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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St Catherine of Siena - GIOVANNI di Paolo


Tempera and gold on panel, 108.6 x 53.3 cm Fogg Art Museum, Cambridge



축일:4월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Saint Catherine of Sienna


Saint Catherine of Siena, Doctor


Santa Caterina da Siena Vergine e dottore della Chiesa, patrona d’Italia


Born:25 March 1347 at Siena, Tuscany, Italy


Died:29 April 1380 of a mysterious and painful illness that came on without notice,


and was never properly diagnosed


Canonized:July 1461 by Pope Pius II


Caterina = donna pura, dal greco





1347년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완덕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여 아직 소녀 시절에 도미니꼬회의 제3회에 입회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 올라 도시들 간에 평화와 화목의 씨를 뿌렸다.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끊임없이 방어했고 수도 생활의 쇄신에 큰 기여를 했다.


건전한 교리와 깊은 영성에 찬 글을 남겼다.


1380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녀의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대화집]에서


(Cap. 167, Gratiarum actio ad Trinitatem: ed. Lat., Ingolstadii, 1583, f. 290-291)



나는 맛보았고 또 보았습니다.


오, 영원한 하느님이시여,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신성의 일치를 통하여 당신은 독생 성자의 피를 한없이 보배롭게 만드셨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내가 거기에서 더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또 더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 찾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당신은 영혼을 채워 주시지만 그것으로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당신의 끝없는 심연 속에서 영혼을 채워 주실 때 영혼이 언제나


당신을 찾아 배고파 하고 또 목말라 하며


당신의 빛 안에서 빛이신 당신을 보는 것을 갈망하게끔 채워 주십니다.



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나는 내 지성의 빛으로 당신의 빛 안에서 당신의 심연과 당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맛보았고 또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 안에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바로 당신의 모상임을 알았습니다.


영원한 아버지시여, 이것은 당신의 힘과 당신 외아드님의 속성인 지혜를 나에게 주심으로 된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자께로부터 발출하시는 성령께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할 의지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창조자이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성자의 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이루신 새 창조를 보고


당신이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심취하여 계신지를 당신 빛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오 심연이시여, 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오 하느님이시여, 오 깊은 바다이시여,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셨으니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타오르는 불이시며 꺼지지 않는 불이십니다.


당신의 열기 속에 영혼의 온갖 자아 사랑이 삼켜지고 모든 차가움이 없어집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의 진리를 알게 하시는 빛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주십니다.



나는 이 빛의 거울에서 당신을 최고선, 만선을 초월하시는 선, 복되신 선, 모든 이해를 초월하시는 선,


더없이 고귀하신 선, 모든 미를 초월하시는 미, 그리고 모든 지혜를 초월하는 지혜로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지혜 자체이시고 사랑의 불로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친히 내어 주신 천사들의 양식입니다.


당신은 나의 온갖 벌거벗음을 덮어 주고 감싸 주시는 의복이십니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이시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배고픈 우리를 먹이십니다.


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가톨릭홈에서)




The Marriage of St Catherine of Siena-BARTOLOMEO, Fra


1511. Oil on wood, 257 x 228 cm. Musee du Louvre, Paris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그녀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1970년 10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로 부터 교회 박사 칭호를 받았다.


여성으로서 교회 박사가 된 이는 교회 역사 안에서 몇 명 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모든 생활 체험에서 분명하고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 하느님의 신비를 깊게 파고든 그녀에게는 너무나 적절한 일이다.



카타리나는 당시의 교황과 귀족들, 수도자, 상인들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썼다.


또, 교황과 피렌체 시민들 사이의 논쟁을 중재했을 때 암살 위기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도 받지 못했던 33살의 그녀에게


신비가, 중재자, 신학자, 설교자, 간호사, 교회 박사 등의 모든 호칭이 거룩한 월계관으로 주어진 것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헤지오그라피라고 불리는 일종의 성인전으로서,


모범이 되거나 영감을 주는 인물에 대한 본받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공경하기위한 전기다.


이들은 많이 윤색되긴 했지만, 정열적이고 풍부한 언어를 사용하여


다소 어색하긴 해도 그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카타리나에 대하여 전해진 그리고 기록된 전승들은,


모두 함께 영향력 있는 14세기 여인의 모습을 20세기의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어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1. 연혁


1347년 3월 25일 염색업자 베닌까사 야고보와 아내 라빠 사이에 23번째 쌍둥이 자매로 태어남.


*주님탄생예고축일:3월25일(게시판1679번)


1348년 1세 25번째 동생 난나 태어남. 시에나에 처음으로 흑사병 유행.


1353년 6세 첫 환시 경험.


1354년 7세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정결서원). 10살때까지 고행, 사색, 관상을 통한 영적생활.


1362년 15-16세 언니 보나벤투라 사망. 첫 고해신부이며 지도자인 폰테의 토마스 O. P.의 충고에 따라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결혼 계획을 거부.


참회의 수녀회 입회. 서원. 몬테 풀치아노의 성녀 아녜스와의 기적. 탈혼.


*몬테 풀치아노의 성녀 아녜스 축일:4월20일(게시판1720번)


1365년 18세 만텔라테들의 도미니꼬회 수도복을 받고 3년간 고독의 시기 시작. 그동안에 읽는 법을 배움.


1368년 3년 동안의 유혹 끝남. 예수와 약혼.


* 8월 12일 아버지 야고보 사망. 옆구리 고통 받음.


* 혁명으로 가족들 시에나에서 추방됨. 폰테의 토마스 수사. 가파리니 신부(신학과 성서 설명).


두번째 고백신부가 된 도미니치 신부를 알게 됨. 카푸아의 라이문도


(두번째 고해신부. 후에 도미니코 수도회 총장.).


프란치스코 수도회 관구장. 아우구스티노 수사들. 참회의 수녀회 수녀들과 교류 시작.


* 정치가. 예술가. 일반 또는 상류층의 사람들과의 사제 관계 형성.


1370년? 23세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지키기 위해 미사, 기도, 희생을 함.


영성체 후에 탈혼. 예수의 물과 피를 마심.


1372년 25세 염문에 대한 환청.


1373년 사순절 부터 예수 승천 때까지 55일간 절식.


1374년 27세 때 처음으로 피렌체로 여행. 카푸아의 라이문도 O.P.가 그녀의 고해신부와 지도자가 됨.


시에나에서 흑사병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봉사. 페스트 퍼짐. 조카 8명 죽음.


1374-1376년 권력가. 상류층 인사들, 학자들에게 십자군 전쟁 추진서한 보냄.


1375년 피사 성당 미사 중 공중부양과 오상의 기적을 받음.


피사로 여행하여,피사와 루까 시가 교황을 반대한 동맹에 가담하지 않도록 설득.


그해의 대부분을 피사에서 보내며,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설교에 새 힘을 얻음.


1375- 1377년 고행 관상 생활 시작. 여러 곳에 나타나는 기적


1376년 3월 26일 아비뇽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피렌체 평화협정 실패. 중재자로 나섬.


* 6월 20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알현. 설득.


* 9월 13일 교황, 로마 귀환 중 제노바에서 카타리나 접견.


1377년 1월 16일 교황 로마 환궁. 벨카로 성을 입수하여 수녀원 세움.


* 9월 라이문도 신부 미네르바 수도원 원장이 됨.


* 그녀의 편지 272통은 「대화」의 원본이 됨.


* 12월? 도시간 평화정착 시도.


1378년 3월 27-28 교황 서거.


* 6월 18일 구에프 일당에게 암살 위기.


* 7월 8일 바르톨로메오(우르바노 6세) 교황 선출


* 9월 20일 로베르또(클레멘스 7세) 교황 선출. 성 빈첸시오 페레르가 지지.


* 10월 ? 「대화」 완성.


1380년 2월 탈진.


* 3월 26일 병자성사(바로톨똘로메오 도미니치 신부).


* 4월 29일 선종.


1461년 6월 28일 시성(교황 비오 2세).


1866년 4월 13일 로마의 수호자로 반포 (교황 비오 9세).


1940년 5월 15일 이탈리아 첫 수호자 공포 (교황 비오 12세).


1943년 9월 15일 간호사의 수호자.


1970년 4월 4일 교회학자.




2. 시대적 배경


카타리나가 살았던 당시, 1347년부터 1380년 사이에 교회사에서는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황제를 겸하고 있던 교황 아래 통일되어 있던 유럽 국가들은 주권을 요구하며 투쟁하였고,.


독립국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 사회, 그녀가 몸담았던 도미니꼬 수도회 모두가 혼돈의 상태이자 신비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고,


터키인들에 대한 십자군과 피렌체와 교황의 알력, 그리고 서방대분열로 인한 그리스도교의 불일치가 있었다.


1348년 흑사병의 대유행 이후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단지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성직을 맡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교회는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 양편에 모두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교황의 시도에 대응하여 필립은


프랑스 주교 관구들이 로마 교황청의 경비 분담금을 보내는 것을 금지했고, 보니파시오는 필립을 파문했다.



1305년에 교황 글레멘스 5세로 선출된 베르트랑 드 고트(Bertrand de Got)는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그 이후 70년간 그의 뒤를 이은 교황들이 따를 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 놓았다.



카타리나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방은 특히 심하게 이러한 외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상업과 문화가 발달해 있었던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의 다른 국가들에 대하여


자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계속되는 불화와 유혈혁명을 통하여 피렌체와 시에나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를 얻었으며,


13세기 끝무렵에는 아홉 명의 대의원들 그룹이 선출하여 시에나를 통치했다.


카타리나의 아버지 야고보 베닌까사는 이러한 포폴라니에 속한 사람이었다.


주) 포폴라니-통치자가 되도록 피선거권이 있는 사람.




3. 사상(신비주의)


짧으면서도 열성적인 활동으로 일관된 가타리나의 삶을 볼 때,


신비적 체험이 없었다면 그같은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온은, 카타리나 같은 성인의 생애에서


신비를 배제하는 것은 인격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나 같다고 말했다.



라이문도도, 그녀와 가까이서 알고 지내다보니 그녀가 영혼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


곧바로 더 없이 자연스럽게 천상의 일들로 마음을 들어올리는 흐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녀가 관상 중에 체험한 것은 곧 그녀를 행동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었으며


활동하면서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 일체는 바로 기도 속에 현존하고 있었다.



그녀의 관상은 활동생활 한 가운데 현존하고 있었고,


그녀가 기도하고 심지어는 탈혼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던 사실들이 많은 편지 속에 나타나 있다.


그녀의 글들을 기도와 활동 사목의 상호작용이


더없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오늘날에 필요적절한 것이 되고 있다.


진리와 사랑 - 카타리나에게 하느님은 온유하신 최초의 진리요, 사람에 미치신 자의 그 자체이셨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지식과 사랑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기리고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더 없이 간절한 욕구로 들뜬 채로 일어선다.


영혼은 일정 시간 덕을 실천하는가 하면,자신에게 쏟아져 내려오는 하느님의 선을 더욱 잘 알기 위해서


자기 인식의 독방에 기거하는 데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지식에 뒤이어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은 사랑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로 자신을 감싸는 것이다. 「대화」첫 단락



카타리나의 사랑은 언제나 또렷한 의식 속에서 진리의 빛 속을 걸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거침없이 ’사회적인 신비가’로 이상화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느님 안에서 체험한 ’진리’를 절대로 수정하려 들지 않던 가타리나의 철저한 타협 거부와,


눈으로 목격한 잘못들을 모조리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그녀를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완벽한 인간적 의미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었다.



가타리나는 진실로 신비적인 활동가였다.


가난과 질병,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불의의 고통은 그녀에게는 단순한 악도, 체계적인 악도 아니었다.


그것이 악이라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것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 과정에서 메말라지면서 역으로 자신의 육체까지도 쇠약하게 만들어 버린


바로 그 정서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초월하여 훨씬 더 온전하고 건강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이런 형태의 활약은 비록 기쁜 것은 못 되었지만 그녀의 신비적 체험이 요구했던 것이었고,


그녀의 글들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활약인 것이다.



4. 카타리나의 神學


그녀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신학이라 부를만한 글을 써본 적도 없었다.


그녀의 글은 체계도 없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답답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녀의 가르침은 토마스 계열에 속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확실히 아우구스티노 계열에 속한다.


그녀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은 우베르티노 다 카살레다(그리온)이며,


도미니코회 수도자 자코포 다 보라지네와 카발카의 저서들에서 근본적인 영향을 받았다.


카타리나는 이 모두를 자기 안에 흡수하고 통합시켜서 자신의 전체적인 지식을 형성하였다.


신학적으로 보면 새롭거나 창의적인 것은 없다.


가톨릭 가르침 속에 온전히 들어가 있으며,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믿어지는 사소하고 미묘한 부분들까지도


틀림없는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카타리나의 독창적인 부분은 이같은 전승을 신선하고 생동감있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카타리나가 쓰고 구술한 글들은 모두가 시에나의 방언인 넬 수오 볼가레였다.


파산반티와 카발카가 본고장 말을 사용하여 종교적인 문제들을 기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항상 가능한 모든 부류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했으며 질서정연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주제를 아주 밀도있게 전개했으며,


은유가 산재하고, 늘 새로운 연결관게가 하나의 층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카타리나의 초기 편지들 일부에서 어느 정도 부차적인 성격을 지니는 까닭에


「대화」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신비적 체험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축일:1월28일,게시판1590번.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축일:8월28일.게시판1336번
.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5. 『대화』에 대해서


「대화」는 그녀가 제자들에게 베푼 모든 가르침을 담은 최고의 저서이자 유산인 셈이다.


카타리나는 이를 그저 ’나의 책’이라고 불렀으며, 라이문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아울러 부탁드리거니와 당신과,


바르톨로메오 (데 도미니치) 형제, 토마스 (델라 폰테) 형제,


그리고 대작곡가 (조반니 탄투치)는 이 책과 그 밖에 눈에 띄는 내 모든 글들을 간수하십시오.


토마소 (피에트라) 선생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데다 이용하십시오.


이들은 나의 심신에 위안을 주었던 것들입니다."



전승이 영국으로 흘러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왜곡들은, 카타리나가 「대화」전체를


닷새 동안 탈혼 중에 구술하였다는 비교적 공통된 믿음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카타리나와 동시대인들 다수가 이 작품에 붙인 지극히 복합적인 참고사항들로 보면


여기에 소요된 시간은 훨씬 더 길어서 1년 가까이 되지 않았는가 싶다.


이 책은 그녀가 두 번째로 평화를 주선하는 사명을 띠고 피렌체로 출발한 무렵까지는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던 것이 분명하다.


피렌체에서 몇 달 보내는 그 정신없는 동안에도 카타리나는 틈틈이 원고를 붙잡고


시간을 보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책을 보면 카타리나는 교회 분열이 극도로 심화되지 않고 그 전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교회 내부의 부패와 개혁의 필요성은 많이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분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카파리니는 그녀가 1378년 11월에 로마로 불려가기 이전에 이 책을 끝마쳤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대인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책에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서 구술한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대화」의 문체는 ’탈혼 상태에서의 구술’과는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늘이거나 줄이느라


굉장히 고심한 흔적까지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스테파노 마코니가 전한 카파리니의 기록 또한 그녀가 "본향 사투리로 손수 작성한 책 가운데서


여러 페이지를" 친히 쓰고 있는 광경을 직접 똑똑히 목격했었노라고 쓰고 있다.


아무튼 편지들과 「대화」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특정한 주제와 심상들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반드시 발견하기 마련이다.




Saint Catherine of Siena the Dominican



6.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기도



오, 성령님,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의 힘으로 저의 마음을


참 하느님이신 당신께 이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소서.



저를 모든 악한 생각에서 보호하시며,


어떤 고통도 가벼운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당신의 지극히 너그러운 사랑으로


저를 뜨겁게 하시고 불타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저의 하느님이여,


모든 어려움에서 저를 도우소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7. 참고자료


* 시에나의 가타리나, "대화" 바오로딸출판사 1997.


* 매리 앤 파툴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가르침" 분도출판사 1997.


* 빈제,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함께하는 기도" 성바오로출판사 1996.


* 폴리, "매일의 성인" 성바오로출판사 1987.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가타리나는 ’순수한’이란 뜻이다.


가타리나가 자신의 짧은 인생에서 중심으로 삼았고,


또 자신의 모든 생활 체험에서 분명하고도 끊임없이 확신한 가치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가장 인상적인 점은


그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을배운 점이다.



그녀는 야고보 베닌카사의 스물세 번째 아이로서 영리하고 명랑하고 깊은 신앙을 지닌 사람으로 자랐다.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에게는 걱정거리이지만


카나리나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고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에 대한 반발로


머리를 잘라 버림으로써 어머니를 실망시켰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아내에게 그녀를 편안히 지내게 해주라고 명령했으며,


기도와 묵상을 하도록 그녀에게 방을 마련해 주었다.



그녀는 16세에 도미니코 제 3회에 들어가 그 후 3년 동안 격리되어 기도와 엄격한 생활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무리의 추종자들-남자,여자,사제,수도자들-이 그녀의 주의에 모여들었다.


그녀의 관상생활로부터 공적이고 활동적인 사도직이 성장해 나왔다.


그녀의 편지 대부분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준 영적 교훈과 격려였지만


점차 공적인 일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두려움 없이 세상일에 참여하고


완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한 사람의 솔직함과 권위를 가지고 말함에 따라


그녀를 반대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녀는 1374년 도미니코회 총회에서 모든 책임을 벗어 버렸다.



그녀의 공적 영향력은 그녀의 뚜렷한 성덕과 도미니코회 회원이라는 점,


그리고 교황에게 준 깊은 인상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힘이 미쳤다.


그녀는 터키 인들에 대한 십자군과 풀로렌스와 교황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1378년에 대분열이 일어나 처음에는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교황들이


그리스도교세계의 일치와 충성을 지리멸렬하게 만들고 성인들까지도 적대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카타리나는 마지막 생애의 2년을 로마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와 교회의 일치를 위한 기도와 탄원으로 보냈다.


그녀는 고통중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녀는 그녀의 영적 ’자녀들’에게 둘러싸여 운명하였다.


1461년 4월 29일 에 시성되었고,


1939년에는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주보 성인으로 공인되었다.


그리고 1970년 10월 4일에 바오로 6세는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카타리나는 교회의 영적 저술가와 신비가들 가운데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가 남긴 영적 증언은 ’대화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참조:성빈첸시오 페레르 축일:4월5일.게시판1697번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우리 시대와는 아주 다른 영성과 신앙체험 가운데서 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활 안에 육화되어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산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생애는 우리를 움츠러 들게도 하고 웃음짓게도 하며


때로는 따분하게 만드는 사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즉 여섯 살 때에 겪은 신비체험,


그리스도와의 어린이다운 약혼, 엄격한 금욕 생활 이야기, 잦은 탈혼 상태에서의 환시 등이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유동적이고 급변하는 20세기에 산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카타리나의 일생이 주는 가치는


일생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목표로서 성덕을 인식했다는 데 있다.




카타리나의 ’대화집’에는 네 가지 논술이 들어 있다.


영적세계에 대한 신앙의 증언이다.


"그 누구도 자기가 크나큰 참회를 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다른 사람보다 육신의 절제를 지나칠 만큼 잘한다고 해서,


그것이 덕도 되지 않고 공로도 되지 않는 한 더욱더 큰 완덕을 얻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어떤 합당한 이유 때문에


현재 참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공로라는 것은 참된 분별력에 비추어 맛들인 사랑의 덕에만 있는 것으로서


그것이 없다면 영혼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이 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대화집」에서


(4,13: ed. latina, Ingolstadii 1583, ff.19v-20)



사랑의 유대


내 감미로운 주님이시여,


자비로운 당신의 눈을 당신 백성에게, 특히 당신 신비체인 교회에게 너그러이 돌리소서.


당신 엄위를 그렇게도 많이 거스른 비참한 나 자신만 용서하시기보다


무수한 당신 피조물을 용서해 주신다면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더 큰 영광이 돌아가리이다.


당신의 백성이 죽음 안에 앉아 있고 나 흘로 생명을 누린다면 내가 어떻게 위안을 느끼겠습니까?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신부인 교회 안에 나의 잘못과


다른 피조물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죄의 어둠을 볼 때 어떻게 내가 위안을 느끼겠습니까?


주여, 특별한 은총을 당신께 비오니,


당신 모상과 유사성으로 사람을 지어 내시려 쏟으신 그 사랑을 사람에게서 거두지 마소서.


무엇 때문에 또는 누구 때문에 사람을 그렇게도 높은 품위에다 두셨습니까?


이는 당신 안에 반사되어 있는 피조물을 보실 때


당신을 매흑시킨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꺼짐 없는 사랑-그 하나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님께서 올려 주신 그품위를 죄의 탓으로 인해 응당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밝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같은 사랑으로 충동되시어 무상으로 인류를 주님과 화해시키시고자


당신 외아드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드님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시고


우리의 불의와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징벌당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이것은 아드님이 당신께서


우리 인성을 취하라고 명하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하신 것입니다.



오, 헤아릴 수 없는 심원한 사랑이여! 높고도 높은 지존께서 더할 수 없이


비천한 인간 상태의 최하위까지 내리시는 것을 볼 때


부서지지 않고 돌처럼 남아 있을 심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비참하고도 병든 아담의 육체 안에 당신의 영원한 신성을 묻으실 때,


사랑 안에 실현하신 그 일치의 공덕으로 인해 우리는 당신의 모상이 되고 당신은 우리의 모상이 되셨습니다.



주여,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표현 할 수 없는 당신의 사랑 때문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이 사랑에 의지하면서 나는 내 영혼의 모든 힘을 다하여 겸손되이 당신의 엄위께 비오니,


이 비천한 주님의 피조물들에게 너그러이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홈에서)



이 젊은 성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이태리의 주보 성인인데,


그 이유는 이태리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종교적, 정치적인 공동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빛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가타리나 베닌카사는 16세의 나이에 도미니코회의 제3회원이 되었으며,


자신의 글에서도 증명되는 바와 같이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녀의 주변에는 친구들로 이루어진 정신적인 작은 한 가정이 형성되었다.


특별히 혼란스러웠던 그 시대에 그녀는 끊임없이 평화에로 모든 사람들을 소환하였으며,


교황님을 아비뇽으로부터 로마로 되돌아 오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교회의 개혁을 위한 씨앗을 던졌다.


성녀는 이 모든 것을 일치와 사랑을 위해 행하였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온 교회에,


성녀의 저서들 중에 포함되어 있는 교의를 공포하며,


교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인 ’교회박사’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가타리나의 모범은 개혁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혁은 반동의 결실이 아니라,


사랑의 결실이며, 교회를 자극하는 인간적인 노력의 결실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개혁이든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하느님의 왕국을 항상,


더욱더 적합하게 건설할 수 있도록 추구되어야 할것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생애는 성 바오로 사도께서 기록한 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 25) 하신 말씀의 좋은 예(例)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가타리나는 많은 공부도 하지 않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당시의 문란하던 교회를 바로잡는데 누구보다도 위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년는 1347년 주님 탄생 예고 축일(3월25일)에


염색(染色)을 직업으로 하고있는 베난카사 가문의 스물 세번째 자녀로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본시 신심이 두터웠던 양친은 생활도 넉넉했으므로 많은 자녀들을 아무 어려움 없이


충분한 교육을 받게 할 수 있었으나 유난히도 명랑한 자라 불리던 가타리나는


다른 형제, 자매와는 일찍부터 달라 예수님과 그 외의 발현을 보기도하고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하여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자란 것을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다.



이처럼 풍부한 영적 은총을 받고 있던 가타리나였으므로 겨우 7세에 이르자


평생 동정 서원을 발하게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양친은 후에 이 미모의 딸을 출가시키려고 하던 무렵 뜻밖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그녀를 하녀처럼 혹사시켰다.


그러나 가타리나는 다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에 힘을 얻어 이러한 학대를 3년간이나 참았다.


그러던 중에 양친도 가타리나가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된 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 후부터는 그녀의 결심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참으로 참기 어려운 마음의 번민을 당하게 된것은 오히려 그 후부터이다.


어찌된 일인지 정결치 못한 생각이나 상상이 자꾸 일어나 이틀에 반시간만 자며 고행과 기도를 통해,


그리고 믿음 안에서 화살 기도를 수시로 바치고 예수님을 외치면서 해도 도처히 물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의 시련에 불과했다.


어느 날, 가타리나가 사랑과 고통으로 인해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불렀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



-가타리나: 나의 주님, 악마들이 그 숱한 음란함을 통해 내 마음을 괴롭혔을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주님: 나는 네 마음 안에 있었다.



-가타리나: 오! 주님, 친히 진리이신 당신 앞에 나는 엎드려 말씀드립니다.


내 마음은 혐오스럽고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떻게 당신께서 거기 계실 수 있었는 지요?


-주님: 그러한 생가과 유혹들이 네 마음 안에 무엇을 가져다 주었느냐?


즐거움이었느냐, 고통이었느냐, 기쁨이었느냐, 슬픔이었느냐?



-가타리나: 큰 고통과 갈등이었습니다.



-주님: 네 마음 중심에 숨어 있는 내가 아니라면 누가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겠느냐.


내가 거기에서 현존하지 않았더라면 음란한 생각이 가득 찼을 때 너는 쾌락에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네가 원수들로부터 유혹 당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너의 구원을 위해 숨어서 아무 흔들림 없도록 너를 보호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는 네게 더 친밀하게, 더 자주 나를 드러내 보이리라.



가타리나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느끼면서


이후에는 어떠한 유혹의 폭풍우가 닥쳐와도 용감히 일어나 확고한 신념으로 훌륭히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Pope Aeneas Piccolomini Canonizes Catherine of Siena-PINTURICCHIO


1502-08. Fresco. Piccolomini Library, Duomo, Siena



가타리나는 3년간 기도, 묵상, 노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준비를 하고 18세 때에 비로소 성 도미니코의 제3회에 들어갔다.


이 회의 회원은 수도원에 들어가서 동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세속에 있으면서


성 도미니코의 정신을 따라 가능한 복음의 권고를 실천하며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회이다.



그러므로 가타리나도 입회한 후에는 읍내를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 모두를 나누어 주고,


때로는 그들을 위해서 자선을 모으기도 하고, 병자들에게는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하고,


특히 나병, 흑사병 같은 무서운 전염병에 걸린 자들도 정성껏 간호해 주며,


그외 남의 집 청소까지 맡아서 해 주는 둥,손발이 닳도록 활약한 모습은 실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심이란 고약해서


이 같은 가타리나에 대해서도 모함과 악담을 하며 그녀의 명예를 손상시키려는 이가 없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암(乳癌)을 앓고 있던 한 부인은 전부터 가타리나에게 많은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이웃 사람들에게 근거도 없는 모함을 했으나 그녀는 조금도 나쁜 기색을 하지 않고


더욱 더 그 부인을 위해 친절한 간호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못마땅히 생각하고 나무라자 가타리나는


"예수께서는 배은 망덕한 유다인들이 당신을 저주하며 모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성스러운 사업을 결코 중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도 겨우 두세 번 악담을 들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명하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덕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점잖게 대답했다고 한다.




가타리나는 종종 주님의 발현을 뵙는 것과 먹지 않고 마시는 것으로만 생명을 유지하는 특은도 받고 있었다.


하루는 예수께서 한 손에는 황금관(冠)을,


다른 한 손에는 가시관을 들고 나타나셔서 "나의 딸아, 어느 것이든지 하나를 선택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가타리나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가시관을 잡아 머리에 쓰며


"저는 황송하옵게도 주님의 배필로 선택된 자로서 주님과 같은 고통의 가시관이야말로 적합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며 용감하게도 주님을 본받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결심을 명백히 했다.



이 같은 예븐 마음씨가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셨음인지


1374년 주님께서 재차 발현하셔서 그의 몸에 5상을 박아 주셨다


그 상처는 눈에 띄지 않았으나 고통은 극히 심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주님께서 더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게 지시과 웅변의 은혜를 줄 것이니 여러 나라를 다니며 위정자와 지도자들에게


내 소망을 전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따라 가타리나는 사방 각처를 여행하며 왕후(王候)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을 방문하고


평화를 도모할 것을 역설하고, 서한이나 저서 등으로 도리를 권고하고,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노력을 다했다.



그뿐 아니라 그 당시 교황 영토내에 두 도시의 시민이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배반해


황제에게 추방당하려는 것을 중개도 해주고, 70년 전부터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 시에 체재하고 있는 성좌를


다시 로마로 복귀하도록 동분 서주하는 등 그러한 방면에도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녀의 사명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사치 생활로 기울어지는 폐풍이 있었으므로


가타리나는 이를 크게 염려하며 거리낌없이 그 개혁 방법을 교황에게 올렸다.


이 권고는 다음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실행되었으나


불행히도 그 방법이 지나치게 격렬해 몇몇 추기경은 불만을 품고 교회를 떠나 다른 교황을 하나 더 세웠다.



가타리나는 이런 불미스러운 상태를 타개하려고 그들에게 어떤 때는 서한을 보내고,


어떤 때는 직접 찾아가서 간청하기도 하며 얼마나 그 조정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그녀는 뭇사람에게 악한 모범이 되었던 이 사람들이 마침내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하느님께 묵시를 받고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도 예언한 바 있으나


그녀 자신은 이 기쁨을 보지 못하고세상을 떠나야만 되었다.


일생을 희생으로 주님께 바친 그녀의 육신이 고행과 병고로 쇠약해져


"성혈, 성혈, 성혈"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때는 1380년 4월 29일이었다.




1461년 6월 28일 교황 비오 2세는 가타리나를 성녀로 시성하셨고,


1866년 4월 1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로마의 수호자로 반포되었다.


교황비오 12세는 1940년 5월 15일 가타리나를 이탈리아의 첫 수호자로 공포하고,


1943년 9월 15일 그녀를 모든 간호사의 수호자로 삼으셨다.


1970년 4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가타리나를 아빌라의 대 데레사와 함께 교회 학자로 세우셨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 동정 학자 축일:10월15일.게시판1420번.




영적인 부모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참으로 뛰어난 여성이었다.


그는 문맹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네 개의 논문을 구술하였고,


그 공로로 현재 교회 안에서 셋밖에 없는 여성 교회 박사 중의 한 명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거의 75년 간 아비뇽에 유폐되어 있던 교황권을 로마로 되돌림으로써 교회의 역사를 바꾸었으며,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흑사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았다.



가타리나는 아이들이 25명이나 되는 대가족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태어난 가정보다도 더 큰 가정을 이루었다.


그의 거룩함이 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많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모여들어 영적인 권고와 지혜를 구했던 것이다.


가타리나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그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만일 당신이 부모가 아니라면, 아니 친자녀와 돌볼 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영적인 부모가 되어 보자.


우리의 경험과 영적인 통찰력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성취하도록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자녀가 자신의 능력과 숨은 바람을 찾아내어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 주는 것이


바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영적인 부모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갖고 있는가?


혹은 영적인 자녀를 두었는가?


나의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잠재력을 발견해야 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Ave Verum - W.Mozart















































CATHERINE of Siena



Also known as


Catharine of Siena


Memorial


29 April; (formerly 30 April)


Profile


Youngest child in a large family. At the age of 6 she had a vision in which Jesus appeared and blessed her. Her parents wanted her to marry, but she became a Dominican tertiary. Mystic. Stigmatist. Received a vision in which she was in a mystical marriage with Christ, and the Infant Christ presented her with a wedding ring. Counselor to Pope Gregory XI and Pope Urban VI. Proclaimed Doctor of the Church on 4 October 1970.


Born


25 March 1347 at Siena, Tuscany, Italy


Died


29 April 1380 of a mysterious and painful illness that came on without notice, and was never properly diagnosed


Canonized


July 1461 by Pope Pius II


Name Meaning


pure one


Patronage


against fire, bodily ills, diocese of Allentown, Pennsylvania, USA, Europe, fire prevention, firefighters, illness, Italy, miscarriages, nurses, nursing services, people ridiculed for their piety, sexual temptation, sick people, sickness, Siena Italy, temptations


Representation


cross; heart; lily; ring; stigmata


Readings


Charity is the sweet and holy bond which links the soul with its Creator: it binds God with man and man with God.



-Saint Catherine of Si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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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Trinity, Godhead, mystery deep as the sea, you could give me no greater gift than the gift of yourself. For you are a fire ever burning and never consumed, which itself consumes all the selfish love that fills my being. Yes, you are a fire that takes away the coldness, illuminates the mind with its light, and causes me to know your truth. And I know that you are beauty and wisdom itself. The food of angels, you gave yourself to man in the fire of your love.



-from On Divine Providence by Saint Catherine of Si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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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comes from love, all is ordained for the salvation of man, God does nothing without this goal in mind.



-Saint Catherine of Siena



















Santa Caterina da Siena Vergine e dottore della Chiesa, patrona d’Italia



29 aprile - Festa


Siena, 25 marzo 1347 - Roma, 29 aprile 1380



Entrata nelle Mantellate, condusse una vita di penitenza e di carita verso i condannati e gli infermi. Portata al misticismo, ricevette le stigmate. Entro in contatto con grandi personalita tra le quali Gregorio XI che convinse a riportare la sede pontificia da Avignone a Roma e dal quale ottenne diverse concessioni a favore del proprio Ordine. Le sue opere piu importanti ci offrono una sintesi dell’esperienza domenicana, agostiniana, francescana e mistica con cui entro in contatto, ravvivata dalla sua mente illuminata dall’intima unione con Dio. Insieme a San Francesco d’Assisi e Patrona d’Italia.



Patronato:Italia, Europa (Giovanni Paolo II, 1/10/99)


Etimologia: Caterina = donna pura, dal greco


Emblema: Anello, Giglio



Lo si dice oggi come una scoperta: "Se e in crisi la giustizia, e in crisi lo Stato". Ma lo diceva gia nel Trecento una ragazza: "Niuno Stato si puo conservare nella legge civile in stato di grazia senza la santa giustizia". Eccola, Caterina da Siena. Ultima dei 25 figli (con una gemella morta quasi subito) del rispettato tintore Jacopo Benincasa e di sua moglie Lapa Piacenti, figlia di un poeta. Caterina non va a scuola, non ha maestri. Accasarla bene e presto, ecco il pensiero dei suoi, che secondo l’uso avviano discorsi di maritaggio quando lei e sui 12 anni. E lei dice di no, sempre, anche davanti alle rappresaglie. E la spunta. Del resto chiede solo una stanzetta che sara la sua “cella” di terziaria domenicana (o Mantellata, per l’abito bianco e il mantello nero).


La stanzetta si fa cenacolo di artisti e di dotti, di religiosi, di processionisti, tutti piu istruiti di lei. E tutti amabilmente pilotati da lei. Li chiameranno “Caterinati”. Lei impara faticosamente a leggere, e piu tardi anche a scrivere, ma la maggior parte dei suoi messaggi e dettata. Con essi lei parla a papi e re, a cuoiai e generali, a donne di casa e a regine. Anche ai "prigioni di Siena", cioe ai detenuti, che da lei non sentono una parola di biasimo per il male commesso. No, Caterina e quella della gioia e della fiducia: accosta le loro sofferenze a quelle di Gesu innocente e li vuole come lui: "Vedete come e dolcemente armato questo cavaliero!". Nel vitalissimo e drammatico Trecento, tra guerra e peste, l’Italia e Siena possono contare su Caterina, come ci contano i colpiti da tutte le sventure, e i condannati a morte: ad esempio, quel perugino, Nicolo di Tuldo, selvaggiamente disperato, che lei trasforma prima del supplizio: "Egli giunse come uno agnello mansueto, e vedendomi, comincio a ridere; e volse ch’io gli facessi il segno della croce".


Va ad Avignone, ambasciatrice dei fiorentini per una non riuscita missione di pace presso papa Gregorio XI. Ma da al Pontefice la spinta per il ritorno a Roma, nel 1377. Parla chiaro ai vertici della Chiesa. A Pietro, cardinale di Ostia, scrive: "Vi dissi che desideravo vedervi uomo virile e non timoroso (...) e fate vedere al Santo Padre piu la perdizione dell’anime che quella delle citta; perocche Dio chiede l’anime piu che le citta". C’e pure chi la cerca per ammazzarla, a Firenze, trovandola con un gruppo di amici. E lei precipitosamente si presenta: "Caterina sono io! Uccidi me, e lascia in pace loro!". Porge il collo, e quello va via sconfitto. Deve poi recarsi a Roma, chiamata da papa Urbano VI dopo la ribellione di una parte dei cardinali che da inizio allo scisma di Occidente. Ma qui si ammala e muore, a soli 33 anni. Sara canonizzata nel 1461 dal papa senese Pio II. Nel 1939 Pio XII la dichiarera patrona d’Italia con Francesco d’Assisi. E nel 1970 avra da Paolo VI il titolo di dottore della Chiesa.


La festa delle stigmate di S. Caterina e, per il solo ordine domenicano, il 1° aprile.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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