하시어 인류에게 품으신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가야파에게 끌려가시어 온 인류의 심판관이신 당신이


빌라도의 재판에 넘겨지는 것을 겸손히 허락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광 받으소서.


당신은 자색 홍포를 입고 날카로운 가시로 엮어 짠 가시관을 쓰신 채 조롱당하시고,


당신의 영예로운 얼굴이 침 뱉음 당하고 눈을 가리우며 얼굴과 몸이


악인들의 잔인한 손으로 무참하게 맞는 것을 인내로이 참으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양 받으소서.


당신은 기둥에 묶이시어 참혹하게 채찍질당하시며, 피에 젖은 채 빌라도의 재판장으로 끌려가시어


순결한 어린양으로 드러내시는 것을 인내로이 허락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예 받으소서.


당신은 그 영광스러운 몸이 피로 범벅이된 채 십자가 형을 받으시고,


고통에 짖눌린 당신의 거룩한 어깨에 십자가를 메시고


사람들이 분노하여 외치는 가운데 수난의 장소로 끌려가시어,


옷 벗긴 채 십자가 나무에 못박貪綬?원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영예 받으소서.


당신은 결코 죄를 짓지 않고 미소한 죄마저 허락치 않으신 당신의 영광스런 어머니가


그렇게도 격심한 고뇌 가운데 계신 것을 보실 때 사랑에 젖은 인자한 눈으로 겸손히 내려다보시고


또 그 분을 위로해 주시면서 당신 제자의 충실한 돌봄에 맡기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당신께로 돌아온 강도에게 천국의 영광을 자비로이 약속하실 때 죽음의 고뇌 가운데서


모든 죄인들에게 죄 사함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찬양 받으소서.


당신은 수시간 동안 우리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한없는 슬픔과 쓰라림을 당하시고,


상처의 예리한 고통은 당신의 복된 영혼까지 꿰뚫고 지극히 거룩한 심장까지 무참히 찔러


마침내 그것을 헤쳐 놓아 기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당신은 또 머리를 숙이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겸손되이 맡기시고 죽으시어


차디찬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보혈과 지극히 거룩한 죽음으로 영혼들을 구속하시고 유배지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자비로이 이끄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우리 구원을 위해 늑방과 심장이 창으로 찔리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 늑방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보혈과 물을 쏟으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광 받으소서.


당신은 그 거룩한 몸이 벗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져 슬픔에 젖은 당신 어머니의 팔에 안기기를 원하시고,


어머니께서 당신 몸을 수의로 싸서 무덤에 묻고 병사들이 지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영예 받으소서.


당신은 삼일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뽑으신 사람들에게 당신이 살아 계심을 드러내 보이시고,


사십 일 후에 많은 이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시어 고성소에서 해방시키기신 당신의 벗들이


하늘의 영광에 들도록 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기쁨과 찬양 받으소서.


당신은 제자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시어


그들의 영혼 안에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가시키셨습니다.



내 주 예수여, 영원토록 찬미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소서.


당신은 당신 신성의 영광안에서 하늘 나라의 옥좌에 앉아 계시고


동정녀에게서 육신을 취하실 때 지니신 모든 거룩한 지체들과 함께 육신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심판 날에 산 이와 죽은 이들의 영혼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당신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스웨덴 업랜드의 총독이며 부유한 지주인 비르겔 페르손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잉그보르그 벵츠도터의 딸인 비르지타는 1303년 7월 14일에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다른 자녀들보다 경건해 처음부터 환시를 여러 번 체험했고


성모께서 그녀에게 발현하시는 특은도 받았다.


열 살 때에 또 성모께서 발현하시어


그녀의 머리 위에 뒷날의 사명의 표지(標識)로 광채 찬란한 관을 씌워 주시었다.



1311년 사순시기 때, 즉 비르지타가 열 한 살 되던 해,


예수 수난에 대한 강론을 듣고 깊이 감동해 밤새도록 생각에 잠겨 있을때,


처음에는 눈부시게 찬란한 광채가 보이고 이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비르지타는 마음이 아파서 "예수님! 당신을 이토록 만든 자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께서는


"나를 경멸하는 사람, 내사랑을 잊는 사람" 이라고 대답하셨다 한다.


그때부터 비르지타는 주로 예수 수난에 대해 묵상했다.





그 해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잉그보르그가 세상을 떠나자,


비르지타는 언니와 같이 큰어머니 댁인 아스펜나스에 가 있게 되었다.


큰 어머니는 이 두아이에 대해 특히 유의하며 교육을 시켰고,


더욱이 비르지타는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눈치채고 더욱 조심히 가르쳤다.


그럼에도 그 아버지 비르겔은 비르지타의 적당한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14세때에 울포라는 귀족 청년에게서 구혼을 받았다.


비르지타는 매우 슬퍼했고 결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했으나


순명하는 마음으로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남편이 된 울포는 아직 어리지만 성스러운 아내에게 합당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내를 깊이 존경하고 그 성덕을 본받으려 노력했다.


그들은 다같이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가 서로 격려하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그동안 울포는 어떤 주(州)의 총독이 되어 자신을 돌볼 새 없이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정의의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 환경에서는 그때 상류 사회의 풍속대로 비르지타도 나서서 손님을 만찬에 초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일단 그 일이 끝나면 자기 방에 돌아와 교회를 위한 일 또는 빈민 구제를 위한 일에 열중했다.


그리고 줄곧 성인전이나 교부들의 서적 특히 성그레고리오의 서적을 탐독했다.





비르지타에게는 여덟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마르타라는 딸과 가롤로라는 아들은 항상 그의 걱정거리였다.


마르타는 허영심이 많아 쾌락을 즐겼고, 가롤로는 의지박약한 성격에다 방탕에 흘렀다.


그러나 경건한 어머니의 눈불과 기도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가롤로는


저 멀리 나폴리에서 자기가 범한 모든 죄를 진실히 통회하고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 국왕 마뉴스2세는 어려서 왕비 나무르의 블랑슈를 맞이하고


비르지타를 그녀의 으뜸시녀로 세워 내실을 전부 도맡아 다스리도록 했다.


처음에 비르지타는 이를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치 못하고 결국 승낙했다.


그녀는 궁중의 모든 일을 현명하고 두터운 애정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그녀는 모든 이에게 성덕의 표양을 보여 궁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햇다.


그리고 그녀가 번쩍이는 비단옷 밑에 거친 옷을 입고 엄격한 재를 지키며,


때로는 철야 기도롤 밤을 새우는 것을 아고는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엇다.



유감스러운 것은 아직 사리를 제대로 분별 못하는 국왕과 왕비가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에만 정신이 팔려 비르지타의 성스러운 생활에는 조금도 감동되는 기색이 없었다.


비르지타는 간청해도 들어 줄 것 같지 않아, 휴가를 청해 남편과 함께 콤포스텔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순례 도중 울포는 아라스라는 곳에서 큰 병에 걸렸다.


그는 병이 완쾌되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는 서원을 했다.


하느님의 섭리로 울포의 병은 완쾌되어 그는 하느님께 드린 서원대로 비르지타의 동의를 얻어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평수사가 되었고


열심히 수도 생활 하다가 다시 중병에 걸려 훌륭한 최후로 일생을 마쳤다.





뜻하지 않게 과부가 된 비르지타는 알바스트라 수녀원 원장의 승낙을 얻어 수녀원 부속 건물을 한 칸 빌려,


그곳에서 지상의 생활이라기 보다 오히려 천상 생활이라 할 수 있는 엄격한 고신 극기의 나날을 보냈다.



그동안 마뉴스 왕은 절제없는 호화스러운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 궁핍해졌는데


다시 비르지타가 궁으로 들어와 주기를 청하므로, 그녀는 궁중에 다시 들어가


우선 사치스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착실한 생활을 택하도록 정성어린 간언을 했다.


그러나 왕은 그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궁중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간언이나 그녀의 성스러운 생활 태도가


안일함만을 찾는 그들에게는 눈의 티와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비르지타는 모든 것을 달갑게 참아 받았다.


그러나 자기 권고가 무익됨을 알고는 오래지 않아 스웨덴에 큰 재화가 미칠 것을 예언하고


다시 알바스트라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당시 교황은 로마가 아닌 프랑스의 아비뇽에 계실 때였다.


그것을 유감되이 생각한 비르지타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교황께 서한을 보내어 로마로 귀환할 것을 청했다.


한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도 역시 같은 청을 해 마침내 교황은 로마로 귀환케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비르지타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녀는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받았는데 고해 신부는 그녀의 모든 환시가 올바르다고 보증해 주었다.


그녀는 이러한 계시에 따라 1344년에 바드스테나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성삼회(비르지타회)의 시작이었다.


마뉴스 왕이 필요한 물자를 원조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그 수도원을 인가했다.



1350년은 교황께서 은사를 공포한 해이다.


비르지타는 은사를 얻기 위해 꼭 로마를 순례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으나,


왜 그런지 쉽사리 떠나게 되지 않았다.


아마 장거리 여행을 하면 다시는 스웨덴을 볼 수 없을 것같이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후에 로마로 갔고,거기서 17년을 지내는 동안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로마에 머물면서 여러 수도회를 개혁하고 빈민구제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동안 스웨덴을 위해 여러 가지 배려를 베풀었다.


그녀의 아들, 딸들도 어머니를 찾아 로마로 왔는데 그들 중의 하나가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이다.



*





비르지타는 예수께서 생활하시던 곳과 돌아 가신곳을 보고 싶은 열망을 억제할 수 없어


팔레스티나 순례를 떠났다.


도중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겨우 성지에 도착해 감동된 마음으로


거룩한 장소들을 빠짐없이 참배했다.


그러나 성모께서 발현하셔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으므로,


즉시 길을 떠나 돌아오는 도중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가까스로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때는 1373년 사순시기 무렵이었다.


비르지타는 2, 3개월 더 살았는데 이 짧은 기간에도 여러가지 유혹이 일어나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하느님께서 내리신 마지막 시련이었다.



7월 23일 아침, 성녀는 고복을 입고 판자위에 누워 그녀의 병실에서 거행되는 미사에서


노자 성체를 영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미사 한대에 더 참여해,


거양성체 때 소리를 높여 "주님!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하고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유해는 클라라 수녀회의 성당에 매장되었다가,


1년 후 스웨덴의 바드스테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녀의 유해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1391년에 그녀는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성녀 비르짓다의 예수님 수난 15기도


발행인: 하안토니오 | 출판사: 아베마리아 출판사 | 2003년 9월 15일



예수님께서 성녀 비르짓다를 통하여 계시하신 당신 수난에 대한 15기도.



"매일 주님의 기도 15번과 성모송 15번을 바치며 이 15기도를 1년 동안 바쳐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은총을 베풀어주겠다."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 축일:3월24일.게시판1678번


*아일랜드의 성녀 브리지다 축일: 2월1일.게시판923번,159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시편22(23)편


update 2005.1.31.






Santa Brigida di Svezia Religiosa, fondatrice
23 luglio - Festa
Finsta, Uppsala (Svezia), giugno 1303 – Roma, 23 luglio 1373


Madre di otto figli fra i quali santa Caterina di Svezia, rimasta vedova si dedicò totalmente alla vita ascetica e contemplativa. Terziaria francescana, diede origine al nuovo ordine del santo Salvatore. La passione di Gesù fu al centro delle sue esperienze mistiche. Morì a Roma il 23 luglio 1373. Il progetto della fondatrice ebbe l'appoggio del re di Svezia e si attuò in ben 78 monasteri in tutt'Europa, nonostante le rigide regole geometriche. L'ordine fu approvato nel 1349 da Urbano V. Brigida venne canonizzata nel 1391, 18 anni dopo la morte. (Avvenire)


Patronato:Svezia, Europa (Giovanni Paolo II, 1/10/99)
Etimologia: Brigida (come Brigitta) = alta, forte, potente, dall'irlandese

Nel tardo Medioevo, sia in campo civile che in quello ecclesiastico, gli uomini si dilaniavano in lotte intestine, provocando guerre tra gli Stati e scismi nella Chiesa e mettendo a rischio la stessa sopravvivenza della civiltà cristiana, davanti al pericolo sempre incombente dei musulmani.
Dio allora suscitò donne come santa Brigida di Svezia e santa Caterina da Siena, contemporanee, che con il loro carisma cercarono di pacificare gli animi e di ricostruire l’unità della Chiesa, dando un contributo, sotto certi aspetti determinante, alla civiltà europea.
E giustamente sia s. Brigida patrona della Svezia (1303-1373), sia s. Caterina da Siena compatrona d’Italia (1347-1380), sono state proclamate compatrone dell’Europa, insieme a s. Benedetto da Norcia (470-547).


Sue origini e formazione
Brigida o Brigitta o Birgitta, nacque nel giugno 1303 nel castello di Finsta presso Uppsala in Svezia; suo padre Birgen Persson era ‘lagman’, cioè giudice e governatore della regione dell’Upplan, la madre Ingeborga era anch’essa di nobile stirpe.
In effetti Brigida apparteneva alla nobile stirpe dei Folkunghi e discendeva dal pio re cristiano Sverker I; ebbe altri sei fratelli e sorelle e le fu imposto il nome di Brigida, in onore di santa Brigida Cell Dara († 525), monaca irlandese, della quale i genitori erano devoti.
Dopo la morte della madre, a 12 anni fu mandata presso la zia Caterina Bengtsdotter, a completare la propria formazione; ancora fanciulla, Brigida dopo aver ascoltato una predica sulla Passione di Gesù, ebbe con Lui un profondo colloquio che le rimase impresso per sempre nella memoria.
Alla domanda: “O mio caro Signore, chi ti ha ridotto così?”, si sentì rispondere: “Tutti coloro che mi dimenticano e disprezzano il mio amore!”. La bambina decise allora di amare Gesù con tutto il cuore e per sempre.
Presso la zia, Brigida trascorse due anni, dove apprese le buone maniere delle famiglie nobili, la scrittura e l’arte del ricamo; durante questi anni non mancarono nella sua vita alcuni fenomeni mistici, come la visione del demonio sotto forma di mostro dai cento piedi e dalle cento mani.


Sposa e madre cristiana
A 14 anni, secondo le consuetudini dell’epoca, il padre la destinò in sposa del giovane Ulf Gudmarsson figlio del governatore del Västergötland; in verità Brigida avrebbe voluto consacrarsi a Dio, ma vide nella disposizione paterna la volontà di Dio e serenamente accettò.
Le nozze furono celebrate nel settembre 1316 e la sua nuova casa fu il castello di Ulfasa, presso le sponde del lago Boren; il giovane sposo, nonostante il suo nome, che significava ‘lupo’, si dimostrò invece uomo mite e desideroso di condurre una vita conforme agli insegnamenti evangelici.
Secondo quanto scrisse e raccontò poi la figlia s. Caterina di Svezia, al processo di canonizzazione, i due sposi vissero per un biennio come fratello e sorella nella preghiera e nella mortificazione; soltanto tre anni dopo nacque la prima figlia e in venti anni Brigida diede al marito ben otto figli, quattro maschi (Karl, Birger, Bengt e Gudmar) e quattro femmine (Marta, Karin, Ingeborga e Cecilia).
Nel 1330 il marito Ulf Gudmarsson fu nominato “lagman” di Närke e successivamente i due coniugi divennero anche Terziari Francescani; dietro questa nomina, c’era tutto l’impegno di Brigida, che gli aveva insegnato a leggere e scrivere e Ulf approfittando della spinta culturale della moglie, aveva approfondito anche lo studio del diritto, meritando tale carica.
Per venti anni Ulfasa fu il centro della vita di Brigida e tutta la provincia dell’Ostergötland divenne il suo mondo, il suo ruolo non fu solo quello di principessa di Närke, ma senza ostentare alcuna vanagloria, fu una ottima massaia, dirigeva il personale alle sue dipendenze, mescolata ad esso svolgeva le varie attività domestiche, instaurando un benefico clima di famiglia.
Si dedicava particolarmente ai poveri e alle ragazze, procurando a quest’ultime una onesta sistemazione per non cadere nella prostituzione; inoltre fece costruire un piccolo ospedale, dove ogni giorno si recava ad assistere gli ammalati, lavandoli e rammendando i loro vestiti.
In questo intenso periodo, conobbe il maestro Matthias, uomo esperto in Sacra Scrittura, di vasta cultura e zelante sacerdote; ben presto divenne il suo confessore e si fece tradurre da lui in svedese, buona parte della Bibbia per poterla leggere e meditare meglio; la sua presenza apportò a Brigida la conoscenza delle correnti di pensiero di tutta l’Europa, giacché don Matthias aveva studiato a Parigi, e tutto ciò si rivelerà utile per la conoscenza delle problematiche del tempo, preparandola alla sua futura missione.


Alla corte reale di Svezia
Quando però nel 1335, il re di Svezia Magnus II sposò Bianca di Dampierre, Brigida che era lontana cugina del sovrano, fi invitata a stabilirsi a corte, per ricevere ed assistere la giovane regina, figlia di Giovanni I, conte di Namur.
L’invito non si poteva respingere e quindi Brigida affidati due figlie e un figlio a monasteri cistercensi, lasciò temporaneamente la sua casa di Ulfasa e si trasferì a Stoccolma, portando con sé il figlio più piccolo, bisognoso ancora delle cure materne.
Ebbe grande influenza sui giovani sovrani e finché fu ascoltata, la Svezia ebbe buone leggi e furono abolite ingiuste ed inumane consuetudini, come il diritto regio di rapina su tutti i beni dei naufraghi, inoltre furono mitigate le tasse che opprimevano il popolo.
Poi man mano, mentre la regina cresceva, manifestando una eccessiva frivolezza favorita dalla debolezza del marito, Brigida si trovò messa da parte e la vita di corte divenne molto mondana.
A questo punto, senza rompere i rapporti con i sovrani, approfittando di momenti propizi e del lutto che l’aveva colpita con la morte nel 1338 del figlio Gudmar, Brigida lasciò la corte e se ne ritornò a casa sua, ritrovando nel castello di Ulfasa nella Nericia, la gioia della famiglia e della convivenza e con il marito si recò in pellegrinaggio a Nidaros per venerare le reliquie di sant’Olav Haraldsson (995-1030) patrono della Scandinavia.


Dalla vita coniugale allo stato religioso – L’esperienza mistica
Quando nel 1341 i due coniugi festeggiarono le nozze d’argento, vollero recarsi in pellegrinaggio a Santiago di Compostella; quest’evento segnò una svolta decisiva nella vita dei due coniugi, che già da tempo vivevano vita fraterna e casta.
Nel viaggio di ritorno, Ulf fu miracolosamente salvato da sicura morte grazie ad un prodigio e i due coniugi presero la decisione di abbracciare la vita religiosa, era una cosa possibile in quei tempi e parecchi santi e sante provengono da questa scelta condivisa.
Al ritorno, Ulf fu accolto nel monastero cistercense di Alvastra, dove poi morì il 12 febbraio 1344 assistito dalla moglie; Brigida a sua volta, avendo esaurito la sua missione di sposa e di madre, decise di trasferirsi in un edificio annesso al monastero di Alvastra, dove restò quasi tre anni fino al 1346.
Fu l’inizio del periodo più straordinario della sua vita; dopo un periodo di austerità e di meditazione sui divini misteri della Passione del Signore e dei dolori e glorie della Vergine, cominciò ad avere le visioni di Cristo, che in una di queste la elesse “sua sposa” e “messaggera del gran Signore”; iniziò così quello straordinario periodo mistico che durerà fino alla sua morte.
Ai suoi direttori spirituali come il padre Matthias, Brigida dettò le sue celebri “Rivelazioni”, sublimi intuizioni e soprannaturali illuminazioni, che ella conobbe per tutta la vita e che furono poi raccolte in otto bellissimi volumi.


Stimolatrice di riforme e di pace in Europa
Durante le visioni, Cristo la spingeva ad operare per il bene del Paese, dell’Europa e della Chiesa; non solo tornò a Stoccolma per portare personalmente al re e alla regina “gli ammonimenti del Signore”, ma inviò lettere e messaggi ai sovrani di Francia e Inghilterra, perché terminassero l’interminabile ‘Guerra dei Trent’anni’.
Suoi messaggeri furono mons. Hemming, vescovo di Abo in Finlandia e il monaco Pietro Olavo di Alvastra; un altro monaco omonimo divenne suo segretario.
Esortò anche papa Clemente VI a correggersi da alcuni gravi difetti e di indire il Giubileo del 1350, inoltre di riportare la Sede pontificia da Avignone a Roma.


La fondazione del nuovo Ordine religioso
Nella solitudine di Alvastra, concepì anche l’idea di dare alla Chiesa un nuovo Ordine religioso che sarà detto del Santo Salvatore, composto da monasteri ‘doppi’, cioè da religiosi e suore, rigorosamente divisi e il cui unico punto d’incontro era nella chiesa per la preghiera in comune; ma tutti sotto la guida di un’unica badessa, rappresentante la Santa Vergine e con un confessore generale.
Ottenuto dal re, il 1° maggio 1346, il castello di Vadstena, con annesse terre e donazioni, Brigida ne iniziò i lavori di ristrutturazione, che durarono molti anni, anche perché papa Clemente VI non concesse la richiesta autorizzazione per il nuovo Ordine, in ottemperanza al decreto del Concilio Ecumenico Lateranense del 1215, che proibiva il sorgere di nuovi Ordini religiosi.
Per questo già nell’autunno del 1349, Brigida si recò a Roma, non solo per l’Anno Santo del 1350, ma anche per sollecitare il papa, quando sarebbe ritornato a Roma, a concedere l’approvazione, che fu poi concessa solo nel 1370 da papa Urbano V.
L’Ordine del Ss. Salvatore, era costituito ispirandosi alla Chiesa primitiva raccolta nel Cenacolo attorno a Maria; la parte femminile era formata da 60 religiose e quella maschile da 25 religiosi, di cui 13 sacerdoti a ricordo dei 12 Apostoli con s. Paolo e 2 diaconi e 2 suddiaconi rappresentanti i primi 4 Padri della Chiesa e otto frati.
Riassumendo, ogni comunità doppia era composta da 85 membri, dei quali 60 suore che con i 12 monaci non sacerdoti rappresentavano i 72 discepoli, più i 13 sacerdoti come sopra detto.
Il gioco di numeri, rientrava nel gusto del tempo per il simbolismo, rappresentare gli apostoli e i discepoli, spingeva ad un richiamo concreto a vivere come loro erano vissuti; senza dimenticare che in quell’epoca non esisteva crisi vocazionale e ciò permetteva di raggiungere senza difficoltà il numero di monache e religiosi prescritto per ogni doppio monastero.


Roma sua seconda patria
Arrivata a Roma insieme al confessore, al segretario Pietro Magnus e al sacerdote Gudmaro di Federico, alloggiò brevemente nell’ospizio dei pellegrini presso Castel Sant’Angelo, e poi nel palazzo del cardinale Ugo Roger di Beaufort, fratello del papa, che vivendo ad Avignone, aveva deciso di metterlo a disposizione di Brigida, la cui fama era giunta anche alla Curia avignonese.
Roma non fece una buona impressione a Brigida, ne migliorò in seguito; nei suoi scritti la descriveva popolata di rospi e vipere, le strade piene di fango ed erbacce, il clero avido, immorale e trascurato.
Si avvertiva fortemente la lontananza da tanto tempo del papa, al quale descriveva nelle sue lettere la decadente situazione della città, spronandolo a ritornare nella sua sede, ma senza riuscirci.
Vedere l’Europa unita e in pace, governata dall’imperatore e guidata spiritualmente dal papa, era il sogno di Brigida e dei grandi spiriti del suo tempo.
Dopo quattro anni, si trasferì poi nella casa offertale nel suo palazzo, dalla nobildonna romana Francesca Papazzurri, nelle vicinanze di Campo de’ Fiori; Roma divenne così per Brigida la sua seconda patria.
Trascorreva le giornate studiando il latino, dedicandosi alla preghiera e alle pratiche di pietà, trascrivendo in gotico le visioni e le rivelazioni del Signore, che poi passava subito al suo segretario Pietro Olavo perché le traducesse in latino.
Dalla dimora di Campo de’ Fiori, che abiterà fino alla morte, inviava lettere al papa, ai reali di Svezia, alle regine di Napoli e di Cipro e naturalmente ai suoi figli e figlie rimasti a Vadstena.


Apostola riformatrice in Italia
Si spostò in pellegrinaggio a vari santuari del Centro e Sud d’Italia, Assisi, Ortona, Benevento, Salerno, Amalfi, Gargano, Bari; nel 1365 Brigida andò a Napoli dove fu artefice e ispiratrice di una missione di risanamento morale, ben accolta dal vescovo e dalla regina Giovanna che seguendo i suoi consigli, operò una radicale conversione nei suoi costumi e in quelli della corte.
Napoli ha sempre ricordato con venerazione la santa del Nord Europa, e a lei ha dedicato un bella chiesa e la strada ove è situata nel centro cittadino; recentemente le sue suore si sono stabilite nell’antico e prestigioso Eremo dei Camaldoli che sovrasta Napoli.
Brigida, si occupò anche della famosa abbazia imperiale di Farfa nella Sabina, vicino Roma, dove l’abate con i monaci “amava più le armi che il claustro”, ma il suo messaggio di riforma non fu ascoltato da essi.
Mentre era ancora a Farfa, fu raggiunta dalla figlia Caterina (Karin), che nel 1350 era rimasta vedova e che rimarrà al suo fianco per sempre, condividendo in pieno l’ideale della madre.
Ritornata a Roma, Brigida continuò a lanciare richiami a persone altolocate e allo stesso popolo romano, per una vita più cristiana, si attirò per questo pesanti accuse, fino ad essere chiamata “la strega del Nord” e a ridursi in estrema povertà, e lei la principessa di Nericia, per poter sostenere sé stessa e chi l’accompagnava, fu costretta a chiedere l’elemosina alla porta delle chiese.


Il ritorno temporaneo del papa – Pellegrina in Terra Santa
Nel 1367 sembrò che le sue preghiere si avverassero, il papa Urbano V tornò da Avignone, ma la sua permanenza a Roma fu breve, perché nel 1370 ripartì per la Francia, nonostante che Brigida gli avesse predetto una morte precoce se l’avesse fatto; infatti appena giunto ad Avignone, il 24 settembre 1370 il papa morì.
Durante il breve periodo romano, Urbano V concesse la sospirata approvazione dell’Ordine del Ss. Salvatore e Caterina di Svezia ne diventò la prima Superiora Generale.
Brigida continuò la sua pressione epistolare, a volte molto infuocata, anche con il nuovo pontefice Gregorio XI, che già la conosceva, affinché tornasse il papato a Roma, ma anche lui pur rimanendo impressionato dalle sue parole, non ebbe il coraggio di farlo.
Ma anche Brigida, ormai settantenne, si avviava verso la fine; ottenuto il via per il suo Ordine religioso, volle intraprendere il suo ultimo e più desiderato pellegrinaggio, quello in Terra Santa.
L’accompagnavano il vescovo eremita Alfonso di Jaén custode delle sue ‘Rivelazioni’ messe per iscritto, di cui molte rimaste segrete, poi i due sacerdoti Olavo, Pietro Magnus e i figli Caterina, Birger e Karl e altre quattro persone, in totale dodici pellegrini.
Verso la fine del 1371, la comitiva partì da Roma diretta a Napoli, dove trascorse l’inverno; in prossimità della partenza, nel marzo 1372 Brigida vide morire di peste il figlio Karl, ma non volle annullare il viaggio e dopo aver pregato per lui e provveduto alla sepoltura, s’imbarcò per Cipro, dove fu accolta dalla regina Eleonora d’Aragona, che approfittò del suo passaggio per attuare una benefica riforma nel suo regno.
A maggio 1372 arrivò a Gerusalemme, dove in quattro mesi poté visitare e meditare nei luoghi della vita terrena di Gesù, poi ritornò a Roma col cuore pieno di ricordi ed emozioni e subito inviò ad Avignone il vescovo Alfonso di Jaén, con un’ulteriore messaggio per il papa, per sollecitarne il ritorno a Roma.


Morte, eredità spirituale, culto
A Gerusalemme, Brigida contrasse una malattia, che in fasi alterne si aggravò sempre più e in breve tempo dal suo ritorno a Roma, il 23 luglio 1373, la santa terminò la sua vita terrena, con accanto la figlia Caterina alla quale aveva affidato l’Ordine del Ss. Salvatore; nella sua stanza da letto si celebrava l’Eucaristia ogni giorno e prima di morire ricevette il velo di monaca dell’Ordine fa lei fondato.
Unico suo rimpianto era di non aver visto il papa tornare a Roma definitivamente, cosa che avverrà poco più di tre anni dopo, il 17 gennaio 1377, per mezzo di un’altra donna s. Caterina da Siena, che continuando la sua opera di persuasione, con molta fermezza, riuscì nell’intento.
Fu sepolta in un sarcofago romano di marmo, collocato dietro la cancellata di ferro nella Chiesa di S. Lorenzo in Damaso; ma già il 2 dicembre 1373, i figli Birger e Caterina, partirono da Roma per Vadstena, portando con loro la cassa con il corpo, che fu sepolto nell’originario monastero svedese il 4 luglio 1374.
A Roma rimasero alcune reliquie, conservate tuttora nella Chiesa di San Lorenzo in Panisperna e dalle Clarisse di San Martino ai Monti.
La figlia Caterina e i suoi discepoli, curarono il suo culto e la causa di canonizzazione; Brigida di Svezia fu proclamata santa il 7 ottobre 1391, da papa Bonifacio IX.
Del suo misticismo rimangono le “Rivelazioni”, raccolte in otto volumi e uno supplementare, ad opera dei suoi discepoli. A questi scritti la Chiesa dà il valore che hanno le rivelazioni private; sono credibili per la santità della persona che le propone, tenendo sempre conto dei condizionamenti del tempo e della persona stessa.
Come tante spiritualità del tardo medioevo, Brigida ebbe il merito di mettere le verità della fede alla portata del popolo, con un linguaggio visivo che colpiva la fantasia, toccava il cuore e spingeva alla conversione; per questo le “Rivelazioni” ebbero il loro influsso per lungo tempo nella vita cristiana, non solo dei popoli scandinavi, ma anche dei latini.
Papa Giovanni Paolo II la proclamò compatrona d’Europa il 1° ottobre 1999; santa Brigida è inoltre patrona della Svezia dal 1° ottobre 1891.


Le Suore Brigidine
Il suo Ordine del SS. Salvatore, le cui religiose sono dette comunemente “Suore Brigidine”, ebbe per due secoli un grande influsso sulla vita religiosa dei Paesi Scandinavi e nel periodo di maggiore fioritura, contava 78 monasteri ‘doppi’, nonostante le rigide regole numeriche, diffusi particolarmente nei Paesi nordici. Declinò e fu sciolto prima con la Riforma Protestante luterana, poi con la Rivoluzione Francese; in Italia le due prime Case si ebbero a Firenze e a Roma.
L’antico Ordine è rifiorito nel ramo femminile, grazie alla Beata Maria Elisabetta Hesselblad (1870-1957), che ne fondò un nuovo ramo all’inizio del Novecento; ora è diffuso in vari luoghi d’Europa, fra cui Vadstena, primo Centro dell’Ordine; le Suore Brigidine si riconoscono per il tipico copricapo, due bande formano sul capo una croce, i cui bracci sono uniti da una fascia circolare e con cinque fiamme, una al centro e quattro sul bordo, che ricordano le piaghe di Cristo.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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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6-Jun-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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