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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5월21일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St. Constantine the Great


San Costantino Imperatore


St. Constantinus I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74.2.27~337.5.22)


Costantino = che ha fermezza, tenace, dal latino


= that it has firmness, tenacious, from the Latin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 274.2.27~337.5.22]


콘스탄티누스 대제. 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337).



정식 명칭은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또는 콘스탄틴 1세라고도 불린다. 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퇴위 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켰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인한 황제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따라 갈레리우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하였다.


306년 아버지가 죽자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정통파 황제를 자칭하고 로마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꺾어야 했고


312년에야 정식으로 황제 지위를 얻었다.


314년부터 로마 제국 동부를 차지한 황제 리키니우스와 대립하였으나,


323년 고트인(人)의 침입을 막아낸 후 리키니우스를 격파, 제국을 통일하여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원래 그는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나 그리스도교에 깊이 경도하여 그 자신도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勅令)을 공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당시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의 사법권 ·재산권 등을 우대하였다.


또한 북아프리카 도나투스파의 분파(分派) 문제도 조정하였으며,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는 등 교회 내의 분쟁 ·교리(敎理)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한 통치 방식을 계승 발전시켜, 문무(文武) 관직의 기능을 완전히 분리하였고,


황제고문회의의 권한을 강화하여 중요한 정치에 관여시켰으며, 황제를 정상으로 하는 계급적 관료제도를 완비하였다.


또한 상비군 제도와 변경의 둔전병(屯田兵) 제도에 의거하여 군제를 정비하였으며,


사르마티아인(人)과 게르만인을 변경지방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야만족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행정적으로는 관료와 군대의 유지, 오리엔트식의 궁정조직과 의례(儀禮)형식의 채용, 대규모 건축사업 등에 대한 지출이 증대하였기 때문에


각종 세금제도(금을 납부하는 형식으로)를 신설하였고, 솔리두스 금화본위(金貨本位)로 화폐제도를 정비하게 되었다.


한편 이교적 색채를 불식한 그리스도교적인 도시로서 비잔티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라고 명명하였다(330).


그는 군인 ·통치자 ·입법자로서 제1급의 인물로 꼽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재건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NAVER백과사전에서)





밀라노칙령 勅令


라틴어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밀라노 칙령 勅令


영어 Edict of Milan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영구히 종교적 관용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한 포고령.


이는 313년 2월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협의한 정치조약의 결과였다.


동방교회는 313년 6월 리키니우스에 의해 선포된 이 포고령에서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그리스도교도에게 법적 권리(교회를 조직할 권리도 포함)를 보장해주며, 몰수한 재산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신속히 돌려주도록 지시했다.


이전에 내렸던 여러 칙령들은 그것을 선포했던 역대 정권들만큼 단명했으나, 이 밀라노 칙령은 종교 관용을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니케아 신경


영어 Nicene Creed


니체아 공의회(기원후 325)에서 선언되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기원후 381)에서 재확인된 신앙의 진리들의 요약.


그것은 (후대에 압축적으로 확정된) 사도신경보다도 가톨릭 교리(특히 삼위일체의 신비)를 더욱 충만히 표현하고 있다.


이 니케아 신경은 주일과 다른 축일들의 성찬례에서 강론 또는 설교 후에 함께 외우는 신앙고백에 사용된다(교리서 195).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로마 제국이 비로소 가톨릭에 자유를 준 것은 저 유명한 콘스탄티노 대제인데,


그때까지 300년 동안 계속된 박해에서 흔연히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무수한 신자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평상시의 훌륭한 행동은 아울러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디오나 어머니 헬레나도 그러한 감화를 받아 은연중 가톨릭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헬레나는 세례를 받고 후세에 성녀로서의 존경을 받을만한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헬레나가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250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녀의 아들인 콘스탄티노가 274년 2월 17일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향은 소아시아의 비치니아 주에 있는 드레파눔이라는 곳이었으며 그녀의 양친은


명문의 집안도 아니고 재산도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헬레나도 손수 벌어서 먹고사는 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미모에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으므로


마침 그곳에 배속 근부 중인 로마의 장교 콘스탄티오 클로루스의 눈에 들게되어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초산(初産)을 한 곳은 나이수스라고 하는 지금의 닛슈 시(세르비아 영내에 있다)이며 그 아기의 이름이 곧 콘스탄티노였다.





콘스탄티노는 작은 콘스탄티오라는 뜻이다.


그러는 동안 남편인 콘스탄티오는 차차 승진해 막시미아노 황제의 중신이 되고 부하들의 신망도 컸으므로,


곧 로마 제국 서부의 총독으로서 갈리아 지방, 즉 프랑스와 남독일,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 온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조건이 있었다. 즉 먼저 그의 부인인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노의 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것과,


다음은 그 아들인 콘스탄티노를 볼모로서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에 있는 리지니오의 저택에 남겨 둔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오는 그런 무리한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복받치는 야심은 마침내 부인을 희생시키려고 결심했다.


때는 292년의 일이었다.



헬레나는 억울한 마음을 억제하며 비참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 아들 콘스탄티노는 인질로서 소아시아를 향해 떠나게 되어 서로 이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콘스탄티오는 자기 야망대로 서 로마 지역의 총독이 되었으나, 역시 사람은 죽을 때엔 본심이 돌아오는 법이다.


그가 중병에 걸려 눕게 되자 그 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을 소환하려 했는데, 이것을 안 동 로마의 총독 리지니오는 콘스탄티노를 독살하려 했다.


겨우 난을 면해 아버지를 찾아간 콘스탄티노는 306년 아버지의 별세와 더불어 군부의 지시를 받아 그 후계 총독이 되었다.


그는 즉시 어머니 헬레나를 독일의 트리엘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모시고 가서 아버지가 약탈한 그녀의 지위와 권리를 복구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가 저 유명한 미르비오교(橋)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얻자 곧 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추대를 받고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헬레나에게 왕대비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보내고 아울러 조폐권(造幣權)을 주고


어머니 고향인 드레파눔을 개조,미화해 이를 헬레노폴리스 즉 헬레나의 시(市)라 개칭하여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기념케 했다.





그러나 전에 세상의 쓴맛을 다 맛본 헬레나인지라, 연기와 같이 허무한 세상의 영화에 마음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불멸의 행복을 말하는 가톨릭에 더욱 마음이 끌리어 마침내 60세에 이르렀을 때에 자진하여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인 에우세비오는 그녀를 평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같이 그녀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는 뛰어났다”고 했다.



당시 헬레나의 몸은 왕대비라는 높은 지위에 있고 또한 조폐권까지 가지고 있어 그녀의 부유함은 비할 데가 없었으나,


그녀는 빈민에게 희사하거나 성당 건축을 위한 것이라면 한 푼도 아끼지 않고 모든 원조를 제공했으며,


자기의 존귀한 신분을 잊고 천한 사람들과 함께 예식에 참여도 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콘스탄티노 황제는 그 후 자기의 기념 도시인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노의 도시라는 뜻이다)을 그 수도로 정했다.



헬레나는 예수께서 일생을 지내신 팔레스티나 지방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또한 그녀의 유일한 소망인 성지 순례를 마침내 326년에 이루었다.


그때 교회의 원수들은 옛날의 성스러운 유물을 없애기 위해 갈바리아 산상에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를 어딘가로 치워 버리고 그 대신 그 곳에다 베누스 여신의 동상을 세워 놓았었다


.


헬레나는 여러 곳을 발굴해 고생 끝에 겨우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문장은 십자가이다.



헬레나는 또 다시 주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과 주님의 승천지인 올리브 동산에 기념 성당을 건축하고 많은 유물을 모시고


콘스탄티노플에 귀환했으나 얼마 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80세였다.


그녀의 상본은 보통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에 망토를 두르고 위엄을 갖춘 왕대비의 복장으로 십자가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녀 헬레나 황후 축일:8월18일.게시판1320번.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게시판1364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게된 내역



콘스탄틴 (Constantine)황제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로마제국 국민들에게 부여할 마음이 없었다


다만 정도가 덜 했을뿐이지 기독교를 탄압하는 정책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Milvian) 다리를


사이에두고 적군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치열한 전쟁중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의 군대는 상대편의 군사력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에 패할 위기에 처해진 콘스탄틴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든중에 환상을 보게되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머릿글자를 보게되며 이 상징을 새기고 전쟁에 임하면 이기라는 계시를 받는다





콘스탄틴은 이를 신의 계시(신의 당부:神託)로 생각하고 병사들의 방패와 투구에


환상으로 본 그 상징의 기호를 그려넣고 전쟁에 임하여 불리하던 상황을 역전시켜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이 전쟁의 승리로 서방을 손에 넣게된 콘스탄틴은


이 전쟁의 승리가 자기에게 환상을 보여준 신이 가져다 준것이라고 믿게되었으며


자신이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기에 이르며 313년 밀라노에 돌아와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은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으며 예배를 할수 있다는 선언인 것이었다


동시에 로마제국에 몰수 되었던 교회의 재산을 환원 받게 되었고 기독교를 로마제국이 인정한 다른종교와 동일시 하게 된것이다


그는 324년에 동방의 리시니우스(Licinius)를 멸하고 드디어 동서를 가로 지르는 대 황제가 되었다



이와같이 그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기독교인이 되기 까지는 전쟁의 승리가 신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었으며


비록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의 대표자들을 감독으로 임명하여


지금의 국회의원과 같은 지위를 인정했으며 많은 교회를 짓기도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지은 교회들:성 요한 라테란 성당(The Church of St John Lateran, Basilica San Giovanni in Laterano)


베드로 성당(The Church of St Peter, San Pietro Basilica),바오로 성당(The Church of St Paul, Basilica of St. Paul Outside the Walls )


(NAVER백과사전에서)



*라테란 대성전 봉헌 축일:11월9일.게시판1461번.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22일.게시판1629번.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의 원래 지명은 비잔티움이다.


B.C. 7세기경 그리스의 지도자 비자스가 "눈 먼땅에 새 도시를 건설하라"는델피 신전의 신탁을 받아


도시 국가를 건설한 것이 유래가 되어 비잔티움으로 불리웠다.


비잔티움의 시대는 이 도시의 그리스 문화를 대표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A.D.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A.D. 330년 5월 11일 히포드럼(마차 경기장)에서 도시의 완공식을 갖고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태어난 이 도시의 이름은


비잔틴제국의 기독교 문화를 대표한다.



기독교 국가로서 1230년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터키 마호멧 술탄에 의해 망하게 되고 이 도시는 3일간의 약탈이 행해진 후


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식 명칭으로 불리워지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스탄불은 이슬람 문화를 나타내는 지명이다.



아름다운 고도이자,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그 옛날 실크로드의 여정이 마무리 되던 곳.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 도시를 일컬어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하였다.


(NAVER백과사전에서)






♬3.Canto Gregoriano-Jacta Cogitatum Tuum

































San Costantino Imperatore



21 maggio


Etimologia: Costantino = che ha fermezza, tenace, dal latino



Costantino e un nome fortunato e lo dimostra il lungo elenco di santi che lo hanno onorato, a cominciare dallo stesso imperatore Costantino, il cui culto si estese lentamente in tutto l’Oriente fino a che il suo nome fu incluso ufficialmente nei Sinassari e se ne celebro la festa il 21 maggio insieme con quella di sua madre Elena. Anche se l’opera di questo grande imperatore a favore del cristianesimo, del quale comprese l’inarrestabile forza, porto i cristiani ad esaltare i grandi meriti e a stendere un velo sulle sue non poche deficienze, in Occidente ottenne un culto limitato ad alcune regioni piu soggette all’influsso bizantino, come la Sicilia, la Calabria e la Sardegna.


Autore: Piero Bargel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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